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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06 / 요셉의 복을 나도 (창49:22-26)
기독교 영성 작가로 잘 알려진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인생은 한 닢 동전과 같습니다. 어디에나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실제로도 인생은 일생이란 말 그대로 오직 한번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게다가 인생에는 연습도 없이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실전 상황’입니다. 그렇다 보니 인생을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으로 끝마칠 수도 있습니다.
이왕이면 내 인생이 성공하는 게 좋겠지요? 그렇지만 성공을 원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격언에도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얻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성공하고자 하면 성공하는 꿈만 꿀 것이 아니라 성공하려는 노력을 해야만 성공이란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서 비전 곧 자기만의 꿈을 갖는 것은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성공을 위한 꿈도 내가 꿀 수도 있고 남이 가르쳐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성공을 위한 노력만큼은 스스로가 해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 보면 우리 앞에는 스스로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많은 것들이 나타납니다. 때론 고난의 자리에 설 수도 있습니다. 최선을 다했어도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며, 애를 썼는데도 환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노력하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노력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해야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 무어 목사님은 말하기를 ‘하나님 없이 달려가는 인생은 반드시 막다른 골목을 만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성도로서 우린 성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하지만 그런 노력 속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적 혹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론 성공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혹 성공한 듯 보여도 계속 유지가 되질 못합니다.
예전에 신앙생활 잘하시던 집사님 한 분이 언제부턴가 교회에서 보이질 않기에 찾아가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요즘 왜 그렇게 뵙기가 힘들어요?” “아유 말도 마세요. 새로 손댄 일이 어찌나 꼬이는지 정신없이 쫓아다닙니다.” “그래서 잘되셨나요?” “아직은요.”
뭡니까? 그 집사님은 교회 잘 나오고, 예수님 잘 믿다가도 정작 본인에게 문제가 생기니까 혼자 해결해 보겠다고, 혼자 노력하면 되는 줄 알고 교회 밖에서만 뛰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 없이 혼자만 동분서주하면서도 결론은 “아직은요!”였습니다.
믿음이란 게 무엇입니까? 믿음은 내 것을 가지고 주님을 믿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없기에 주님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내가 주를 위해 뭔가를 해 드리게 아닙니다. 주님이시라면 나를 위해 뭐든 해 주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굳이 믿음이 없어도 될 상황에선 믿음이 좋다가도 정작 믿음이 꼭 필요한 상황이 되면 믿음이 없이 삽니다.
중국의 노자가 말하기를 ‘제자가 준비되면 스승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배울 준비가 안 된 제자라면 스승은 스승이 되지 못하고 준비된 제자라면 스승이 비로소 스승일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믿음에서도 그렇습니다. 믿을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에게서 예수님은 ‘예수님’일 수가 없습니다. 반면에 믿을 준비만 되어 있다면 그에게서 예수님은 언제든 ‘예수님’이실 수가 있게 됩니다.
왜냐고요?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언제든 그의 믿음대로 되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겐 믿으려고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서 믿음이 준비되면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나타나십니다. 오병이어로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풍랑과 풍파를 잔잔케 하시고, 사탄, 마귀를 물러나게 하신 예수님이 나에게도 ‘나의 예수님’으로 오셔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린 살면서 성공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되 그 노력 속에는 믿음의 노력이 반드시 있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의 노력은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요?
성경에 보면 신앙의 선진들 모두가 다들 나름의 믿음의 노력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요셉에게서 참 신앙의 노력을 배울 수 있습니다.
1. 요셉은 고난 중에도 믿음을 택했습니다.
어느 날 요셉이 꿈을 꾸고는 형들에게 얘기합니다. ‘형들의 나락 단이 내 나락 단에 절을 하더라.’ 또 말하기를 ‘형들의 별들이 내 별에게 절을 하더라.’
그랬더니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한 형들은 평소에도 꼴 보기 싫었는데 이 기회에 저놈을 처치해 버리자는 모의를 했고, 그런 형들에 의한 고난은 요셉에게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잘 보세요. 이전까진 별 탈 없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 얘기를 했더니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요셉은 ‘하나님 때문에’ 망하게 됐단 겁니다.
문제는, 요셉의 이런 고난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단 겁니다.
교회를 다니는데도, 하나님을 잘 믿는데도, 또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려니까 왠지 더 고난만 만나게 됩니다. 솔직히 어떤 때 보면 안 믿는 사람은 잘 되고 잘 사는데 믿는 나만 안 되고 못 산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전에 어떤 분을 전도했는데 두어 주 만에 교회를 그만 나오시겠다 해서 찾아뵀더니 교회 다니고부터 오히려 하는 일마다 꼬이고 안 좋은 일만 생기고 해서 더는 교회 나오기가 싫다는 답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열심히 믿음 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하나님 때문에 죽게 된 것처럼 나도 하나님 때문에 오히려 망할 수 있다면 계속 믿어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여기서 성경 해석상의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때문에’라고 하는 말은 결과가 아니라 원인을 따질 때 쓰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때문에”란 말도 결과론이 아니라 원인론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요셉의 고난은 요셉 때문이 아닌 하나님 때문에 겪는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얼핏 듣기엔 그게 그 말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 때문에 요셉이 죽을 지경이 된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이 단계에서 하나를 더 생각할 수 있어야 믿음이 됩니다.
‘하나님 때문에 생긴 일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다.’
이게 진정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고 소망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 연관 지으세요.
요셉은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당한다가 아니라 고난은 있지만 하나님 때문에 복 받을 것이라고.
어떻습니까? 똑같은 ‘하나님 때문에’ 지만 믿음이 있고 없고에 따라 고난이냐 복이냐가 결정되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성경에 보면 요셉 이야기 중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셨더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인즉 하나님 때문에 고난 당하는 요셉이었기에 하나님이 요셉과 늘 함께하셨다는 겁니다. 그랬기에 형들은 요셉을 자기네 집에서는 추방했지만, 하나님의 품에서까지 추방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모로부터의 사랑 줄은 끊었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까지 끊어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요셉에게 그리하셨다면 하나님은 나에게서도 그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만 놓고 하나님 때문에 힘들다 하지 마시고 어떤 형편에서든 하나님 때문에 되어질 앞으로의 일들을 소망하며 기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신 이유가 이 때문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한 세상의 그 누가 하나님의 축복을 막을 수 있으며 그 어떤 힘센 자가 있어 하나님 믿는 사람을 찢을 수 있으며 괴롭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높여주는 곳에 높음이 있고,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해 주는 곳에 영광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하는 곳에는 실패 같으나 성공이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곳에는 성공 같으나 실패가 연속될 뿐입니다.
2. 요셉은 유혹 중에도 믿음을 택했습니다.
믿음의 위기는 고난 때문에도 오지만 그에 못지않게 유혹 때문에도 옵니다. 그래서 우린 유혹의 화살이 날아오는 시기를 잘 알아야 합니다.
유혹의 때는 인생살이가 어렵고, 아프고, 서글플 때가 아닙니다. 반대로 성공했나 싶고, 이젠 좀 살만하다 싶을 때면 영락없이 유혹의 화살이 날아옵니다.
사탄의 이런 유혹을 피해 갈 능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대신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나더러 죽어라 죽어라 해도 하나님은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내게서 선이 되도록 역사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같은 신앙의 선진들에게서 보여지는 그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분들이 믿은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보세요. 하나님이 이제 곧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역전 인생을 펼치시려는데 도중에 우리가 믿음을 놓아버리면 하나님이 우릴 위해 뭘 더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느 마라톤 선수가 말하기를 42.195킬로미터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그만 뛰고 싶다는 한계점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가 고비라고. 그 순간만 넘어서게 되면 결국엔 완주할 수 있노라고.
믿음에서도 그렇습니다. 항상 ‘지금이 고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으로 지금의 고난, 지금의 유혹만 넘어설 수 있다면 우린 믿음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까지 달려갈 수 있게 됩니다.
요셉은 어땠나요? 유혹과 믿음의 갈림길에서 믿음을 택한 요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감옥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유혹으로부터 승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셉의 앞길에 놓여 있는 것이 감옥이더라는 겁니다. 다시 한번 더 실망할 상황에 맞닥뜨렸습니다. 이젠 그만 믿어야 하나라고 여겨질 만한 상황들이 연속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감옥 밖에서도 그러했든 감옥 안에서도 그의 믿음을 지켜냈습니다.
우리가 요셉에게서 배울 것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지금 있는 곳을 감옥이라 생각하니 감옥이었지 영적으로 그곳은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감으로 만드시기 위해 교육받게 하신 정치학 세미나실이었고 신앙 대학원 교실이었습니다. 거기서 요셉은 애굽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만나 그들로부터 왕궁 돌아가는 일들과 애굽의 국내외 상황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감옥에서의 신앙 훈련이 끝나갈 즈음 하나님은 요셉에게 ‘해몽학 박사’라는 졸업장을 주셨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 해몽의 은사는 요셉이 애굽 왕과의 면접에서 합격 점수를 받게 했고, 결국 그는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현실에서의 요셉의 감옥은 하나님이 보시기엔 요셉의 ‘신앙 훈련 교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과 하나님 사이에서의 ‘시각 차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집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계신 현 위치를 어디라 생각하십니까?
고난의 자리인가요? 힘든 자리인가요? 속상한 자리인가요? 아쉽고 부족한 자리인가요?
앞서 말씀드렸지요. ‘제자가 준비되면 스승은 나타난다.’고.
우리의 믿음만 준비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론 저와 여러분을 신앙 훈련 교실에 밀어 넣기도 하시는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믿음이 준비되게 하시려고.
구약에선 요셉이 학생이었고 오늘날엔 우리가 학생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신앙 훈련의 모든 과정을 통과하여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다면 우리도 모든 훈련 과정을 통과하면 요셉과 같은 복을 받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이런 요셉을 향해 본문 22절에서 하나님은 야곱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당시 무성한 가지라 함은 포도원에서 풍년일 때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그렇게 보면 요셉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생의 풍년과 풍성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잠시 무성했다가 시들어 버리는 게 아니라 샘 곁에 심겨진 나무였기에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하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노력 없이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믿음 안에서 많은 고난과 유혹을 이기고 해몽학 박사가 된 요셉처럼 우리도 모두가 예배 박사, 기도 박사, 찬양 박사, 전도 박사, 봉사 박사, 섬김과 순종과 충성과 각종 은사의 박사들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그로 인해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 인생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의 복이 있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더하여 요셉이 받은 무성한 가지의 복이 담을 넘었다고 한 것은 요셉이 받은 복이 요셉에게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요셉 덕분에 요셉의 온 가족은 물론 애굽 모든 백성이 흉년 중에도 요셉의 무성한 가지의 덕을 보아 살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요셉은 무성한 가지의 복을 받았고 그 가지가 담을 넘었기에 요셉은 담 너머의 영역까지 복을 받게 하는 ‘복의 통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는 여러분 한 사람이 은혜받고 복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복이 여러분의 가정 구석구석에 퍼지고, 여러분의 부모와 자녀들 모두에게 나누어지고, 여러분이 학교든 직장에 가시면 거기서도 무성한 가지가 되어 받은 복으로 말미암아 그곳에 있는 모두가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은 성도의 ‘축복인 동시에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성도의 축복이기에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복 받기를 소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이 성도의 사명이기에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라도 우린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역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지만 복의 통로가 되지도 못하기에 하나님께는 불순종이고 가족과 이웃에게는 시쳇말로 민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우리에게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모두를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가 되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살게 하실 것입니다.
비록 현실이 당장엔 고난이고 유혹이고 감옥살이 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믿으세요!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요셉의 복을 나도 받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준비된자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기도의 끈을 놓치말아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