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호접지몽, 허접지몽이 될 위기에 처하다. (원래 그렇지 않았나? 6--;;;;;;;)
"알 수가 없군....."
클라우제비츠, 샤른호스트, 철가면, 루시퍼.... 이 많고도 많은 이름의 소유
주는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설마 내가 실수를 했단 말인가? 아니야. 그럴리는 없어."
.......뭔가 아주 무지막지하게 쏟아 퍼부어주고 싶은 데 생각이 안난다.
"분명 나의 행동은 투르를 구석의 구석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 네 바보짓 때문에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오밤중에도 피가 머리위
로 솟구친다.
"....이렇게 빠르게 회복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야..."
그거야 당연히...... 헌데 넌 왜 그것까지 시비냐!
"잘못 짚은 것인가.... 분명 그 사피 알딘이 베라딘의 화신이라고 생각했는
데..."
리치몬드 백작, 제피르펠컨 군사, 도둑, 팬드래건 국왕, 전직 천사장, 현직
돈많은 백수에다 암살자.... 쯧쯧, 이 많은 직함(?)들이 아깝다. 니네 아버지
가 아시면 하늘에서 땅을 치고 울거다! 어쩌다 너 같은 아들을 둬가지고...
게다가 너 니네 아버지랑 영혼도 같다며? 이거 가만 두고보면 팬드래건
왕가야말로 뭔가 씌인 것 같지 않아? 이올린 복수하겠다고 난리치다가 지
낭군님 지가 죽였지, 버몬트 광증부리다가 지 형 지가 찔렀지, 라시드란
녀석은 도둑이랑 결혼하겠다고 난리치다가 훗날 장미전쟁을 일으키는 원
인 제공했지, 거기다가 국왕의 이중생활이라는 다큐멘타리 찍을 일있냐?
도둑? 도오~둑? 니네 할머니 닮아가냐? 어머니의 명예를 지키라는 아버지
유언따위는 다 어디로 날려보내고 이 짓하고 있는 거냐!
"...아무래도 다시 한번 투르로 가봐야 할 것 같군."
왜 또! 또 와서 무슨 짓을 하려고!
저래서 무슨 일을 제대로 하기나하면 내가 암 말도 안해! 하는 짓마다 사
고를 치는 데다가 제대로 끝도 못 맺는 주제에! 네 놈이 사촌동생이자 처
남인 놈한테 국정을 맡겨둔 덕택에 온 나라가 미쳐버렸다고! 이제 어쩔거
야!
누가 저 놈 좀 말려봐~~~~~ 지그문트 박사! 당신 명색이 비스바덴놈이 남
긴 것들(?) 중 하나잖아! 저 놈 폭주 좀 막아보란......
잠깐만...... ............
...............................
훗훗훗.......푸하하하하하하!
그래! 가봐라! 빨리빨리 가라고!
투르로!
"우와... 이거 꽤 무겁다...."
"이걸 들고 휘두른단 말이지?"
"성기사라는 사람들이야 다 하는 짓인데 뭘."
"과연 에디트의 힘은 막강하군."
"이거 하나만은 그 바보 오라버니 칭찬해줘도 되겠어."
적군들의 시체사이를 지나다니며 수거해온 전리품들을 바라보며 술탄전권
대리인과 경님, 그리고 얼떨결에 술탄직속부대의 선봉장을 맡게된 소연은
쓸만한 무기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쓰읍. 탐난다. 엑스칼리버."
"바리사다랑 엑스칼리버랑 순수강도만 따지면 누가 더 나을까?"
"글쎄? 전에 본 메뉴엘에 따르면 엑스칼리버는 초필살기뿐만 아니라 살도
바로 레벨 5로 쓸 수 있게 해주던데?"
"아마 터프니스랑 샤프니스는 별 차이 없을 거야."
"으흠.... 그렇단 말이지...."
아무튼 지금 상황으로선 그림의 떡이라고. 침 닦아, 아가씨들.
"그나저나 이븐 시나."
"예. 폐하."
"살라딘님이 보급기지에서 털어온 물자는 얼마나 돼요?"
터, 털어온... 말인즉 사실이지만 어째서 이런 어투를 사용해서 살라딘을
그 사촌형이자 매형인 작자랑 동급으로 놓아야 하는 고야?
"클레이모어 50 점, 블릿츠 15점, 바스타드 소드 20점, 테슈브 30점과 회복
약....."
"그만그만. 이러다가 끝도 없겠네. 구체적인 거 말고 대략적으로 말해봐
요."
"......다수의 검과 방어구, 빔라이플과 고급라이플, 그리고 회복과 상태회복,
소울치회복에 쓰이는 소모아이템들이 있습니다."
"음, 멋져요. 놀라운 요약력이야."
"화, 황공합니다." (오옷, 당황하는 군!)
"성과는 꽤 있었네?"
"응. 바시아조크들이랑 스파히레이져들을 더욱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
거야."
"게다가 회복계 아이템을 빼앗다니 상당히 괜찮았어."
".....문제는 우다비나의 상인들이야."
"응? 왜?"
".....버몬트 놈도 그들을 소환했대."
"나의 제안은 여기까지요. 이제 당신들의 의견을 듣고 싶은 데?"
연회색 눈동자에서는 도무지 감정을 읽을 수 없다.
상인들은 자꾸만 눈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허리께를 힐끔거렸다.
빔소드. 어째서 투르의 예니체리가 팬드래건의 사자로서 찾아온 걸까?
그 해답을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 자꾸만 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는 것이 뭡니까?"
들이마시는 숨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하다. 오스만은 얼굴을 찌푸렸다. 벨
때 베더라도 얼굴이나 봐두지. 배짱좋은 장사꾼.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이지만 나름대로 도가 있는 법. 조국을 배신했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대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데?"
"..............."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면 오히려 할 말 없어지는 법. 오스만은 잠시 저
놈을 베어서 본보기를 보일까하는 생각과 아니면 대단한 놈같으니 한번
구워삶아볼까 하는 두 가지 생각 사이에서 고민했다.
"......향후 계속될 전쟁에서 팬드래건의 군수물자를 독점하게 해주지."
웅성웅성.... 다른 상인들은 부산을 떨고 있을 때도 그 하나만은 조용히 눈
을 감고 생각중이었다. 여기서 재촉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
"전쟁이 끝난 후에는?"
오스만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할 말은 해야지.
"투르북부의 상권독점이다. 우다비나의 상권은 독식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
니 황폐화된 라자스타나와 쿠에틀란을 비롯, 전후 10년동안 북부의 모든
상권을 보장해주지."
"........우리 모두가 하겠다고 나설 경우에는 어쩔 거요?"
슬슬 열이 오르고 있다. 나이로만 본다면 이미 40대중반에 들어선 중년남
자다. 오스만에게 반쯤 말을 놓는다고 해서 타박을 들을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오스만 누리파샤의 뿌리깊은 오만함은 그의 툭툭 던지는 듯한 말
투와 태도를 곱게 보아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속내를 내보일 수는
없지...
"그렇지는 않겠지. 투르의 척추를 담당하고 있는 우다비나의 상인이라고
해도 남부의 폐쇄적인 전통호족들과 종교계와의 연줄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일테니."
"으음....."
이로서 모인 상인중에서 대부분이 떨어져나갔다. 큰 돈을 벌지는 못하겠지
만 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심하면서.
그리고 남아있는 사람을 걱정했다.
"결국....당신 혼자로군."
"그렇게 되었구려."
"어쩌겠나?"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지지리 복도 없는 양반. 쯧쯧... 우다비나의 상인중에서도 그 규모로는 팬
드래건의 아미고상단과 맞먹는 거대상권의 우두머리인 일 사담은 도박을
결심했다.
"생각할 시간?"
오스만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위협적으로 되물었다.
"그렇소."
"......장사꾼의 천한 속성이 나오는 군. 계속 곱게 봐주니까.......!"
"당신 말대로 난 장사꾼이요. 이익없는 일에 매달릴 수는 없소. 당신들은
이번 전쟁에서 팬드래건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모양인데 얼마전 그대들
의 비공정이 술탄과 그 직속부대에 대해 파괴되었던 사건을 온 투르국민
들은 기억하고 있다오."
"................"
오스만의 전신에서 살기가 칼날처럼 날을 세웠다.
"내 생애 그렇게 장엄한 광경은 다시 못 볼 것이었지. 나중에 설사 팬드래
건이 전쟁에서는 이긴다고 해도 점령에도 성공할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소. 그것도 전후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 화려한 불꽃놀이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일까?"
그에 비해 이 아저씨는 너무나도 여유만만.
".......네 이놈....."
"마음대로 하시구려. 미안하지만 당신네들과 남부의 연줄은 내 손에 달렸
소."
"크윽....!"
애시당초 그를 택한 것은 그의 형이 원로 무슬림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앙그라교는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팬드래건의 주신교와는 달리 현실적이고
도 구체적인 권력, 즉 무력을 소유하고 있다.
군사로 쓸어버릴 것을 생각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 전력이지만 그런 식으
로 반감을 샀다간 안 그래도 몰려있는 처지를 만회해볼 기회가 없어진다.
이른 바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 다고 골치 아프게 된 것이다.
"아무튼... 형님 한분 잘 둔 덕에 투르에서 손꼽히는 부를 쌓기도 했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꼴도 우습구먼. 지나친 재물은 화를 부른다더니
꼭 그 꼴일세.."
나이에 맞지 않게 개구쟁이처럼 턱을 슥슥 문지르던 그는 약간은 약올리
듯이 빙그레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들도 마찬가지. 난 이제 당신들의 약점이 된 거요."
"......자꾸 입을 놀리는 걸 보면 그쪽에서도 그쪽 나름대로 바라는 게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거창할 것 까지야. 난 시간이 필요할 뿐이요."
".....무슨 시간 말인가."
"생각할 시간이든, 뒷구멍을 파놓을 시간이든 말이요. 난 상인이지 도박꾼
이 아니라서 하드 베팅에서 낭만을 느끼지는 않소."
침묵이 흘렀다.
"좋아. 하지만 허튼 짓은 용납하지 않아!"
"마음대로. 용납하지 않는다고 해봤자 날 어찌할 수도 없잖소?"
뿌드득- 오스만은 이를 갈았다. 어쨌거나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럼 가서 마음껏 생각하시지. 허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당신입에서 오케이라는 대답이 나와야 해."
"노력해보지."
오스만이 체질에 맞지도 않는 짓을 하느라고 난리를 치고 있을 무렵, 유나
는 간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앙~~~~"
"으헹~~ 내가 뭘 어쨌다고 이래~~~"
"쯧쯧, 이리 줘봐."
전쟁중에는 고아와 과부가 생기기 마련이다. 유나의 탈을 뒤집어쓴 세라자
드가 운영하고 있는 탁아소겸 고아원, 치료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린애들의 울음소리, 어른들의 비명소리, 상처에서 흘러나온 말라붙은 피
와 진물들은 끊임없이 사람의 청각과 후각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순간순간
마다 소울치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애가 애를 보니 일이 되냐?"
"으헹...."
애를 보는 데 소질이 없는 경님과 의외로 애를 잘 돌보는 유나의 모습을
보던 소연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미 소연의 품안에도 아이 하나가 막
잠들어 새끈새끈 숨을 쉬고 있었다.
"목욕도 시켰고.... 밥도 먹였고.... 트림도 시키고 잠도 재우고.... 이제 또
뭐가 남았냐?"
"기저귀랑 젖병소독."
"끄윽...."
"울 어무이도 날 이렇게 키웠겠지. 돌아가면 말 잘들어야지."
"그래도 엄마는 나 하나였다."
"나 키울때쯤이면 울 오빠 다 커서 지 알아서 돌아다닐때였지."
"........그러고보니 내 동생이 아들이라고 난 버려진 자식이었어."
"시끄러. 누가 여기서 자기 신상고백하라고 했어? 빨리 냄비나 가져와."
저녁식사시간이 되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끝내야 한다. 큰 덩치의 어른하나
가 욕조로 써도 될만큼 커다란 냄비가 갑자기 주방에서 탁아소 뒷편 공터
로 끌려나왔다.
"자, 활약해봐라. 해파리."
"여기까지 와서 꼭 그 별명을 써먹어야해?!"
"잔말말고. 어서."
"흑, 내 팔자야. .....아이스 미사일!"
우당탕탕탕! 욕조(?) 속으로 수십개의 얼음들이 와장창 쏟아졌다.
"파이어볼!"
직격으로 때려버리면 철이 녹으니까 조심해서 살살.....
얼음은 순식간에 물이 되었다. 그것도 뜨끈뜨끈한 끓는 물.
"자, 어서 기저귀 넣어."
"영차....!"
"세제 풀고."
"이 정도 넣으면 되겠지?"
"합성세제도 아닌데 뭘 그래? 팍팍 넣어."
그리고는 각자 긴 작대기하나씩을 들고 와서 쿡쿡 찌르고 젓기를 반복했
다.
"이거 스트레스 푸는 데 괜찮겠다."
"난 더 쌓인다."
"난 맨날 정신노동을 해서 그런지 이거 나쁘지 않은데?"
"넌 머리만 썼지. 우리는 머리도 쓰고 몸도 썼어."
"원래 hp 만 되찾으면 나도 당당히 한몫할 수 있을 텐데...쩝."
"하지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경님이는 힐 원드 못쓰잖아. 이 많은 환자
들에게 일일이 힐 걸어줬다간 아무리 hp 30000인 사람이라고 해도 못 견
딜걸? 엔젤 더스트는 뭐 공짠가? 세라자드님이 네 몸에 들어간게 다행이
라고 생각해."
"아아. 나도 마찬가지. 나의 정치력역량을 이런식으로라도 써먹을 수 있다
니 욕구불만이 많이 해소됐어."
'.......대체 평소에 무슨 욕구를 발산시키고 싶었길래?' (-_-;;;;;;;;)
그러나 저걸 입밖으로 냈다가는 수명이 단축되기에 아이들은 침묵했다.
쿡쿡, 휘휘, 쿡쿡, 휘휘..... 휘적휘적....
깨끗하게 된 빨래를 덜어내어 꽉 짜 옆에다 쌓아두고 다시 아이스미사일
로 물을 공수해서 파이어볼로 덥히려고 하는 찰나,
"일 사담이라고 합니다. 폐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신! 폐하께서 오실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잖소!"
"나름대로 급한 일이라서요. 무례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멀뚱멀뚱... 유나는 앞치마를 두른 모습 그대로 두 손을 허리에 짚고는
(이거 이 녀석 전매특허 자세다.) 낯선 남자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나이는 40에서 50사이, 그럭저럭 샤프한 눈매에 인상만 보면 날렵하고 머
리회전빠른 사람으로 보이는 데.....
첫인상은 합격.
"이름은?"
"일 사담이라고 합니다. 폐하."
"에? 당신은 버몬트에게 붙은 줄 알았는 데?"
"..........."
일 사담은 무례와 대범함의 사이를 오가는 태도로 젊은 여왕을 찬찬히 뜯
어보았다. 소문 속의 이미지와는 많이 틀리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있는 것
만으로 그 기품과 성력을 느낄 수 있다는 성녀라기보다는 어떻게든 잘못
되어가는 정국을 바로잡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는 철부지 혁명가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소문이란 와전되기 마련이지만......'
소문과 동일한 것이라면 그 꾸미지 않아도 환히 빛나는 미모뿐.
지금의 차림새도 그렇고 하는 행동이나 말투도 판이하게 틀리다.
게다가 저 긴장감없는 말이라니....
적에게 붙은 매국노를 보며 하는 말치고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단지 그와의 약속시간이 먼저였을 뿐입니다. 폐하."
".....그러고보니 원래라면 오늘 당신과 만나기로 했었군. 당신네들이 버몬
트에게 갔다길래 우리쪽 제안은 거절한 걸로 알았어요."
"성급하시군요. 폐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데 가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
까?"
"바로 그래서지. 우리의 칼은 당신 목에 닿지 않거든."
사담의 눈에 잠시 놀라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이런, 저역시 투르인입니다. 그렇게 쉽게 조국을 배신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못할 것도 아니지. 어쨌거나 여기까지 친히 오신 건 고맙네요.
잠시 내 천막안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여기 있으면 안되겠습니까?"
"음? 여긴 좀 그런데.... 잠깐만 기다려요."
그러고선 대답도 듣지 않고 뒤돌아서더니 아까하던 작업을 계속했다.
"뭐하냐? 아이스 미사일을 쐈어도 열번은 쐈겠다."
"아, 응."
우당탕탕!
"파이어볼!"
화르르르르르륵-!
"기저귀감 헹구는 건 잠시 부탁해."
그리고는 앞치마를 벗어 옆에 있는 소연의 어깨위에 걸쳐놓고는 휘적휘적
일 사담을 앞질러갔다.
"에구구....허리야....."
오스만과 만났던 막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허름한 곳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일 사담은 실내에 의자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민하는 일 사담에 비해 유나는 명확하고도 간단하게 그 문제를 해결했
다. 의자는 사담에게 놔주고 자신은 간이침대위에 걸터앉은 것이다.
"끄응- 전시중이라 이것저것 갖춰놓을 여유가 없어요. 양해해주길 바라네
요."
"괜찮습니다. 폐하."
"그나저나 무슨 할말이 있어서 왔어요?"
"예? 할말이라니요?"
"응? 버몬트에게 틀킬 것을 감수하고도 온 이유는 당신이 뭔가 할 말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요?"
"뭐, 말을 한다기보다는 들을려고 왔습니다."
유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으음.... 저울질을 시작해보려고 하는 모양이군요."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소리도 없이 일 사담의 등 뒤로 이븐시나와 케먈, 마르자나 등이 들어왔
다. 그러나 무언의 압력을 주려던 그들의 시도는 유나의 말 한마디로 깨졌
다.
"아, 인사들 나누세요. 마르자나씨, 이븐시나씨, 그리고 케먈. 이쪽은 우다
비나의 대상, 일 사담씨."
"........"
잠시 당황하던 마르자나를 비롯, 세사람은 고개만 가볍게 까닥였다.
"그리고 일사담씨, 저들은 총사령관각하 살라딘님의 충실한 부하들이자 제
직속부대의 대장입니다."
높임말? 일 사담은 보편적인 군신관계와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 현재의 상
황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던 것을 포기했다. 아까 그 한족의 소녀들과도 분
명 반말을 나누고 있었다.
술탄이자 칼리프. 기실 사피 알딘의 뒤를 이어 그녀가 정통성을 이어받게
된 것에는 그녀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는 하나밖에 남지 않는 왕가의 혈
통과 강력한 술탄을 모시고 싶지 않았던 귀족들의 꿍심덕택이었다.
분명 그녀의 존재는 지배자라기보다는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컸다.
사피 알딘의 가장 총애받는 신하이자 세라자드와도 연인사이라는 살라딘
이란 사내에 대해 말을 들었을 때도 자신도 그리 생각하지 않았는 가. 머
리가 좋은 사내라고. 민중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지만 권력을 쓰는 데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세라자드를 앞에 세우고 자신이 정국을 움직일 계
획이라는 게 눈에 뻔하다고.
헌데 그 살라딘은 보이지도 않고 세라자드가 최전방이자 현재 실질적 투
르의 수도인 카디스를 지키고 있다?
"저들은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
니다."
"음음, 걱정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단지 저야 폐하께서 어떤 조건을 내거
실 건지 그게 궁금할 뿐이지요."
"면세."
"...........예?"
"전후, 물론 확실하게 휴전조약이든 종전조약이든, 끝을 맺고 나서 이야기
입니다. 10년간의 완전면세입니다. 우다비나내에서는 그 10년동안 당신이
개척한 그 어떤 곳에서든지. 국내는 물론 외국과의 교역도 마찬가지."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남부의 물자가 버몬트에게 공짜로 넘어가는 것을 막아주십시오."
".....공짜로라는 것은...."
"넘어가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단지 공짜는 안됩니다. 지나치게 싼 값도
안돼요. 버몬트가 기분좋을 때면 아주아주아주 비싼 프리미엄을 붙여주셨
으면 하는 군요."
그 놈이 기분 좋을 때가 있을 것 같냐......--;;;;;
"..........."
오스만을 만났을 때처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10년간의 재원을 너무 싼값에 넘기시는 군요."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의 칼은 당신에게 닿지 않으니까."
씨익- 여왕의 웃는 모습을 보며 일 사담은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인생은 도박. 한번쯤 마음에 드는 쪽에 거는 것도 나쁘지 않아.
"하지만 팬드래건의 칼은 제 목젖바로 아래에 있지요."
"........"
"협상대표로 오스만 누리파샤를 보냈더군요."
"오스만!"
마르자나의 노성이 터져나왔지만 그 누구도 저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변절자의 이름에는 침을 뱉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까.
"내일 중으로 대답을 해줘야 겠는 데.... 그나마의 시간도 하드베팅은 사양
하겠다는 말로 얻어냈습니다."
"......도박이 체질에 맞지 않는 군요."
"하지만 하드베팅을 하는 체 하는 건 즐기는 편입니다. 배포가 큰 인물로
보여서 나쁠 건 없거든요."
"............"
무슨 소리를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어차피 표정을 감추는 데 익숙하
지 못한 자신이다. 유나는 노골적으로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냈다.
"원래부터 성격이 소심해서 이것저것 보험을 많이 들어두는 편이라서 말
입니다.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해도 말이죠."
"......계속 하세요."
"버몬트는 지금 오스만의 영향력을 믿고 남부 호족들과의 접촉을 시도하
고 있습니다. 오스만의 출신은 북부이나 같은 귀족이라는 유대감은 현재
북부 대부분의 호족을 숙청해버리신 폐하에 대한 불만이라는 땅위에서 쑥
쑥 자랄테니까요."
"그 놈이!"
"감히 교단을 넘본단 말인가!"
"제 형님이 원로 무슬림이신 관계로 덜미를 잡히고 말았습니다만.... 덕택
에 제가 그들의 약점이 된 셈이죠. 저 아니면 기댈데가 없으니까요."
"....또 죽어버린 오라버니의 후광에 기대야하는 경우가 생기는 군요."
"아무튼 저는 그들에게 길은 가르쳐줄 생각입니다."
"뭐라고!"
"당신 지금 무슨 망언을 지껄이는 겁니까!"
마르자나는 말대신 칼을 뽑아들었다.
유나는 당장이라도 칼을 휘두를 것 같은 마르자나의 기세를 손을 들어막
았다. 그리고는 일 사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길?"
"예. 길은 가르쳐줄 겁니다. 제 목숨은 하나이니까요."
".....길은 가르쳐준다?"
"예. 길은 가르쳐주겠습니다."
".......밀림의 길을 말이지?"
"남부의 숲을 가로지르는 길입니다."
무슨 동문서답인가.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이븐 시나의 눈동자에 경악이 스치고 케먈의 입가
에 미소가 떠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이거야 말로 도박입니다!"
"....재미있겠군요."
"무슨! 당신이 하겠다는 일이 뭔지 알고나 있습니까!"
"숲을 통과하는 길이라 이거지? 하지만 버몬트는 그 속에서 동서남북을
찾을 정도의 능력은 있어요."
"동서남북을 안다고 해서 숨어있는 맹수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쿡.... 하지만 당신에게 있어서 꽤 힘들텐데요? 그 나이에 줄타기가 쉽겠
습니까?"
"여차하면 줄에 매달리면 됩니다."
"....타이밍 계산을 잘 해야 할 겁니다."
"장사에서 타이밍빼면 남는 것 없습니다."
"......좋아요!"
짝- 박수와 함께 모든 것이 결정됐다.
"폐하!"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마르자나는 어리둥절해져 있고 원래부터 도박성이 강
한 계획을 좋아하던 케먈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이븐시나가 반대하고
나섰다.
"위험합니다! 저자를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배신이라도
한다면...."
"장사는 상대방을 믿기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라오."
".........."
"술탄께서도 그건 알고 계실 겁니다."
유나는 뒤로 돌아선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충성을 맹세한 적이 없으니 배신할 수는 없지."
"단지 거래가 끝난 것일 뿐."
뒷말은 일사담이 받았다.
"아직은 여유가 있으니 이러는 거지만. 버몬트놈도 꽤 불쌍하군. 이때까지
그라나다나 아미고처럼 자신에게 알아서 기는 상단밖에는 상대해오지 않
았을 텐데. 당신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일 사담."
"그렇습니까?"
그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허나 제가 보기에 버몬트대공이 불쌍한 진짜 이유는 폐하를 상대해야 하
기때문인 것 같습니다."
끼이이이이-
해는 이미 져서 어두운 밤, 잔뜩 몸을 웅크린 채 울부짖는 아지다하카의
모습은 말 그대로 마룡이었다. 공포, 힘..... 그러나 지금 아지다하카를 이곳
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여리디 여린 생명과 나누었던 과거의 기억.
이름을 지어주었던, 동생처럼 아꼈던,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중했던 것의
일부.
"저, 세, 세라님....여기 아니고 다른 데서 이야기하면 안될까요?"
"흐엥~~ 무서워...."
아지다하카의 먹이를 주려고 왔다가 덜컥 발목이 붙잡혀버린 소연과 경님
은 아지다하카의 머리 바로 앞에서도 멀쩡한 얼굴로 그릇을 들이밀고 있
는 세라자드를 보며 울먹거렸다.
아, 참고로 세라라는 것은 함부로 세라자드란 이름이 나오게 하지 않기 위
해서 미리 붙여둔 가명이다. 가명이 뭐 이따위냐고 따지지는 말아달라. 행
여나 세라자드- 라고 무의식중에 부르게 되더라도 중간에 말을 끊거나 잘
못 말했다고 변명하기 위해서니까.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데..... 들어주시겠어요?"
이런 밤은.... 이렇게 달조차 뜨지 않은 새까만 밤은...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두 남매가 서로의 체온에만 의지한 채 7일밤낮을 달리던 그때....
그 어둠과 공허의 공간 속, 미쳐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귓가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심장소리에 안도하며 정신을 놓았다가 붙잡기
가 몇번이었던 지...
"에, 예?"
"어쩌면....아니, 분명히 저는 아무것도 몰랐어요. 맨처음으로 무슬림의 칭
호를 받고 봉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곳으로
돌아다닐때조차.... 그렇게 막막하지는 않았지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이제 어떻게 누구를 보살피며 긍휼히 여겨야 하는 지, 아니, 그것은 무
슬림의 의무이지 술탄의 의무는 아닐텐데...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
는 거지......? 정말 새까맣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더군요. 살라딘님이 이렇
게 행동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면 그게 다였어요. 술탄으로서 무엇
을 해야 하는 지, 어떻게 해야 이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을 수 있는 지,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요."
"............"
"그래서 나는.... 살라딘님 말고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질 못했어요. 그 누구
도 믿을 수 없었고...."
".......세라님..."
"하지만..... 하지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목소리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듯.
"사랑하고 있어요. 한치의 의심도 없어... 믿고 있어요. 죽는 순간까지 변하
지 않을거라 확신할 수 있는 데.... 그래서.... 그 믿음 하나에 기대어 내게
는 어울리지도 않는 저 자리에 섰는 데....."
소연은 아차 싶었다.
본디 그녀의 자리인 것이다. 그걸 그녀를 제외하고 이렇게 휘두르고 있으
니...!
'실수였어. 유나 녀석이 바쁘니까 경님이랑 내가 그녀를 보살펴줘야 했는
데...'
"어째서..... 이렇게도 안도하는 걸까요...."
'에........?'
"남겨진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현 정책에 불만을 품
는 사람들이 터트리는 분통을 들으면서.... 저 원망을 듣는 게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내가 살린 사람들이 몽땅 죽어서 돌아왔는 데도 난 '다행이다'
를 반복하죠. 예전처럼 사람들이 내게 웃어줘서 다행이다. 미움받지 않아
다행이다.... 계속..... 이대로 지켜보기만 해도 되니까 다행이다..... 매 순간
순간마다 나조차도 몸서리치게 저급인 생각들을 하고 있어요! 심지어 어
떤 생각까지 하는 지 아세요? 이대로 영원히 굳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계
속 그녀가 내 자리에 있고.... 나는 계속 이대로 있었으면 좋겠어.....! 심지
어.... 살라딘님이 날 알아차리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는 것조차 때때로 안심
이 되요...... 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소연은 아연해졌다.
몰랐다.... 이렇게까지 두려워하고 있었던 건가......
가슴 한가운데가 쿡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다.
얼마나 불안했을 까....
살라딘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자비단에 없고, 낯설기 짝이 없는 술탄궁
에서....... 오직 혼자 남아........ 계속해서 자기 어깨위에 드리워진 짐을 생각
하며 잠들기가 몇날 몇밤이었을 까...
저 성문 밖으로 쳐들어오는 이국의 군대들을 지켜보며....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 까....
성녀라고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그렇게 떠들어도....
어쩌면 그것은.... 그녀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는 지도 모르는 데...
그때까지 말한마디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경님이 벌떡 일어났다.
"따라오세요."
그리고는 세라자드의 손목을 잡아끌어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겨, 경님아!"
허둥지둥 따라가는 소연은 아랑곳없이 경님은 무자비할 정도로 세라자드
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경님씨! 대체 어딜.....!"
"헥헥! 아이고.... 힘들다...."
"여, 여기는?"
요새의 전망대, 적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한 천루.
여기라면 세라자드에게도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언제나 힘들때면 몰래 여
기에서 바람을 맞곤 했으니까.
"보세요!"
"....예?"
"아래를 보시라고요!"
달이 없는 새카만 하늘이라도, 별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수한 별빛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땅 위의 불빛.
"각 군대의 천막을 비롯해서 탁아소, 병동에서 걸어놓은 불빛이에요."
소연은 경님이 낯설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진지하고 굳은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다름아닌 세라자드님이 해놓으신 거죠. 어둠은 아프고 약한 사람들을 불
안하게 만든다고... 기름낭비인지도 모르겠지만 달이 안뜨는 날은 허락해달
라고 하셨지요. 보이시죠? 저 불빛이 뭔지 아시겠어요? 저것은요.... 저것은
모두 세라자드님이 살려준 사람들이에요!"
"..........."
"당신이 저 불빛들을 만들었어요! 아시겠어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요?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요? 그럴지도 모르죠! 이 전쟁은 결국 누가 누
구를 더 많이 죽이냐이니까요! 하지만요! 이런........전 유나가 아니라 말은
잘 못하겠어요. 하지만요! 저 불빛들은 모두 나름대로 소중한 거예요! 아
무리 작아도, 아무리 약해도.... 저 꺼지기 쉬운 불꽃을 지켜온 것은 다름아
닌 세라자드님이에요! 모르시겠어요?"
".......내가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에....."
"저 역시 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죠."
"유, 유나아아아?"
경님과 소연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천루로 올라오는 계단밑에서
긴 생머리를 나부끼며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윽, 힘들어...."
"어, 어떻게 여길?"
"병사들끼리 간단하게 술주정이나 부린다길래 너희들도 부를려고 가봤더
니 없잖아. 대신 어디서 누가 무지막지 하게 고함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올라와봤다."
삐질- 경님이 노골적으로 헉, 망했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자, 유나는 피식
웃었다.
"말 잘하네, 뭘."
"에......그, 그게......"
"당신이 만든 불입니다. 그렇지요?"
버벅거리는 경님을 뒤로 제쳐두고, 유나는 세라자드를 향해 낮은 소리로
되물었다.
"이건........"
"할 수 있느냐를 물은 것이 아닙니다. 해낸 것은 당신이지요. 이 세상 다
른 누구도 아닌 당신입니다. 그렇지요?"
긴 머리카락은 바람에 휩쓸려 하나의 물결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
는 또다른 어둠.
"소중한 것을 지켜온 건 당신이지요.....?"
대답할 수 없었다.
"나에게 나의 방식이 있듯.... 당신에게도 당신의 방식이 있었을 텐데...."
유나는 세라자드보다 한뼘이상 키가 컸다. 그래서, 현재 세라자드의 육체
를 하고 있는 유나, 세라자드의 두 뺨을 감싸는 모습은 좀 이상했다.
"이제야 와서...... 미안해요."
눈물이 날 것 같다...
이런 일로 울어본 적이 없는 데....
"좀 더 일찍 왔으면..... 당신은 계속해서 당신의 방식을 지킬 수 있었을 텐
데.... 이제야 와서.... 미안해요."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에서 마침내, 눈물 한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손등 위에 떨어진 눈물을 너무나 낯선 듯이 바라보던 그녀는 마침내, 주르
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아니.......에요...."
"그래서 내 손으로 당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켜줄 수 있었을 텐데.... 우리
는 좀더 편안하게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에요..... 아니에요....."
자신보다 키가 작은 몸에 매달려, 울고 있었지만 조금도 우스꽝스럽지 않
았다.
"이제라도..........이제라도 와줘서 고마워요...."
춤추듯 흔들리는 불빛, 동료의 죽음을 딛고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 달리기
만 할 사람들. 되돌아보는 것도 멈춰서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 그저 오늘
을 사는 사람들.
살아남는다면 그것으로 족한, 소박하고 아름다운 일상따위 꿈에서만 존재
하는, 전쟁 속의 목숨이란 다 그러한 것.
특히나 용병이라면 더욱 그러한 법.
"앗! 폐하! 대체 어딜 가셨다 이제 오십니까!"
"기다리다가 술 다 식었습니다."
"난 어차피 술 못마셔. 알콜 체질이 아니걸랑. 그나저나 너희들 은인 데리
고 왔다."
"은인?"
"여기, 앉으세요. 세라씨."
후다다다닥-
술탄이 와도 그대로 주저앉아 농이나 던지던 용병들이 일제히 후다닥 일
어섰다.
"오, 오셨습니까?"
"이, 이런 누추한 자리에.... 야, 빨리 그 모포 어서 내놔!"
"후에?"
"악! 벌써 술냄새 다 뱄잖아!"
"어이어이, 딴 거 내놔!"
와장창창~ 울라블레~~~
한참동안 난리를 친 다음에야 세라자드가 앉을 자리가 (가장 편하고 튼튼
한 나무 상자위의 모포를 세겹씩 깐) 만들어졌고, 다른 곳에 있던 용병들
도 왠지 슬금슬금 이쪽으로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어쭈구리? 내가 올때는 옆눈으로 보던 것들이....."
"그, 그게 아니라...."
"세라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시까요!"
"아....얼마전에...."
"하하, 예, 저 망할 팬드래건 놈들에게 다리가 꿰뚫려서 왔지요. 부러진 창
끝이 그대로 남아있었는 데 그걸 고쳐주셨어요."
".......세라자....아니 세라씨는 의외로 비위가 강하시군요....."
"그, 그저 창을 빼고 붕대로 감아드린 것 뿐인데...."
"치료주문도 걸어주셨지요."
"제 아내도 전에 산욕열로 고생할 때 세라씨께서 도와주셨다고 하시더군
요."
"어머, 그러고보니 그 분은 이제 출산일이 가까워오는 군요."
"아, 저....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전에 사내자식을 하나 들쳐업고 왔던..."
"음.....아! 아브르의 아버지시군요!"
"예! 그때 제 못난 자식놈이 팔이 하나 날아갈뻔 했는 데 덕택에 병신되려
다가 말았습니다. 경황도 없어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어느새 세라자드를 중심으로 커다란 동심원이 그려지고 있었다.
약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유나와 소연일행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
보고 있었다.
"그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지켜보는 게 얼마나 엄청난 오해를 불러
오는 지 이제 알았어."
"응? 뭘?"
"나는 그녀가 바보라고 생각했어."
흠칫.
갑자기 터져나온 폭탄같은 발언에 소연과 경님은 저도 모르게 사색이 되
어서 주변을 살펴봤다.
"마법사로서는 궁극의 경지에 달한 주제에, 그렇게 두려움에 떨면서, 오직
남이 도와주기만 기다리다가 한심하게 죽은 여자라고.... 도무지 쓸모가 없
는 여자라고.... 그렇게 생각했지."
"야, 야...!"
"말이 심하잖아!"
"마냥 사람만 좋았지... 무언가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거랑은 인연이 없는
여자라고 흘겨봤어....... 갈 곳을 모르던 그가 정작 마음을 붙인 곳이 저런
여자라는 것도 한심했지.... 그를 좋아했지만.... 그를 끊게 된것도 마찬가지
의 이유야. 그 역시 중요한 순간에는 도망쳐버렸으니까... 뭐라고 변명해도,
동정 받을 여지는 충분하다 해도, 결국은 동정이니까. 이겨내지 못했으니
동정이 상한선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너 상당히 못됐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마도 내가 아직 사랑이란 걸 해보지 않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질질 끄는 걸 보면 짜증나. 단칼에 내치는 게 아니더라
도 금방 눈치채고, 금방 생각하고 결론이 딱 나와주는 게 좋아. 지지부진
하게 늪처럼 바닥을 모르는 감정따위는 언제나 딱 질색이었지."
"........너 나중에 누가 데려갈지 지인짜~ 궁금하다."
소연이 질려서 막 돌아앉을 때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응?"
"얀처럼 최강의 검사에게 강한 애정과 훈련을 받으며 단련된 몸도 아냐.
마르자나처럼 오빠같은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거칠고 힘들지만 마음만은
편하게 강해졌던 것도 아냐.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몸으로 오직 사람
을 구하고 싶다는 일념하나로 남부의 깊은 오지까지 가지 않은 곳이 없어.
아두스가 있었다고 해도 혼자였어. 살라딘이 나타났어도 그녀는 혼자였겠
지. 그를 사랑했지만 그의 방식과 그녀의 방식은 엄연히 다르니까. 바보같
이 마음만 좋은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기로 결심했을 때 얼마나 아팠을 까...."
"..................."
"이때까지 살려온 사람들이 다 무로 돌아가는 것 같아..... 얼마나 자책하
고.... 슬퍼했을까...."
왕족의 몸으로 무슬림의 이타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시간, 오라
버니를 돕기 위해 전장에 나가 적들을 섬멸했던 시간, 그리고 약을 찾기
위해 고생고생하며,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며 남부 일대를 헤맸던 시간.
"그 모든 시간들이 눈 앞에서 사라져가는 것 같아..... 얼마나 괴로웠을
까...."
"야............. 너........ 우냐.......?"
조그맣게 들려오는 훌쩍거림에, 소연은 기가 찼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자신의 한 손을 친구의 머
리위에 툭하니 올렸다.
"사라지지 않았어. 무의미한 행동따위는 없었어. 사라져버린 것 같던 시간
들은 분명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어. 그런 시간을 만든 건 그녀고,
그런 그녀가 술탄이었기에 네가 그 전권대리인으로서 투르를 구해낼 수
있었던 거야. 그걸 알잖아."
".................그렇....지."
"다 잘될 거다. 저 모습을 봐라."
용병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어느새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표정을 짓지 못하겠지.....?"
"하지만 세라자드님 역시 죽었다 깨어나셔도 일 사담의 말을 알아듣진 못
하셨을 거야."
"그거야 그렇지."
그 말에서 배어져나오는 묘한 자신감에 소연은 슬쩍 놀려보기로 했다.
"뭐.... 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저렇게 기품있고 고아하진 못할 거라는 데
동의하긴 해."
"내가 기파랑이냐! 이 회쳐먹을 해파리야!"
"으윽......흑흑흑... 고래면 제발 고래답게 바다에나 돌아가줘....왜 사막에서
설치는 고야.....흑흑흑..."
"그러는 너는? 어디 해파리주제에 습기도 없는 데서 방랑하고 있는 거야!"
"나야 살라딘님의 옥체를 한번만이라도 만져(?) 보겠다는 일념에...."
"훗! 나는 버몬트 자식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갈겨 보겠다는 일념하에다!
게다가 난 이미 살라딘이랑 스킨쉽을 나눠 봤지!"
"크윽! 억울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