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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22주일 [모든 악의를 버리고 서로 용서하는 그리스도인]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엡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를 구원한 것은 그의 인자하신 성품이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그분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우리를 살렸을 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되었다.
주님의 성품은 우리 삶의 규범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속한 방법으로 살고, 하늘이 제공해 준 법으로 살고, 하늘에서만 주실 수 있는 긍휼로 은혜 받고 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세상사람]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아직 세상 성격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거칠고,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삶을 살다보니, 교회안에서도 그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때에 따라서, 날카롭고 공격적인 모습이 있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남을 비방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교회 안에서도 경쟁하고, 남을 쉽게 판단하고, 앙심을 품고, 복수를 계획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난다.
세상처럼 교회안에서도 공격을 주고받는다.
이런 일은 절대 교회안에서 있어서는 안된다.
거칠고, 공격적인 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다.
세상은 마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다.
원래 하나님과는 성질이 맞지 않는다. 마귀의 성질에 꼭 맞는 마귀의 자녀들이 거하는 영역이 세상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살다가, 그 마음과 태도, 그런 방식의 성품을 가지고, 교회에서 그대로 쏟아부으면 안될 것이다.
교회 오면 모든 것이 절대 바뀌어야 한다.
예수 믿는 날부터 훈련하여, 연수가 될수록 더욱 더 교회에 맞게 변화되어 왔어야 한다.
여기는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여기는 하늘에 속해 있다. 세상과 무관할 뿐 아니라, 반대의 영역이다.
교회의 주소지는 땅에 있지만, 속한 곳은 하늘이다.
그래서, 성질도 다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여러 해 하면서도 바뀌지 않으면 문제다.
[너무 익숙해서 이게 정상적인 줄]
우리는 여기서 다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날 때, 받았던 성품이 정착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옛성질을 끝까지 밀어내야 한다.
교회에서는 예수님 닮은 영혼들로 가득해야 한다.
그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교회들이 그렇지 않다.
상당히 많은 성도, 어쩌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다 그런 기대치에 못 미친다.
거의 옛사람이 그대로 들어와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정상이라고 여기면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 문제 없다고 보는 것이 문제다.
사실 많이 바뀌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계속 남아있다.
지금의 상태는 정상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도 상당히 문제가 있다.
그런 상태를 정상으로 보고, 복음의 본질은 뒤로 버리고, 성경의 일부의 내용만으로 신앙을 재구성하여, 그것이 신앙인 줄로 생각한다.
자기 마음에 맞게 재구성하면, 편향된다.
그러면, 왜곡되고, 빗나간 편향된 시각으로 이해하게 된다.
원래 복음이 요구하는 사항들을 다 순응해서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제외하고, 자기가 원하는 부분만 취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진리를 잘 안다고, 신앙을 이론화 시킨다.
이론 안에 신앙의 모든 법을 집어넣으려고 한다.
예수 믿는 것의 이치를 어떤 이론으로 구성하고, 거기에 대입해서,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확인한다.
이 부분은 너무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이론에 영원한 생명을 집어넣을 수 없다.
구원은 진짜 우리 마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행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마음이 구원받은 것이다.
어떤 이론안에 신앙이 다 들어있다면, 하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하면서도, 이론을 논할 수 있다.
우리 교회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참된 접근을 위해, 우리의 변화도 과감해야 한다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냥 그대로 갈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주님이 요구하신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못 미치는 상태로 가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천국에 가기에는 대단히 많은 장벽이 있는 것이다.
난공불락, 철옹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과 똑같다.
벽과 싸우는 것 같다.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들, 성령이 가운데 계신 회중이라면, 그에 합당하게 심령에 하나님이 가득해야 할텐데, 아닌데도, 그냥 가고 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는데도, 원래 그렇게 해왔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이런 식으로는 천국 가는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불리한 입지에서 가는 것이다.
천국을 가겠다면, 사실 다 버리고, 다 뜯어고쳐서라도 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되겠지 하는 식으로라면, 천국을 위한 실제적인 일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가 진짜 천국에 갈지, 못할지 불투명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내게 구원이 있는가.
이 확신을 못 가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 문제는 그 사람이 어떤지 나도 말을 못할 것 같다.
행실에서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도 확신할 수 없다.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증거는 행실의 변화다.
그런데, 그것이 없으면, 구원의 확신은 희미할 것이다.
기존의 이론이나 전통, 잘못된 인식, 절충되어 온 것을 계산해야 한다.
너무 많이 양보해 왔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나는 힘을 다해, 성도들이 힘겹게 느낄지라도, 주님의 방법을 강조하고, 호소하고 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동안 많이 절충해와서, 정말 주님이 주신 처방대로 그대로 살지 못했다.
교회가 더 변화해야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런 인정은 해야 한다.
우리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위한 방법들을 많이 이어왔다.
재정적으로 아쉬운 것도 있고, 한 영혼이라도 소중히 여기라고 했기 때문에, 그저 속썩이고, 힘들어도 다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는 동안 교회는 많이 절충해야 하고, 양보해야 하고, 그만큼 교회의 수준은 더 떨어진다.
사람들에게 비난 받을까봐 이런 것은 함부로 말을 못환다.
그런데, 교회가 무너질 정도가 되면, 절충하면 안된다.
어떤 사람은 교회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무슨 서비스센터처럼 여긴다.
교회가 무엇을 베풀어주어야 하고, 교회가 왜 이러냐고 한다.
어떤 사람은 교회가 수년간 돈을 대주어도 고맙게 여기지도 않는다.
돈이 그냥 나오는가.
그것은 우리가 죽을 결심으로 싸워서, 주님의 나라를 지키는 부산물이다.
우리 영혼을 깎아내고, 졸라내서 나온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니까, 괜찮다고 정당화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교회를 서비스센터로 여기는 것이 문제다.
교회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서비스 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나를 위해 피를 쏟으신 주님을 대신하여, 사랑할 대상이다.
교회는 나를 찢고, 망가뜨려서도 사랑을 쏟아야 할 대상이다.
여기는 당장 시중들고, 섬길 주님의 육체가 없다. 교회가 주님의 육체다.
교회가 너무 절충해서, 교회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들은 뒤로 가고 있다.
어떤 교회는 그것을 너무 당연히 여기고, 거기서부터 신앙의 원리를 재구성하니까,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영혼을 살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자이고, 하나님의 자녀같은 사람들이다.
이것은 복음의 당연한 조건이다.
[그리스도를 닮은 것으로 완전히 바뀌어야]
이 때부터 내 생애를 주를 위해 살겠다고 바뀌었어야 한다.
먼저 주님의 모습이 우리가 닮을 모델이고, 그 자체가 우리 삶의 방향이고, 방식이고, 교회의 법이다.
지금 교회를 상대로 법적으로 싸워서, 쓰러뜨리려고 하는데, 우리 법은 법정의 법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의 법이다.
누구도 지울 수 없는 심령에 쓰여진 주님의 뜻이 우리의 법이다.
이 법은 생명의 길의 법이다.
천국가는 법이다.
우리 마음으로 섬겨야 할 주님이 우리의 천국의 길이다.
그리스도를 닮자는 것은 덕담이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 듣기 좋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내가 사는 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것이다.
거듭났으면,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면 본질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우리가 배우는 것들도, 성령을 통해 가르치시는 것이다.
본질을 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충실히 주님의 인도를 받자.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말고, 모든 성도가 동시에 해야 한다.
겉으로 흉내만 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처럼 해야한다.
너무 어려워서 못하는 것이지, 해야 한다. 동시에 안하니까, 하려는 사람도 기운이 빠진다.
누구 한사람이 찬물을 끼얹으니까, 서로 안하려고 하게 된다.
교회에서 잘난 척하는 것,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완전히 다르다.
[본문]
지난주에는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우리의 범죄가 하나님께 죄가 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고, 그것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비통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 말씀과 한짝이다.
악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결론 부분이다.
[분노에 대해 또 다시 말씀?]
본문에 다시 분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엡4:26의 화내는 것과 다른 면에서 중요한 부분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악의적인 행동은 계속 발전하게 된다.
그냥 단지 마음의 불만을 품고, 악한 마음을 품은 것을 없애지 않으면, 결국 교회의 존속을 위협하는 큰 죄로 옮겨간다.
죄는 인간이 늘 범하는 것이다.
[죄는 자라난다]
인간의 자연적 성품은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죄는 가만히 있지 않고, 더욱 커지게 된다.
만약 커지는 죄를 견제하지 않으면, 불신자의 죄처럼 커지게 만들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는 불신자와 다름 없을 수도 있다.
전혀 견제 하지 않았다면, 불신자와 사실 다름이 없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본문에 나열된 목록이 나타나면, 빨리 돌이켜야 한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과정이 악독이다.
[악독]
나쁜 감정, 질투, 욕심, 짜증, 미움, 앙심이 악독이다.
워낙 세상에서 거친 삶을 살다보니, 매사에 날카롭게 보다가, 교회안에서도 그렇게 한다.
교회 안에서도, 신경 바싹 세우고, 자기를 높이려고 한다.
약3: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악독이 독한 시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히12:14-15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쓴 뿌리의 쓰다는 표현이 악독이다.
악독이 생기면, 교회 많은 사람들이 오염된다.
한사람의 악독 때문에, 주변이 다 시든다.
[노함]
악독 다음 단계가 노함이다.
노함은 일시적인 분노, 순간적인 격정을 말한다.
눅4: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고후12: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갈5: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시기, 분냄 짝지어서 가고 있다.
[분냄]
일시적으로 타오른 것이 가라앉았지만, 앙심을 품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약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타오르긴 타오르지만, 안으로 타올라서, 바깥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싸늘하고, 차갑다.
[떠드는 것]
안으로 꾹 누르고 있다가, 이제는 바깥으로 터진다. 이것을 떠드는 것으로 표현했다.
원어에는 공개적으로 소리치는 것을 말한다.
고함을 치기도 하고, 그대로 뿜어낸다.
[훼방하는 것]
이 다음단계는 훼방이다.
훼방은 중상, 비방, 말로 하는 것 중에서는 최고로 나쁜 것이다.
성령훼방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중상, 비방으로 훼방한다.
원한을 갖고, 쏟아붓다가, 이제는 제 정신으로 비방한다.
딤전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딤후3: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말씀은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냥 옳게 들리는 말만 하는 것도 훼방이다.
이런 단계들을 밟아온 악독은 인간의 관계를 망칠 뿐 아니라, 교회의 결속을 해친다.
[교회의 세움과 존속을 위협하는 죄들]
교회는 성도들이 받치고 있다.
자기 마음과 사랑으로 붙드는 것이 교회의 세움이다.
이런 교회의 세움을 공격하면, 교회의 안전성이 약해진다.
그리고, 전도 자체도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지도 않는데, 누가 오겠는가.
다른 문제로 싸우고 있는데, 전도가 될 리 없다.
약3:14, 16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악독이 있으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발전할 것이다.
엡4: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본문은 그런 악한 성질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불만으로 시작하여,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악독이라는 내적감정에서 시작했다가, 최소의 분출만 하다가, 앙심을 갖고, 이제는 공개적으로 터트리고, 훼방한다.
이렇게 발전하는 모양을 표현하고 있다.
[모든 악의는 그 당시 상태에서 멈추고 버려야]
멈추지 않으면, 그 사람은 망하게 된다.
모든 악의는 막아야 한다.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고 했다.
모든 악행은 악의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롬1: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 하는 자요
본문의 악독은 원어로 악의다.
딛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고전5: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성경의 어느 한부분에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모든 악을 버리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약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악의가 있으면, 도를 받을 수 없다. 서로 상극관계다.
악의는 남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적인 생각이다.
어떤 단계인지 모르지만, 거기서 멈추라.
멈추지 않으면, 그 다음단계로 발전할 것이다.
질투, 불만으로 시작하여, 화가 나고, 계속 타오르고, 앙심을 품고 기회를 노리다가, 나중에는 터져서 선동을 시작하고, 이제는 훼방단계까지 간다.
공개적으로 거짓증언도 하고, 고소, 고발까지 한다.
이런 상태에 갈 때까지 프로세스가 계속 진행된다.
초대교회 문헌들을 보면, 당시에도 어떤 악독이 더 큰 것으로 발전해 간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유하고 있었다.
상식적인 문제였다.
어리석음에서 악독으로 악독에서 노함으로 녹함에서 분냄, 분냄에서 격노로 간다.
격노까지 가면, 이 단계를 다 거쳐, 혼합된 죄를 범하고 있는 상태다.
훼방만 했어도, 이미 그 앞의 단계를 다 거쳐갔다. 그 단계가 되면, 속죄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처음 예수 믿을 때, 아무리 악한 자도 다 구원하시지만, 나중에 훼방하는 단계까지 가면, 다시 속죄받기에는 죄가 너무 크다.
[서로에게 인자하라]
엡4:32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인자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엡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그는 자비하신 분인데, 원어는 인자하다는 표현이다.
주님은 조건없이 인자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보신다.
눅6: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에게도 인자하시고,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다.
우리도 그분처럼 되어야 한다.
여기 원수는 전쟁중인 상대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갈등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 불쌍히 여기라]
불씽히 여긴다는 단어는 내장을 뜻하는 단어에서 왔다. 긍휼이다.
우리는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 손이 가슴에 올라간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배에 손이 올라간다.
진짜 마음이 아플 때는 배가 뒤틀린다. 소화가 되지 않는다.
마음을 갉아먹는 아픈 심정을 말한다.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벧전3:8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서로 용서하라]
인자하라. 불씽히 여기라. 용서하라.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다.
골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그가 십자가에서 나의 불행을 대신 겪으셔서, 나를 살리셨다.
그가 우리에게 베푸실 때는 우리가 가진 어떤 장점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의 원수였는데도 그렇게 하셨다.
아직 원수였는데, 죄인이었는데,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면, 우리는 그의 사랑을 확인한 것이다.
롬5:8,10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너희는 서로 인자하고, 서로 용서하라.
[서로 그리고 또 서로]
서로, 서로 같은 단어를 반복한다. 강조하는 것이다.
주님이 원수된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더 많이 용서해야 하겠는가.
요일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골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너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
이것이 새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새성품이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또한 회캐게 하기 위해 용서하심]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은혜에 대한 감사 때문이다.
마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또, 내가 남을 용서하는 이유는 앞으로도 또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기 위해서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앞으로도 넘어지고, 쓰러질 일이 많다.
하나님의 용서가 계속 필요하다.
그런데,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고, 인색하다면, 내 앞길도 막힌다.
[무조건 죄를 덮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기대하는 용서]
그러나, 무조건 용서가 아니라, 회개를 기대하는 것이다.
마18:23,33,35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주인이 일만달란트 빚진 자를 용서했으나, 그 사람은 자기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주인은 화가 나서, 그 사람을 다시 가두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이다.
너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날 갚아야 한다.
롬2:1,3,5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도, 사실 자기도 그런 일을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못보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생 용서하고, 평생 회개해야 한다.
그러나, 무조건 용서는 없다.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한다고 해서, 무조건 용서가 되지 않는다.
누가 작은 범죄를 하면, 용서를 하고, 용기를 주는 이유는 스스로 돌이킬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범죄하고도, 무조건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있다.
교회의 세움을 망치는 것도 용서할 수 있다. 회개의 전제 아래서다.
용서 받을 것을 전제로 계속 범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악용하는 것이다.
용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고, 회개하는 자를 감싸기 위해서다.
회개치 않으면, 영원한 심판이 해결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성도가 회개한다면, 용서해야 한다.
고후2:5-11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무리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심하게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악한 행실을 다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악을 행할 때, 형제에게 권면하라. 말을 듣지 않으면, 다시 가서 말하라.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출교시키라고 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우리의 삶의 방법]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하여 영원한 나라로 가고 있다.
원수가 틈타지 않는 하나님의 행복이 넘치는 교회되자.
앞으로 인자할 분은 아멘하라.
앞으로 긍휼을 베풀 자는 아멘하라.
앞으로 용서할 자는 아멘하라.
앞으로 순종할 자는 아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