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리스마와 지혜의 혼동
<문제가 잘 발생하는 주요 영역>
영적 단체에서
위험하게 여기는 분야 중의 하나는
권력의 남용이다.
이것은 스승이나 지도자가
그 단체의 모든 힘을
마음대로 휘두를 때 발생하기 쉽다.
스승이 원하는 바가 최고의 권위일 때,
제자들이 스승의 한마디 한마디를
깍듯이 받들어 모실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저지되고
반응을 경청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스승은
쉽사리 제자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모두
제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미명하에 말이다.
부지불식간에 중독된 권위가
지혜를 대신하고,
사랑은 스승이 정하는 바에 따라
분배되는 하사품으로 변질되어간다.
권력이 남용되면
파벌과 알력 싸움이 생긴다.
'남겨지는' 자들이 있고,
버림받거나 처벌받는 자들이 있다.
파벌과 가신 그룹,
비밀과 권력 투쟁이 생긴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권력의 남용이 망상증과
사교집단과 여타의 끔직한 일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스승과 단체의
두 번째 문제 영역은
돈의 오용이다.
영적인 삶에서 발견하게 되는
은총은
후덕한 너그러움을 일깨워주어서,
성공한 단체에는
돈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신을 위해,
사원을 짓기 위해,
지도자의 신성한 사업을 위해서.
대부분의 종교 전통은
단순한 생활 방식에 젖어 있으므로
그 지도자들은
돈을 만지는 데 미숙하다.
수행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매달리지 않는 이상,
지도자는
이 물질주의적인 사회에서
너무나 쉽게 돈의 마력에 휩쓸려서
이내 경호원에 둘러싸이고,
영성이라는 미명하에
필요에서부터 욕망으로
빠져들어가버린다.
최악의 경우, 단체 구성원들에게는
금욕 생활과 무보수 봉사를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 구좌 개설과 호화생활,
헌금 사기 등의 행각으로까지
폐단이 이어질수 있다.
세 번째로 흔한 폐해는 성 문제이다.
불행이다.
이 시대에는
성적 에너지의 오용이
너무나 널리 번져 있어서,
스승이 이 부분에 대해
깨어 있지 못할 때
이것은 쉽게
그 단체의 문제로 불거질 수 있다.
대부분의 영적 가르침이 요구하는
금욕주의와
스승의 욕망이 부딪힐 때 생긴
양면성은
은밀한 스캔들을 만들어낸다.
스승에게 접근하는 대가로 교환되는 섹스,
'탄트라의 이름으로..'
제자가 스승에게 바치는 섹스 등,
다양한 형태의 성적 착취가 일어난다.
이러한 관계는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한다. 극단적으로는 이런 성적 비행이
비밀스러운 규방을 만들어내고,
아동학대와,
심지어는 자신의 특별한 힘이
제자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공언한 스승에게서
제자들이
에이즈를 옮는 일도 있었다.
네 번째 문제 영역은 술과 마약의 남용이다.
현대 문화는 온갖 중독에 빠져 있어서,
이것이 영적 단체에까지 번져들어온다.
어떤 영적 전통에서는
술 취한 상태를
영적 변성에 비유하면서 찬양한다.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공공연한, 혹은 은밀한
중독에 대한
핑계와 변명으로 악용될 수 있다.
알코올 중독, 혹은 마약에
중독된 스승들은
그의 단체를 모두 타락시키고
중독 문화에 빠지게 된 제자들의 삶에
큰 고통을 안겨준다.
<카리스마와 지혜의 혼동>
영적인 착각을 일으키는
또 다른 이유는
카리스마를
진정한 지혜와 혼동하기 때문이다.
어떤 영적 지도자들에게는
비범한 의식 상태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확장되기 시작하면,
이런 카리스마적인
목사나 신부, 선사, 신비주의자, 랍비, 구루등은
쉽게 지복감과 초월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러한 영적 힘은
지혜나 깨달음이나
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로
잘못 받아들여지기 쉽다.
우리는 힘과 카리스마는
단지 힘과 카리스마일 뿐이며,
이런 에너지는
선동적인 정치가나 연예인들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것임을
쉽게 잊어버린다.
카리스마적이기는 하지만
지혜롭지 않을 수는 얼마든지 있다.
거꾸로,
지혜는 반드시
화려하거나 강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박하고 겸손한 가슴에,
가장 평범해 보이는 삶 속에서
드러날 수 있다.
특별한 어떤 영적 권능을 내세우며
떠받드는 영적 단체라면
추종자들은 각별히 깨어 있어야만 한다.
비밀의 가르침이나
고대로부터 내려왔다는 비전의 계보가 새삼스럽게 부각된다든지,
어떤 특별한 그룹의
사람들이 선택되어
구원을 받거나
깨달음을 얻는다는 등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그 단체는
사교 집단으로 변질될 시기가
무르익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언제나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맹목적인 카리스마의 무대에서
흔히 발생하는 전형적인 위험의 징조다.
지혜로운 전통들에는
이러한 오도를 예방하는
안전 장치가 있다.
그것은 혼히
원로들이나 존경받는 스승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각자의 영적 상태나 행동을
상호 감시하고
감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간성을 배제한다는 것>
인간의 세속적인
갈망에 대한 부인은
전세계의 영적 전통들에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상화의 한 형태라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고 있다.
이런 이상에서는
스승이나 수도원장이나 지도자들이
세상을 초월하고
성자와 같은 단순함과
금욕적인 순수함을 유지하기를 기대한다.
단순한 삶을 선택하는 것은
큰 덕목이기는 해도
금욕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
욕망을 부인하는 것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수녀나 신부나 승려들은
성적으로 짝지워진 관계의 영향권에서 벗어남으로써
기도와 헌신과 단체 생활에
삶을 온전히 바칠 수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의도적인 금욕과 독신의길을
가치있고 존중할 만하다.
이것이 건전한 순수성을
지니고있음을 보여주는 표시는
다음과 같다.
즉 이런 역할을 자임한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그저 억눌러버리거나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성애와 인간적 친교와
모든 교류의 감정을 충분히 인정하되,
그것을 풍성한
영적 삶속으로 포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 시각속에
인간성을 거부하는 태도가 자리잡을때
문제가 일어난다.
구도자들에게는
이것이 청교도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자신을 경험으로부터
스스로 단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스승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사심없고 죄를 짓지않는
순수성에 대한 기대를 받다보면
자신의 그늘진 면을
억압하게되거나 ,
그것에 대해 무지해질 수있다.
이처럼 그릇된 이상화에
사로잡힌 지도자는
인간적인 요구, 성욕, 슬픔, 취약성 등이
쉽게 간과될 수있다.
이런 이상에 치우친 영적 체계들은
이런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도움이나 가르침을 거의 주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의 경지가
아무리 순수하고 고상하더라도
간과된 인간성은
돌아올 것이며,
충족되지 않은 요구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육신의 요구와 인간적인 요구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악마로 만들어져서
타인에게 투사될 수있다.
이것이 망상증에 불을 붙이고
마녀 사냥과 종교재판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고난과 깨어남이 모두
보다 높은 선을 위한 것임을 인식할때 ,
우리의 원정은
깨달음으로 마무리된다.
채워지지않는 욕망이
우리의 영적탐구속에 끼어들어서,
영적체험을
단지 에고를 확대시키는 데만
봉사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도자가 영적 에너지에다
자신을 지나치게 동화시키면,
자신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봉사를 받아야 한다고
믿을 수도 있다.
스승의 주위에
가르침 자체보다
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게끔 하는
유혹이 있다면
우리는 주의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로운 이들은
자신이 발견하는 영적에너지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일 뿐이다.
도겐선사는
선사의 삶이란
하나의 연속적인 실수,
즉 실수의 연발을 통해서
공부할 수있는
하나의 기회라고 말했다.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이
아무리 신체적으로
잘 조율이 되어있다고해도
그것이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성숙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것은
자명하다.
거꾸로, 지적으로 명석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몸이나 감정을 다루는데에는
무지해서 곤란을 겪을 수도 잇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기분을 잘 파악하고
인간관게도 좋지만
자기를 제한하고 구속하는
자신의 관념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할 수도 있다.
영적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다양한 의식상태를 넘나드는
기술을 갖춘 명상지도자도
감정이나 인간관계의 영역에서는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다.
신과의 친교를 즐기는
헌신적인 수사와 수녀들도
가족과, 혹의 자신의 몸과의
관계는 엉망일 수도 있다.
신체가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고
호흡과 생각을 잘 제어할 수있는
요가 수행자나 구루들도
스스로 고난을 자초할 수 있는,
자신도 모르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성숙한 대부분의
승려, 수녀, 명상지도자, 도인들도
결국은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했던
삶의 전체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영적수행 자체가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를 부인하거나 도외시하도록 가르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 수행이
그들의 수행에 포함될때까지
그들은 감정적 문제로부터
신체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필요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진실은 내부의 경계를
허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실된 자아의 외침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의 문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그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혼이나 우울증, 질병,
혹은 이상한 실패 등을 통해서
그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영적 길에서 성장해가면
욕망과 열정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썼듯이
'천국의문을 들어가는 사람은
열정이 없거나
그것에 족쇄를 채운 사람이 아니라,
열정에 대한
이해를 키운 사람이다'
모든 욕망을 저주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을
지혜와 감수성에 연관시킬 수있다.
성숙한 가슴은
심지어 분노와 증오의 힘과도
함께 일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증오의 깊은 고통으로부터
분노를 분간하는 것을 배운다.
우리는 그것을 모두
강력한 에너지로서 이해한다.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에너지들을 이해하여
그것을 명료한 힘과 바꾸어놓는 것이다.
지혜로운 가슴은
불완전함 그 자체에
자비심을 준다.
ㅡ '깨달음 이후의 빨랫감' ㅡ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