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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 욕망의 구도
(- 기타노 타케시(北野武)의 『HANA-BI』를 중심으로-)
1.들어가는 말
다른 영상매체가 그렇듯이 영화가 드러내 놓고자 하는 이미지의 구조적인 장치는 세계에 대한 재해석이자, 추상화이며
형상화하는 일이다.
이러한 추상화나 형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 구조적인 틀 속에서 투영해 보고 반성해 본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존재론적인 자아를 발견하고 주관과 객관 사이를 왕래하며 삶의 의미를 조명해 보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한편의 영화를 통해 다양한 시대성과 역사1) 내지 한 사회의 문화성2)을 파악해 나가게 된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는 존재론적인 물음3)을 던지는 영화로 보인다.
우리는 이 존재론적 물음 속에서 다양한 삶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함의 관계가 내포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근본적인 삶의 문제를 구조적인 장치로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바로
하나-비라는 제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비(HANA-BI)4)는 불꽃놀이를 의미한다.
기타노는 그것을 로마자로 표기하고, 중간에 하이폰을 넣어 花(HANA)와 火(HI)라는 두 개의 요소로 나누고 있다5).
그것은 이 작품을 통해 나타내는 이원론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花는 현저한 시각적 이미지로서 자연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정신 속에 감추어진 신비적인 축을 표상하면서 삶과 사랑,
우정이나 선과 같은 것을 상징하고 있다.
火는 강렬한 폭력과 죽음이라는 형태로 때로는 억압된 노여움과 미움을 통해 충동적으로 분출되는 악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듯 하나-비는 우리 인간의 삶의 모습의 양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花는 우리가 언제나 꿈꾸는 이상적인 가치의 구조적인 장치이다.
우리는 이러한 꽃이 갖는 미학의 장치 속에서 우리의 삶이 존재론적인 가치를 갖고, 의미론적인 삶의 대상임을 자인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장치가 얼마만큼 火앞에서 불꽃같이 사라져 버린 운명적인 것인가를 곧 알 수 있다.
폭력과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것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이상적인 가치의 삶이 얼마나 무기력하며,
덧없는가를 기타노는 이러한 이중적인 장치의 구조 속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문제를 찾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러한 양면성은 주인공인 니시 형사의 삶의 모습과 흡사하다 우리는 그의 인생의 허무함과 짧은 인생 앞에 나타나 있는
이중적인 삶의모습 속에서 온갖 관념과 기쁨, 슬픔을 모게 된다.
게다가 우리는 거기에 모든 것을 내맡기기 때문에 니시라는 주인공을 통해 폭력과 죽음, 사랑, 즐거움이라는 존재상황 속
에서 진정한 삶의 모습이 가벼움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기타노 감독은 이러한 삶의 모습이 가벼움으로 다루어지기 쉬운 일상의 틀을 과감히 해체하고, 인간의 삶은 단순히 폭력과 죽음처럼 가볍게 다루어질 수 없는 존재성임을 보여주고자 하여 그는 꽃이 갖는 화려함과 눈부심, 즉 아름다움으로 대체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조차도 그 경계에서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기타노 감독은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의 틀 속에서 관객들에게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 다가서게 만들고 있다.
하나-비는 이러한 개인적인 삶의 존재론적 주관성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함의도 다분히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사회적인 관계성이 들어있는 구조적인 장치가 하나-비의 각론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생의 이중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주인공의 니시가 가지고 있는 삶의 모습은 동료와의 관계(헌신과 봉사로 비춰지는 삶의 모습), 야쿠자와의 관계(폭력과
살인 앞에서 또 다른 폭력과 살인으로 대반격해 나가는 장치), 사회 조직과의 관계(은행을 털어 동료형사와 그 부인,
미망인을 돕는 행위,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의 여행, 야쿠자의 차용금의 상환, 은행과 경찰이 갖는 사회적 장치) 등의
모습 속에서도 여실히 이중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중성 속에서 우리는 잠시 니시의 존재에 대해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이중적인 구조의 장치들이 영화의 전반적인 정적인 흐름과 약간 어둡고도 푸른 배경 속에서 그 무거움이
더해간다.
정적인 흐름 속에서 가끔은 동적인 장면들이 그 흐름을 역행하지만 그 또한 거대한 흐름을 역행할 수 없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관객들은 도대체 이 영화가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혼란을 느낀 나머지 睡眠속에 잠수되어 버린다. 원래 이 영화는 죽음의 장치가 가벼움과 무거움 속에 뒤범벅되어 오히려 관객을 침묵하게 만들고, 그 침묵은 또 다른 무거
움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무거움에 대한 침묵이 흥행에 실패하게 만든 요인이요, 영화가 갖는 오락성 등과 같은 삶의 가벼움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난해한 작품으로 보이는 요소이기도 하다.
한편 이 작품이 갖는 무거움에 대한 反致의 장치로 기타노는 자신이 직접 그린 미학적인 화폭 속에 무거움을 해소시키고
있다.
죽음과 폭력의 무거움 속에 자리잡기 쉬운 삶의 덧없음을 각인시키는 틀이자, 삶의 의미를 사랑의 차원으로 진지하게
승화시키려는 미학적인 틀로서 우리의 존재론적 삶의 의미를 채색해 나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존재론적 삶의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세부류의 삶의 양태6) 초점을 맞추어 그 중심 축에서
욕망의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이 세 부류 모두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배제하지 않은 채 사회적인 함의라는 측면에서도 그 문제를 진지하게 풀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이 드라마에 나타난 욕망의 구조적 장치부터 풀어나가 보기로 한다.
2.욕망의 구조적 장치
주인공인 니시는 경시청에서 인정받는 베테랑급 민완형사이다.
그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호리베 형사와 함께 문제를 해결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영화의 처음 시작될 때, 자동차 안에서 부하형사들이 니시와 호리베 형사의 관계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내용 중에, 두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둘은 서로 상대적이며, 보충 보완하는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앞으로
둘의 운명을 예시하고 있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는 마치 생을 포기한 부인의 표정과도 같이 삶의 의미 자체를 잃어버리고 또한 체념한 것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허한 표정에 누군가를 증오하는 듯한 표정, 또한 삶을 체념한 낙오자처럼 축 늘어진 어깨 그리고 묵직한 발걸음, 더구나 영화의 전반적인 배경이 약간 어둡고도 푸른, 그리고 무거운 듯한 장치들, 따라서 니시 주변의 어두운 죽음의 문제(사건과 관련하여 부하와 야쿠자의 죽음, 딸의 죽음과 부인과 사별해야 되는 운명 등) 와 관련된 삶이 관객에게 삶의 무거움, 삶의
덧없음(허무)을 제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호리베 : 부인은 좀 어때? 벌써 2년이나 됐지? 자네의 마음 알 것 같네. 얼마나 상심이 되겠나.
아마 당해 보지 않고서는 짐작도 못하겠지‥‥ (니시는 말을 하지 않은 채 듣기만 하고 있다)
더구나 니시는 그동안 신념과 열성을 다했던 수사관 생활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직장이라는 곳이 자신의 이상과 가치관을 실현시켜 주는 장소이며, 일을 통해 자신의 장래의 시간까지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그에게 이제는 한갓 무의미한 존재로 다가온다.
여기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현실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자신의 욕망이 거부한다.
그는 자신 앞에 굴러온 공을 주워 엉뚱한 방향으로 던져버리듯7) 자신의 욕망이 어떠한 방향으로 일탈할 것인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의 일탈이자 가정의 일탈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무언의 욕망의 항의이다8).
그리하여 니시가 갖는 욕망의 구조를 우리의 욕망의 구조와 일치시키고자 감독 자신은 니시를 주인공으로 삼아 철저하게
심층적인 분석의 틀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 같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개인의 심층적인 욕망의 구조적인 틀에 대한 해체를 가정과 직장이라는 현장으로 확대해 나가고,
더 나아가 사회의 구조로 확대해 나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는 또한 그 사회조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역행하는 구조적인 틀로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적인 틀의 일탈이 바로 폐차장의 장치, 도난차량인 택시를 구입하여 경시청차로 도색한 후 은행을 터는
장면이나, 은행 안에서 감시카메라가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리적인 구조적인 틀도 결국 우리의 존재적인 삶이라는 거대의 흐름 앞에서 운명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가령 호리베가 그린 화폭 위의 눈과 빛의 글자 위에 自決이라고 쓰여진 글자(눈과 빛이 하나씩 어우러져 우리를 감싸안고
있지만 그 위에 자결이라는 글자를 집어 넣음으로써 자신의 구차한 생을 명예롭게 끝내고자한 그의 욕망), 주인공이 연을
날리는 어린 소녀 앞에서 연을 날도록 도와주는 모습이나 연에 나타난 그림, 그리고 니시가 부인과 더불어 총으로 자결
하는 모습 등은 운명 앞에 소외된 우리의 生, 날지 못한 자신의 한계상황 속에 갇혀있는 또 다른 욕망의 구조적인 틀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자결하는 순간 광풍처럼 밀려오는 검푸른 파도와 하얀 백사장의 대치가 바로 우리의 욕망의 존재론적 이중
성의 표출이자 그 경계 허물기임을 보여준 것 같다.
그것은 바로 두 방의 총소리가 그 경계를 과감히 난도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 및 경계허물기도 호리배가 그린 화폭위의 눈(雪)과 빛(光)이 갖는 이중성이나 그 전의 동물들의 형상에다
꽃들을 표현한 것들 속에서도 욕망의 이중성은 여실히 나타난다.
한편 그는 기존의 영화감독들이 사용하는 기법에서 일탈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령 야쿠자와 싸움에서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보여주지 않는 장치의 사용이라든가, 은행을 털면서도 감시카메라의 움직
임과 더불어 女銀行員과 니시 뒤의 의자에 앉아있는 남자 고객이 아무 말 없이 범인만을 응시케 하는 장치의 사용, 자결
할 때 총소리만이 울리게 하는 장치는 우리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강렬하게 확정짓는 구조적인 틀로 인식시키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우리의 감각적 인식이 얼마만큼 기존의 모델적 양상에 의해 길들여 졌고 잘못 인식되어 왔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3.존재론적 욕망의 양태
먼저 이 장에서는 니시가 관계하고 있는 야쿠자들과 폐차장의 신(장면)이 갖는 장치의 구조와 호리베의 일상과 화폭에 표출된 욕망의 양상, 그리고 니시의 욕망이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어떻게 사회적인 관계를 함의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비는 불꽃놀이를 의미한다. 하나-비는 우리 인간의 삶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다우며 살아갈 만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즉 욕망의 만족 그 자체를 나타내주는 대상이다. 그러나 그 찬란함과 아름다움의 이면에 가려져 있는 추ㆍ악은 그 아름다움 자체 속에서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불꽃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불꽃이 사라지고 난 후 그 공허한 공간 위에 남는 잿빛 연기처럼 엄습해와 마치 판도라 상자 안에서 내뿜는 연기 마냥 아주 오래 동안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지배하게 된다. 생존의 차원에서 볼때 삶은 언제나 죽음에 종속되어 있다 우리는 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잘 죽어가고 있는 것이 된다.
기타노는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폭력이나 죽음과 같은 무거움을 통해 우리의 생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리얼리스틱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니 이러한 장치가 오히려 우리의 삶이 보잘 것 없다기보다는 오히려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를 역설적인 장치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삶의 완료로서 죽음을 통해 삶의 완성으로서의 죽음으로 다가선 감독으로 보여진다. 삶과 죽음에 있어 인간은 ‘죽음에로 향해진 존재9)’ 이지만, 한편 진정한 삶을 위한 죽음이 될 때, 이제 더 이상 삶이 죽음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죽음이 삶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죽음은 삶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 속에 있다는 말이 된다. 우리가 본질 구조상 죽음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에게 죽음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생 속에 이미 死가 들어 있다. 죽음은 공간적으로 우리 옆에 있고, 시간적으로 우리 앞에 있지만 본질상 우리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삶도 이러한 죽음을 포함하고 있는 것, 어찌 보면 생과 사의 통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신체는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면서 죽음의 거주지이다. 죽음은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항상 우리 삶 자체를 위협하고, 그것을 넘어서려 하고 있다. 죽음이 우리의 생 이상의 것으로 넘어설 때, 그것은 삶을 위한 죽음으로서 의미 추구적인 목적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 추구적인 삶의 목적성10) 앞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삶의 양태들11)을 보게 된다. 그 중 존재론적 욕망의 몇 가지를 (하나-비)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3.1현실적 욕망
먼저 야쿠자들과 폐차장 주인이 갖는 현실적 욕망12) 속에서 일반적인 욕구된 삶의 양태를 볼 수 있다. 폐 차장에는 수명을 다한 온갖 종류의 차량들이 그곳에 들어옴으로써 자동차로서의 생명은 끝난다. 그리고 쓸모가 있는 부품들과 나머지 부속들은 일일이 해부되어 보관되거나 고철로 처분된다. 기타노는 왜 폐차장이란 장치를 내세우고 있는가? 그것은 과학이 가져다준 메커니즘의 한 단면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산업화의 영향으로 온갖 상처와 고통 속에 자신의 삶을 포기한 인간의 모습이다. 더구나 그것은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생명을 잃은 부속품처럼 현재 일그러져 있는 가요코와 자신의 모습이자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이 폐차장에서 일하는 주인이나 여종업원의 모습을 보면, 말만큼 커다란 엉덩이를 가진 처녀지만 그녀는 거의 일하지 않고, 기름에 절어빠진 작업복으로 뭉실한 젖가슴과 펑퍼짐한 엉덩이를 감싼 채 늘퍼질러앉아 낮잠이나 자는 환각상태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신이 있다.
폐차장 주인 : (종업원의 머리를 윽박지르며) "일 좀 해라, 이 식충아!"
이러한 모습은 '현대' 라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으로 보인다. 젊음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발산해야할 나이임에도 환각 탓인지 멍하게 졸고있는 모습은 바로 삶의 주체인 자신의 존재의 자아를 상실한 모습이자, 또한 반대로 외적 권력적 욕망의 구조 속에서 대항할 의지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또 다른 삶의 모습이다.
그리고 다음의 예문과 같이 폐차장 주인도 마찬가지다. 큰 차를 가지고 소형차를 윽박지르며 운전하는 모습은 약자 위에 군림하는 강한자의 논리 자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절도차량을 강제로 빼앗아 이익을 챙기는 그의 모습은 현대인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더구나 무섭게 차를 몰고 좁은 길을 질주하는 폐차장 주인의 신에서 우리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면서 자기의 작은 지식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과 욕망의 소유13)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안기보다는 약자 위에 군림하며,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과 권리만을 행사하려는 우리 사회의 병든 모습을 본다.
소형트럭운전사 : 눈이 삐었어? 스피드를 낸 건 당신이잖아! 길이 좁은데 큰 차가 양보해야지!
폐차장주인 : 웃기지 마. 누가 작은 차를 몰라고 했어?
소형트럭운전사 : 남이 작은 차를 몰던 말던 무슨 참견이야? 수리비를 내야지!
폐차장주인 : (멱살을 움켜잡고 들어올리며) 한번 더 박아줄까?
소형트럭운전사 :(싹싹빌며) 잘못했어요‥‥
폐차장 주인은 미성년자가 절도한 차량을 위협과 협박으로 갈취하고, 그것을 니시에게 다시 판다. 차를 훔쳐온 녀석은 기는 놈이고, 폐차장 주인은 뛰는 놈이라면 니시는 나는 놈인 셈이다. 현대사회의 먹이사슬과 같은 현장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살아가지만 그것 마저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진정한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삶의 현장이자 어우러진 모습이 아닌가 싶다.
폐차장주인과 소형트럭 운전사가 싸우다가 맥없이 패배한 소형트럭 운전사가 다시 폐차장에 와서 쓰레기와 같은 부품을 주워 가는 모습 속에서도 우리는 또 다시 강한 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성을 본다. 폐차장의 똑같이 버려져 있는 부품 속에서, 또한 그만그만한 부속품과 같이 버려진 실존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을 보게 된다. 부품을 찾는 소형트럭 운전수에게 여 종업원은 쓰레기이니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다 같은 쓰레기와 같은 군상들임에도 폐차장 주인은 폐차장 부품에 대한 애착을 갖는다. 그런 상황에서 니시가 폐차장을 찾는 것은 현대 사회구조의 병들어 있는 존재론적 구조의 틀속에 갇혀있는 자신의 모습의 발견이자, 또한 그 구조적인 틀을 깨부수고자 하는 반항으로 이어진다. 그는 절도차량을 구입하고, 경시청 차량으로 도색한 다음 은행을 털게 된다.
야쿠자의 장치도 마찬가지 코드적 성격을 띠고 있다. 다음의 예문에서 보듯이 야쿠자의 코드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의 권력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그들은 한 사람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면서 동물적인 잔인성과 흉폭성을 나타낸다.
남자 : 이제 보니 악덕한 고리대금업자들 이었군. 더러운 속임수를 쓰다니‥‥
야쿠자 : 돈을 빌려 쓴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남자 : 이자를 마음대로 올렸잖아!
야쿠자 : 그건 우리 맘이지.
남자 : 그런 이자는 낼 수 없어.
야쿠자 : 골통에 총알을 박아 줄까?
(나중에 남자는 야쿠자에게 총을 맞고 쓰러진다)
이와 같이 야쿠자들은 火(불)처럼 쉽사리 욕망을 불태우며 그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끝까지 삶의 주변에서 서성거리며 죽음으로 위협해 간다. 이것은 어찌 보면 우리의 기본적 욕망 구조일지 모른다. 홉즈14)는 리바이어던에서 이러한 흉폭성 및 잔인성이 인간성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게끔 되어 있어서, 개개인은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며, 이를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다른 사람을 해친다는 가정을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정의는 '강자의 이득' 이라는 소피스트의 한 논리처럼15) 강한자의 논리만이 절대성을 지니고 있고 또한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의 단적인 표현이다.
야쿠자들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해와 욕구에 따라 멋대로 행동하면서 명령대로만 움직인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규율과 규칙에 따라 폭력성으로 길들여 짐으로써 또 다른 폭력을 양산해 낸다. 그리고 그들은 그 규율이나 규칙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신체에 직접 작용케 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일종의 메커니즘을 형성한다. 그 틀을 깨는 때에는 무자비한 폭력이 작용하기 때문에 선이나 자비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때때로 나타나는 선도 위장된 선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욕망의 배경에는 현실적인 권력 즉 금전적 욕망이나 정치적 욕망이 작용한다. 이러한 정치적ㆍ금전적 욕망이 자신들의 공간에서 벗어나 사회적 작용성을 띠게 만든 동인이 된다.
3.2욕망의 갈등과 조화
다음으로 우리는 호리베의 삶의 모습 속에서 죽음과 삶의 양태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앞의 세계에서 나타나는 욕망의 욕구와는 달리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호리베가 어떻게 삶을 욕구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호리베 형사의 수첩에는 사건현장에 대한 메모 내용 그리고 용의자나 증인, 목격자의 증언등에 대한 기록들이 쓰여져 있는 수첩이다. 호리베는 미짱이라는 어린 딸이 자신의 수첩에다 그린 그림을 보고 불평을 이야기 하지만, 나중에 그는 잘 그렸다고 칭찬한다. 일평생 추악한 범죄인들만을 상대했던 자신의 일상 속에 나타난 수첩 속의 그림과 천진난만한 어린 미짱의 아주 잘 그린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이중성의 장치를 보여준다. 한편 호리베는 니시를 병원으로 보내고 자신이 직접 잠복근무를 하던 중, 범죄인의 총에 맞아 하반신을 못쓰는 반신불수가 되고 만다. 이러한 외형적인 반신불수를 오히려 이해하고, 또한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 보호해주어야 되는 아내와 어린 딸은 호리베를 매정하게 버리고 만다. 그러한 신은 니시와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호리베 : “아무리 부부 사이라고 해도 소용없더군. 결국에는 자신만 생각하게 되는 모양이야‥‥‥”
“퇴원해서 집에 갔더니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불도 켜지 않으면서‥‥”
"내 몸이 이렇게 되고 나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리더군.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 그건 그렇고 이제 난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며 할지‥‥"
이상적인 가치적 존재성을 지닌 사랑까지도 어쩌면 외형적인 감각의 조건 앞에 무참히 짓밟혀 버리고 마는 현실, 지난날의 자신의 존재의 가치성 마저 상실해 버린 호리베로서는 더 이상 삶의 의미마저 상실한다.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에 대해 스스로 위로도 해 보았으나 불구가 된 몸을 지탱하기가 힘들었다. 그 다음에는 희망을 가져 보고자 했다. 그러나 순간 순간 찾아든 것은 쓰디쓴 현실뿐이다. 암담함 속에서 아내가 이해하고 협력해 주면 어린 딸과 함께 열심히 살아 보려고도 했다. 그것만이 유일한 삶의 목표였다. 그러나 그 유일한 작은 목표조차 결국의 불구의 호리베를 매몰차게 배반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는 휠체어의 바퀴에 브레이크를 잠근 채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서 멀리 파도가 밀려오는 수평선을 응시하면서 차라리 그 거센 파도가 밀려와 자신을 뒤덮어 자신을 미지의 바다 속으로 데리고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이 보인다. 스스로 생을 극복할 수 없는 존재가 무섭고 거센 파도와 같은 현실적인 욕망의 구조 속에 그냥 내맡겨 놓은 것과 같은 존재의 무거움의 장치로 보인다. 이러한 장치는 나중에 그가 어떤 일을 벌일 것인가를 보여준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자본주의적 물질 만능 내지 감각주의가 빚어낸 현실적인 사회상 내지는 일본의 냉혹한 사회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가정이라는 최소단위의 공동체의 공간마저 파괴시켜 버리는 현실의 냉혹하고 잔인한 현실 앞에 우리 자신을 방황으로 내몰고 만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가정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에 가려져 있는 현실 사회에 대한 고발의 현장이라고 봐도 좋을 것같다. 이것은 우리 사회적 구조의 역 기능뿐만 아니라 돈과 황금만능의 제일주의와 세계주의에 대한 하나의 경고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호리베는 친구의 배려에 감동을 받아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다. 휠체어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림으로 표현할 대상을 찾는다. 벚꽃이 만개한 꽃나무 숲을 그리기도 하고, 망망대해가 펼쳐진 수평선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바로 끊임없이 가슴을 파고드는 고독과 상념 그리고 번뇌를 극복하기 위한 욕망의 끊임없는 찾기이다. 호리베는 길가의 꽃가게 앞에 휠체어를 고정시킨 채 꽃들을 들여다본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꽃의 아름다움과 진한 향기가 풍겨나오고 꽃과 합일한 듯한 욕망에 젖어 든다. 한 다발의 꽃을 사서 꽃에다 자신이 지금까지 그려왔던 각종 곤충과 동물들을 조화시켜 그 그림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한다. 몸뚱이는 동물인데다가 머리부분만 활짝핀 꽃송이를 그려본다. 호리베의 혼신을 다한 화폭에는 특이한 조화로움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의 모습을 그림 속에 그려본다.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예술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그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존재를 확인하며 발견해 나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곤충, 동물들 속에 참다운 생명과 존재 의미를 부여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물성 속에 내재해 있는 자신의 동물적 본능의 욕망이 이제 참다운 존재적 아름다움과 선의 향기로 승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온 지난날의 동물적인 삶, 즉 동물성과 같은 이중성에 갇혀있는 모습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 순간 꽃과 같은 향기로움과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는 장면, 구도의 순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꽃과 같은 이상적인 생을 욕망하지만 현실의 고통은 늘 자신앞에서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모습은 수평선을 바라보며 양산을 쓰고 있는 모녀의 그림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호리베는 이제까지 살아온 과거가 형사라는 직업을 통해 사회 정화라는 정의의 구현자로서 자칭하면서, 또한 그 목적 앞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나 가정의 소홀한 생활들이 변제되는 듯한 착각 속에서 살았음을 자각한다. 자신의 삶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조화가 가져다주는 이상적인 가치 이상의 것을 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반신불수의 휠체어의 신세가 되자, 아내와 자식의 존재마저 사라져 버리고 오고 갈데 없는 외톨이의 신세가 되어 버린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의지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고 좌우한 것 같지만, 막상 의지를 상실할 때 실존의 의지를 상실한 자의 모습이다. 마치 허허벌판에 한 그루만이 서 있는 외로운 나무처럼 세상에서 버려진 자신, 실존의 모습을 상실한 자신으로 남게 되고, 거기에서 불안과 공포와 죽음이 자신을 짓누를 때 삶의 가치를 상실해 버리는 존재의 모습이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호리베는 니시의 참다운 우정의 향기를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 우정의 향기는 그림 속에서 자신의 실존의 아름다움과 향기로 발현되는 예술적인 경지에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의 무거움 속에서 생의 욕망을 각인하고 성취하는데 생의 목적을 두는 것은 니시의 욕망의 목적과 일치할지도 모른다. 그러한 욕구 내지 욕망이 화폭의 그림처럼 단지 아른거리는 이상일 뿐 성취되지 않았을 때는 허무로 남기 십상이다. 그 허무함 앞에 나약하고 비굴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본다. 그것도 한 순간일 뿐이다. 현실의 만족함 앞에 도취되어 그림으로서 표현해 보지만 그것도 지속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다 이것이 호리베적인 삶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장치를 기타노는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찾게 만들고 있는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우리 관객만이 느끼는 특권인 장치인것 같다. 꽃과 동물의 이중적인 장치 앞에서 그 꽃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과 향기는 그것을 절절히 느끼는 자의 고유한 특권이며, 여러 가지 동물들의 형상들은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의 모습을 확인한 자만의 실존적인 특권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장치는 기타노 자신이 교통사고를 통해 실제 체험한 고통과 죽음이라는 한계상황 속에서 얻어진 것으로 보이며, 가슴 저미도록 실존의 존재를 갈구한 구도적인 탈각 속에서 보여주는 장치로 보인다.
호리베의 그림 속에 나타난 꽃과 동물의 형상들의 장치 속에서 그것을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침은 현실과 이상적인 허구에 대한 무지이다. 호리베와 앞날에 대한 행복은 이상적인 허구 속에 나타난 현실의 복종이지만, 그것은 육체적인 아픔과 현실적인 고통, 생존의지를 찾기 위한 관객들의 바램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영화 속에 나타난 죽음과 폭력등이 가져온 무거운 장치들을 일탈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로서 무거움의 극복이자 관객을 미학 속에 유인하고자 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영화들이 흥행만을 의식한 나머지 현실의 논리에 충실하여 현실과 적당히 타협해 버리고 인과 응보 내지는 해피엔딩의 현실과 이상의 조화에다 그 목적을 두기 싶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타노는 호리베의 조화 속에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이상적인 허구를 과감히 허무는 작업을 해 나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앞으로 전개될 니시의 죽음과 가요코와의 아름다운 여행을 통한 자결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자신의 선택 앞에 관객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관객들은 이러한 선택 앞에서 이것이 일본적인 사고방식 내지는 생활방식인 것처럼 오인하기도 하고, 성급하게 판단을 하며, 또한 적당히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버린 것 같다. 이러한 자결 속에서 무거움은 오히려 더 큰 무거움과 침묵으로 내닫게 만드는 것 같다. 논자 자신도 마지막 총소리와 더불어 논자 자신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본능을 느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타노는 주인공의 선택이 관객들의 선택과 일치하리라고 강요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강요가 일방적이었다면 이 영화는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선택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을 유도한 기타노의 천재성이 오히려 새로운 영상미학으로 다가옴을 느낀다. 주인공의 죽음 앞에서 선택의 결단이 힘든 고뇌였듯이 그것은 그 자신의 고뇌와도 일치한다.
3.3욕망의 극복
호리베가 야쿠자에게 당했다는 절망적 상황과 가요코의 절망적 상황의 대치국면을 통해 죽음과 공포, 폭력과 살인이 우리의 삶의 무거운 침묵과 불안, 공포로 다가온다. 이러한 공포와 폭력, 죽음에 대한 무거움에 대한 거부로서 니시는 나중에 자신의 나머지 총알마저 살인자인 야쿠자에게 다 쏟아버린다. 폭력 앞에 무기력한 자신의 무능함, 그 무능함에 대한 반항이자 극복에 대한 행위의 표현이 바로 또 다른 살인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호리베를 반신불수로 만든 범인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 한편 그런 남편을 두고 떠나버린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이 떠나버린 냉혹한 현실이 그를 더욱 가슴아프게 만든다. 더구나 이전의 호리베의 혁혁한 전공이 이제 그의 반신불구와 더불어 묻혀 버리고, 또한 동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려, 결국 몸담았던 직장에서 떠나야 되는 아픈 현실이 니시에게는 또 다른 삶의 거부로 다가온다.
이러한 분노와 거부는 아내인 가요코와 호리베 부부 등에 대한 참담함과 함께 뼈 속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분노는 범인의 얼굴이 정면을 보도록 발로 고정시켜 놓고 양미간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총구를 한곳에 집중시켜 연거푸 방아쇠를 당기게 만드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또한 자신의 차에 낙서했다는 이유로 불량배를 거의 반쯤 의식을 잃게 만들 정도로 폭행을 가하는 잔인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야쿠자에게 칼로 실명하게 만드는 끔찍한 장면이나, 살인하는 장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편 이런 모든 상황이 본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한 니시는 자신의 지갑을 털어 호리베를 돕는다. 그리고 그는 죽임을 당한 부하형사였던 다나카의 미망인을 돕는다. 호리베에게는 마지막 그의 생명에 대한 한줄기 욕망들을 화폭 속에 담고자 한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고급의 그림도구 일체를 사서 보내주기로 하고, 다나카 미망인에게도 금전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는다. 그것도 모자라 야쿠자에게서 많은 돈을 차용하여 호리베와 미망인을 돕는다. 그리고 이러한 니시의 현실적인 삶에 대한 거부는 경찰관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에 대한 회의로까지 이르며, 결국 경찰에 대한 반역으로 나타난다.
3.3.1정치ㆍ사회적인 욕망의 모순
우리 인간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도 한다. 사회적인 동물이란 바로 이 사회 안에서의 생활을 일컫는다. 사회를 떠난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사회 안에서의 생활이란 타인과의 관계일 수 있고,더 나아가 타인과의 관계가 하나의 공동체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일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작은 조직일 수 있고, 크게는 한 국가일 수 있다. 이러한 타인과의 관계는 정치ㆍ사회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하나-비에서 니시는 폐차장 주인에게서 절도차량임을 내세워 택시를 싸게 구입한 후 손수 페인트를 칠하고 경시청 차량으로 바꾸어 은행을 털러 간다. 경시청 차가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논자는 이제까지 니시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사회, 즉 작게는 자신의 직장이요, 크게는 한 국가라는 조직사회에 대한 반항이자 거부의 몸짓으로 보인다. 이것은 곧 사회의 가치와 제도, 질서 모두에 대한 배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진정한 삶의 의미가 기존의 제도와 질서 속에서 주어진다고 보는 맹목성에 대한 반항으로 보여진다16). 이것은 곧 노자가 새로운 제도와 질서가 오히려 우리를 구속하며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어 노예로 삼아버린다는 그의 정치성에 대한 경고와도 같다.
이것은 자신과 가족을 버린 이 세상에 대한 반항, 친구와 후배를 등진 이 세상의 잔인함에 대한 복수의 대항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일본 사회의 전체의 구조주의적 모순과 법과 제도의 폭력성에 대한 대항이라볼 수 있다. 가족이라는 평안함의 기존의 이상적인 가치적 담론이 얼마나 허구이며, 그러한 허구에 맹목화된 일본의 제도와 질서 이 모두에 대한 대항이다. 이것은 일본적 관료주의 및 제도와 관습의 굴레 마저 던져 버리겠다는 의미이자, 그 제도와 관료적 상황이 얼마만큼 폭력과 사기 앞에 무기력하며, 또한 제도와 관습이 얼마만큼 또 다른 폭력을 이끌어 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경찰국가로 자임한 일본의 허구적인 한 단면이다. 그러한 장면은 바로 뺑소니차로 인해 손상을 입은 한 남자가 니시의 경찰차를 보고 도와달라고 하나 그냥 지나가 버리자 다음과 같이 울부짖음에서 나타난다.
한 사내 : 세금이나 축내는 도둑놈들아?
그들은 더구나 한 사회와 개인의 삶을 보장해 주는 든든한 울타리로서 존재하면서도, 그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억압의 울타리, 새로운 벽을 쌓아 가는 새로운 역기능을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니시의 행동은 야쿠자의 폭력과 죽음처럼 세상의 잔인함과 비인간성 속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상실한 자아의 발견이다. 더구나 인간의 동물성이 잔인하게 표출되어 나온 세상의 악에 대해 혐오의 자각이다. 그런 인간들을 정화하겠다는 경찰의 의무조차도 얼마나 큰 악이며 또 다른 해악을 양산해 내는지 자각하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자신이 몰두하고 추구한 행복한 삶까지도 어찌 보면 폐차장의 하나의 부속품처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며, 폐차장의 부품처럼 다른 부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이제는 쓰레기더미 속에 갇혀져 있는 버려진 자신의 존재였다. 폐차장의 부품처럼 더 이상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한 몸짓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정치ㆍ사회적인 관계의 구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성에 대한 과감한 탈주의 몸짓으로 보인다.
3.3.2물질적 사회구조의 모순
그런 세상에 대한 반역의 행위로 은행을 털려고 한다. 자신이 이제껏 몸담아왔던 거부할 수 없는 조직(경찰)의 힘을 빌려, 그 거부의 몸짓으로 그 동안 경찰의 행위와 조직 및 법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무력한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경찰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통해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자 했고, 또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던 그 조직마저 야쿠자의 폭력 앞에 무의미하여, 그 경찰 또한 새로운 폭력을 양산해내는 어찌 보면 야쿠자의 조직과 동일하다고 본 것은 아닐까? 은행이라는 조직도 모든 사람들을 울타리 속에 가둬놓고 행복을 추구하게 만드는 거대한 공룡(자본주의)으로서 약자를 위하고, 강한 자(가진 자)와의 공존의 존재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있는 자나 가진 자를 대변하며 가진 자에게 더욱 갖도록 만드는 도구 역할을 하는 참으로 자본주의의 충실한 사냥꾼, 바로 욕망의 현실적인 장소로 나타난다17). 이 모두에 대한 배반의 행위로 그는 이 세상의 잔인함에 대한 일탈의 몸짓으로 은행을 털려고 한다. 자본주의 논리 앞에 우리의 삶은 얼마나 무기력하며, 몇 푼의 노예로 전락되어 버린 현실이 참으로 또 다른 반역의 행위를 만들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경찰이라는 법과 제도 및 질서의 집행자의 또 다른 폭력처럼 약한 자를 죽음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냉혹한 거대한 동물과 같은 존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니시가 정복차림으로 계산대 앞에서 총을 들여 대어도 은행직원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이것은 개인주의적인 삶의 일반성을 보여준다. 현대 자본주의의 병들은 모습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마냥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이익이나 일에만 얽매어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니시가 은행에 들어올 때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니시 뒤에 의자에 앉아있는 젊은 남자는 물끄러미 마냥 쳐다만 볼뿐이다. 그 젊은 남자가 총을 들고 있는 니시와 돈을 가져다주는 여행원을 번갈아가며 쳐다볼 뿐 침묵을 지키는 모습은 마치 경찰, 은행의 거대함 앞에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는 말 못하는 현대인의 나약한 모습 그 자체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반성이나 반추가 없이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그냥 지나쳐 버리는 현실의 냉혹함이 또 다른 무거움으로 다가온다.
단지 감시카메라만이 계속 니시의 한 동작 한 몸짓의 모두를 비춰주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감시카메라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모습, 또한 그것에 의지한 채 그것이 진정한 경찰의 역할을 다해 주리라는 맹목성에 대한 경고라는 장치18)이다. 감시 카메라가 모든 것을 주시하고 감시하는 그 제도의 맹목성에 매여있는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이자, 현대 자본주의의 메카니즘의 전형으로 보인다. 이 메카니즘의 코드에 의해 우리는 훈련되고 생산되며 근대적 인간으로 길들여져 간다. 마치 〈핑크플로이드의 벽〉19) 나타난 콘베이어 시스템의 작용처럼, 그것은 우리 개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이 얼마나 잠식당하고 침해당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기타노는 여기에서 기존의 은행털이의 장치를 완전히 상쇄시키는 새로운 장치를 사용하고 있다. 복면을 쓴 강도들이 총을 마구 쏴대고 계산대에 뛰어 올라가는 그런 선입관을 과감히 깨부수고 오히려 감시카메라의 영상을 통해 우리를 주시하는 그 거대한 허구가 얼마나 무참하게 짓밟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은행털이의 동적인 장면보다 훨씬 실감나게 만드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3.3.3求道와 自決을 통한 극복
한편 니시는 호리베와 타나카 유족에게 은행에서 턴 상당액을 송금하고 야쿠자에게 진 빚도 갚는다. 야쿠자에게 빚진 돈을 갚지 않는 것보다 갚아버림으로서 야쿠자에 대한 복수이자 관객을 오히려 조롱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행 중에 야쿠자들은 계속 니시를 미행한다. 니시의 마지막 행복마저 노리는 야쿠자를 향해 니시는 과감히 또다른 폭력과 살인으로 대응한다. 이것은 현실의 폭력에 대한 대응이다. 이것은 야쿠자에게서 빌린 돈을 갚지 않는 것보다 갚음으로서 그들에게 복수한 것과 같은 행위이다. 니시는 야쿠자 세 명에게 턱뼈가 으스러지도록 폭력을 가한다. 더러운 입에서 더러운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확인시켜 주는 하나의 경고이다. 니시가 야쿠자에게 향한 총구는 자신과 관객을 향한 총구이기도 하다. 야쿠자의 욕망은 현실적인 욕망이며, 이것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늘 솟구쳐 나오는 또 다른 욕망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 니시는 자신을 늘 자극하는 폭력적 욕망마저 떨쳐버리고 싶은 몸짖이자, 그것에 대한 극복으로 잔인한 폭력의 장면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니시는 아내와의 마지막 인생의 여행을 통해 아내의 잃어버린 웃음과 언어를 되찾아 준다. 니시와 가요코의 웃음은 바로 승화되는 또 다른 장치가 아닌가 싶다. 더구나 후지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과 일치된 그들의 여행과정, 그리고 사찰의 계단 앞에서 범종의 울림, 그것은 지금까지의 생의 반성이자 자연과 일치되는 삶의 추구이며, 구도의 길로 들어서 있는 모습이다. 그 구도의 길 앞에서 자신의 삶의 문제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회상하며 승화된 삶을 욕구하는 생 이상의 욕구의 장치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와 같은 장면은 한 노인과 어린 소녀와의 대화에서 잘 나타난다.
노인 : "이런 종은 소리도 엄청 크게 울린단다".
"얘야, 지금은 이 종을 칠 수 없단다. 저녁때까지 기다려야만 해,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응?"
하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린 소녀는 자꾸만 범종을 뒤돌아본다, 범종의 소리를 간절히 듣고 싶어하는 표정이다. 소녀와 남자가 절간 문 쪽으로 내려가는 사이 범종이 은은하게 울린다. 이것은 니시가 자신의 아내와 어린아이를 배려하는 종소리이자 자신의 이생을 삶을 정리하고 싶은 울림이었고, 아내인 가요코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의 소리처럼 들린다. 그리고 저 세계에서 엄마의 병세를 걱정할지도 모를 그 아이가 엄마가 지금 웃는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 메아리인지도 모른다.
한편 거의 같은 시간 호리베는 고독과 실망, 좌절 앞에 자신의 삶의 대한 욕구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느끼면서 화폭에 自決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그 글씨를 향해 붉은색 그림물감을 확 끼얹는다. 호리베가 화폭 위에 써놓은 '자결' 이라는 글자는 눈과 같기도 하고 별빛과 같이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그림은 또한 순수함과 영원함을 상징하는 그가 이제까지 그린 그림의 완성으로, 그 세계를 향한 간절함이다. 즉 기타노는 그 아름다움을 짓밟아 버리는 장치를 통해 자신이 찾아야할 삶의 욕망을 새롭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기타노는 우리의 이상적인 허구가 현실의 생존의지 속에서 얼마나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인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이상적인 허구와 현실의 생존의지는 피나는 투쟁을 그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 대한 물음이 다음의 신(장면) 속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한 장면을 기타노는 호리베의 화폭의 자결과 니시의 두방의 총소리와 일치시키는 신에다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은 바로 호리베의 인생이 니시의 생명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이다. 호리베는 자신의 욕망이 달성되지 못하여 그 절망과 허무에서 오는 자결이요, 니시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운명적인 책임 앞에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며 또한 그 욕망을 떨쳐 버리고자 한 승화의 자결로 보인다. 이러한 장치는 모리 형사를 말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모리 형사 : "나는 저런 인생을 살 수 없을 거야"
이것은 이전의 니시의 삶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모든 것을 초월한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의 극복은 또한 연의 양쪽 날개가 고스란히 찢긴 채 날지못하는데서 나타난다. 연은 죽음 앞에서 그 운명을 떨쳐버리고 날고자 하는 욕망의 또 다른 장치이자 표현으로 보인다. 이것은 존재와 가벼움과 무거움에서 벗어나고자 한 궁극적인 욕구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니시는 자신의 욕망의 일탈이자 탈주의 몸짓으로 자결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거부하는 운명 앞에서 이제까지의 온갖 근심과 고통,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아내와의 사랑의 불꽃을 통해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3년 동안 닫혔던 가요꼬의 입에서 두 마디 언어는 이제까지 자신의 삶이 경박한 한 여자의 삶이 아니라 生이상의 것을 추구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언어로 보이며, 남편인 니시 자신의 삶의 완성의 표현으로 보인다.
가요꼬 : "고마워요" "미안해요"
이것은 묵묵히 미소를 지으며 남편의 삶의 문제까지도 오히려 자신의 삶과 합일시켜 버리는 놀라운 대전환의 장치이자 구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두 방의 총성이 광풍처럼 밀려오는 검푸른 파도와 하얀 백사장의 장치의 구조를 허물어뜨림으로서 이 세상의 추악한 욕망의 탈주20)를 확정짓는 순간으로 보인다.
4.맺는말
우리는 처음에 이 영화가 존재론적인 물음 속에 다양한 삶이 어떻게 사회적인 함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언급하였다. 하나-비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삶과 죽음, 사랑과 폭력, 우정과 분노 등 이원론적 대치 관계 속에서 죽음과 폭력을 통해 우리의 생의 문제를 조명해 나가는 드라마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대치 관계가 기존의 드라마속에 나타난 사실성 보다 훨씬 강렬한 리얼리즘을 통해 관객의 삶의 문제로 전환시켜 그들의 삶의 내면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이런 강렬한 대치가 일본적 요소인 야쿠자적인 폭력적 요소와 더불어 새로운 리얼리즘으로 다가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리얼리즘은 한 사회의 다양한 삶의 양상의 모순들을 함축하여 보여준다. 우리는 기타노가 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어두운 장르를 통해 어떻게 구조적 모순을 들추어내고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장면은 특히 3장에서 살펴본 여러 욕망들의 모순이었다. 역시 기타노 자신은 자신의 사실적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순응보다는 오히려 반역이나 대항, 즉 자결과 같은 삶을 통해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지를 묻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자결은 일본인들의 문화의 특수성에서 오는 존재론적 및 상대론적 특성이겠으나 그러나 여기에서 자결의 무게는 삶과 죽음의 완성이자 명예로운 일탈의 극복으로 나타난 것 같다. 일본인들의 자결의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의 맞이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원래 영화라는 영상의 이미지가 문학적 텍스트와는 달리 감성적 요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성이 가지고 있듯이, 그 모든 내용들을 한정된 시간에 다 쏟아넣기란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내용들 하나 하나를 찾아 나가는 작업은 관객들의 몫으로 남기에 여기에 대한 편견은 또 다른 편견을 낳을 뿐이다. 이러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어떻게 보면 이 영화의 이중적 대치 속에서도 작용할 수 있다.
기타노는 꽃과 불의 이중적 대치가 그렇듯이, 이런 제목의 이중적 대치만큼이나 꽃 속에 담겨있는 관념적 의미 내지는 담론적 체계가 얼마나 허구인가를 과감히 해부하고 있다. 또한 火(HI)의 의미가 보여주는 것처럼 강력하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적 죽음 앞에 우리의 욕망적 구조가 얼마나 허구적이며, 허무한가를 여실히 꼬집어 주고 있다. 이런 허무적 요소도 그 자체의 요소에 허우적거리며 떠밀려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허무적이고도 허구적인 요소를 통해 새로운 생의 욕구이자 욕망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승화된 요소로 나아가는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火가 지니는 무조건적인 맹목성 앞에서 좌절하고 무관심하며, 피해 나가는 그 욕망적 허구는 단지 외적인 허구일 뿐, 이것이 오히려 기존의 관념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火적인 요소가 지니는 외적인 허구를 인식하고 그것의 의미의 존재성을 자각한 가운데 우리는 火가 지니는 참다운 불꽃놀이에 흥겨워하며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랑도 사랑만이 주어질 때 그 아름다움은 드러나지 않고 미움적인 요소와 더불어 그 빛이 더욱 더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듯이, 진정한 불꽃놀이는 이 양자의 조화를 통해 내면의 욕망적 구조를 모두 살라 버리고 승화되는 아름다운 불꽃놀이로 남기에 말이다.
참고문헌
기타노 다케시(1998), 한명준역, 『HANA-BI』, 도서출판 반도기획.
淀川長治 編(1998), 『Filmmakers』, ②, 北野 武, キネマ旬報社.
キネマ旬報(1999), 『'99 10月下旬特別號』, キネマ旬報社.
キネマ旬報(1998), 『'98 1月下旬號』, キネマ旬報社.
北野武VSビ-トたけし(1994), 阿部嘉昭 著, 筑摩書房.
그래엄 터너(1994), 임재철 외역, 『대중 영화의 이해』, 한나래.
드레피스 ·라비노우 著, 서우석 역(1989), 『미셸 푸고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나남출판.
한국영화학회 편(1998), 『아세아 영화연구-역사, 미학, 정체성, 산업-행복한집』.
川口喬一編(1995), 『文學の文化硏究』. 硏究出版社.
각 주
1) 한 작가가 한 편와 작품을 만들어 낼 때, 그 이야기의 전반적인 내용을 결정하고 있는 것은, 작가 자신의 〈개성〉등에 있기보다도 그 전에 오히려 廣義의 시대성,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드라마의 경우, 항상 그 자체로 보편적인 〈극적인 것〉을 지향한다고 하는 측면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극적인 것〉을 생산하는 핵심으로서 액션에 무엇이 선택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이미 극작가 개인의 영역을 넘어선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작가나 독자 혹은 관객의 정신성을 작품이라는 형태에 끌어내는 핵심은 그의 〈시대〉를 제쳐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加藤行夫(1995), 『드라마를 만드는 문화,-베켓트(Beckett) 시대의 종언-문학의 문학연구』, 川口 喬一출판사, p.336
2) 영화와 문화와의 관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있고, 그러한 시도들이 오랫동안 시도되어 왔다. 그런 시도들은 예컨대 영화와 사회, 영화와 정치, 영화와 대중문화 등의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관계는 영화와의 관계가 '반영론적(reflectionist)' 관계이며, 따라서 영화는 문화의 지배적 신념과 지배적 가치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래엄 터너(1994), 임재철 외 역, 『대중 영화의 이해』, 한나래, p.183 참조.
3) 여기에서 존재론적 이라 함은 삶의 주체로서 개인적인 고뇌와 슬픔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인 삶의 표현은 말이나 이성이나 논리를 넘어서 물리적 또는 신체적 폭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그 존재의 한켠에 염세주의 내지 허무주의적 경향이 엿보이기도 한다.
4) 하나-비는 기타노 타케시가 감독, 각색, 편집 그리고 주연을 맡은 영화이다. 이 영화는 제 57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 을 수상한 작품이며, 우리 나라 '일본영화 수입개봉 1호'를 기록한 영화로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지극히 일본적 이면서도 전세계를 감동시킨 휴먼 드라마의 성격을 띠고 있다.
5) 기타노 다케시가 왜 HANA-BI를 가타카나로 표기하지 않고 로마자로 표현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논자가 볼 때 이 글자가 갖는 의미는 다양하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 우리는 이 불꽃놀이가 단지 일본적인 상황속에서 주어지는 불꽃놀이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 하나-비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들이 모두 한 국가를 넘어 전 세계, 다시 말해서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필하려고 한 의도로 로마자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6) 여기에서 세 부류의 삶이라 함은 앞으로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세 계층의 욕망적인 삶을 의미한다. 그것의 첫째는 바로 야쿠자와 폐차장 주인의 삶을 의미하며, 둘째는 호리베의 욕망적인 삶이다. 그리고 셋째는 니시의 삶 속에 드러난 욕망의 극복의 삶을 의미한다.
7) 니시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장치는 야구공의 장치인 것 같다. 이 공의 장치는 자기 아내가 백열병에 걸려 생을 마감해야 하고, 느닷없이 나타난 범인에 의해 동료와 후배형사를 잃어버리는 아픈 현실을 보여주는 장치이다. 니시는 공허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또 무서운 눈빛으로 공을 던진 소년을 바라본 듯 하지만, 오히려 그들을 탓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감독은 공의 장치를 통해 우리에게 안으로 전개될 상황의 묘사를 보여준다. 둥근 공이 갖는 의미도 의미려니와 그것이 하필 니시 앞에 떨어졌다는 것과 갑자기 떨어진 공처럼, 그는 자신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예측할 수 없는 상황앞에 초연해진다. 그리고 그는 그 공을 전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다른 방향으로 던져 버림으로써 그리고 그 공이 없어져 버린 것처럼, 그 자신의 삶의 장치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리라는 것을 새로운 장치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또한 그 우스꽝스러운 표현으로 우리를 잠시 공허한 공간의 벽을 빠져 나오게 한다. 그 순간적인 광경은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그 자신의 가슴속의 온갖 혼돈과 번뇌에서 튀겨 나온 욕망의 분출의 표출이자 현실을 거부하고자 하는 몸부림 내지는 운명 앞에 사라져 버릴 존재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치인 것 같다.
8) 니시가 자신의 존재나 타자의 고통 속에서 일탈하고자 한 욕망은 진실을 직시함으로서 이제까지 억압적인 방어에 의해 야기되어온 모든 것들에 대한 일종의 해방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해방은 하이데거가 말한 바와 같이 바탕에 깔린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어떤 지침도 없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해방과 같다. 이것은 또한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말한 것과 같이 허무주의와의 대면에 있어서 우리들의 유일한 희망이기도 하다. Hans-Georg Gadamer(1975), 『진리와 방법』, New York: Seaburv Press.
9)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라고 하였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에로 향해진 존재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이 미래의 시간에 언제가 죽기 마련인 존재라고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는 인간이 그 본질 구조상 매 순간 죽음을 의식하고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하였다 하이데거에 있어 인간의 현존재는 그 본질상 죽음의 각인이 찍힌 존재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순간순간마다 인간의 현존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10) 하나의 대상 속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푸코는 "이차적이고도 동시에 일차적인 다른 의미의 담론, 즉 보다 감추어져 있으면서도 또한 보다 근본적인 다른 의미의 담론의 뚜렷한 의미를 통한 재이해"라고 정의하였다. 드레피스ㆍ라비노우 저, 서우석 역(1989), 『미셸 푸고 ;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나남출판, 서문 참조. 앞으로 이 책의 인용은 『미셸 푸고 ;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로 정함.
11) 우리는 하나-비에서 여러 가지 삶의 양태들 가운데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폐차장주인과 야쿠자들의 세계 속에서 주어지는 삶이며, 두번째는 호리베의 삶의 세계,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으로서 삶을 완성지은 니시의 삶의 세계로 볼 수 있다.
12) 욕망은 인간이 마음속에 가지는 결핍성, 즉 불완전성의 원천이라 볼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완전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욕망은 무한히 나아가려는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은 위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도 향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욕망의 이중성 중에 뒬리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생산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욕망은 항상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의지, 즉 생산성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욕망이 무언가를 생산한다면, 그 산물은 현실적인 것이다. 욕망이 생산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현실 속에서, 현실을 생산하는 한에서만 그럴 수 있을 뿐이다. "'Deleuze/Guattari(1993),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urenia,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26 참조. 하나-비에서 야쿠자들과 폐차장 주인의 욕망의 의지는 불완전한 욕망, 즉 타자를 자신의 권력의 구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욕망, 즉 탈코드화된 욕망의 의지의 작용이라 볼 수 있다.
13) 권력은 푸코의 말대로 그 관계가 "비평등주의적이고 병적"이다. 그것은 재화나 지위, 포상, 음모 등이 아니라 "사회적 신체를 통한 정치 테크노로지의 작동"으로서, 항상 생산적으로 나타난다. 『미셀 푸고 ;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pp.268∼269 참조. 권력과 마찬가지로 욕망 또한 무언가를 산출하려는 의지이고, 그 자체로 능동적인 것이란 점에서 '결핍' 이 아니라 하나의 생산'이다. Deleuze/Guattari(1983), pp.32∼33 참조. 이러한 권력과 욕망은 서로 지속적이고 훈련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기존의 질서 안에서 작용하도록 메커니즘에 종속시켜 버린다.
14) Thomas Hobbes, Leviathan, 제13장.
15) Platon, Politeia, 338a∼339a.
16) 니시 자신의 개인적인 탈주의 욕구는 권력 안에서 주어진 욕망의 일탈이자, 훈련적 인간성의 해방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푸코식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 개인의 욕망의 질주는 신체에 작용된 훈련에 기인한다. 훈련은 사회안에 존재하는 다른 형식들을 "투자하고" 식민화 하는데, 훈련은 이것들을 함께 연루시켜 이것들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이것들의 효율성을 연마하여 "무엇보다도 권력의 효과를 가장 미세하고 멀리 있는 요소들에 미치게 해 주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DP 216). 더구나 훈련적 기술은 유순한 신체를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훈련은 특정의 기관들(구치소나 군대), 혹은 병원이나 학교, 기존의 권위(질병 통제)나 사법적인 국가 장치의 부분들(경찰)에 의해 사용될 수 있다. 『미셸 푸고 ; 구조주의와 해석학을 넘어서』, pp.229∼230 참조.
17) 은행이라는 코드는 바로 욕망의 실현 장소로 보인다. 그것은 욕망에 대한 절절한 통제나 제어적인 특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욕망을 소비하고 질주하게 만드는 힘의 결정체와도 같다. 이러한 무한한 욕망의 코드 앞에 우리의 개인적 욕망은 함몰되어 버리고 만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갖는 이중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전의 자본주의는 근대적 욕망을 실현시켜 나가게 함으로서 생산수단과 신분적 종속으로부터 해방시켰으나,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 같이 해방이 아니라 억압 내지 구속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언급한대로, 분열적 흐름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억압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양면성과 같다. Deleuze/Guattari(1983), pp.230∼231참조.
18) 여기에서 감시카메라는 자본주의적 산물인 메카니즘의 또 다른 권력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는 자본주의적 권력이 적절히 통제할 대상을 제어하기 위해, 자본가의 의지대로 은행이용자들의 신체를 통제하는 권력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러한 권력적 코드를 발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권력은 단지 권력 그 자체로 나타나면서도 유용성이나 효율성의 측면에서 테크놀로지의 도입에 의해 변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관계를 푸코는 "학교 생활에서의 테크놀로지의 도입"이라 하였다. 학교에서는 엄격한 계획, 학생들의 분리, 성의 감시, 등급매기기, 개별화 등으로서 변화되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 ; 구조주의를 넘어서』, pp.269참조.
19) 알란 파커 감독의 영화로, 전쟁으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어버린 현실과 학교제도 속에서 주어지는 편견, 자본주의적 산업 가운데 나타난 기계화된 비인간성 등 온갖 사회적인 억압 때문에 거의 할말을 잃어버린 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그린 영화이다. 특히 이 영화는 이러한 광기어린 모습을 고막을 찢을 듯한음악으로서 부조리와 억압을 향해 절규하고 있다.
20) 이 욕망의 탈주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이 세상의 삶의 욕구 내지 욕망을 떨쳐버림 속에서 나오는 것이었고, 또한 자신의 아내와 더불어 자기와 관계하고 있는 타자에 대한 사랑에 대한 힘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더불어 우리는 죽음을 초극함으로서 얻어지는 그 자신만의 삶의 목적성이라 볼 수 있다.
이병담
서남대학교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