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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의자왕 암군설에 대해..
한단인 추천 0 조회 481 07.12.20 21:15 댓글 28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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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2.21 00:09

    첫댓글 명쾌한 답변. ^^

  • 작성자 07.12.22 15:13

    논쟁을 기대했는데.. 아무 반응들이 없으니 심심(?)하네요. 쩝..

  • 07.12.22 18:37

    ^^; 논쟁을 기대부터 하시면 어떡합니까... 맞는 말씀 했으니 다 동의한 반응이라고 보면 되지요~

  • 07.12.23 10:49

    하하.. 한단인님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리. +_+

  • 작성자 07.12.23 15:53

    경지.. ;;;;;

  • 작성자 07.12.25 00:37

    장래에 일어날 사태에 대비를 하다뇨?

  • 07.12.23 07:26

    그러고보니 왕자 41명을 좌평에 봉하고 식읍을 준 것은 백제 담로제의 연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 작성자 07.12.23 15:55

    음..담로의 정의가 확실치 않으니 뭐라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담로의 정의를 우리가 말하는 봉건제와 유사한 것이라면 그 형태는 한 고조 유방이 각 이성 제후를 왕실 인척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 07.12.23 07:27

    이 글을 통해 또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한단인 님은 수양제를 어떻게 보시나요?

  • 07.12.23 10:49

    왠 뜬금없이 수양제가 궁금할까요.ㅎㅎ

  • 07.12.23 11:16

    뜬금없는 답변 : 김갑수씨는 좋아합니다.. ^^;;

  • 작성자 07.12.23 15:58

    폭군 이미지 때문에 그러시나요? 수 양제의 경우도.. 당 태종 때문에 상당히 왜곡되거나 특정 잘못이 과하게 부각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요즘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폭군 인상이 강하게 들긴 하겠죠. 그런데 수양제 언급하시니 생각이 난건데.. 모후의 죽음이 정변의 계기가 된 것이라면 신라에서 이걸 물고 늘어졌을텐데 기록에 남지 않은 것을 보면 의자왕이 모후를 살해하고 정변을 일으키진 않은 모양입니다.

  • 07.12.23 19:35

    라이센스, 다물정신 님// 한단인님이 말씀하신대로 폭군 이미지 때문입니다. 기록을 그대로 따라가보면 전체적 맥락에서 수양제와 당태종은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부도덕한 집권, 대규모 토목공사,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과도한 외정 등) 한쪽은 폭군, 한쪽은 성군으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의자왕 암군설이 떠도는 상황에서 그 정도는 예상하셨을 텐데요?

  • 작성자 07.12.23 16:00

    음..그런데 지금 올린 글에서 제가 치명적인 오탈자를 하나가 있는데 아무도 지적이 없으시네요. 수정할까 싶었는데.. 재미로 남겨두겠습니다.

  • 07.12.24 12:11

    으이그 지긋 지긋한 독감, 그리고 송년회 회식등 그야말로 몸이 만신창이라 잠시 쉬었습니다..그런데 한단인님의 좋은 글이 올라와 있군요..잘 감상했습니다.....치명적인 오탈자는 저도 발견이 잘 안되는데..어느 부분에???..다만 3천궁녀부분에서는 한단님도 속단을 하신 것 같습니다..딱히 3천 궁녀라는 말은 사료 어디에도 없지만 그에 해당하는 사료는 15세기에 쓰여진 한 시문의 내용보다도 삼국유사의 태종춘추공 내용중 백제고기에서 전한다는 타사암 건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감기 조심하십시요....정말 지독합니다...^^*;

  • 07.12.24 11:47

    또한 재미있는 것은 좌평의직은 먼저 당나라와의 결전을 주장했고 달솔 상영은 먼저 신라와의 결전을 주장하는 것이 나오는데...의직은 이미 신라 김유신군과의 전투 경험이 있기에 적은 군사로 신라와의 결전을 기피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따라서 상영은 계백을 따라 황산벌 전투에 나섰으며 의직은 비록 사료에는 나타나질 않으나 그의 주장대로 기벌포 방어 전투에 나서 당군과 결전하면서 전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 작성자 07.12.25 00:36

    3천 궁녀를 언급한 것은 의자왕이 황음무도하다는 한 근거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그 숫자의 허구를 말하기 위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 기록에서 언급하신 그 기록이 딱히 의자왕의 황음무도함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만..

  • 작성자 07.12.25 00:37

    음..그리고 글이 너무 기니 아마도 오탈자를 찾기 힘드실 것 같군요. 힌트는 마지막 단락의 황극천황 기사부분입니다. 곰곰히 읽어보심 뭔가 말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실 겁니다. ㅎㅎ

  • 07.12.25 15:31

    혹시 이건가요? -->> 고명한 사람 40여명 "이섬"으로 쫓겨갔습니다. ^^;

  • 07.12.25 21:19

    삼국유사의 타사암건은 황음무도와는 거리가 먼 궁녀들의 절개를 미담으로 하는 내용으로 봐야 하겠지요, 그리고 황극여왕과 제명여왕이 동일인이라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대좌평 지적의 사망과 제명여왕의 등극과의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것과는 무슨 관련설이 있는지요??

  • 작성자 07.12.27 01:11

    신농님. 그 오탈자도 있긴 하지만 글 내용 자체에 치명적인 모순을 만들지는 않지요. 좀 더 찾아보심이..ㅎㅎ

  • 07.12.26 03:45

    '의자왕 암군설에 대해'라는 큰 줄기와는 상관없이 그냥 잔가지들에 대한 의문점 몇가지입니다. 큰 줄기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때문에 코멘트하지 않겠습니다. 1. 일본서기 황극천황조의 친위쿠데타 기록을 655년의 일로 단정한다면, 그 기록에 고구려 정변이 같이 나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2. 백제 멸망 당시 태자를 신라측 기록(삼국사기)에서는 효, 당측 기록에서는 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도 의자왕 4년 융이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문사의 반란;과 관련하여 짚어 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작성자 07.12.26 19:45

    1번의 경우는 질문을 거꾸로 하셔야 할 듯.. 원래 고구려의 정변이 642년 10월에 일어났습니다. 백제의 정변이 왜 제명천황 원년이 아니라 황극 원년으로 기록된 것인지 의문이 일어야 할 듯 싶군요. 저도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2번의 경우는 제가 본문에 이유를 쓴 것 같습니다만..의자왕 4년에 모종의 이유로 맏아들 효가 아닌 3자인 융이 태자위에 책봉되었다가 의자왕 정변이 일어난 655년에 장자 효가 태자로 책봉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때문에 저는 656년 2월의 태자궁 건립을 그 맥락에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 07.12.28 16:59

    태자가 바뀌었다면 왜 당측 기록에서는 융이 태자라고 하였을까요?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오히려 삼국사기의 기사가 왜곡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태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융이었는데, 후에 웅진도독이 된 융에게 적대적인 신라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효를 태자로 만들었다는 뭐 그런;; 사실 저 또한 655년의 태자궁 건립을 마찬가지 맥락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그렇게 본다면 당측 기록에서 여전히 융을 태자로 적고 있는 점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음모의 냄새가 나는 것은 저만의 과민반응인가요? ㅎㅎ

  • 07.12.26 03:42

    3. 사비성 함락과 의자왕의 항복은 약 6일의 시차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측 기록에는 웅진방령 이식이라는 자가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했다고 합니다. 과연 의자왕의 항복은 자의적 결단에 의한 행동이었을까요? 4. 부여태의 전시 왕위참칭이 왕자간의 알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극단적인 반란은 최소한의 기반과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부여태의 경우는 완전히 안드로메다입니다. 결과적으로 역사에 보기드문 코미디가 되어버렸구요. 정말 부여태는 되지도 않을 짓거리를 한 바보일까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

  • 작성자 07.12.26 19:48

    저도 이 부분이 햇갈립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의자왕이 웅진방령군을 데리고 왔다고 서술하고 있거든요? 백제와 별다른 연고 없는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는 예식이 의자왕을 잡아 끌고 왔다고 되어 있는데 백제와 이해관계가 가장 높은 신라에서 도리어 이 기록을 평이하게 처리하니 저로서도 의문입니다. 4. 태의 왕위 참칭의 경우도 제가 본문에서 설명을 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안드로메다 짓이라고 하실만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태 역시도 효나 융과는 달리 어머니가 다르고 지지세력도 달랐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 07.12.26 19:49

    이희진 씨는 방어 책임을 맡은 태가 실제 지위가 없이 방어 책임을 맡으려고 하니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이라 하던데..이건 좀..저도 확신이 서질 않는 부분이긴 합니다.

  • 07.12.28 17:03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왕조사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의자왕이 이식에게 끌려왔다고 해도 의자왕을 주체로 기록했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식이 의자왕을 끌고 와서 항복한 게 맞다면, 이거이거... 정말 장난 아닌데요;;; 백제멸망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재검토되어야 되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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