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은 별이 별로 좋지 않다. 내가 기다리는 밤은 겨울이다.
북두칠성 북극성 페가수스......수많은 은하와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혜성
묵호 시내를 걸어다니면서 밤하늘을 본다. 오늘은 흐려서 별이 보이지 않았다.
강릉에 살 때 아내와의 사랑의 장면도 별과 함께 했다.
"별이 보여요....흐흐흑"
아내의 말에 답을 할 수 없었다. 난 별을 볼 수 없었다. 난 아내의 얼굴만 볼 수 있었다.
옥상, 평상 주위에는 내가 키운 자식들(상추,고추 등)이 잘 자라고 있었다. 우리 둘을 지켜보는 것은 녀석들 뿐이다. 우리의 사랑을 지켜보면서 녀석들은 잘 자랄 것이다.
옥상 평상에서 친구들과 한잔 하고, 아내와 2차를 하던 중 기여코 눈이 맞고 말았다. 그것이 그 날 아내가 별을 볼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날, 나는 아내에게 우주의 중심에 있게 만들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천지창조를 했다는 사기를 치는 기독교도 아내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초속 35만 키로로 돌고 있다는 사실과 아내가 방금 본 별빛이, 대충 통일신라 시대에 반짝거렸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를, 그 빛을 봤더라도 상관이 없다.
아내와 난, 그날 진정 살아있었다.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사랑한다는 사실이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아내와 난, 살기 위해 사랑은 했지만, 유전자를 번식시킬 수는 없었다.
다만, 그날 아내가 별을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난 별을 보지 못했다.
별을 보며 걸으면서, 나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렐레오 갈렐레이를 생각하고, 박경리와 니체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특히, 비가 와서 별이 보이지 않는 날은 더욱 그렇다.
여름밤에는 별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별은 겨울밤에 봐야 제맛이다.
특히, 북두칠성은 겨울밤이 더 선명하다.
우울증을 심하게 앓은 후, 결론은 나를 내팽게치는 것이었다.
별 볼일 없다는 삶이라고 단정 짓고 마구 사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자. 내가 내가 아닌채로 살자. 내 삶을 버리자. 목적을 가지지 말자.
혹시 내가 죽더라도 내 죽음이라고 슬퍼 하지 말자. 나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커다란 인류의 죽음 중에서 모래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자”
알콜에 빠지고 알콜 마저도 무의미해지고 우울증 마저 무시하고........
그 다음은 아무 생각 없어졌습니다.
나를 놓아 버린 후, 그 다음에 찾아온 것은 짜라투스트라 였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산을 내려오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20 세기 말, 제국주의 후발 주자였던 독일은 젊은이들은 먹고 살기 힘들 때였습니다.
자본주의는 시작부터 과정부터 지금도 개판입니다.
젊은 짜라투스트라가 괴로운 것은 당연한 거였습니다.
니체는 성실한 크리스찬이었지만, 젊은이의 마음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유럽의 위대한 철학자인 겁니다.
어느 순간 별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글을 쓰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1 층에 내려가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있다가 밤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별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겁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저 별들 중에 지구는 우주의 한가운데서 티끌 만도 못하는 작은 존재라는 것을.
나는, 혹은 나의 죽음은, 또는 나의 삶은, 티끌 만큼도 못한 지구 속에서도 한 없이 작은, 더 작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라는.
나의 슬픔은, 나의 아픔은, 아내의 죽음은, 내 삶은, 내 죽음은, 그런 것이라는.
그래서 나는 우울증에서 탈출했던 겁니다.
내가 우울증에서 벗어난 것은 별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