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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엽기 혹은 진실..(연예인 과거사진) 원문보기 글쓴이: Ψ 새초롬고냥이
3번째 시간 입니다. ^^
part1과 2 보고 오셨겠지요? ^^
오늘 시작은 사도세자(정조 아버지)에 대한
정조대왕의 깊은 효심을 알 수 있는 내용으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정조 34권, 16년( 1792 임자 / 청 건륭(乾隆) 57년) 1월 25일 을미 1번째기사
현륭원을 참배하다.
상이 현륭원을 배알하고 시신(侍臣)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풍수지리에 대해 비록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1백 리의 평야에 이러한 형국이 이루어졌으니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둘러싼 것과
조·대산(朝對山)의 밝고 수려한 모습은 비록 평범한 사람의 안목이라도 모두 알 수 있다.
이곳은 효종 때에 표시하여 둔 곳인데, 지금 원침(園寢)이 되었으니,
실로 하늘이 준 것이지 나의 힘이 아니다. 2
8년 동안 옛 능원(陵園)에 봉안하였다가 다행히도
천지 신명의 도움을 힘입어 내 마음에 여한이 없게 되었으니,
지난 일을 회상하면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하였다.
정조 37권, 17년( 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1월 13일 정미 1번째기사
현륭원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돌아와 수원 행궁에 머물렀다.
정조 39권, 18년( 1794 갑인 / 청 건륭(乾隆) 59년) 1월 13일 신축 2번째기사
어가가 현륭원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향(香)을 피우려 할 적에
상이 간장이 끊어질 듯 흐느껴 울었다. 겨우 의식을 마치고
이어 원(園)에 가서 봉심하였는데, 상이 더욱 오열하며 눈물을 줄줄 흘리자
곁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울면서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영의정 홍낙성과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나와 아뢰기를,
“지금이 바로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 때입니다. 신들이 등으로 업어야겠습니다.”
하고는, 그대로 보여(步輿)를 내오자 상이 이를 물리치고 곁에 모신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원에서 내려와서야 비로소 보여를 타고 재전(齋殿)으로 돌아왔다.
대신·각신과 약원이 의관을 거느리고 들어와 진맥을 하고 소합원(蘇合元)을 드렸다.
낙성이 아뢰기를,
“재전은 조섭하는 데에 불편하니 행궁으로 돌아가 지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서 하룻밤 자면서 사모하는 정성을 조금이나마 펴려고 하니
경들은 다시 더 말하지 말라.”
하였다. 점심 때가 지나서 상이 편여(便輿)를 타고
구역 안의 여러 산기슭과 새로 정한 화소(火巢)를 두루 살펴보고
옛 향교의 터에 올라 각신 정민시 등에게 이르기를,
“이곳의 지형이 매우 아름답다.”
하고, 훈련 대장 조심태에게 이르기를,
“오늘 여러 산기슭을 살펴보면서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나가며 두루 다 돌아보았는데,
새로 심은 나무들이 거의 모두 울창하게 자랐다.
지금부터는 다시 나무를 심느라 큰 힘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겠다.”
하였다. 날이 저물어 재전으로 돌아와서는
예방 승지 이면응(李冕膺)과 대축(大祝) 어용겸(魚用謙)에게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정조 42권, 19년( 1795 을묘 / 청 건륭(乾隆) 60년) 윤2월 9일 신묘 1번째기사
상이 혜경궁(惠慶宮)을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에 행행하였는데, 두 군주(郡主)가 따라갔다.
정조 44권, 20년( 1796 병진 / 청 순치(順治) 1년) 1월 21일 무진 1번째기사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상이 작헌례를 마치고는 부복하여
눈물을 흘리며 얼굴을 가리고 목메여 흐느끼자, 따라간 신하들이 모두 놀라고 슬퍼하며
서로 번갈아가면서 상께 억제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상이 오열하면서 이르기를,
“나의 지극한 슬픔이 어느 때인들 그렇지 않을까마는,
오늘의 이 예(禮)에야 더욱 어찌 감정을 참을 수 있겠는가.”
정조 48권, 22년( 1798 무오 / 청 가경(嘉慶) 3년) 2월 4일 무술 1번째기사
상의 건강이 점차 회복되므로, 현륭원에 나아가 친제(親祭)를 행하고
현륭원 위를 봉심한 다음, 화성의 행궁에 돌아와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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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자주 찾았다고 하던데..
그때마다 심하게 흐느끼고 오열했다고 하네요.
오열하다가 혼절한적도 있다고 하네요.
어린시절 뒤주에 갇힌 아버지의 모습과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암살에 위협에 시달려온 자신의 처지가 한에 맺혀 그러겠지요.
저같아도 너무나 좋아했던 아버지 앞에라면
그 한스러움을 토해내고 싶었을 겁니다.
안쓰러운 정조대왕 ㅜ.ㅜ.ㅜ.ㅜ.ㅜ.ㅜ.ㅜ.ㅜ.ㅜ
자 이제 정조하면 떠오르는 화성과 규장각에 대해서 말해보지요.
먼저 화성입니다.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선왕인 영조의 둘째왕자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부근에 있던 관아를 수원의 팔달산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 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수도를 한양에서 옮기려는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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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조는 천도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왜 막대한 물량을 들이면서 이 성을 쌓았을까?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을까?
옷도 기워 입을 정도로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정조가
단순히 효도하려 이런 역사를 벌였겠는가?
아닙니다.
정조는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정조실록 15년)라고 말했습니다.
또 윤행임이 쓴 비문에는 “화성을 쌓은 데에는 은근한 의도가 있어서
초당을 노래당(老來堂), 정자를 미로한정(未老閑亭)이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끝내 몇 년 뒤에 세상을 떠나
천고의 제왕들에게 없던
훌륭한 사적들이 당대에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노래당이란 늙어서 살집, 미로한정은 늙지 않아서
한가롭게 지낼 정자라는 뜻입니다.
그 자신이 와서 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말입니다.
바로 왕도를 옮기겠다는 표현일 것입니다.
서울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들은 이 의도를 엿보고 몸을 떨었습니다.
화성으로 천도하는 날, 기득권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을 지경으로 빠질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습니다.
정조의 독살설과 천도문제가 관련이 있을지 모를 일입니다.
화성(수원)에는 정조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수원은 곧 정조의 도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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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습니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습니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 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성곽자체가 "효"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외에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 성으로
이와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 찾아볼 수 없는 평산성의 형태로
군사적 방어기능과 상업적 기능을 함께 보유하고 있으며
시설의 기능이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동양 성곽의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습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단순한 성묘의 수준을 넘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행차는 국가적으로 매우 큰 행사입니다.
수많은 병력과 인원이 동원되고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행행은
왕이 군수권과 재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않으면 실현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정조의 능행은 자신의 왕권 장악을 모든 정치적 적대세력에게 나타내는 동시에
새로운 정치 개혁의 기반을 다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정조는 화성행차를 하는 동안에
백성과 대화를 갖는 시간을 자주 가졌습니다.
백성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했던 왕
조정대신들한테는 참으로 눈엣가시 같은 왕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눈에는 무섭기도 했겠네요. ^^
하지만 이런 외로운 싸움을 이기고 진정 더 새로운 조선을 꿈꾸기
한달전....승하하시고 맙니다. ....
성품도 수수하고 알면 알수록
안쓰러운 분입니다.
두번째로 집현전과 비교되는 규장각에 관해 알아봅시다.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인 1776년 규장각을 만듭니다.
이 규장각은 초기엔 내각과 외각으로 나눠졌는데요,
내각은 활자(지금의 인쇄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를
만들고 각종 책을 펴내 만드는 일을,
외각은 만든 책을 출판하는 일을 했습니다.
3년 후엔 외각에 검서관을 두어 박제가 등
서얼(양반집에서 정실부인이 아니라 첩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출신 학자들을 등용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정조의 서얼 차별 폐지에 의한 것으로 유득공, 이덕무 등 능력있는
많은 서얼들이 빛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은 정조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습니다.
또 왕권 강화와 문화, 학문 발전에 큰 영향을 주죠.
정조는 또 당하관(총 9품 중 정3품 이하의 관리들)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으로 삼고 한 달에 2번씩 시험을 봐 못 보면 벌을 받고
성적이 좋으면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관리들이 공부를 하도록 한 정책이죠.
또 규장각에선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신하들이 토론을 하는
경연관으로서의 역할도 했습니다.
1781년엔 규장각을 당시 서울의 관청들 중 가장 컸던 도총부 건물로 옮겼고
실록을 보관하던 강화사고 별고를 고쳐 지어서 외규장각이라 했습니다.
또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우리나라 책들을 보관하는 서고,
중국 책들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웠죠.
규장각 학자들은 높은 대우를 받았고
아침 저녁으로 왕을 문안했으며
신하와 왕이 얘기할 땐 이를 기록하는 사관 역할을 했습니다.
규장각은 기능이 계속 강해지고 확대되어 나중엔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의 기능을 모두 가진 정권의 핵심 기구가 됐고
그 규장각에서 나온 인재들이 정조의 개혁정치와 탕평책을 도왔습니다.
정조가 규장각 인재를 뽑을 때는
비록 당의 눈치를 봤지만
당색이 가장 적은 인물로 고루고루 뽑았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 탕평책이란 국사시간에 많이 들어본 것이 나오는데요.
이건 내일 part4에서 자세히 다루어 봅시다 ^^
그럼 우리 어린 세손저하의 영특함을 느낄 수 있는
영조와의 대화를 엿보고 끝내도록 하지요
임금이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다.
임금이 사서(司書) 정술조(鄭述祚)에게 묻기를,
“동궁이 오늘 무슨 장(章)을 강(講)하였는가?”
하고, 이어세손에게 묻기를,
“공자(孔子)가 어찌하여 자주 물에 대하여 일컬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것이 밤낮 쉬지 않고 흐르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나 도랑을 혹 사람의 힘을 써서 틔우기도 하고
파기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더러운 것들이 막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능히 몸에 공부(工夫)를 하기를 마침 내를 틔우는 것처럼 할 수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마땅히 거울을 닦는 것처럼 마음을 씻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거울의 본질이 어두워 닦는다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본질이 어찌 일찍이 어두웠겠습니까? 먼지에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닦으면 밝아질 것이니,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잘한다 칭찬하고,
여러 신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장차 너를 위하여 자성편(自省編)을
문답 형식으로 만들어 춘방(春坊)에 내릴 터이니,
너는 그것을 좌우(左右)에 두고 경계하며 반성하도록 하라.”
정조대왕이 11살 때 영조 맘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십니다.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른 영특한 답변이십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인 이산갤
그리고 또한가지
조선 시대 때 신하들과 왕이 서로 토론하고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에 왕이 신하를 가르친 왕이 딱 두 명이 있데요..
그 분들이 바로 세종대왕과 정조대왕이십니다.
다음시간에는 탕평책과 그의 어머니
그리고 그다음에는 당파싸움과 영조와 정조
태종과 세종도 비교해 보도록 하죠^^
자 여기서 문제~!
조선왕조계보를 모르시는 분들 없겠죠?
갑니다~
태정태세 비욘세 예성연중 인명선
광인효현 숙경영 정순헌철 고순종
태정태세 비욘세?
아니져~
태정태세 문단세
맞습니다~
딴건 몰라도 이건 외우자구요~^^
p.s.
우리가 광해군과 소현세자 정조를
안쓰러워 하는것은
조선의 앞날을 다 알기에
나라가 안쓰럽기 때문입니다.
정조를 더 안타까워 하는것은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꿀 마지막 기회를
안타깝게 보지 못하고
몰락으로 치닫는
조선의 역사가
내나라의 역사가 안쓰러워서 입니다.
울지말고 강해져라 대한민국~!!!!
첫댓글 태혜정광 경성목!!이걸 외워야죠 ㅡㅡㅋ 조선보단 고려를
태혜정 광경성 목현덕 정문순 선헌숙예 인의명 신희강 고원렬 선숙혜 목정공 우창공/// 산토끼에 넣어서 해보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