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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합리적 사고
합리적 사고란 무엇인가?
오늘 주제는 이번에 책으로 나온 바로 그 주제입니다. 합리적인 생각으로 살아간다는 것, 최근 들어 이 주제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간 제가 쓴 글들이 거의 그런 방식의 사고를 요구하는 것들이라 묶어서 <합리적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라는 책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의 머리말에 썼듯이, 가장 높은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 아래 바른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지식도 중요하지만 진리와 지식 사이에 반드시 합리적인 상식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바른 지식이 있어도 상식이 없으면 그것을 잘못 사용할 수도 있고, 잘못 이해할 수도 있으며, 잘못 적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예리한 칼을 아무데서나 휘두르는 격이기 때문에 위험하기도 합니다. 항상 상식적이고 말이 되게, 이치에 맞게 행동하고 실천할 줄 알아야 진리도 지식도 더욱 돋보이는 것이겠지요.
합리적인 사고, 간단히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요즘 흡연자들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논란이 많은데, 나라에서 담배를 만들어 팔면서 흡연권은 인정하지 않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구역은 점점 좁아지니 볼멘소리를 하는 흡연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길에서 담배를 물고 가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요, 이런 사람들을 보는 비흡연자들의 불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거리 흡연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까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합법적으로 산 일종의 기호식품이고, 법적으로 허용되는 공간에서 피운다는데 문제될 것이 무어냐 하는 흡연자들과, 그래도 간접흡연을 우려하는 비흡연자들의 의견이 팽팽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흡연자인 어떤 분이 그런 의견을 반박하면서 인터넷에 이런 글을 썼더군요.
"거리의 흡연자들에게... 제가 길을 가면서 콜라를 마시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겠지요. 하지만 콜라를 뿌리면서 간다면 어떨까요??”
어떻습니까? 말 되죠? 합리적입니다. 담배는 혼자 피우면 아무도 뭐랄 수 없겠죠? 연기가 날리니까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썩은 뱃속 폐까지 들어갔다 나온 연기를 우리가 왜 마셔야 합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조금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고, 거리라는 공공의 공간에서의 흡연을 반대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알밤이 한 포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빠른 시간에 공평하게 반반으로 나눌 수 있을까요?
저울은 없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긴 사람 맘대로 한다고요? 그런 것 말고요.
일일이 개수를 세서 나눈다고요? 크기도 들쭉날쭉하고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정답은, 한 사람이 나누고 다른 사람이 고르는 것입니다. 나누는 사람은 상대방이 더 많은 것을 가져갈까봐 손해를 안 보려고 최대한 똑같이 나누겠지요. 다른 사람은 많아 보이는 것을 가져가면 됩니다. 이렇게 서로 불평불만이 없게 하는 합리적인 생각, 그런 방법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고, 목회자가 필요하고, 그런 이웃, 친구, 가족,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찾으시고 부르십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도 사고 현장을 고려해 누가 더 과실이 많은지 몇 대 몇으로 잘 판단하는 것도 합리적인 사고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일 중 하나인데, 억울한 사람이 없이 공평하게 재판해야 하는 것처럼 바른 판단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합리적인 사고입니다.
생각하기 힘들어하는 현대인들
이런 주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지난 번에 사랑침례교회에서 열린 <요한계시록 바로알기> 출간 설명회 후에 한 어르신이 새로운 책의 아이디어라고 메모한 종이를 주시면서부터입니다.
이분은 자신이 너무나 궁금하고 혼란스러운 주제라고 하셨는데, 바로 요즘 사람들의 인격과 성격, 판단력, 사고력, 행동 등이 심하게 흐트러져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사람들의 성품이 함량 미달이 되어가고 성격은 비정상적이며 이해력이 떨어져 지적 활동을 어려워하고, 의롭고 선한 생각은 사라지고 사탄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으로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나 도무지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시위하듯 전달하며, 아집으로 똘똘 뭉쳐 제대로 사고하고 구분하는 일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 정말 공감합니다.
각 기업들은 이른바 진상고객들을 처리하기 위해 늘 골머리를 앓습니다. 전문 용어로 블랙 컨슈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한 번 문제를 삼으면 항의를 떠나서 인터넷을 통한 다양한 공격으로 제품이나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히기 때문입니다. 전화로 텔레마케팅 업무를 하는 분들의 감정노동 스트레스는 극에 달합니다. 부유층을 상대하는 호텔이나 사교 클럽 등에서는 서비스직 사람들이 그들의 스트레스를 다 받아줘야 한답니다.
관공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까 악성 민원으로 몇 달째 관공서를 마비시킨 남자가 결국 공무집행 방해죄로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습니다. 8개월 간 2900건, 매일 12번 정도 주차를 단속해 달라, 뭐를 처리해 달라 등등 그 일대를 다니면서 계속 민원을 넣었던 것인데, 대체 얼마나 생각이 비이성적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기자가 심경을 물으니까, 그렇게 많이 민원을 넣은 줄은 본인도 몰랐다고 합니다. 거의 정신줄 놓고 사는 거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티 세력도 문제지만 내부에서 나가서 비방하는 사람들이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다 사람이니 그렇긴 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나 기독교 자체가 배타적이고 꽉 막혔다는 것은 사람들의 오해입니다. 성경과 기독교는 모르는 이들이 보면 답답하지만 알고 나면 가장 합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합리적인 하나님의 진리를 안다는 이들도 불합리한 판단을 하고 바른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원인은 무엇일까요? 분석은 여러 방향으로 할 수 있지만, 일단 성경적 세계관이 아닌 진화론적 세계관이 세상과 교육을 지배하고 있고 은연중에 많고 적게 그것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라도 바른 판단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적 공리주의와 성경적 합리주의
모든 사람에게 이득이 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이로운 방향이 무엇인지 모색하는 것을 '공리주의'라고 합니다. 공공의 이득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합리적인 사고가 없이는 공리주의적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사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는 공리주의에 대해 집요하게 생각해보고 토론하는 강좌의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그 강의는, 정답은 하나가 아니지만 가장 정답에 가까운 합리적 생각을 모색하는 과정 자체에 중점을 둔 수업입니다. 예컨대 난파된 배가 너무 무거워서 누군가 바다에 뛰어들어야 나머지가 살 수 있다면 누가 내려야 할까요? 40대, 50대, 60대, 70대가 있다면, 살 만큼 산 노인이 내려야 할까요, 아니면 어른 공경 차원에서 젊은 사람이 내려야 할까요?
우선 장유유서로 연장자부터 살린다고 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40대 남성은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럼 얘기가 달라지겠죠. 그래서 50대를 지목하려고 보니 그는 배를 운전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기준만으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체적인 상황을 고려해 판단하고 결정해서 불만이 적도록 하는 것이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지만 최대 다수의 최고 행복을 찾는 과정입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이 강의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유독 금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성경적 관점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의 해답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말하는 학생에게 "일단 하나님은 빼고 이야기합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토론에서 제외시키려는 것은, 다른 악한 의도가 있다기보다 더 이상 토론의 진행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토론하는 정의보다 훨씬 강력한 하나님의 공의를 통해 죄와 도덕이 극명하게 드러나 해결책과 나아갈 방향이 선명해지고 말 테니까요. 많은 토론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마이클 샌델처럼 밥줄 끊길 사람이 많습니다. 결론이 금방 나기 때문에 변호사부터 판사까지 다 굶어 죽습니다. 원래 법이라는 게 간단한 건데 점점 복잡해져서 소송 천국이 되어갑니다. 진짜 판단 기준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빼면 우리는 시체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강의를 들어도 참 쓸데없는 이야기만 자꾸 되풀이 한다 싶습니다. 어떤 좋은 아이디어도 결국 인본주의적인 판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왜 답이 있는데 자꾸 토론하고 빙빙 돌리냐는 거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 중에 배에서 내려야 하는 사람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겠지요. 아무리 얼마 못살 노인이라도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일단 살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모든 판단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 먼저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특정 민족을 다 죽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일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여호와가 피와 제물을 원하고 전쟁을 즐기며 살인을 지시하는 무자비한 신이라고 욕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죽어도 천국에 가니 오히려 부모들도 다 잃게 되는 그 난리 통에 살아남는 것보다 낫습니다. 또한 죽이라고 명령하신 대상은 악한 사람들로, 메시아의 혈통을 방해하는, 오염된 유전자를 지닌 자들이었기 때문에 명령은 정당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은 I AM THAT I AM, 즉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며 그분 자체가 존재 자체이고 법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불리한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공의는, 피를 통해 죄 없는 존재가 희생해야만 채워집니다. 그 공의가 채워져야만 인간에게도 약속이 정확히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는 것에 불공평한 일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달리 약속을 어기지 않는 존재이며 차원이 다른 분입니다. 성경 말씀의 오묘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차이를 모릅니다. 그래서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공리주의에 모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합리적인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가치와 개념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성모독하고, 종교의 자유를 말하며, 인간의 권리를 우선시하면서 하나님을 제외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적인 법에만 의거해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합리적 사고는 세상 법보다 더 큰 범주의 법인 성경적 기준, 하나님의 공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판단의 공의를 행하는 것이 희생물보다 더 {주}께서 받으실 만하니라. (잠 21:3)
이처럼 성경에서 '정의'는 스무 번 정도 '판단의 공의'라는 말과 함께 등장합니다. 이 말씀은 주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나타낼 때도 쓰이고, 사람들 사이에서 바르게 행해야 할 조건으로도 사용됩니다. 사람들의 정의는 최대 다수의 최고 행복이지만 하나님의 정의는 그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날 과학도, 법률도, 정의와 도덕도 모두 결론을 못 내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노리는 게 이겁니다. 끝까지 빙빙 돌고 맴돌기만 하라는 것이죠. 해답에 도달하지 말고 열심히 탐구만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신자들의 큐티가 이렇고 설교가 이렇습니다. 뭘 딱 가르쳐 주는 게 없어요. 그냥 종교의 틀에서 서로 토론하면서, 이렇게 하면 복 받는다, 교회에서 살아라, 목사님 말만 잘 듣고 죽도록 충성해라... 등등, 그 안에서 종교적인 것들을 다루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결론이 이미 났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공부하는 것이고, 그들은 결론을 찾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니라. (전 12:13)
저도 책을 쓰지만 이 말씀 직전에,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몸이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진화론자 리처드 도킨스처럼 자연의 비밀을 알겠다고 책을 자꾸 쓸 필요 없이, 마이클 샌델처럼 공공의 행복을 위한 답을 찾는다고 강의 자꾸 할 거 없이, 우리 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는 겁니다. 이것이 사람의 의무이고, 그렇게만 하면 모든 해답이 합리적으로 도출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합리적 사고방식 5가지
합리적인 사고는 성경에서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요? 성경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 합리적 사고를 주문하고 있지만 그중에서 몇 가지 개념을 단어별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들으라(hear)
합리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전해지는 정보를 잘 분석하고 정확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귀 없는 사람은 없는데도 성경은 13번 정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듣는데도 바른 판단을 못하면 그건 귀가 없느니만 못한 것입니다. 13하면 생각나는 숫자가 있지요. 13구절이나 성경에 '없음' 표시가 있어서, 열세 번이나 그것을 보는데도, 사람들은 그 부분이 고의로 삭제되었다는 말도 귀를 닫고 듣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글자로 되어 있는데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지요. 성경이 책으로 구성돼 있는데도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합니다. 말씀이란 최초로 하나님께서 친히 숨을 불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글자로 옮기기 전까지는 소리가 먼저 나고 누군가 들어야 옮길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듣지 않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대적하여 걸으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 죄들에 따라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리리라. (레 26:21)
눈은 3대 정욕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위험하고, 실수가 많습니다. 착시현상을 일으켜 어떤 사물을 다른 것으로 오인해 두뇌에 저장하기도 하고, 귀보다 취약점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눈을 통해 많은 죄가 들어오고 오해가 생깁니다.
귀는 오감 중에 가장 최후까지 기능을 한다고 합니다. 임종할 때 눈을 감고 돌아가신 것 같아도 숨이 아주 끊어지기까지는 귀가 열려 있어서, 고인을 두고 벌써부터 장례 이야기에 관을 얼마짜리를 쓸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지 못한 분이 가실 때에는 마지막까지 귀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혹시 듣고 돌이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마지막까지 귀 있는 자를 찾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의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겨듣고 심사숙고할 때 사람은 구원을 받고 자기를 고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위해서는 먼저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처럼 믿음이 들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믿음은 들음에 의해 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오느니라. (롬 10:17)
믿음은 율법의 행위보다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써 성령님을 받는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 (갈 3:2)
물론 믿음에 대해 귓등으로 들어서 성령님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귀 기울여 들어야 믿음이 오고 성령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 있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도 귀가 닫힌 사람은 마음이 돌같이 단단한 사람입니다. 귀를 열 때 바른 생각과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가 있습니다.
2. 보라(behold)
흔히 이성을 잃으면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눈은 자기 감정에 따라 잘못보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착시현상을 테스트하는 많은 그림들을 보셨을 겁니다. 시각적 착각을 이용한 트릭아트도 유행이고, 과거에 매직아이라는 것도 유행했었습니다. 눈의 착각을 이용한 많은 마법도 고대로부터 존재해왔고, 지금도 컴퓨터 그래픽 등 눈을 의심할 정도로 정교한 비주얼 효과가 매우 많이 이용됩니다. 봐도 본 것이 아닙니다.
음식점 같은 곳에 전시된 음식 모형들은 실제보다 더 그럴 듯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고사진이나 영상에 나오는 음식들은 사실은 전혀 먹을 수 없는 것들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싱싱하고 맛있게 보이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죠. 우유거품은 입술 위에 더 많이 잘 묻도록 다른 것이 첨가돼 만들어지고요, 아메리카노 커피는 물에 간장을 풀어 더 깔끔해 보이게 하는 등 원래 음식과는 다른 물질들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그걸 보면서 입맛을 다시고 시장기를 느끼는 것이니 우리가 보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각적 맹점을 이용해 무엇이든 조작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왝더독(Wag the dog, 1998)>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꼬리다 몸통을 흔든다는 뜻으로, 주객이 전도된 상황을 말합니다.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이 영화는 미국 대통령의 성추문에 쏠린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아무 잘못도 없는 만만한 나라 알바니아가 미국에 테러를 가하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연기자를 동원하고 컴퓨터 그래픽을 집어넣어 보도하고, 여론을 부추겨 전쟁 위기 상황을 꾸며내 시선을 돌리는 과정을 풍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눈속임을 통해 얼마든지 사람의 감정을 조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보는 것은 대부분 사라질 것들이며 가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자꾸 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라... 이것은 물론 see나 look이 아닌 behold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731회나 나오는 이 말을 NIV 같은 현대역본들은 하찮게 여겨 거의 삭제했는데요, 이것은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주의 깊게 눈 여겨 보라는 뜻이며, 주의를 환기해서 잘 살펴보라는 뜻이지요. 중요한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하나님은 보라! 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 맨 끝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현대의 미지근하고 생명력 없는 개신교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의 의미는 '사람의 권리'라는 뜻인데, 주님보다 사람이 높아진 이 시대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풍요롭고 부족함이 없는 듯하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빈 깡통 같은 시대입니다.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계 3:17)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을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또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또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볼지니라.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18~19절)
현실을 제대로 볼 줄 모르고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안약을 발라 제대로 보라고 하십니다. 속된 말로 동태눈이라는 것이 있죠. 사전에도 엄연히 등재된 말인데요, 흐릿하고 생기가 없어 보이는 눈을 이르는 말이지요. 영적으로 동태눈이 되면 현실도 대안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거의 오감을 동원해서 분별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기를 요구하시는 것 같습니다. 듣는 것... 청각 나왔지요, 보는 것... 시각 나왔습니다. 맛보는 것도 있습니다.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시 34:8)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 이것은 너희가 그 젖으로 말미암아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께서 은혜로우신 것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벧전 2:2~3)
주님의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라고 하십니다. 또 주님의 은혜로우심을 맛보고 깨달았다면 말씀의 순수한 젖을 사모하라고도 하십니다.
오감 중 만져보는 것, 촉감도 방법입니다. 그러나 직접 만져보고 아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고, 믿는 것이 더욱 복된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한 제자 도마는 직접 만져봐야 믿겠다고 말합니다(요 20:25). 그러나 몸을 만져 확인하게 해주신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9). 믿음이란 확인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만져볼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한편 오감이 있으나 그것을 가지고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존재도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그것은 바로 이교도들의 우상입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들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그것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말도 하지 못하느니라. (시 115:4~7)
그런데 이런 우상뿐 아니라 사람도 이런 돌덩이와 같이 오감을 느끼는 기관이 있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도 우상들과 같으며 우상들을 신뢰하는 모든 자도 그와 같도다. (8절)
우상을 만드는 자들, 사람이 만든 우상을 신뢰하는 자들도 모두 돌처럼 아무 기능을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는 전혀 분별력이 없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신뢰하는 자체가 형벌이 된 것입니다. 그들의 양심은 뜨거운 인두로 지진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서 돌덩어리 우상처럼 아무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사고를 하려면 먼저 우상을 떠나 하나님이 진리를 더듬어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오감을 통해 잘 판단해야 합니다. 물론 이 오감의 활용은 모두 비유적 표현입니다. 잘 판단하고 분별하며 바르게 사고하라는 뜻입니다.
3. 맑은 정신(sober mind)
sober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술에 취하지 않은 말짱한, 냉철한, 맑은...이라는 뜻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이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요, 개역성경은 이것을 번역하지 않고 건너뛰거나 대충 번역해 놓았습니다.
연로한 남자들이 맑은 정신을 가지며 신중하고 절제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에서 건전하게 하고 (딛 2:2, 흠정역)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딛 2:2, 개역)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하지 않거나 '지혜롭게' 등으로 알아서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 맑은 정신이라는 말은 참 중요한 것입니다. 요즘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지고 사회가 복잡해져서 정신 흐릿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합리적인 사고는커녕 툭하면 들이받습니다. 자기 말만 하고 상대방이 하는 말을 분별하지 않으며, 기준도 흐릿하고 교리도 흐릿하고 성경관도 희미합니다.
교회의 리더와 집사 등의 적임자를 말할 때도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일은 맑은 정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돈을 잘 다루어야 하고 유혹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모든 일을 공평하게 잘 판단할 수 있어야 복잡한 인간 세상의 축소판인 교회 공동체를 잘 이끌어가고 분쟁을 잘 조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영혼을 다루는 목사는 정말 정신이 맑아야 합니다.
맑은 정신은 반드시 바른 판단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인데요, 잘못된 판단을 할 때도 명확한 기준과 판단에 의해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판단을 한다 해서 모두 정신이 흐릿한 것은 아니지요. 거짓된 것을 믿거나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해 지옥에 가더라도 맑은 정신으로 자기 자유의지를 활용해 결정해야 덜 억울하게 자기 권리를 다 쓴 것이므로 맑은 정신은 모두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결정을 하든지 그것은 각자의 몫이며 그 길은 하나님이 존중하십니다. 그런 중대한 선택은 바른 것이든 그릇된 것이든 혼미한 상태에서 해선 안 됩니다. 물론 진정으로 맑은 정신은 결국 바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분별력에 관한 문제이고, 일차적으로는 말짱한 상태에서 결정하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신경한 사람은 참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다짐을 받아놓고도 그걸 그 사람이 과연 제 시간에 약속대로 할까, 늘 불안한 사람이 있지요. 지하철에서 남의 발을 밟을 수 있지요. 하지만 자기가 밟은 줄도 모르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것은 정말 곤란합니다. 항상 정신을 또렷하게 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정말 험합니다. 맑은 정신을 갖는 것은 스스로를 위해서도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4. 깊이 생각(consider)
무언가 판단하려면 생각을 깊게 해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귀찮아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안 한다기보다 불필요한 부분을 깊이 생각하고 꼭 해야 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할까요... 예컨대 자기 영혼과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인 "나는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생각은 간단히 저절로 생겨서 왔다가 소멸되든지 윤회하든지 어디든 가겠지 하고 미뤄두면서도, 인터넷 쇼핑을 할 때는 몇 백 원 더 싼 곳 찾는다고 심각하게 비교하며 클릭을 망설이고, 괜히 손해 볼까봐 엄청나게 고민해서 물건을 구매하고는 돈 벌었다고 좋아합니다.
그런 하찮은 돈 몇 푼 손해 보는 것이 그리 중요합니까? 한 번뿐인 인생이라는 유일한 기회에 해결해야 하는 목숨의 문제, 내세의 문제를 그리 단순히 처리하면 그 손해가 얼마나 막대한 것인데...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안타깝다는 표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숨이 막히는 답답함과 무서운 부담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성경은 인간의 마지막 끝을 깊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들의 마지막 끝을 깊이 생각하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으리요! (신 32:29)
그런데 개역성경은 이 consider라는 단어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옛날 곧 오래된 시대의 여러 해를 깊이 생각하였사오며 (시 77:5, 흠정역)
이때 consider는 고찰하고 심사숙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역성경은 그냥 '생각'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옛날 곧 이전 해를 생각하였사오며 (시 77:5, 개역)
그러나 그냥 생각이 아니라 깊이 따져보고 생각해야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형제들 곧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아, 우리의 신앙 고백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히 3:1)
그런데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들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들을 깊이 생각하지 말라. (사 43:18)
상반되는 말씀 같지만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기억하라는 뜻이겠지요. 우리는 지나간 일을 돌아보고 발전적인 미래를 설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는 대상을 혼동하거나 뒤바꾸면 안 됩니다. 다가오지도 않은 일을 너무 걱정하면서 갖가지 가능성을 깊이 고민하고, 또 이미 엎질러진 상태인 지난 일을 자꾸만 생각하면서 자괴감에 빠지고 패배의식을 가지면 곤란합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3요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현재가 없으면 경험될 수도 만들어질 수도 없습니다. 현재를 잘 고민하면서 살면 좋은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그것은 시시각각 과거가 되면서 후회 없는 지난 시간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과거지향적인 소심함이나 과도한 미래지향적 염려증보다는 현재와 오늘, 바로 지금에 충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고 하겠습니다.
5. 판단(judge)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로운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 (요 7:24)
'합리적인 사고' 하면 제일 먼저 분별력, 통찰력 등의 말이 생각날 겁니다. 이런 모든 바른 사고의 목적은 결국 판단과 선택을 위한 것입니다. 사소한 결정부터 중대한 결정까지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그런 선택의 과정에서 분별력이 있어야 불이익을 당하지 않습니다. 가장 큰 불이익은 영원의 시간을 지옥에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이 중요한데요... 판단력에 대한 다음 글을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배우자의 선택, 거주지의 선택, 진로와 직업과 전공의 선택, 신앙의 선택 등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인데, 이런 선택은 반드시 믿음에 의해 좌우된다. 즉 믿음이 가는 쪽으로 선택하게 되므로, 믿음이 재앙과 불행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믿음은 결심을 낳고, 결심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삶에서 믿음만큼 중요한 게 없다.
따라서 진실한 것, 사실적인 것, 합리적인 것을 믿어야 하고, 거짓과 위장과 과장과 허상과 불합리한 것을 믿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해득실과 원근친소에 따라 아전인수식으로 절묘하게 포장된 언어가 난무하고, 시기 질투의 마음이 각색한 언어 때문에 혼동이 되어 믿을 것을 안 믿고, 안 믿을 것을 믿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믿음은 가장 신중하고 가장 지혜롭게 이루어져야 하며, 믿음 중에서 불신과 맹신이 가장 경계할 대상이다.
정말 맞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것은 목사의 이야기가 아니고 '상사'의 이야기입니다. '상사'란 불교의 '종정'에 해당하는 원불교 최고 지도자인 종법사를 지내고 퇴임한 사람에게 붙이는 칭호랍니다. 원불교 이광정(75) 상사의 <믿음대로 산다>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기독교 신앙서적과 같은 이 책의 제목과 위와 같은 내용을 보면 믿음이 가는 쪽으로 하게 되는 선택을 통해 낳는 결과라는 것이 바로 심판임을 그들도 알고 있다는 것인데, 그런 선택들이 결국 극락이든 지옥이든 데리고 가는 것임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믿느냐, 즉 어떤 가치에 자신의 소망을 두는가에 따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인데 틀린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들의 문제는 "선택의 권한이 없는 부분까지도 선택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를 만들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는 불변하는 영원한 정답이 있는 것인데, 다른 가능성들을 스스로 만들어 두고 참 신과 견주어 선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또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행위로 극락(?) 같은 곳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선행이나 아름다운 삶을 통해 갈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중대한 결정일수록 선택의 가짓수는 적어집니다. 우리가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만 뭘 먹어도 큰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누구와 결혼할까 생각하면 고민이 많이 됩니다. 선택을 잘못하면 인생이 힘들어지지만, 그래도 죽진 않지요. 하지만 삶과 죽음이 개입되면 문제는 다릅니다. 중대함의 정도에 따라 선택의 폭이 점점 좁아지지요. 창조와 진화, 과학이 아무리 복잡하고 발달하고 드넓은 우주가 발견돼도 태초로부터 지금까지 선택은 딱 두 가지 중 하나라는 것이 항상 놀랍습니다. '주관식'도 아니고, '4지선다형'도 아니고, OX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화 학설이 발전해도 결국은 창조 아니면 모두 다 진화의 편입니다.
왜 이런 구도가 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한 가지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 몰라도 그건 알아야지요. 차라리 개역성경 가지고라도 말씀은 한 가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정답이 개역성경이라고 우긴다면 그건 잘못 알고 잘못 믿어서 그렇지 하나님 믿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 말씀, 저것도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믿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하나님은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니며, 우리를 구원해 줄 힘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따라 심판하겠다면서 자기 말도 보존 못하는 신이 어떻게 우리를 부활시켜서 고통 없는 존재로 만들어 환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로 데려가 영원히 살게 해준다는 것입니까? 차라리 옥장판 팔아서 부자 되게 해준다는 피라미드 기업의 말을 믿겠습니다.
이렇게 참 신이 아니면 모두 가짜인 것이 이치입니다. 가장 중요한 결정에는 답이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로 판단해서, 점심 메뉴 고민하는 것만큼도 신과 심판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여러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판단의 대상 자체를 잘못 설정한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과 판단을 막으려면? : 합리적인 사고가 아닌 것
1. 다수결과 정답 사이
살다 보면 친구와의 갈등, 단체와 단체의 갈등, 생각의 차이 등에서 선택할 때가 다가옵니다. 구원 문제, 교리 문제, 성경 문제, 배교 문제면 오히려 해답을 얻었으니 고민할 필요가 없는데, 형제간에 생기는 이견이나 다툼 등에는 섬세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가 필요한 일에 지식을 들이대고, 지식이 필요한 일에 불필요하게 지혜를 동원하고 감정을 섞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때는 냉철하게 무엇이 쟁점인지, 무엇이 요구되는 시점인지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분쟁이 생기고 판단으로 결정해야 할 일이 생길 때, 다수는 옳을까요, 그를까요? 얼마 전 글에서 다루었듯이, 다수는 사소한 문제를 대략 맞히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퀴즈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나 방청객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어렵고 엉뚱한 문제는 전화 찬스보다 방청객 찬스를 쓸 때 더 잘 맞힐 수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천 개 구슬의 개수도 수만 명의 시청자들이 어림잡은 수치를 모두 평균 내보니 놀랍도록 근사치에 가까웠다 합니다. 오차는 불과 0.47%였습니다. 돼지의 무게를 맞추는 진화론자 골턴의 실험에서도 모든 이들의 평균을 내보니 매우 가까운 값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미천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의견을 모을 때 대략적으로 근사치를 구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투표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의견이 대립할 때는 투표를 통해 많은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민심이란 모두 단 한 표만을 행사하지만 여당과 야당, 소수정당에 골고루 힘의 균형을 맞춰주는 신기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것이 다수결의 힘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문제는 이미 정답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물어 다수결로 하면 안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는 오히려 소수가 그 답을 찾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진화론자들의 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자들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능히 들어가지 못하리라. (눅 13:24)
여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정해진 길을 알려주는데 듣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합리적인 판단은 길을 고르는 게 아니라 정해진 답을 알려주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선택하는 것이겠지요.
여러 사본들 중에서 정경을 확정할 때의 방법은 어떨까요? 이것도 이미 정답이 있는데 다수결로 정한 것일까요? 이것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는 사본들, 성령님을 받은 성도들이자 왕가의 제사장이 된 성도들이 많이 선택한 사본들이 정경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까지 다 섞어서 다수의 것을 선택하면 그렇게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이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신학자와 성경 비평학자들이 개입되면 오늘날처럼 성경 전쟁이 되고, 마구잡이로 변개된 천주교 신학의 성경이 진짜 성경과 함께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거듭난 사람들이 많이 선택한 본문이 다수 본문, 공인본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역시 아무나 섞어서 다수의 답을 찾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소수본문을 선택하는 일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합리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2. 합리적 사고와 합리화
모든 일을 잘 판단해서 해야 하지만 자기 눈에 옳은 것을 선택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경고합니다.
자기 눈에 지혜로운 자들과 자기가 보기에 분별 있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사 5:21)
성경에는 일 달란트 받은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자기 기준에서 합리적으로 판단을 하고 주인의 성향을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는 지혜롭게 한답시고 행동했습니다. 아마 그가 아예 악한 생각을 했다면 돈을 써버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돈을 묻었다가 되가져왔습니다.
그 뒤에 일 달란트 받은 자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엄한 사람이라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흩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내가 알았으므로 내가 두려워하여 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었나이다. 보소서, 거기에 당신의 것이 있나이다, 하매 그의 주인이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흩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으니 그러므로 네가 내 돈을 돈 바꾸는 자에게 맡겨서 내가 올 때에 이자와 함께 내 것을 받게 했어야 함이 마땅하도다. (마 25:24~27)
한마디로 "너는 판단 미스를 했다" 이겁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가 생각할 때 옳은 대로 판단을 많이 하면서 내가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했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러나 분별과 자기철학을 혼동하면 안 되겠지요.
그리고 합리적인 사고와 합리화는 다릅니다. 이 게으른 종은 일하기가 싫어서 마음대로 판단해 돈을 땅에 묻으면서 자기가 일하지 않을 핑계를 생각해 자기 합리화를 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종류의 변명에서 가장 악한 것은 하나님을 파는 일입니다. 자기가 원해서 했으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서 그것이 주님의 길이라고 합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심판 받을 일입니다.
그런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댄 웃사의 이야기를 비롯해 노아의 아들 함, 아나니야와 삽비라 등 자기 생각으로 판단해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이들이 구원을 잃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가 훼손됐기 때문에 육신의 형벌로 처리된 것입니다.
3. 합리적 판단은 잘 나누는 것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나누듯이(dividing) 우리가 고를 문제와 정답이 정해진 문제를 잘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이 합리적인 생각이며 바른 판단입니다. 합리적 생각은 상황판단입니다. 운전을 하다 보면 매시간 선택을 해야 합니다. 갈 것인가, 설 것인가?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추월할 것인가, 양보할 것인가? 등등... 이처럼 삶에서 만나는 많은 일들과 관계 속에서도 항상 판단하고 선택할 일이 생깁니다. 이런 때 결정을 잘 해야 뒤탈이 없고 편안합니다.
첫째, 시간(타이밍)을 판단해야 합니다.
빨리 수습할 일인지 기다리면서 천천히 해결할 일인지 판단해야 합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단기 과제와 장기 과제가 있습니다. 빨리 해결해야 할 일을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천천히 이루어나가야 할 일을 급히 처리하면 부작용이 많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소용이 없습니다. 누군가와 화해할 때도 시간을 놓치면 어려워집니다. 이런 타이밍을 놓쳐서 평생 부모나 가족, 친구와 반목하고 살다가 죽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제가 아는 분도 십여 년이 넘게 장인어른에게 용서를 구하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임종 때 이미 말을 못하게 된 상황에야 찾아뵙게 되어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회개도 적절한 순간에 결단을 내려야지 질질 끌면 영영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한하고 시간에 얽매인 우리는 시간을 잘 활용하고, 그 안에서 지혜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휴거>라는 유명한 소설도 그렇게 시작됩니다. 두 여성이 일요일에 설교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습니다. 회심할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데, 한 친구는 지금 당장 나가자고 하고 한 친구는 아직 확신이 안 선다며 다음 주에 회심하겠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날 밤에 휴거가 일어난 것입니다. 회심한 친구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혼자 남은 그 여성은 뒤늦게 모든 것을 깨닫고 가족들과 목숨을 걸고 환난기를 보낸다는 스토리지요. 그래서 결단은 빠를수록 좋고 시간을 놓치면 아무리 바른 판단도 소용이 없습니다.
한 공상과학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는데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도시에서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마을 사람들은 동작을 멈춰버렸습니다. 이런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처음에 무척 어리둥절해서 없어진 사람들을 찾고 멈춰버린 사람들을 주시하는데요, 멈춘 사람들은 숨도 쉬고 몸도 살아 있는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도시에 시간의 시스템이 개개인에게 다르게 적용된 것이었습니다. 없어진 사람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빨리 움직이게 돼서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일반 사람들에게 보이려면 한 자세로 몇 주 동안은 있어야 비로소 눈에 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글자를 남겨 의사소통을 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무언가 만들어 놓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멈춰버린 사람들은 느린 시간이 적용돼서, 며칠 있다 가보면 한 발짝 정도를 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행성에 가면 자전과 공전 주기가 달라 시간이 달라지는 것처럼 사람마다 다른 시간이 적용되었다는 상상력으로 씌인 이 소설은, 개개인이 느끼는 체감 시간의 다름을 공상과학의 형식을 빌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을 느끼는 정도는 다 다릅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느긋한데 아내는 잔소리를 합니다. 아이들 때는 시간을 길게 느끼고 노인이 될수록 시간을 빨리 느낀다고 하는데요, 어릴 때는 한참 놀다가 시계를 봐도 아직 엄마가 밥 먹으러 오라고 부를 때가 안 되었고, 하루종일 헤매 다녀도 해가 지지 않는 것 같은 경험이 많습니다.
너무 시간이 없어서 큰일이다 생각해 본 일은, 숙제를 못한 때 외에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멀리 버스를 타고 친척집에 갈 때는 가도 가도 끝이 없어서 얼마나 남았냐고 물어도 어른들은 그저 다 왔다고만 하는데 그러고도 30~40분 더 가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없고 바쁘고 조급합니다. 저는 청년 때 어르신들이 탑골 공원에서 우두커니 앉아 계시면 무료해서 어쩌나 괜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연세가 드실수록 시간이 더 빨리 가서,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겁니다. 어린 아이들에 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우리 자녀들을 못 기다려주는 겁니다. 아이들의 시간은 다르거든요. 저희 큰 아이가 고3인데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 엄청 느린 겁니다. 지금도 스마트폰 터치만 번개고 나머지는 다 느리죠. 그런데 어릴 때 어린이집 원장님이 상담을 하면서 그러더랍니다. 쟤는 원래 속도가 느린 아이니까 좀 기다려줘야 한다고요. 그것도 모르고 잔소리를 하다 보니 아이는 힘들어지는 거죠.
이렇게 다 다르기 때문에 남에게 내 템포를 강요해서도 안 되지만, 남의 속도나 체감 시간을 고려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을 잘 조절하고 관리해야 일에 성공할 수 있고,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포기할 부분과 살릴 부분을 나누어야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거나 문제가 생기면, 수습이 불가능한 일인지,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일인지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조정하면 되겠지만 그것이 어려우면 정확히 맺고 끊어야 합니다. 여성들이 남자들을 바라볼 때, 나쁜 남자보다 더 나쁜 남자가 우유부단한 남자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상황이 제일 답답한 법이지요.
저는 다세대 주택에 사는데, 작년 봄에 건물 전체 방수 공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우리 집이 공사 진행을 맡게 되어 시공자를 알아보고 돈을 걷어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둘째 날이 되는데 소개로 일을 의뢰한 분들인데, 영 공사를 어설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사비 많으니 적으니 하면서 투덜거리고 욕을 하고 자기네끼리 싸우고 난리가 났습니다. 공사를 낮에 남은 아내가 지켜보고 있으니 얕잡아보고 그러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내한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다음날 아침에 가만히 보니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일을 맡은 업체 사장이 또 하청을 줬는데, 자기네끼리 액수를 놓고 싸우고 욕을 하면서 처음에 얘기한 부분도 못해주겠다는 등 배짱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약금과 선금 준 것을 빼고 계산해보니 300여 만원이 남아 있어서 다른 업체를 찾아보니 그 정도면 남은 공사를 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일하는 사장을 붙잡고 일 이런 식으로 할 거냐고 따지니까 일이 어렵다고, 하청 준 사람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또 혼잣말로 욕을 했습니다. 그래서 당장 공사 멈추라고, 다른 곳으로 넘길 거니까 계약금과 선금은 알아서 하라고 했지요.
알고 보니 그 사장이 자기는 감독도 일도 안 하면서 일부는 챙기고 적은 돈으로 하청을 맡긴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리 불평이 심했던 거죠. 그래서 그 길로 다 돌려보내고 새로운 업체에 맡겨 일을 무사히 잘 마무리했습니다. 만일 그때 결단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면 일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돈은 돈 대로 나가고 우리만 건물 사람들에게 생기는 것도 없이 망신만 당할 뻔 했습니다. 나중엔 그 업체 사장도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는 신속하게 잘 판단하는 순발력을 발휘해야 위기를 넘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도 이런 것이 꽤 있습니다. 어물어물하다가 일이 커지거나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기도 하지요. 나무에 빠르게 병균이 퍼지고 있으면 잘라내야지, 그냥 두었다가 멀쩡한 부분까지 썩을 수가 있습니다. 병해충에 오염된 가지는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선택과 판단을 잘못하면 멀쩡한 부분을 자르고 오염된 부분을 그냥 두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잘못 번역된 성경을 미련 없이 버리면 건강한 믿음이 찾아옵니다. 억지로 옹호하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장황하게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때를 놓치면 점점 더 바꾸기 어려워지지요.
우리 조직이나 문화에 악한 요소나 잘못된 개념, 불합리성을 제거할 때 바른 생각과 합리적 사고가 뒤따를 것입니다. 사람에 있어서도 가능하면 함께 안고 이끌어가야겠지요. 그리스도의 지체는 각기 수준이 다른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지체가 자신의 기능을 벗어난 일을 하거나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병에 들었다면 과감히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다른 지체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이 판단을 잘못 하게 되면 반대의 결과가 올 것입니다.
셋째, 친구의 말인지 적군의 말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이상한 교회나 조직을 보면, 충심으로 바른 말과 유익한 직언을 하는 사람을 그냥두지 않고 잘라버립니다. 정치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가신들과 아첨꾼들만 남깁니다. 당장은 그들의 말이 듣기 좋지만 그것은 목회자와 교회를 망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말이나 교리나 주장, 이론 등은 저마다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듣기 싫어도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세우려고 애쓰는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와 주장이 있고, 그럴듯해도 성경이나 교회에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제가 학창시절에 모 국회의원 벽보 붙이는 일을 했었습니다. 그때 같은 계열의 주장을 하는 후보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쪽에서 이쪽을 자꾸 비방하는 겁니다. 비슷한 성향의 표를 자기네가 가져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쪽 후보가 낙선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쪽 후보는 당선됐을까요? 그쪽 후보도 떨어졌습니다.
그 어부지리는 노선이 다른 상대편 후보에게 갔습니다. 그분은 기업가였고 정치인도 아니었지만 어쩌다가 당선이 되었는데, 한 번 국회에 간 뒤로 의정활동이 부실해 초선으로 끝나고 말았고, 제가 아르바이트한 후보는 원래 거물급이었는데, 그때 떨어졌지만 다음 선거부터 계속 의원이 되어 최고위원까지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 선거 때부터 이분이 당선되는 것이 순리지만 엉뚱한 사람에게 내준 것은 우리를 비방한 이들이 적군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글이나 주장을 보면 예전보다 많이 논리적이고 수준이 높은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보존되었다는 믿음도 없고, 순수한 100퍼센트의 말씀이 있다는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신학과 교리와 교회, 그리고 기득권과 이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길을 찾기보다는 흠집을 내 이기려고 달려듭니다.
그런 일은 궁극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교계를 난장판으로 만듭니다. 그들은 우리가 성경을 팔기 위해, 그리고 우리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기존의 성경을 공략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기존 성경이 바르게 개정된다면 그게 더 팔려도 관계없습니다. 왜 애써 번역하고 정리한 성경을 무료로 공개하겠습니까? 성경이 두 동강 나고 권위가 떨어져도 자기네 기득권은 지켜야겠다는 이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꾼이겠습니까?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합리적인 것입니다.
넷째, 지혜와 교활함을 구분해야 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뱀처럼 지혜롭게 생각을 참 잘합니다. 그러나 뱀처럼 지혜로운 것과 뱀 같은 것은 다른 것입니다. 화려한 말이나 상대방에게 놓는 덫으로 스스로를 높이거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 등등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말에 실수가 있어서 꼬투리를 잡힐까 두려워 말을 해야 하는 순간에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반대로 말이 너무 많아 그 말들에 스스로 침몰하기도 합니다.
애매한 숙제를 던져 놓고 상대방이 어떤 해석을 내리면, 자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발뺌하기도 합니다. 방에서 발을 반쯤 내놓고 "내가 나갈 거 같니, 들어갈 거 같니?" 이렇게 물으면 상대방이 어떤 대답을 해도 나는 그 사람이 답을 맞추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잘 만드는 것을 지혜로 아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지혜가 아닌 간교함이며 꼼수인 것입니다.
자기 의사를 표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말, 멋있는 말, 좀 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말이 좋은 말이 아니고, 단순하면서 쉽고 명쾌한 말이 좋은 말입니다. 그래야 오해가 없습니다. 이방원과 정몽주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이런 시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을 했다고 하지요. 새로 건국하는 조선에 연합하자고 제안한 것에 자신은 고려왕조를 배신할 수 없다고 답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들이 하는 선문답 같은 말들은 잘못하면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어쩌라고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말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했던 이 말은 해석하기 나름인 애매한 말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성경에는 이런 식의 표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시작에 땅은 땅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러면 우리가 그 뜻을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뭐든 명확히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이나 좋은 문구도 서로 보내는데, 그것도 좋지만 담백한 게 제일 좋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오래된 실수담이 하나 있지요. 어떤 사람이 결혼하는 신부에게 줄 카드를 쓰려고 성경구절을 찾아 놨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나니..." 이 말씀이었죠.
그런데 너무 바빠서 미루다가 당일에 결혼식에 늦은 겁니다. 그래서 카드에 급히 성경구절 위치만 쓴다는 게 요한일서를 요한복음으로 착각해 적은 겁니다. '요한복음 4장 18절'. 이렇게만 써서 카드를 줬는데, 신부가 나중에 성경을 펴 보니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네게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네게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그 점에서 네 말이 참되도다, 하시니라."
결혼하는 신부에게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결혼 축하한다고 하면 될 것을 긁어 부스럼만 만들고 만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새해에 작정한 일에 성공하라고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욥의 친구의 말이지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을 보내줬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계획한 일은 다이어트였습니다. 그럼 지금보다 더 몸이 창대해지라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그냥 다이어트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머리를 많이 쓰면 똑똑해 보이죠. 그러나 조금 미련해 보여도 예스냐, 노냐, 명확히 해야 할 때는 해야 합니다. 성경을 믿으면 믿는다, 아니면 안 믿는다 말을 해야지요.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다면서 어디 가서 약력에 적어 내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도 안 합니다. 그러면서 누가 대신 말해주면 맞다고, 바른 말씀이 널리 전파돼 감사할 일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핑계는, 역공을 당해서 오히려 사역에 방해가 될까봐 그런다는 것이지만, 독도에 대해서 언제까지나 조용한 외교를 할 수 없듯이 이제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떳떳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문제와 논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만 당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사고가 아니라 비겁함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이렇게 행동한다, 당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내 일은 하나님을 전하는 일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기 때문에 나는 정당하다 등등... 우리가 얼마나 완전하기에 사소한 결정들이 모두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단순하고 일상적인 것들은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고 담백하게 하는 것이지, 모든 결정을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주장하면 그와 반대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귀의 뜻에 맞는 일을 한다는 것일까요?
성도간에, 또는 목회자와 성도간에 기도해 봐라, 기도해 달라,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 이런 말들 듣기에는 좋지만 대부분 불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기도해 응답을 받았다는데 누가 그걸 반대하겠습니까? 자기 생각이면서 기도해서 결정한 거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해보라고 했는데 반대하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보여 웬만한 일에 반대할 수도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닙니다. 합니다, 못합니다,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길에서 옷단을 큼직하게 하고 다니는 것처럼 이런 언행들은 마음의 옷단이며 겉치레입니다. 그렇다고 그게 다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명확히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면 오해가 생긴다는 것이고, 습관적으로 하면 위선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먼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맹세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예는 예라 하고 너희의 아니요는 아니요라 하라. 이것은 너희가 정죄에 빠지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 (약 5:12)
성경을 들어서 이야기하면 은혜롭게 보이고 하나님을 자주 거론해야 성경적인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에서처럼 간단히 의사표시할 일을 자꾸 복잡하게 만들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니골라당은 이른바 평신도를 규정해서 그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자꾸만 사람과 일을 종교적이고 수직적이며 계층화합니다. 이들이 사람들을 억압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성경인데, 백성들은 예상대로 꼼짝 못합니다.
잘못된 판단과 생각을 막으려면 먼저 정직하고 권모술수가 없어야 합니다. 어떤 일에 자꾸 앞 수를 내다보고 정치적으로 행동하려 하면 입지는 더 좁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들먹이기 전에 최소한의 예의와 상식을 가지고 행동해야겠습니다.
다섯째,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 일들이나 모든 것에는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가치가 있고, 그때그때 바뀌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본주의에는 이것을 혼동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동성애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면 각자의 취향으로 보고 그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얼마 전 우리가 믿음의 선진으로 여기는 재침례파 중 메노나이트파에서 동성애 여자 목사를 허용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동성애를 절대적 기준에 놓지 않고 상대적 평가 대상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아름답다, 안정적이다, 하고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만물에는 수학적 법칙이 들어있어서, 수치적으로 이상적인 조건들이 거기 숨어 있습니다. 1:1.618이라는 황금비율이 세상 만물에 들어 있습니다. 이런 수치가 인체와 행성들의 돌아가는 형태, 식물과 자연 모든 것에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미의 기준, 아름다움의 기준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추한 것을 아름답다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 하고, 나쁜 것도 생각하기에 따라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반면에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 기준에 놓으면 안 됩니다. 각자 믿음에 따라 하면 되는 교회 출석이나 헌금 같은 것을 충성의 절대적 기준인 것처럼 성도들을 평가하면 안 되겠지요. 각자 양심에 따라 할 일들도 특정한 기준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억압하는 일이 이단 종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바로 가치를 뒤바꾸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라는 영화에는 할로윈 마을의 해골 잭이 크리스마스 마을 어린이들에게 마음을 담은 선물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정성껏 준비했는데 크리스마스 마을 애들이 그걸 열어보고는 기겁을 하고 울고 기절하는 겁니다. 잭은 크게 실망합니다. 감독은 여기서 서로의 기준이 다를 뿐 어느 쪽이 악하고 특별히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하는 거죠. 서로 상대적인 것이라는 얘깁니다. 이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세상에 이런 개념이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인본주의적 생각입니다.
여섯째, 본질과 비본질입니다.
이 역시 비슷한 문제입니다. 굽힐 때인가 부러질 때인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적인 것은 굽힐 수 있지만 절대적인 가치는 굽힐 수 없습니다. 이 둘을 혼동할 때 많은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개화기 때 상투를 풀고 머리를 짧게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부 사람들은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오두가단 차발불가단'이라는 말로 저항했습니다. 몸과 머리털은 부모님이 주신 것이니 목은 잘라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기껏 머리카락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다니 완전히 주객전도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머리카락을 포함한 온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입니다. 마룻바닥에서 예배드리던 오래 전 교회에 나무 의자를 들이려고 하자 할머니 등을 중심으로 바닥에 드러눞고 난리가 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배를 드려야지, 어디 의자에 편히 앉아 있을 수 있느냐면서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 정성은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은 굽힐 수 있는 일입니다. 감정과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른 성경을 찾아 왔다면서, 사람들에게 실망했다고 이제는 흠정역을 안 쓰고 심지어 개역성경을 봐도 삶이 그들보다 낫다면 그런 사람들과 신앙생활 하고 싶다고 합니다. 이건 성경을 믿은 게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무언가를 찾은 것 아닐까요? 본질은 성경인데, 그것을 사용하는 이들의 문제로 성경까지 부인하고 싶다는 것은 이런 가치를 거꾸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 이외에 교회의 형식이나 수칙이나 규정들, 말하자면 성경보다 훨씬 하위에 있는 개념들을 성경과 비슷한 위치에 두거나 오히려 성경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오는 폐해도 많습니다. 비본질이 본질의 자리에 있으면 바르게 행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분별해야 우선순위를 잘 정할 수 있고, 불필요한 일에 기울이는 소모적인 일들이 줄어듭니다.
결론
잘못된 판단과 비합리적 사고로 흐르는 이유는 결국 '자아'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합리적으로 판단했다고 주장하고 많은 근거를 대기도 하지만 결국은 원인이 '나'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 어느 조직에 충성하면 좋은 의도도 있겠지만 많은 부분이 자기에게 이득이 되고 거기서 자신을 존중해 줬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또 누군가 조직을 떠날 때 그곳이 하나님의 일을 잘 못한다는 등의 말을 하지만 많은 부분이 자기가 대우를 잘 못 받았기 때문인 일도 많지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편을 들어줘야 붙어 있습니다. 그것이 솔직한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가장 큰 우리의 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지 말고, 그때그때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해보면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런 생각이 결국 나를 살리는 생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사람보다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을 설득하느냐, [하나님]을 설득하느냐? 혹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애쓰느냐? 내가 아직도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리라. (갈 1:10)
개역성경에 "내가 하나님께 좋게 하랴"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을 설득한다(persuade)는 단어는 내 일로써 하나님을 확신시킨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확신하시도록 설득해야 내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합리적 선택은 하나님을 설득하는 당위성이 있어야지, 사람에게 듣기 좋고 사람을 확신시키는 방향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합리적인 사고는, 당연한 결론이지만 가능한 한 자신을 낮추고 버리며 하나님을 크게 보아 판단하는 것입니다. '나', 자아만 없어도 해결되는 일이 많습니다. 자아는 모든 것을 뿌옇게 만들고 가립니다. 나를 투명하게 만들어야 모든 일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모든 일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맑은 정신입니다. 그래야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합니다.
H. G. 웰즈의 소설 <투명인간>을 보면 주인공이 드디어 몸이 투명해지는 약을 개발해 먹어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약을 먹고 눈을 감았지만 앞이 다 보였습니다. 자신의 앞을 가리던 육신의 사라지니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기에 바쁘고, 조금만 남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면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누가 자기를 무시하면 내가 투명인간이냐고 자기를 봐달라고, 알아달라고 아우성이지요. 물론 그것이 사람의 당연한 마음이긴 하지만 자기를 드러낼수록 더욱 존재감은 낮아지는 것이 성경의 법칙입니다. 자기를 내려놓고 감추고 조용히 자기 할 일을 하면 사람들이 먼저 자신의 존재를 알아보고 인정해줍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만들면 시야를 가리던 아집과 미움과 편견 등등이 없어지고 모든 일을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합리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자아는 모든 일에 걸림돌이 됩니다. 이것을 잘 조절하고 넘어설 때 합리적 사고가 가능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고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연약하게 만듭니다. 매 순간, 모든 일들마다 우리에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지만 최대한 바른 판단을 할 때,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고, 성도들도 최대 다수의 최고 행복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한 발 물러서서 나를 빼고 전체를, 하나님을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리합니다.
우리에게는 합리적인 사고가 필요하지만 세상의 공리주의와 성경적 합리주의는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말씀하는 합리적 사고는 너무나 많지만 그중에 다섯 가지, "듣고, 보고, 맑은 정신으로 깊이 생각해 판단하는 것" 정도는 늘 염두에 두어야겠습니다.
끝으로 합리적인 판단을 하려면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큰 목적과 예수님의 복음이 사는 길을 택해야겠습니다. 이런 바른 판단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에게 더 큰 사랑과 은혜를 끼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