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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전신현님께서 최근에 쓰신 의자왕=암군이라는 인식 때문에 카페에서 격론이 일어난 것 같군요. 제가 반론글을 월요일에 올린다고 했는데 게으른 탓에 반론글을 이제사 올린 점 사과드립니다. (그런데 어차피 천랑성주님이나 소호금천님 같은 분들이 이미 한 얘기를 조금 정리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아서 만족할만한 답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반론 전에 무전신현님이 의자왕을 암군으로 보신 연유를 우선 정리하고 그에 대한 반론을 하겠습니다.
첫째, 3천의 궁녀를 거느리고 황음무도했으며 사치를 즐겼다.
둘째,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들을 중용했다.
셋째,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해 이렇다할 대책을 내리지 못하고 성충과 흥수의 구국책을 따르지 않았다.
넷째,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도망갔다.
대략 이정도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론을 하기에 앞서 제 반론의 주된 내용은 이희석님의 <<전쟁의 발견>>이란 책의 백제 멸망 부분과 이도학 선생님의 <<살아있는 백제사>> 부분을 상당부분 참고했음을 미리 밝힙니다.
반론을 가하기 이전에 기본적으로 유가에 의해 집필된 사료는 정통 논리에 입각해 있음을 주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즉, 당대의 정권이 통치 당위성을 갖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때문에 전대 왕조가 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찾아 쓴다는, 다분히 목적론적 서술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한 그 이유란 것에 대해서도 요즘과 같은 과학적 분석이라기보다, 천인감응설에 입각하여 개인의 도덕적 행태가 나라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식으로 글을 쓰게 마련입니다. 그러다보니 평상시에 흔히 나타나는 문제들을 말기적 현상으로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이 유가 사관의 행태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 유가의 입장에서는 승자를 선한 자로, 패자를 악한 자로 본다는 기본적으로 안좋은 색안경을 끼고 접근한다는 겁니다.
첫째 부분에서 우선 3천 궁녀는 오해라는 점을 밝힙니다. 사료 원전에서 3천 궁녀라고 쓰여진 사료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이도학 선생님은 여기에 대해 15세기에 쓰여진 한 시문의 내용이 실제 사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사적 기록의 고정관념에 불과하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삼국사기에 각종 궁인과 더불어 향응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향응의 종류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여기서 이도학 선생님은 친위 쿠데타로 인해 행동의 제약이 풀린 의자왕이 개인 욕구를 마음껏 풀었다라고 보고 계십니다만 저는 그렇게만 생각하진 않습니다.)
향응의 문제는 2번째 문제와도 결부되는 일입니다만 655년에 백제 의자왕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뒤에서 다시 언급될 문제이지만 의자왕이 자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왕권은 모후(친모가 아닐 가능성이 높음)에게 상당부분 억눌려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655년 정월에 모후가 사망하면서 의자왕은 친위 쿠테타를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왕제 1명과 동모매 4명, 내좌평 등 40여인의 중요 귀족들을 섬으로 추방합니다.
그러나 의자왕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귀족 전부를 몰살했다고 볼 순 없습니다. 관료 수급을 평민층에서 할 순 없으니까요. 적어도 의자왕을 따르는 귀족들이나 중립인 귀족들은 남겨두고 모후를 따르는 귀족 중 가장 핵심인사들만 처리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후를 따르던 하급귀족이나 중립집단들을 불러다가 위무해야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그것이 개인 욕구의 차원이란 맥락에서 본다면 그 해에 의자왕이 직접 고구려, 말갈과 연합해 대대적으로 신라 북변 성 30개를 함락시킨 사건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놀기에 바쁜 그가 뭣하러 쓸데없는 전쟁을 직접 벌이겠습니까? 장수 하나 시켜서 하면 될 것을 말입니다.
또한 대규모 토목공사는 요즘의 눈으로, 특히 피지배층인 '근대' 민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쓸데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이 깨여있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일 뿐입니다. 왕성 축조상의 거대함은 기실은 왕실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 아이콘입니다. 심리적 압박을 준달까요? 은 주왕이 녹대를 건설했다는 입장을 유가에서는 다분히 사치의 일환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정치심리학적으로 봤을 때 거대한 토목건축은 권위와 경외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피지배층이나 귀족들이 국왕의 권위에 쉽게 대항하지 못하게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뭐 그런거라고 할 수 있죠.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계획한 일도 같은 맥락입니다. 당시의 관점에서는 그런 점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당연한 일입니다. 근대인의 관점에서 과거를 재단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물론 토목 건축이 왕실 재정을 낭비하는 일이 될 순 있습니다. 재정의 근간을 뒤흔든다는 점에서 과도한 토목공사는 분명 문제가 될 것입니다만 의자왕의 경우는 태자궁을 증축한 것과 망해정 건립 이외에는 산성 수축 정도 밖에 없습니다. 백제의 멸망 때에도 나당 연합군의 급속한 작전에 의해 망한 것이지 재정 부족으로 인한 문제점이 나타났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천랑성주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말기적 현상을 유가에서 과도하게 해석한 흔적일 뿐입니다.
두 번째 문제를 따져보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의자왕이 655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쿠데타 이전의 의자왕은 태자 옹립에 있어서도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의자왕 4년에 왕자 융을 태자로 세웠다고 했는데 멸망 전의 태자는 융이 아니라 효였습니다. 즉, 중간에 태자가 바뀐 것입니다. 이때 왕자 융은 의자왕의 3자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태자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상 맏아들에게 가게 마련입니다만 즉위 초에 정해진 태자가 장자도 아닌 3자에게 돌아간다면 이는 특정한 정치권력의 개입이 있었다는 반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후 사망과 관련하여 벌어진 쿠데타가 655년 1월에 벌어졌고 태자궁 수축이 그 해 2월에 시작되었습니다. 태자의 교체는 아마 이때 이뤄진 것으로 보이고 태자의 교체를 했다면 아마도 각 왕자들의 어머니가 다르고 그에 개입된 정치세력이 다르다는 반증일 것입니다.(의자왕과 그의 모후 관계도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됩니다.) 아마도 부여융의 어머니는 의자왕의 모후와 관계있는 정치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반면 장자로 생각되는 효의 어머니는 모후와는 반대에 선 세력이었을 수 있겠죠.
아무튼 모후 세력이 655년 박살나면서 정국의 주도권은 의자왕과 그를 지원한 효의 어머니 세력에게 넘어갔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왕을 따르는 세력과 모후를 따르는 세력으로 양분된 상황에서 중도를 지키던 세력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충은 아마도 여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가 비록 중도를 지키던 세력이라고 하더라도 국왕 전제권에 익숙하지 않은 고대에는 기본적으로 귀족들이 왕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진 않습니다. 이는 국왕전제권을 형식적으로나마 인정한 조선시대 사대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성충과 흥수는 의자왕이 각종 향응을 벌여 귀족들을 왕권 아래로 위계화 시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충이 향응에 대한 반대를 넌지시 언급하는 것이 사료의 기록대로 사실이라면 말입니다.
당시 의자왕은 쿠테타를 일으킨 초반에 해당하여 왕의 전제권이 아직 공고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비록 사소한 일에서 왕의 일에 반기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성충의 발언을 인정하게 되면 이제 막 세워지는 국왕 권위에 심각한 손상이 가게 됩니다. 따라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의자왕은 성충을 처벌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완전히 같다고 할 순 없겠습니다만 절대왕정 시대의 프랑스 루이 14세의 상황과도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 쓴 <<문명화 과정>>을 보면 절대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루이 14세가 궁정향연에 몸이 아파 참석하지 않은 귀족에게 왕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역모죄로 다스릴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지금으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진 않습니다만 귀족들의 행동을 통제하는 그 과정을 통해 루이 14세는 절대권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당시 루이 14세는 경쟁자였던 오스트리아와 영국 등과 계속 전쟁중이었으니 의자왕이 신라를 공격하는 것과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의자왕은 당의 개입으로 인해 패했고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토목공사에 관한한 유럽 최대 왕궁인 '베르사유 궁전'의 축조가 이때 이뤄졌으니 무전신현님의 논리대로라면 루이 14세도 의자왕과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 어쨌든 이 과정에서 왕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신라 입장에서는 충신으로 미화되어 서술되고, 왕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은 간신으로 쓰여졌을 개연성도 있다고 봅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의자왕의 오점이나 판단 미스 등을 최대한 부각시키거나 과장, 혹은 없는 사실 쓰기 등을 통해서 자국 통치의 당위성을 설명해야하니까요.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41명의 왕자들을 좌평에 봉하고 식읍을 내린 일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고 계십니다만 왕실을 지방에 파견보내 지방을 통제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깝게는 주의 봉건제가 있고 전한의 군국제가 있습니다. 만약 그에 대한 비판을 하신다면 주의 봉건제와 전한 군국제에 대한 '도덕적' 비판도 가하셔야 합니다. 무전신현님은 이 부분에 대한 비판의 시작을 왕의 공적 위치를 기본전제로 놓고 왕자들에 대한 식읍 분봉이 잘못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원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은 처음부터 존재한게 아니라 사회의 상황에 따라 '만들어지는' 개념입니다. 당시의 백제에게 있었을지 장담도 못하는 공적 영역을 준수해야 했다는 설명은 다분히 목적론적일 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대적 한계를 무시하고 근대의 잣대를 고대에 들이대는 것 밖에 안됩니다.
셋째 문제를 따져보겠습니다. 나당 연합군 침공에 대한 성충과 흥수의 견해에 대해 의자왕이 따르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다분히 오해가 있습니다. 미리 짚고 넘어가야할 사실은 성충과 흥수는 군인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기록된 성충과 흥수의 말을 들어보면 탄현과 기벌포를 철저히 막아야 한다는 말에 대해 다른 신료들이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말을 꼼꼼히 보지 않고 뒷 내용만 보게 되면 정치권력 싸움 때문에 성충과 흥수의 말을 거부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으나 앞서 언급했듯 성충과 흥수는 군인이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반대하는 견해에는 기벌포와 탄현을 '출입도 못할 정도로 단단히 봉쇄해야한다'는 것에 대한 반대입니다. 백제본기 원문을 보면 기벌포와 탄현에서 방어하는 것은 같지만 좀더 세부적으로 좁은 통로를 통해 들어오면서 대열이 흐트러지는 때를 노려 요격하자는 얘기였습니다. 당시에 탄현과 기벌포의 중요성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었고 성충과 흥수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의자왕이 이 지역의 중요성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원래 의자왕이 흥수에게 의견을 물어본 것은 신라군과 당군 중 누구를 먼저 공격하느냐에 대한 것이었는데 흥수는 엉뚱하게도 전략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이 점은 성충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문에 흥수의 원론적 답변에 대해 대신들이 반론을 제기하고 그의 견해를 채택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기사로 인해서 후에 백제 의자왕이 우유부단해서 신라군과 당군을 기벌포와 탄현에서 막지 못했다는 책임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백제본기의 내용에서는 신라군과 당군이 각기 탄현과 웅진강구를 지나고 나서야 계백이 병력을 동원해 막았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 문장은 애초부터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계백이 패한 후 잔여병력이 웅진강구에서 당군과 대치중이기 때문입니다. 문장대로라면 아직 당군은 웅진강구에 상륙하지도 않았던 때입니다. 따라서 계백의 출전이 백제군의 첫 대응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즉, 백제군은 탄현 부근에서 신라군을 상대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신라군을 탄현 부근에서 저지하지 못하고 황산벌에서 재차 막아야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비록 탄현에서 백제군이 신라군을 저지하지 못했지만 황산벌에서 1차 저지를 하면서 탄현에서 막지 못한 전략적 실책은 무마된 듯 했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지형상의 이득을 얻지 못한 백제군이 최종적으로 패한 것으로 나오지만요.(여기에 대해서는 이희진 님의 <<전쟁의 발견>>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사비를 버리고 웅진성으로 갔다는 부분에 대한 반론입니다. 이 부분은 저도 의자왕이 아닌만큼 그의 심중을 알 수 없는 관계로 단언하긴 힙듭니다. 따라서 추정을 해보긴 했습니다만 저도 맞다고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우선.. 언급하신대로 사비성이 방어입지에 좋은 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포위된 상황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조금 미지수입니다. 개로왕을 언급하시면서 왕의 경우 최고 지휘자로서의 책임을 가지는게 아니냐고 하셨습니다만 그 경우는 상당히 특수한 경우입니다.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죽음과 패배에 대한 공포감을 이겨내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습니다. 만약 그것을 최고 지휘자라는 이유로 당대의 인물에게 강요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자신이 앞장서서 전투에 나선 전적을 생각해보면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 공포감 때문에 피신을 했다고 하기에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사람이 항상 한결같다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655에도 직접 신라 북변 30여 성을 함락시킬 정도로 호전적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쉽게 그리 생각하긴 어렵습니다. 때문에 전략의 일환으로 의자왕이 태자와 함께 피신했다고 가정을 하고 사고를 진행시켜봤습니다.
우선 신라군이 당에 보급을 대어준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총 동원병력이 20만에 육박하는 이상 장기전이 쉬울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의자왕의 입장에서는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어야 유리합니다. 그러나 전장의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최고 지휘자가 사비성에서 고립된다면 어떠한 전술, 전략의 지휘가 어렵게 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만일에 경우 수도가 함락된다면 모든 게 끝장이 나게 됩니다. 따라서 의자왕의 심중에는 핵심 지휘부는 몰래 성을 빠져나가고 허수아비만이 성 중에 남아 신라군과 당군의 이목을 속여 시간을 버는 사이 지방군을 불러들여 이들을 상대하게 할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사비성 중에는 나당 연합군에 대한 공포보다는 이들이 물러난 이후의 상황을 더 걱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에 이미 장기전을 통한 나당 연합군 대책이 마련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상황은 의자왕의 계산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둘째 아틀 태와 셋째 부여융, 그리고 태자의 아들 등이 남아 나당 연합군을 상대했는데 이때 둘째인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사비성에서 백제군을 지휘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의자왕의 자식들은 서로 어머니가 다 달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도 태 역시도 지지하는 세력이 따로 있었다고 본다면 왕위 계승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때문에 태자 효의 아들과 셋째 부여융이 태의 즉위 이후의 일을 걱정하여 성을 몰래 빠져나가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 중은 전투 의욕을 거의 상실했고 포위한지 3일도 안되어 사비성이 함락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의자왕의 전략 중에 가장 큰 부분이 붕괴된 것입니다. 소식을 들은 의자왕은 7월 18일에 항복을 요청하죠.
여기까지만 보면 의자왕이 의욕을 잃은 늙은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까지 당의 해외 정복 상황을 보면 중화 이외의 절역(絶域)에 대해서는 기미지배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즉, 이전에 반당적인 정권을 교체하여 친당 정권을 수립하고 간섭도를 높이는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당의 백제 침공도 대 고구려 전에서 전초기지 마련과 본보기 용도로 침공한 것이었지 직접 지배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의자왕은 이 점을 노렸을 것입니다. 더 이상 반항하면 왕실 자체가 없어질 가능성을 염려한 것이겠죠. 어쩌면 당 측에서 의자왕과 협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신라와의 약정에서는 백제 영토를 신라에게 주기로 했다는 것과는 달리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친당적 성향이 있는 부여융에게 도독자리를 맡겨 친당적인 괴뢰정부를 세우게 합니다. 마치 2차세계대전에서 친나치적인 비시정권을 프랑스에 남긴 것과 같은 맥락이겠죠. 이 괴뢰정권은 비록 친당적이긴 했으나 백제인 스스로 자치적인 성향이 다분히 강했습니다. 만약 당의 세력이 약화된다면 이 기미지배의 형태는 당장에 벗어버리고 독립적인 정권으로 탈바꿈할 여지도 있었습니다. 실제 그런 예도 많았구요. 서돌궐이나 언기국 등등 적잖은 예가 백제 멸망 전에 많이 보입니다. 당의 기미지배를 받던 수많은 국가 중에 상황 여하에 따라 반기를 일으키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에 의자왕은 최소한 왕실의 보전을 위해서라도 그 이상 저항하는 것은 도리어 해가 된다고 판단했을 여지는 있습니다. 물론 민족주의적 사고에서는 그건 용납될 수 없지만 당시는 민족주의가 형성된 시기가 아니란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의자왕의 계산은 또 어긋납니다. 당나라의 말을 들어서 백제땅에 욕심을 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던 신라가 웅진도독부를 공격하여 감시역으로 있던 당의 과의와 백제인 관료를 주살하고 웅진도독부를 접수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때문에 도독으로서 백제 땅을 다스려야할 부여융은 백제땅으로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의자왕이 결과적으로 보면 몇가지 판단 미스를 하여 최종적으로는 백제 멸망에 원인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무전신현님의 발언대로 의자왕=암군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사료를 쓴 사관의 의도에 놀아나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료가 만들어진 의도를 생각하시고 사료를 참고하시는 훈련을 하시길 바랍니다.
ps. 의자왕의 655년 정변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일본서기 황극천황 원년(642) 기사를 보면 고구려의 정변과 백제 정변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이도학 선생님은 백제의 정변은 황극천황 원년이 아닌 제명천황 원년(655)년의 일로 봐야한다고 보고 계십니다. 참고로 살아있는 백제사에서 그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계시진 않습니다만 다음의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황극천황 원년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백제 조사의 조자들이, "지난해 1월에 대좌평 '지적'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의 사신이 곤륜의 사자를 바다에 던져 넣었습니다. 금년 정월, 국왕의 모가 죽었습니다. 또 弟王子와 동모매(同母妹) 여자 4인, 내좌평 기미, 고명한 사람 40여명 이섬으로 쫓겨갔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641년에 죽었다고 한 지적이 642년 7월 22일에 백제 사신으로서 일본에서 향응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일본서기 기록의 어느 한쪽을 믿을 수 없게 되는데 여기서 한가지 사료를 더 추가해서 보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제의 금석문 중에 '사택지적비'가 있는데 백제 8대성 중 사(沙)씨 집안의 지적이 말년에 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비로서 이때의 지적은 바로 대좌평 지적을 의미합니다. 사택지적비 상으로는 이 비의 건립연대가 654년 9월로 나오니 적어도 지적의 사망은 654년 11월 이후가 되어야 하는 셈이 됩니다. 마침 제명천황의 즉위년이 655년이니 전해 11월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 지적의 죽음이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셈입니다. (참고로 황극천황과 제명천황은 같은 사람입니다. 모종의 이유로 인해 황극천황이 제위를 효덕천황에게 양위한 후 효덕천황이 사망하면서 다시 제위에 오른 케이스입니다.)
마침 삼국사기 기록도 의자왕의 독재적 행위에 대해서는 655년 1월 이후부터 등장하게 되니 이 역시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되는 셈이구요.
첫댓글 명쾌한 답변. ^^
논쟁을 기대했는데.. 아무 반응들이 없으니 심심(?)하네요. 쩝..
^^; 논쟁을 기대부터 하시면 어떡합니까... 맞는 말씀 했으니 다 동의한 반응이라고 보면 되지요~
하하.. 한단인님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해서리. +_+
경지.. ;;;;;
장래에 일어날 사태에 대비를 하다뇨?
그러고보니 왕자 41명을 좌평에 봉하고 식읍을 준 것은 백제 담로제의 연장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음..담로의 정의가 확실치 않으니 뭐라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담로의 정의를 우리가 말하는 봉건제와 유사한 것이라면 그 형태는 한 고조 유방이 각 이성 제후를 왕실 인척으로 바꾸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글을 통해 또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한단인 님은 수양제를 어떻게 보시나요?
왠 뜬금없이 수양제가 궁금할까요.ㅎㅎ
뜬금없는 답변 : 김갑수씨는 좋아합니다.. ^^;;
폭군 이미지 때문에 그러시나요? 수 양제의 경우도.. 당 태종 때문에 상당히 왜곡되거나 특정 잘못이 과하게 부각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요즘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폭군 인상이 강하게 들긴 하겠죠. 그런데 수양제 언급하시니 생각이 난건데.. 모후의 죽음이 정변의 계기가 된 것이라면 신라에서 이걸 물고 늘어졌을텐데 기록에 남지 않은 것을 보면 의자왕이 모후를 살해하고 정변을 일으키진 않은 모양입니다.
라이센스, 다물정신 님// 한단인님이 말씀하신대로 폭군 이미지 때문입니다. 기록을 그대로 따라가보면 전체적 맥락에서 수양제와 당태종은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부도덕한 집권, 대규모 토목공사,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과도한 외정 등) 한쪽은 폭군, 한쪽은 성군으로 불렸기 때문입니다. 의자왕 암군설이 떠도는 상황에서 그 정도는 예상하셨을 텐데요?
음..그런데 지금 올린 글에서 제가 치명적인 오탈자를 하나가 있는데 아무도 지적이 없으시네요. 수정할까 싶었는데.. 재미로 남겨두겠습니다.
으이그 지긋 지긋한 독감, 그리고 송년회 회식등 그야말로 몸이 만신창이라 잠시 쉬었습니다..그런데 한단인님의 좋은 글이 올라와 있군요..잘 감상했습니다.....치명적인 오탈자는 저도 발견이 잘 안되는데..어느 부분에???..다만 3천궁녀부분에서는 한단님도 속단을 하신 것 같습니다..딱히 3천 궁녀라는 말은 사료 어디에도 없지만 그에 해당하는 사료는 15세기에 쓰여진 한 시문의 내용보다도 삼국유사의 태종춘추공 내용중 백제고기에서 전한다는 타사암 건에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감기 조심하십시요....정말 지독합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좌평의직은 먼저 당나라와의 결전을 주장했고 달솔 상영은 먼저 신라와의 결전을 주장하는 것이 나오는데...의직은 이미 신라 김유신군과의 전투 경험이 있기에 적은 군사로 신라와의 결전을 기피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따라서 상영은 계백을 따라 황산벌 전투에 나섰으며 의직은 비록 사료에는 나타나질 않으나 그의 주장대로 기벌포 방어 전투에 나서 당군과 결전하면서 전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3천 궁녀를 언급한 것은 의자왕이 황음무도하다는 한 근거로 이용되어 왔기 때문에 그 숫자의 허구를 말하기 위해서 말했던 것입니다. 삼국유사 기록에서 언급하신 그 기록이 딱히 의자왕의 황음무도함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만..
음..그리고 글이 너무 기니 아마도 오탈자를 찾기 힘드실 것 같군요. 힌트는 마지막 단락의 황극천황 기사부분입니다. 곰곰히 읽어보심 뭔가 말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리실 겁니다. ㅎㅎ
혹시 이건가요? -->> 고명한 사람 40여명 "이섬"으로 쫓겨갔습니다. ^^;
삼국유사의 타사암건은 황음무도와는 거리가 먼 궁녀들의 절개를 미담으로 하는 내용으로 봐야 하겠지요, 그리고 황극여왕과 제명여왕이 동일인이라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대좌평 지적의 사망과 제명여왕의 등극과의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것과는 무슨 관련설이 있는지요??
신농님. 그 오탈자도 있긴 하지만 글 내용 자체에 치명적인 모순을 만들지는 않지요. 좀 더 찾아보심이..ㅎㅎ
'의자왕 암군설에 대해'라는 큰 줄기와는 상관없이 그냥 잔가지들에 대한 의문점 몇가지입니다. 큰 줄기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때문에 코멘트하지 않겠습니다. 1. 일본서기 황극천황조의 친위쿠데타 기록을 655년의 일로 단정한다면, 그 기록에 고구려 정변이 같이 나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2. 백제 멸망 당시 태자를 신라측 기록(삼국사기)에서는 효, 당측 기록에서는 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도 의자왕 4년 융이 태자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문사의 반란;과 관련하여 짚어 볼 만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번의 경우는 질문을 거꾸로 하셔야 할 듯.. 원래 고구려의 정변이 642년 10월에 일어났습니다. 백제의 정변이 왜 제명천황 원년이 아니라 황극 원년으로 기록된 것인지 의문이 일어야 할 듯 싶군요. 저도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2번의 경우는 제가 본문에 이유를 쓴 것 같습니다만..의자왕 4년에 모종의 이유로 맏아들 효가 아닌 3자인 융이 태자위에 책봉되었다가 의자왕 정변이 일어난 655년에 장자 효가 태자로 책봉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때문에 저는 656년 2월의 태자궁 건립을 그 맥락에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태자가 바뀌었다면 왜 당측 기록에서는 융이 태자라고 하였을까요?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오히려 삼국사기의 기사가 왜곡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태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융이었는데, 후에 웅진도독이 된 융에게 적대적인 신라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효를 태자로 만들었다는 뭐 그런;; 사실 저 또한 655년의 태자궁 건립을 마찬가지 맥락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그렇게 본다면 당측 기록에서 여전히 융을 태자로 적고 있는 점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음모의 냄새가 나는 것은 저만의 과민반응인가요? ㅎㅎ
3. 사비성 함락과 의자왕의 항복은 약 6일의 시차가 있습니다. 그리고 당측 기록에는 웅진방령 이식이라는 자가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했다고 합니다. 과연 의자왕의 항복은 자의적 결단에 의한 행동이었을까요? 4. 부여태의 전시 왕위참칭이 왕자간의 알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런 극단적인 반란은 최소한의 기반과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부여태의 경우는 완전히 안드로메다입니다. 결과적으로 역사에 보기드문 코미디가 되어버렸구요. 정말 부여태는 되지도 않을 짓거리를 한 바보일까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
저도 이 부분이 햇갈립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의자왕이 웅진방령군을 데리고 왔다고 서술하고 있거든요? 백제와 별다른 연고 없는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는 예식이 의자왕을 잡아 끌고 왔다고 되어 있는데 백제와 이해관계가 가장 높은 신라에서 도리어 이 기록을 평이하게 처리하니 저로서도 의문입니다. 4. 태의 왕위 참칭의 경우도 제가 본문에서 설명을 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안드로메다 짓이라고 하실만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태 역시도 효나 융과는 달리 어머니가 다르고 지지세력도 달랐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희진 씨는 방어 책임을 맡은 태가 실제 지위가 없이 방어 책임을 맡으려고 하니 부득이하게 선택한 것이라 하던데..이건 좀..저도 확신이 서질 않는 부분이긴 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왕조사관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의자왕이 이식에게 끌려왔다고 해도 의자왕을 주체로 기록했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이식이 의자왕을 끌고 와서 항복한 게 맞다면, 이거이거... 정말 장난 아닌데요;;; 백제멸망 원인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부터 재검토되어야 되는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