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는가?
에제 17,22-24; 2코린 5,6-10; 마르 4,26-34 / 연중 제11주일; 2024.6.16.
⒈ 말씀의 초점: 하느님 나라
연중 제11주일인 오늘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에제키엘은 레바논 산의 울창한 향백나무 산림처럼 척박한 이스라엘 광야를 울창한 숲으로 만드는 꿈을 꾸면서 하느님의 뜻이 꽃 피고 열매 맺는 그날을 예언하였습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힘이 나오는 이치를 염두에 두고서, 보이는 몸보다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의 초점은 하느님 나라로서, 예수님께서는 그 나라가 작고 소박하게 시작됨을 강조하셨고, 에제키엘은 그 나라가 실현되는 현실이 반드시 다가올 것임을 강조했는데, 바오로는 이 나라를 키우고 성장시키는 원리로서의 믿음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과 마침 그리고 과정이 모두 말씀으로 계시된 셈입니다.
⒉ 구약시대의 현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아브라함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이 믿어온 대상이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실체였습니다. 워낙 당시 이스라엘을 둘러싼 안팎의 상황이 어둡다 못해 암울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로마 제국에 빼앗겼고, 민족은 이집트 종살이와 바빌론 유배에 이어 세 번째로 정치적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동족 안에서도 엘리트들은 민족의 공동선보다 자신들 계층의 이익을 더 앞세웠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제사를 독점할 수 있는 권한만 보장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로마와도 협력할 의사가 있었고, 바리사이들은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독립하는 노선을 지지하지만 그렇게 하여 세워질 새 나라는 자신들이 주도하는 율법의 나라여야 한다고 공언하고 다녔습니다. 이 와중에 짓밟히고 착취당하다가 죽어 나가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몹쓸 질병으로 고통받고 마귀 들려 고생하다가 예수님께 대한 명성이 퍼지자 가시는 곳마다 그분을 찾으러 온 사태가 그 시대의 어둠을 반영합니다. 이 민중을 상대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세도, 재물도, 지식도 없이 그저 몸뚱아리 하나에다가, 오로지 하느님께 향한 믿음만으로 이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고 다니셨으니, 백성은 그 말씀에 솔깃하면서도 확신을 갖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병과 장애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해서만은 달랐습니다. 놀라고 경탄하면서 사방에서 몰려들었고 밤낮으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은 뒷전이고 혜택에만 온통 관심을 쏟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겨자씨의 비유는 이러한 상황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3. 겨자씨의 비유와 믿음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나면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는 겨자 나무에 대한 상식에 빗대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가 무모해 보일지언정 무망한 것이 아님을 설득하고자 하셨습니다. 비단 겨자 나무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나무와 풀 같은 식물 생명은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하느님께서 알아서 키우시는 이치를 납득시키고자 애를 쓰셨습니다. 당신은, 그리고 백성도 씨만 뿌리면 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또 다른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겨자씨 비유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좀처럼 믿기 어려워하면서, 마귀 들린 아이에게서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하고 장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까지 말씀하신 것만 해도 하느님 나라가 다가올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복음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고, 그 믿음으로 마음을 모으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심어 주신 가르침이 분명한데, 덧붙여서 이렇게도 쐐기를 박듯이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2)
4. 초대교회의 현실
사정이 어렵기는 사도 바오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라는 데도 없고, 반겨 맞이해 줄 사람이 기다기리는 커녕 가서도 방해가 기다리고 있으며, 박해를 함께 견디며 복음을 선포할 사람들도 마땅치 않은 처지에서 그는 혈혈단신으로 선교지에 뛰어들곤 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제2독서에 등장하는 코린토는 당시 그리스에서 아테네보다 더 번창했던 항구 도시로서 우상숭배가 창궐하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높은 산정에 자리잡은 신전에는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알려진 아프로디테를 - 이 아프로디테가 로마식 이름으로는 비너스입니다 - 섬기는 여사제들이 천여 명이나 상주하며 이교 제사를 핑계로 성관계를 공공연히 저질렀을 정도로 성도덕이 문란한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우리 몸이야말로 성령께서 계시는 성전임을 가르치며 몸으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해야지 몸으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고 질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독서에 나오다시피, “보이는 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라.”(2코린 5,7)고 확신에 가득 차서 권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나서야 하며, 그 때에는 이 몸으로 한 소행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되리라.”(2코린 5,10)고 격려하며 경고했습니다.
5. 우리의 현실과 과제: 사랑의 문명을 향하여
에제키엘도, 바오로도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여러 가지 비유를 동원하셨지만, 공통적으로 우리들 사람에게 뿌려져야 할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씨 뿌리는 이는 예수님이셨고, 그 씨를 받아서 뿌리를 내려야 할 몫은 우선적으로 우리들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음 밭이 비옥하면 그 씨앗은 튼튼히 뿌리를 내릴 것이고, 조만간 싹도 트일 것이며, 자라서는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을 것입니다.
마음에 믿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다음에는 우리들이 맺고 있는 인간 관계를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단 두 세 사람이라도 이 인간 관계를 작은 세상으로 삼아서 하느님 나라를 꽃피워야 합니다. 그래야 이 관계를 겨자씨처럼 온 세상으로 퍼뜨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라고 보증하신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이룩되어야 할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대한 예수님의 의지가 어떠한 지는 다음 말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라.“(마태 5,18)
한처음에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구를 조성하시어 온갖 생명체들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조화롭고 균형잡힌 세상을 지어 내셨습니다.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어 내신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2,1;1,3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조화와 균형으로 아름다운 이 세상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현실과 미래를 조화롭고 균형있는 모습으로 변화시켜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현실에서는 조화와 균형이 이룩된 질서 대신에 무질서가 판을 치고 있었으므로, 이에 대해 요한 23세 교황은 이렇게 갈파한 바 있습니다.
지상의 평화는 모든 시대의 인류가 깊이 갈망하는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설정하신 질서를 충분히 존중할 때에 비로소 회복될 수 있고 견고해진다. 세상에는 살아 있는 생명과 자연의 힘을 지배하는 놀라운 질서가 있기 때문에 현대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자연의 힘을 지배하고, 그 선익을 향유하기 위하여 적당한 도구들을 창조하고, 그런 질서를 발견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위대함의 소산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발명은 무엇보다도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있다. 시편 저자가 외치듯이 지혜와 선의 귀중한 보화들을 인간에게 풍요롭게 주시려고 우주를 창조하셨다. “하느님, 내 주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시편 8,1) “주님이 하신 일이 많고도 많건마는, 그 모두를 지혜로써 이룩하시었으니, 온 땅에 당신 조물 가득 차 있나이다.”(시편 103,24)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창세 1,26) 당신과 비슷하게 지성과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을 만드시고, 세상의 주인으로 올려놓으신 것이다. 계속하여 시편 저자는 외치고 있다. “당신은 인간을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어 주셨나이다.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 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시편 8,5-6)
그런데 여전히 세상의 완전한 질서를 거스르는 개인들과 국가들 간에 불목이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한 관계 개선은 무력의 사용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내밀한 마음 안에 질서를 새겨 주셨는데, 이것이 양심을 일깨우며, 인간은 단순하게 이 양심을 따라야 한다. “인간은 그들 마음속에서 하나의 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양심이 바로 그 근거가 된다.”(로마 2,15) 이 사실은 달리 설명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하느님의 모든 업적은 또한 당신의 무한한 지혜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 반영이 더욱 분명할수록 그만큼 완전성의 정도는 높아지는 것이다.”(시편 18,8-11 참조)
그러나 가끔 그릇된 견해에서 탈선이 생긴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 공동체와 함께 인간의 관계를 우주의 비이성적인 자연 법칙으로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인간을 다스리는 법은 이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본성 안에 그 법을 새겨 주셨는데, 우리는 그 법들을 어디서나 찾아야 한다.
이 법들은 인간이 어떻게 사회 안에서 이웃을 대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국가 구성원과 그 직무의 상호 관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분명히 지시한다. 또한 이 법들은 어떤 원리들이 국가들의 관계를 통제하는지, 한편으로는 개인들과 국가들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들보다 더 넓은 세계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이런 공동체의 설립은 보편적 공동선의 요구에서 나온다.(회칙 지상의 평화, 1-7항)
이렇게 회칙의 서론을 시작한 요한 23세는 본론에서 이 지상에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즉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하여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아래의 도표와 같이 제시하였습니다.
즉,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와 자연의 질서 속에 담긴 조화와 균형을 인류가 자신의 문명에서 이룩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심어 주신 양심의 법에 따라 자유를 선용하는 질서를 이룩함으로써 하느님께서 가르치시는 최고선의 가치를 확립한 바탕 위에서 공동선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고선의 가치들은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이며 이것이 사랑이라는 진리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공동선의 가치들은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것이 으뜸인데, 가톨릭 사회교리에서는 사회의 공동선, 재화의 보편 목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등의 명제를 버금가는 가치로 가르치고 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상의 원리로서는 보조성과 연대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가치들을 실현해야 인류는 사랑의 문명을 이룩할 수 있는데, 이것이 현대 용어로 재해석된 하느님 나라입니다.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직후에 이 ‘지상의 평화’ 회칙을 반포했는데, 공의회에 모인 주교들은 이 회칙의 가르침을 뼈대로 해서 인류에게 보내는 ‘현대 세계의 사목헌장’을 공표한 바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겨자씨와 같이 작고 소박하게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는 이와 같은 가치들을 먼저 우리 마음속에 심고, 단 둘이나 세 사람이라도 우리네 인간 관계에서 실현하기로 애쓰면서, 점차 우리 사회 현실 속에서도 실현하고자 노력할 때, 어느 새 다가올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간직하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시고, 단 두 세 사람이라도 마음을 모아 하느님 나라를 구하면 당신보다 더 큰 일도 이루게 해 주시겠다던 그분의 약속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