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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가르족의 멸망
1. 개요
오이라트계 유목민족. 몽골어계 종족으로서 북원 이후 인류 역사 최후의 유목 제국이다.
『마지막 몽골 제국』이라고도 불리운다.
준가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왼손, 좌익을 뜻하는 제군가르(몽골어: ᠵᠡᠭᠦᠨ ᠭᠠᠷ Jegün-γar)에서 왔다.
전통적인 유목국가는 남면하여 중앙(몽골어: ᠳᠤᠮᠳᠠ Dumda), 우익(右翼, 몽골어: ᠪᠴᠷᠴᠭᠤᠨ ᠭᠠᠷ baraγun-γar),
좌익의 3부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오이라트를 이루는 호쇼트, 초로스, 토르구트, 두르베트 중에
두르베트 정권에 있어 좌익(동방)을 담당하고 있던 자들이 '준가르'라고 불리게 된 것이 그 시초이다.
기병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화약과 무기를 생산했으며,
강력한 전투력으로 최후까지 청나라를 괴롭혔다.
유목과 수렵채집 생활을 주로 했으나,
상업 발달은 물론 기후가 허락하는 한 농경도 병행했을 정도로
유연한 사회 경제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칼미크인과 사촌이나 현존하는 칼미크족과 달리 준가르 부족은
청나라와의 전쟁과 천연두 유행으로 거의 멸족되고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살아남은 준가르인들조차 여러 이민족에 동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이다.
서북부 신장-위구르 지역 북부의 중가리아와 카스피해,
그리고 외몽골과 티베트에까지 걸쳐 거주했었다.
2. 역사
2.1 기원
기원은 예니세이 강 유역에 거주하던 유목민 오이라트다. 주로 수렵과 목축을 하며 살았다.
12세기경에 칭기즈 칸에게 정복당하여 4만 호로 편성되었고
이후 몽골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원대에도 색목인으로서 우대받았다.
그런데 몽골 제국내에서 오고타이 가문의 카이두와 대칸의 경계선에 진출했었기에
몽골 제국 시대에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으며 주로 대칸의 반대편에 서서 싸웠으며,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고 북진하면서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에 대항해서 싸웠다.
이렇게 몽골과 맞서 싸우면서 오이라트는 몽골고원 서쪽의 유목 민족들을 흡수하는데,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를 위시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 당시 가장 거세게 대항했던 부족들로
워낙 덩치가 큰지라 말이 오이라트지 실제로는 흡수된 부족 출신들이 원 오이라트계보다 훨씬 많아진다.
즉 이즈음에는 오이라트를 중심으로 서몽골의 유목 부족들이 뭉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오이라트의 최대 부족 순위는 준가르와 토르구트부터 나이만, 케레이트 계열이 된다.
원 오이라트계 부족은 오히려 소수 부족으로 전락한다.
에센 타이시의 시대에 전 몽골을 통일할 정도로 기세가 대단하였고
급기야는 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의 정통제를 생포하면서 위명을 떨쳤다.
하지만 에센이 암살당한후 오이라트는 혼란에 빠지고 약화되어 몽골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서쪽 자신들의 본거지로 후퇴하였다. 이후 몽골 최후의 명군인 알탄 칸의 등장으로
오이라트는 몽골고원을 결국 상실하고 몽골에 복속되었다.
1600년대 초반부터 오이라트는 재흥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 1623년 몽골 할하부를 격파하여 완전한 독립에 다시 성공하였다.
그 직후 내분을 겪어 케레이트의 후예 토르구트부가 서쪽으로 이주해
카스피해 북부의 노가이 칸국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중심으로 삼아 지금의 칼미크가 되었다.
남은 오이라트의 부족 중 칭기스 칸의 동생 주치 카사르의 후예를 자칭하던 호쇼트부는
티베트 내전에 개입한 후 이주해 떨어져 나가고 잔존 오이라트는 1640년 청의 성장으로
위협을 느낀 몽골과 화의한 후 준가르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최후의 유목 제국을 건설했다.
준가르의 군주 칭호는 갈단 때를 제외하면 한(Xān)이 아닌 홍 타이지(Xong Taiǰi)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홍 타이지는 청 제국의 숭덕제의 휘호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래서 숭덕제의 휘호에 관해서 논란이 있다.
2.2 갈단 한 즉위, 청나라와의 대립
청의 등장은 북방 유목민족의 흥망을 바꾸게 된다.
계속되는 내분과 청의 정벌로 몽골은 사실상 분열되고 정복되거나 힘을 못 쓰는 상황이었다.
그 반면 중국 서쪽의 오이라트계 종족들은 준가르를 중심으로 뭉쳐서 단합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지도자로 갈단 한이 등장하면서 이후 청조에게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한다.
갈단은 준가르의 첫 홍 타이지인 바투르(Bātur)의 둘째아들이며, 원래 승려였으나
아버지의 후계자 및 형인 셍게가 형제들과의 다툼으로 피살당하자 환속해 준가르를 평정했다.
그 전까지 홍 타이지의 칭호를 쓰던 갈단은 이전까지 오이라트의 맹주였던 호쇼트 부족을 정복하며
준가르를 통합하고 달라이 라마 5세에게 홍 타이지를 거쳐 '보쇽투 한'(Bošoqtu Xān)의 칭호를 받았다.
갈단은 한때 티베트 불교의 승려였던 경력 및 고승 웬사 투르크의 환생자로 공인받은 인연으로
티베트와도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림 분지로 영토를 넓혔다
청군의 준가르 대학살
갈단의 부와 인구는 서역을 장악했다.
그는 모래에서 기름을 뽑아내고 흙을 구워 유황을 추출하고 황산을 이용하여 초석을 만들었다.
구리, 납, 양질의 철이 생산되었다. 준마와 오랑캐 기수의 규모에서 그들을 능가할 자들이 없었다. ...
갈단은 질 좋은 무기를 직접 만들 수 있었기에 군용 자재를 멀리서 구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고리 미늘을 연결하여 사슬 갑옷(Chain mail)을 만들었는데, 마치 직물처럼 가벼웠다.
만약 화살이 이를 뚫으면 그는 갑옷 제작자를 죽였다.
또한 그는 회회족에 사절을 보내 화약 무기 사용법과 전술,
즉 먼저 총을 쓴 뒤 활과 검으로 싸우는 전법을 가르쳤다.
그는 병사들에게 총, 소검, 활과 화살을 휴대시키고 허리에 단도를 착용시켰다.
그들의 천둥 같은 고함을 들은 이들은 원근을 불문하고 항복했다.
진변기략 1687
1688년에 갈단이 외몽골 할하 부족의 내분을 틈타 청나라령 외몽골을 공격하자,
서역의 교역로를 안정화하고 몽골과 티베트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강희제는 오랜 준비 끝에 준가르 원정에 나서 적봉에서 준가르군을 격퇴한 뒤,
몽골 고원으로 갈단을 추격하며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다.
갈단은 울란바토르 북동쪽인 테렐지, 준모드에서 1696년에 벌어진 전투에서 패한 후 반격을 노렸지만
본국에서 조카인 체왕 랍탄이 반란을 일으키고 티베트와의 연락도 끊긴 와중에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1697년에 객사했고 시신은 청나라에서 인수해 장례를 치렀다.
갈단이 죽은 후에는 체왕 랍탄이 뒤를 이어 전성기를 구가하여
카자흐스탄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준가르 제국의 국력은 러시아나 청조에 비하면 인구수(준가르는 60만 정도),
농업 생산력, 기술력 등 여러 면에서 뒤쳐져 있었다.
2.3 준가르의 반격
하지만 그렇다고 청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옹정제 때 청나라 변방의 목마장들을 습격해 말을 대량으로 털어가고
청의 영토인 투루판을 공격하여 청나라를 놀라게 했다.
또한 강희제 말기에는 티베트 내정에 개입하여 달라이 라마 6세를 내쫓고
친준가르 승려를 새 달라이 라마로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준가르가 옹립한 달라이 라마는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티베트와 호쇼트 부족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달라이 라마 7세를 새로 세우고 준가르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이때부터 티베트는 청나라의 세력권에 놓이게 된다.
청의 대신 악종기는 준가르 쪽의 변방에 30만의 대군을 투입해야 한다고 16차례나 건의했으나
옹정제는 그건 너무 많다며 망설이다가 결국 악종기의 의견을 받아들여 20만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푸르단이 이끄는 북로군이 호톤노르에서 준가르의 유인전술에 넘어가는 바람에
5만 명을 잃고 주요 장수들이 줄줄이 전사하거나 자결하는 큰 패배를 당하고 만다.
서로군을 이끌던 악종기도 이 패배의 책임을 물어 파면된다.
그나마 칭기즈 칸의 20세손인 화석액부 찰살극 새음약액부 중좌익 말기 군왕 박이제길특 책릉이
준가르군을 격퇴하고 그 중 1만을 살해하여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다
2.4 멸망
하지만 세력이 팽창한 준가르는 과거 비슷한 유목 제국을 세운 몽골 제국처럼
후계자 문제로 내분을 겪으며 약해져 갔다.
여기에 건륭제가 즉위한 후 청나라는 이전과는 다른 철저한 준비 끝에 본격적인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압도적인 청의 국력과 내분이 겹친 준가르는
결국 후계자 싸움에서 역전을 노린 아무르사나의 투항으로 청에 복속된다.
그러나 청이 준가르 땅을 4명의 대등한 칸을 세워 분할통치하려하자
자기가 유일한 칸이 될 거라 생각했던 아무르사나가 이에 반발해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아무르사나는 청군에게 패배하여
간신히 목숨만 건진 채 피신하여 이역만리 러시아땅에서 죽게 된다.
청군의 준가르 공격(1756년)
이후에도 준가르가 복속을 거부하고 계속 저항하였다.
피해가 막심해지자 더 이상 보다못한 건륭제는 준가르의 복속을 포기하고 아예 멸족시키기로 결정했다.
이후 항복도 받아주지 않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준가르족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비록 중국 사서에서는 준가르족에 대한 멸족 시도를 부정하고 있긴 하나
학살하는 장수들에게는 상을 내리고 죽이진 않고 밖으로 내쫓는 장수들에게는 벌을 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설상가상으로 천연두까지 돌면서 결국 준가르인은 최소 80%, 최대 90% 이상이 사망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준가르인들은 러시아 제국이나 카자흐 등지로 도망쳐서
현지 주민들에게 동화되거나 청나라에 붙잡혀서 노비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준가르는 멸족당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건륭제는 준가르에게 질렸던지 중국 내에서 준가르라는 이름을 꺼내지도 못하게 했고,
이후 십전노인이라는 명성을 위해 준가르 지방 원정의 공로를 쪼개 여러 개의 원정으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청나라는 준가르족들이 살던 땅에
자신들에게 복속시킨 한족, 위구르족, 회족(回族) 등의 타민족들을 대거 이주시켰다.
청이 침략하기 이전에 신장지역에는
준가르인이 60만, 위구르인이 37만 정도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되었지만,
이후 신장지역은 위구르인이 번영하게 되었다.
청은 준가르를 평정한 이후 이리에 텐산 남북로를 관할하는
판사대신과 협판대신을 파견하고 주요 거점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1768년 청은 이 지역을 새로이 개척한 강역이라는 의미로 신강(新疆)이라 명명했다.
3. 통치자 목록
1대: 하라쿨(?~1634)
2대: 에르데니 바투르(?~1653)
3대: 셍게(?~1671. 재위기간 1653~1671)
4대: 갈단 한(1644~1697. 재위기간 1671~1697)
5대: 체왕 랍탄(1643~1727. 재위기간 1697~1727)
6대: 갈단 체렝(?~1745. 재위기간 1727~1745) - 체왕 랍탄의 장자. 3남 1녀를 두었다. 딸의 이름은 울란 바야르.
7대: 체왕 도르지 남잘(Tsewang Dorji Namjal, 1731~1750. 재위기간 1745~1750) - 갈단 체렝의 2자.
8대: 라마 도르지(Lama Dorji, 1726 또는 1728~1753. 재위기간 1751~1753) - 갈단 체렝의 장자.
체왕 도르지 남잘과 막냇동생 다시 다와와를 투옥하고 권력을 잡았다.
9대: 다와치((Dawachi, ?~1759. 재위기간 1753~1755) - 방계 가문인 체링 돈둘의 손자.
라마 도르지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아무르사나(1723~1757) - 체왕 랍탄의 손자
4. 평가
준가르의 전성기 때에는 제2의 몽골 제국이 될 것처럼 기세가 대단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 및 청나라와 달리 준가르의 지배층들은
피지배민족과 주변국에게 철저히 강압적으로 대한 탓에 반감을 쌓아왔고,
결국 준가르는 나라가 망하는 것에 끝나지 않고 민족 자체가 멸족하는 것으로 업보를 치르고 말았다.
만약 준가르가 피지배민족 및 주변국에 어느 정도 온건하게 나왔다면
몽골 제국이나 청나라처럼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흉노, 돌궐, 위구르 제국처럼 중국 왕조를 견제할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어찌보면 태평천국이나 아즈텍 제국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셈이다.
첫댓글 글 감사
감사
준가르,
하나의 민족의 흥망성쇠를 보고있습니다.
전 언제가 역사를 좋아하시는 청솔님께 거의 고구려 후예라는
묘족에 대한 글좀 올려주십쇼 하는 청을 하고 싶었습니다.
전 실력이 딸려서...글 감사합니다.
저는 우리와 고구려는
별 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신라인의 후손이지요
고구려의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묘족은 묘족일 뿐이지요
고구려도 몽골의 일족인 부여족의 한 갈래구요
말갈족과 부여족의 연합이 고구려라고 합니다
원산~평양 이남의 신라는
고구려를 뒤에서 쳤지요
뒷통수 치는데는 신라가 전문이지요
앞에서는 당나라가 쳤구요
고구려는 사라졌습니다
유민들이 뿔뿔이 흩어졌지요
668년의 일입니다
1355년 전의 일입니다
@청솔 고구려가 부여의 후손인 것은 알지만 ...
그럼 신라가 통일해서 ...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배우며 갑니다.
@낭만 신라가 통일을 한 게 아니라
백제는 일본으로
고구려는 당으로 밀어낸거지요
고구려땅은 당나라땅이 됐구요
통일신라라는 말이 터무니없습니다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힘이 약해지자
경순왕이 나라를 통째로 고려에 바치지요
왕건은 몇 번 사양하는 척하다가
신라를 낼름 집어 삼키고
경순왕은 개경에 가서 높은 벼슬을 받고
큰소리 떵떵치며 행세합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한 사람입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큰 전쟁은 없었습니다
후백제의 견훤과 좀 다퉜는데
견훤의 후계자문제가 삐끄러져
왕건이 거저 후백제를 삼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