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났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왼쪽 흉부가 심하게 결려서 통증 때문에
못 일어날 것 같았어요. 약간 어이없음 정도로 넘어가려 했지만 문득 제 폐가
안 좋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수 사워를 하고 몸무게를 달아보니
90kg, 욱, 곧바로 정수리를 거울에 클로즈업시켰을 때 분명 싹이 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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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새싹을 가지런히 나게 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광합성을 했을까요?
몸무게만 빼면 이상 증후가 없거든요. 설마 폐암 걸린 것은 아닐 테지요?
가족 역에 폐암은 없는데 두들겨 맞아서 그런 걸 까요? 왕 부시가 94세의 일기를
쓰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멋지게 살다갔습니다. 파일럿 출신답게(미, 에어포트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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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에도 낙하산 점프를 했다 나 봐요. 내 참, 저는 공소공포증 때문에 낙하산만
못타봤습니다. 본드 섬에 갔다가 저 행 비행(패러글라이딩)을 하는데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막내아들 벌 되는 지인이 항공대 진학을 한다고 해서 축하를
해줬습니다. 비주얼도 딱 파일럿이고 머리도 있는 아이니까 한10년 항공에 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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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 정비사도 되고 파일럿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 부시는 바그다드를 불바다를 만들었지요. 사실 미국우월주의는 트럼프보다
부시가 먼저 했습니다. 아들까지 대통령을 만들었으니 뭔 복을 타고 났는지 모를
일입니다. 2018년 기준으로 현재 50미만인 분들은 130세가 평균수명이라고 하더이다.
이제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풍경을 적응해가야 합니다.
우선은 자녀와 같이 늙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자녀를 일찍 독립시키고
도와주지도, 늙어 짐이 되지도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떤 지인은 자녀의 탯줄을
빨리 자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매몰차게 말하더이다. 늙어서 필요한 것이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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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외로움‘으로 알고서 준비하고 있지만 적응이 잘 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딸내미가 인테리어를 잘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전화를 해주면 좋으련만 누구
딸인데 언감생심 전화를 하겠습니까? 아빠도 보고 싶어 죽겠어도 그냥 죽으려고요.
잘하겠지요. 에스더야 예주를 부탁해. 피카소 부친이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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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미술인생을 접었다고 합디다. 저도 이제 수-랩 미술학원에 정을 떼야겠어요.
뭐 몰라주면 어때? 그리고 어떻게 일일이 알겠어요? 나만 보고 살라는 말은 웃기는
얘기라고. 티칭도 해야 하고, 수업도 받아야 하고, 연애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인
아이를 왜 구속하려고 하냐고? 긴 목과 타원형의 얼굴, 우아하고 애수가 깃든 여인의
초상으로 널리 알려진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는 몬드리안하고 구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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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출신임에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파리의 뒷골목을 전전하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이 젊은 예술가는 ‘몽마르트의 보헤미안’이라고 불리며 벨
에포크 시대 가난한 예술가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모딜리아니는 어린 시절부터
늑막염, 폐렴, 장티푸스, 결핵 등 평생 병생 병치레만 하고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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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인 우리 예주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모딜리아니는 14세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리보르노의 작은 미술학교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그 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그림 수업을 받았는데, 이 역시 병 때문에 그만두었어요.
요양 차 갓던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고전에 경도되었고,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미술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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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니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고대 미술에 대한 조예는 후일 그의 작품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1906년, 파리 몽마르트에 정착한 그는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인체 데생과 유화를 공부했어요. 당시 파리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지로, 마티스, 드랭과
같은 야수파 화가들이 막 활동을 시작했을 때이고, 몽마르트에는 젊은 화가들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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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공동체가 형성될 무렵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파카소, 브랑쿠시, 브라크 등
거물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카페, 공연장, 댄스 홀 등을 오가며 활기찬 시간을
보냈어요. 늘씬한 몸매, 간결한 멋을 풍기는 옷차림에 위트가 넘치는 미남 모딜리아니는
사교계의 총아였다고 합니다. 모딜리아니는 입체파, 야수파, 후기 인상파 등 다양한 사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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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장이었던 파리에서 자신만의 화법을 계발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후기 인상주의와
폴 세잔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초상화와 누드에 매료되었어요. 그는 브랑쿠시를
통해 조각을 배웠으며, 7-8년이나 매달렸다고 합니다. 그는 미술을 배우던 초기부터
인체의 조화와 비례의 미를 중요시했으며, 모델의 특징을 포착하는데 재능이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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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작 ‘첼로 연주자’ ‘리보르노의 걸인’ ‘연인 두상’ 등을 보면 이미 섬세한 표현력과
차별화된 색체를 사용하여 몽환적인 한편, 애수가 깃든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보는 이의 감성에 호소하는 그의 작품들은 암암리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작품에 감정이 이입되는 것을 싫어했고 보편성과 객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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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합니다. 또한 서술형을 배제하고 대상을 양식화하는 방향으로 작품세계를 발전
시켰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은 회화, 조각, 데생 모두가 한 편의 시 같은데 그는
실제로 단테, 페트라르카, 니체, 보를레르의 글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배고픈 직업을
선택한 그는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폴 기욤의 도움으로 생애 첫 전시회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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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시회를 끝으로 36세에 요절을 합니다. 저는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우리 아이들이
미술인인데도 마른 땅만 밟기를 바라는 이상한 바램을 하는 제가 못마땅합니다.
모딜리아니의 여인이었던 잔 에뷔테른의 사랑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지만 혹여, 비운의
마술에 걸려 해가 될까봐 생략하겠습니다. 천재의 단명을 누가 공식으로 만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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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이 그린 '모딜리안 초상화'는 절 닮지 않나요? 도상학적으로 턱을 괴는 자세는
멜랑콜리를 의미한다는데 제가 지금 꾸물꾸물 뭐가 올라오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 에뷔테른의 목은 노천명의 모가지가 길어 슬픈
사슴의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근데 내 목은 언제 이렇게 늙은 것이여?
2018.12.2.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