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 동신면가 대표(오른쪽)는 1964년 부친이 경기도 동두천에 만든 사업장을 물려받아 1984년 서울 성내동에 현(現) 가게의 전신 '동신생등심떡갈비'를 세웠다. 박 대표가 동신면가의 총주방장이자 아내인 김문자씨(67)와 함께 가게 벽면에 걸린 옛 가게의 사진을 가리키며 웃고 있다.
"사업장은 주인의 눈길과 손길이 닿지 않으면 시드는 화초와 같아요. 어느 한 구석이라도 시들기 시작하면 그 사업장은 곧 무너집니다."
55년 전통의 서울 암사동 '동신면가'를 운영하는 박영수 대표(66)는 반세기 넘게 가게가 살아남은 비결을 이렇게 요약했다. 박 대표는 "사업주는 사업장 내 모든 포지션의 업무를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면서 "'나는 이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니 저 부분은 그 쪽 담당자가 해주겠지'라는 생각을 하면 사업장에 금세 그늘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는 경영활동과 학업을 병행해 조리외식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신한대학교 외식산업CEO과정 주임교수로 예비창업자들을 포함한 '제자들'을 만나며 우리나라 외식창업 문화의 문제와 한계를 절감했다는 박 대표다. 그가 느낀 가장 큰 문제는 '외식창업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퇴직금 털어넣고 아파트 팔고 전세 들어가며 남은 차액으로 막연하게 달려들어요. 프랜차이즈 업체가 있으니까 일단 가게를 열 수는 있죠. 요리 좀 한다는 셰프를 일시적으로 고용해서 맛은 어느정도 내는데, 요즘 맛 좋은 식당이 한 두 곳입니까? 사업장 내의 어느 영역에서 일손에 구멍이 생겨도 곧장 채워낼 수 있을 만큼 모든 걸 장악해도 쉽지 않아요. 그냥 달려들면 백전백패입니다."
고객이 사업장에 '접선'하는 순간부터 되돌아가는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이 하나의 서비스이자 상품이라고 박 대표는 강조했다. 박 대표는 박사학위 취득에 앞서서 미국에서 외식경영전문가 과정을 수료했다. 이런 이력을 바탕으로 1990년대 후반 한국외식업중앙회 중앙교육원장을 지냈다. 박 대표는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돌아봤다.
"영업허가를 취득하려면 하루 동안 법정 의무교육을 받아야 해요. 500명이 겨우 앉을 수 있는 공간에 700~800명이 몰리는 거예요.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그냥 죽으라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큰 꿈을 갖고 오셨겠지만 욕하지 마시고 잘 좀 들어보시라. 저도 업주인데, 친척들이 식당을 차린다고 하면 절대로 하지 말라고 말린다. 용기가 정말 큰 분이라면 돌아가셔서 조금 더 고생하고 준비하셔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포기하시는 게 좋겠다'는 식으로 강의를 했죠."
IMF의 여파로 너도나도 자영업시장에, 특히 외식업시장에 뛰어들던 때였다. 물 들어올 때 노 젓기라도 하는 듯이 온갖 프랜차이즈가 깃발을 올리기 시작한 게 이 때다. 어떤 수강생은 '네가 원장이면 원장이지 어디서 남의 일에 초를 치느냐'며 욕설을 퍼붓고 나간 일도 있다고 한다. 박 대표가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고 마음 먹게 된 경험이다.
정부든 어디든, '건강한 진입장벽'을 만들어서 '묻지마 창업'을 방지하고 사업이나 경영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고 논문과 강의에서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우리나라의 진입장벽은 선진국의 30% 수준 밖에 안 된다고 박 대표는 판단한다. 사회구조가 낳은 결과라서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결과가 뻔한 일에 무작정 뛰어들게 하는 건 잘못이라고 박 대표는 지금도 확신한다.
동신면가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박 대표의 부친이 1964년에 창업했다. 그래서 탄생한 게 간판메뉴인 '평안냉면'이다. 박 대표는 어려서부터 일손이 딸릴 때면 주방에 들어가 면 내리고 육수 부어내는 일을 거드는 식으로 일을 배우고 익혔다.
평안냉면은 평양냉면처럼 담백하고 맛깔스러운데 면발이 지나치지 않을 만큼 묘하게 쫄깃해서 '이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 메밀이 많이 들어갔다. 소ㆍ돼지 떡갈비는 입 안에 맴돌고 달라붙는 느낌을 주지 않아 깔끔하다. 박찬일 셰프가 '노포의 장사법'에서 소개한 음식들이다.
첫댓글 종당엔 저렇게 오랜 경험으로 쌓아올린 음식점만 살아남을꺼 같아요.
노포 가게들은 잘하니깐
인기도 음식도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