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독서 : 2열왕 5,1-15ㄷ
복 음 :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도착하시어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
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루카 4,28)
말씀지기
이 군중이 방금 전까지도 예수님께 감탄하다가
다음 순간 그분을 죽이려고 하는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학자들이 보기에는 이 사건들이 여기에서 말한 것보다
약간 더 시간차를 두고 일어났다는 것이 일부나마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도 미루어 짐작하듯이,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서 대단한 영접을 받으셨지만,
며칠 또는 몇 주가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그들이 좋아하지 않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되어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던 분은 분명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알았습니다.
그분은 그들 가운데서 오랫동안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어떤 자세를 취해 오신 듯합니다.
그들은 억눌리고 상처 입은 이들의 해방을 이야기하신 그분의 말씀은 아주 좋아한 반면에,
참회를 촉구하는 그분의 부르심에는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유다인도 아닌 두 사람 나아만과 사렙타의 과부처럼
마음이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대체 무슨 속셈이었던 것일까요?
시골 목수의 아들이 그런 말을 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이 관중이 예수님께 보인 반응과 비슷하게 그분께 응답할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그분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체험할 때는 마음이 확 끌립니다.
그러다가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에
그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영역이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이런 말을 듣기란 거북할 수 있지요.
나자렛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예수님께 저항하고
심지어는 그분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낮추어
주님께서 거친 부분을 다듬어 주시도록 내어 드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회심의 길을 우직하게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첫 번째 이유가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데’(루카 4,18) 있었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을 얽어매는 온갖 것에서 풀려나기를,
자유로이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이 우리에게 내려주고자 하시는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늘 즐겁지만은 않겠지만, 그래도 노력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는, 바로 오늘은 당신이 주님과 함께하는 삶에
획기적인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그분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다시금 그분과 사랑에 빠지도록 하십시오!
“주님, 저는 당신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나아갑니다.
제가 어떤 값을 치르더라도 당신을 기쁘게 따를 수 있도록,
저를 당신의 영으로 가득 채워 주십시오.”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 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 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사랑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휴대전화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았던, 그러니까 제가 신학생 때의 일입니다.
길거리에서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제가 다가와
돈을 좀 빌려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급하게 광주의 집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절대로 사기꾼이 아님을 힘주어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이분의 상황이 안타까워 지갑을 꺼내
광주까지 내려가는 차비라는 3만원을 주었습니다.
이분께서는 너무나 고맙다면서 제 은행 계좌번호를 적어가셨고,
분명히 곧바로 입금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다음날 제 통장에 입금이 되었는지 확인해 보았지요.
입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확인했지만 역시 입금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5일 뒤, 이분이 주신 명함에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습니다.
엉뚱한 번호더군요. 그리고 명함에 적혀 있는 회사는 실제로 있지 않은 유령회사였습니다.
맞습니다. 사기를 당한 것이었지요.
저는 그분을 믿었지만, 그분은 저를 이용했을 뿐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종종 제게 길거리에서 도움을 청하는 몇몇 사람을 만났지요.
그때마다 저는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한 번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뒤, 어디를 갔다가 지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당황했습니다.
집까지 돌아가려면 차비라도 있어야 할 텐데 지갑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우선 땅바닥만 쳐다보게 되더군요. 혹시라도 떨어진 돈이 있을까 싶어서요. 없었습니다.
다음에는 혹시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을까 사람들의 얼굴만 쳐다보았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의 방법은 모르는 사람에게 차비를 빌려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밖에 없었지요.
다행히 기적처럼 아는 사람을 만나서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때의 일을 겪은 뒤에는 모르는 누군가가 요청할 때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물론 나 역시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종 사기를 치면서 남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또 나와 아는 사람들만 해결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을 갖는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사랑의 삶과 정반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보편적인 사랑보다는 편협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자신들만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철저하게 반대하십니다.
구원의 길은 모든 이스라엘과 이방인 할 것 없이 모든 이에게 환하게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사람처럼 다른 이들을 믿지 못하고
편협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우리 역시 모든 이들에게 열린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열등감이 나를 조작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
“넌 아버지가 없어 자라서 결혼하기 힘들겠다.”
“너는 머리가 안 좋아서 누가 데려가겠니?”
“넌 어떻게 허리랑 히프랑 구분이 안 되니?”
우리는 살면서 이런저런 상처들을 받고 살아갑니다.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들은 말들은 우리 안에 상처를 남깁니다.
이 상처들이 우리 안에 남기는 것은 열등감이고 또 그것이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만약 부모 없이 자란 사람이 그것이 자기에게 커다란 상처고 열등감일 때,
애인을 사귀다가도 그 사람이 자신의 치부를 알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뜬금없이 헤어지자고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런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에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도
자신 안에 상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혜민 스님은 TV스타 특강 쇼에 나와서 이와 관련된 당신의 경험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스님이 김승우가 진행하는 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기에 앞서
인터넷으로 김승우씨의 프로필을 검색하였다고 합니다.
그 프로필에는 김승우씨의 키가 180이라고 나와 있어서,
약간 키가 작은 스님은 함께 섰을 때 보는 순간,
‘... 180은 아닌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왜 스님은 김승우씨가 옷을 잘 입고 얼굴도 잘 생겼음에도 키부터 보았을까요?
스님은 그 이유가 스님이 키가 조금 작다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들은 실제로는
그 사람이 그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나를 볼 때
자신이 있는 문제부터 보려고 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상처가 있고 열등감이 있기 때문에 그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식이
상대에게 똑같은 상처를 입혀서 자신의 상처의 고통을 경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자기보호 방식입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남이 나에게 맞는 이야기를 해도 화가 나는 것이고
자신의 상처가 드러날까 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넌 키가 작아. 넌 머리가 안 좋아. 넌 못생겼어...”
자신이 그렇기 때문에 굳이 그 소리를 들어도 기분 나쁠 필요가 없는데
기분이 나쁜 이유는 자신이 숨기는 모습이 밝혀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경우에 다른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해도
나의 부끄러운 면을 보고 비웃는 것 같아서 화가 나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만족하고 할 수 있다면 감사하는 일입니다.
김희아씨의 예에서도 보듯이 지금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 나에게 가장 어울리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준 것이라는 믿음이 상처를 치유합니다.
그러면 열등감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결국 자신이 더 잘나 보이려는 자아를 죽이고
겸손하게 받은 많은 것들로부터 감사드리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진실을 말씀하십니다.
에언자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며 엘리야와 나아만의 예를 들어주십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사실이지만 고향사람들은 잔뜩 화가 납니다.
자신들은 다르게 취급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듣는데도 화가 난다면 내 안에 트라우마가 있는 것이고,
그런 상처가 있다는 뜻은 그만큼 자아가 강하다는 뜻이고,
자아가 강하다는 말은 그만큼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자아가 큰 만큼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빛으로써 우리 상처를 환히 비추고 부끄럽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감사합시다.
남이 나에게 하는 말에 화가 날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진실하게 내 모든 단점들을 밝힙시다.
주님이 주신 것이니 좋은 것이라고 여깁시다.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하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타인의 덕행에 질투하지 않는 삶
변종찬 신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을 말씀하시는데,
무엇이 나자렛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분노하게 만들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봅니다.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질투와 분노가 동일 선상에 있는 것임을 보게 됩니다.
같은 고향 사람인 예수님의 입에서 은총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것에 대한
질투와 이에 따른 분노인 것입니다.
한 친구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일화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자신보다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했던 어떤 친구가 어느 날 우수한 성적을 받았을 때,
그에게 축하의 말을 하기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하면서
왠지 모를 분노감이 들었고, 급기야는 그 친구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가득한 미움이 질투의 또 다른 측면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았다고 하면서,
지금은 연락이 되지 않아 미안함을 전할 길이 없어 아쉽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타인의 덕행에 질투하지 않는 것은 보기 드문 덕행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질투와 분노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과 정반대의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안에 질투와 분노가 자리할 때,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 밖으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주인이신 분을 그분의 자리에서 밀쳐내는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처하심을 깨달으면서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성전이 되고 그분은 우리 안에서
우리 하느님이 되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15,3)
하느님 은총과 사랑은
김찬선 신부
나아만과 엘리사. 세속 임금의 신하와 하느님의 사신.
나아만이 엘리사를 통해 하느님의 치유를 받고자 멀리서 옵니다.
그리고 치유를 받기 위해 정성을 다 하는 뜻에서 많은 봉물 가지고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 뜻에서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만나주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그저 요르단 강 물에 몸을 씻으라고만 합니다.
엘리사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신답습니다.
세속의 권세를 그리 대단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대단한지 몰라도
하느님 앞에서 그가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엘리사는 세속의 권세뿐 아니라 인간의 정성도 그리 대단한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나아만의 정성을 높이 사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도 나아만의 치유를 위해 정성을 들이지 않는 듯 보입니다.
아무런 성의가 없는 듯이 심부름꾼을 시켜 처방만 내립니다.
이에 나아만은 그렇게 성의도 없고 정성도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느님의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거며,
또 도랑물 같은 요르단 강 물로 무슨 병이 낫겠냐고 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맞는 말입니다.
의사가 성의도 없고 정성도 기울이지 않으면 그 치료는 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차원은 인간의 성의나 정성이 치유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치유하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치유하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치유하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언젠가 입시를 앞두고 학부모들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미사를 드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마고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 대답이 시원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일어나 가면서 다시 한 번, “신부님, 정성껏 미사를 드려주세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을 다시 앉히고는 하느님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지,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을 믿는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다 믿는다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당신이 당신 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더 사랑하심을 믿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믿는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불안해 하냐고 일침을 놓고
보시다시피 제 정성은 믿을 것이 못되니 제 정성을 믿지 마시고 하느님을 믿으시라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족속보다 더 당신 마음에 들거나 예뻐서
또는 이스라엘이 하는 짓이 당신 마음에 더 들어서
은총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은사는 순전히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의해서이지
인간이 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믿는 것,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구원입니다.
하느님, 제 하는 짓 보고 구원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과 사랑으로 구원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