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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중국과 조선의 시문(詩文)에 관한 비평을 그의 문집 『농암집』 34권 「외편(外篇)」에 남겼다.
● 한유(韓愈)의 문장 중에 〈원도(原道)〉를 위시하여 〈맹간(孟簡)에게 준 편지〉와 〈문창(文暢)을 전송한 서(序)〉는 논의의 정대(正大)함과 필력의 호방함이 맹자의 문장보다 못하지 않다. 〈맹간에게 준 편지〉는 특히 더 좋으니, 맹자에 대해 논한 부분이 억양이 반복되어 극히 보기 좋다.
● 밤에 꿈속에서 어느 절에 갔다가 변사(辨師)라는 이름의 노승을 만나 유가와 불가의 차이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내가 희로애락을 운운하자 중이 이르기를, “그것은 바로 육근(六根 즉 눈,귀,코,혀,몸,뜻을 말함)과 육진(六塵 즉 色,聲,香,味,觸,法을 말함)이 자아내는 망상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마음은 어떤 물건입니까?” 하자, 중이 이르기를 “진여(眞如.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체(體)입니다.” 하였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희로애락은 마음의 용(用)입니다. 용이 곧 체이니 용만 유독 진여가 아니란 말입니까?” 하였다.
● 영평(永平) 응암(鷹巖)에서 철원(鐵原) 풍전역(豐田驛)으로 향하는 길에 낭유령(狼踰嶺)에 들렀는데, 고개 아래의 수석이 매우 아름다워 말을 멈추고 잠깐 앉았다. 세차게 흐르는 여울과 맑은 못, 푸른 벼랑과 늙은 나무가 극히 심원(深遠)하고 호젓한 운치가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일어설 생각을 잊게 하였다. 이어 생각하기를, ‘깊은 산 외딴 골짜기 안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을 텐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또 가지 못하니, 개탄스럽다.’ 하였다. 최고운(崔孤雲.최치원)이 이르기를, “인간 세상의 요로 통진 눈에 아니 뜨이고, 세상 밖 청산녹수 꿈에서도 돌아가네.[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 하였는데, 이 말을 세 번 반복해 되뇌며 한스러워하였다.
● 나는 밤에 꿈속에서 산수를 노니는 일이 매우 많다. 금강산 유람에서 돌아온 뒤로 8, 9년 동안 꿈속에서 비로봉(毗盧峰)과 만폭동(萬瀑洞) 사이를 밟은 것은 이루 다 기억할 수도 없고, 이따금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이한 경치를 만나기도 하는데, 이 어찌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니겠는가. 옛날 주자가 스스로 말하기를, “몇 밤을 연달아 꿈속에서 글을 풀이한다.” 하고, 이것이 비록 좋은 일이기는 하나 이 또한 꿈에 나타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산수 꿈을 꾸는 것이 비록 영화와 이득을 꿈꾸는 것과 다르기는 하나 한쪽에 치우쳐 매인 마음의 발로라는 점은 똑같다. 이 점을 스스로 경계해야 하겠기에 우선 이렇게 써 놓고 보는 바이다.
● 공자가 이르기를, “상사에는 형식만 잘 차리는 것보다 차라리 슬퍼하기만 하는 것이 낫다.[喪 與其易也 寧戚]”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비문(碑文)을 지으면서 누가 거상을 잘했다고 말할 적에는 대체로 다 ‘척이함비(戚易咸備)’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법과 애통한 심정이 모두 갖추어졌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성인의 뜻은 바로 형식만 잘 차리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차라리 슬퍼하기만 하는 것을 취한 것이다. 그래서 주자가 풀이하기를, “이(易)는 다스린다는 말이니 절문(節文)은 익숙하나 애통하고 비통한 진심이 없는 것이고, 척(戚)은 오로지 슬퍼하기만 하여 절문이 부족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 두 가지는 정반대의 것이다. 어찌 둘을 겸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예를 들어 부자(夫子)가 이르기를, “사치하는 것보다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다.” 하였는데 지금 만약 ‘사치와 검소를 모두 갖추었다.’고 한다면 무슨 의리를 담은 글이 되겠는가. 그런데도 선배들의 글 중에 이 말을 사용한 경우가 매우 많으니, 한때 우연히 실수한 것을 인습하여 쓸 뿐 더 이상 깊이 살펴보지 않아서가 아닌가 한다. 또 내 생각에 이 말의 잘못은 명(明)나라 사람에게서 시작된 것 같으니,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의 비문에는 이러한 말이 없다.
● 그리고 비문(碑文)의 글이 잘못을 인습하여 우습게 되는 것은 ‘대자리를 바꾸었다[易簀]’는 말만 한 것이 없다. 대자리를 바꾸는 것은 사실 성현이 바르게 생을 마감하는 일이다. 그러나 증자(曾子)의 대자리는 바로 계손(季孫)이 준 것으로 예법에 어긋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바꾼 것이니, 그 때문에 생을 바르게 마감한다는 뜻이 되었다. 사람들이 어찌 모두 계손의 대자리를 가져서 죽음을 앞두고 반드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문장가들이 고사(故事)를 인용하는 것은 실로 이런 부류가 많다. 그러나 비문의 경우에는 그 성격이 본디 신중하고 엄격하여 이력과 생졸(生卒)을 서술할 적에 오직 사실에 근거하여 그대로 써야지 옛말을 인용할 필요가 없다. 비록 혹 고사를 인용한다 하더라도 상세히 살펴 합당하게 해야 하니, 예를 들어 이불을 걷어 손발을 보라는 것과 대자리를 바꾼 것이 모두 증자의 일이기는 하나 이불을 걷어 손발을 보라는 말은 사람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대자리를 바꾸었다는 말은 사람마다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주자가 지은 연평(延平.이동)의 제문에 비록 ‘들어냈다[擧扶]’는 말이 있기는 하나 이는 ‘대자리를 바꾸었다’고 직접 말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그리고 제문은 비문과는 다르니, 이것을 선례로 삼아 원용해서는 안 된다.
● 왕엄주(王弇州.왕세정)는 반고(班固), 사마천(司馬遷)의 문장을 배웠다고 스스로 말하였으며 비문(碑文)에 일을 서술할 적에는 그들의 글을 극력 모방하여 추종할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실은 송(宋)나라의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보다도 훨씬 못하였다. 지금 구공(歐公)의 비문들을 읽어 보면 강령을 제시하고 의리가 드러나는 중요한 점을 착종하는 데에 종종 법도가 있어 간략하면서도 빠짐이 없고 상세하면서도 번다하지 않아서 느낌이 한가하면서도 사정이 곡진히 담기고 기풍이 생동하는 부분은 또 왕왕 그림을 그린 것 같으니, 모녹문(茅鹿門.모곤)의 “태사공(太史公.사마천)의 정수를 터득했다.”는 말이 이것이다. 왕엄주는 옛사람이 강령을 제시하고 의리가 드러나는 중요한 점을 착종한 묘미를 알지 못하고 그저 옛사람의 글귀와 글자를 그대로 따라서 모방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비문에 일을 서술할 적에 대소경중을 막론하고 모두 써서 걸핏하면 온통 번다하고 잗단 일들로 가득 차곤 하였으니, 강령을 제시하거나 의리가 드러나는 중요한 점을 끌어내어 써넣지도 못하고 수미 본말에 늘이거나 줄여 변화를 준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스스로 기풍이 돋보인다고 한 부분은 사마천의 글자, 반고의 글귀를 인용하여 수식하고 부회한 것에 불과하였다. 이 어찌 옛사람의 묘미와 함께 놓고 논의할 가치가 있겠는가.
● 옛사람들의 간략함은 문장 작법을 간략히 한 것이었는데 명(明)나라 사람들의 간략함은 자구(字句)를 간략히 한 것이었으며, 옛사람들의 상세함은 대체(大體)를 상세히 한 것이었는데 명나라 사람들의 상세함은 작은 일을 상세히 한 것이었다. 그래서 구양공(歐陽公.구양수)이 지은 왕 문정공(王文正公.왕단), 범 문정공(范文正公.범중엄)의 비문은 그 글이 2000자가 채 못 되면서도 이들이 정승이 되어 펼친 사업과 일생 동안의 중요한 품행을 거의 다 묘사하였다. 반면에 엄주(弇州.왕세정)는 장사꾼이나 부녀자의 전기를 지을 적에도 인물이 보잘것없어 기록할 가치가 없는데도 그 글이 걸핏하면 수백, 수천 자에 달하였으니, 여기에서 글솜씨가 있고 없는 차이를 볼 수 있다.
● 《마사(馬史)》 중에 예를 들어 〈신릉군전(信陵君傳)〉의 신릉군이 후생(侯生)을 맞이한 일을 서술한 대목과 〈관부전(灌夫傳)〉의 관부가 좌중을 꾸짖은 일을 서술한 대목 등은 곡절이 자세하여 털끝만치도 빠뜨린 것이 없다. 엄주(弇州), 창명(滄溟.이반룡) 같은 이들은 전기를 지을 적에 대체로 모두 이런 글을 모방하면서도 〈신릉군전〉은 오직 선비를 예우하고 현자에게 겸손하여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힘을 얻은 것을 주제로 하고 〈관부전〉은 오직 전분(田蚡)과 두영(竇嬰) 두 집안이 원수를 져 서로 다툰 것을 주제로 하였는데 후생을 맞이한 대목과 좌중을 꾸짖은 대목이 바로 그 의리가 드러나는 긴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상세하게 서술할수록 묘미가 더해진 것임을 몰랐다. 이것을 미루어 유례(類例)를 찾아보면 《사기》와 《한서(漢書)》의 여러 전(傳)들이 모두 그러하다. 만약 일의 대소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두 자세히 순차적으로 서술하려 한다면 어찌 요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엄주 등 여러 사람들은 이러한 뜻을 몰랐기 때문에 전기를 지을 적에 그 사람이 일생 동안 한 일을 들어 일상생활의 자잘한 일까지 한결같이 《사기》, 《한서》의 순차적인 서술법에 따라 묘사하였으니, 이 또한 가소롭다.
● 비문은 역사서의 전기와 문체가 대체로 같다. 그러나 역사서의 전기는 그래도 상세하고 풍부한 것을 위주로 하는 반면에 비문의 경우는 오로지 간략하고 엄격한 것을 위주로 한다. 그래서 한유(韓愈)의 비문에 사실을 서술한 것이 《사기》, 《한서》의 전기와 매우 다른 것이니, 비단 문장이 다를 뿐만 아니라 글의 기본 성격도 당연히 그렇게 다른 것이다. 구양공(歐陽公)이 사마천의 문장을 배웠으면서도 비문을 지을 적에 역사서의 전기의 문체를 다 쓰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명나라 사람들에 이르러 비로소 순전히 역사서의 전기의 문체를 사용하여 비문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게다가 옛사람들이 일을 서술한 법도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장에 요점이 없어져 비문의 간략하고 엄격한 필법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 범 문정공(范文正公)은 송(宋)나라의 제일가는 인물로서 일생 동안 행한 일 중에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한 것이 극히 많았다. 그런데도 구양공이 신도비를 지을 적에는 오직 출사(出仕)와 은거에 따른 사업 및 일생 동안의 중요한 품행만을 서술하고 그 나머지 좋은 말과 선행 따위는 모두 생략하였다. 예를 들어 친족들을 구휼하기 위해 의전(義田)을 설치한 일과 벗의 상사(喪事)를 돕기 위해 보리를 실은 배를 통째로 부의한 일은 더욱이 옛사람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비문에 이 일조차 싣지 않았으니, 일을 서술하는 데에 있어 이처럼 간략하고 엄격하여 구차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대의 비문은 비록 큰 사업을 펼치고 명절(名節)이 뛰어난 명현(名賢), 위인(偉人)이라 해도 반드시 그 자잘한 행실을 다 기록하고 심지어는 문장을 쓴 작은 일조차 모두 빠뜨리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문을 받는 이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짓는 사람도 마음이 편치 않아 하는데, 습속이 잘못된 지가 오래되어 변화시키기가 어렵다.
● 명(明)나라 사람들은 시(詩)를 일컬을 적에 걸핏하면 한대(漢代), 위대(魏代), 성당(盛唐) 시대를 말하곤 한다. 그러나 한대, 위대는 본디 시대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이 말하는 당대(唐代)의 시라는 것도 진정한 당대의 시는 아니다. 나는 일찍이 “당대의 시가 어려운 것은 비범하고 활달한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기품이 있는 것이 어렵고, 고상하고 수려한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온후(溫厚)하고 깊고 담박한 것이 어렵고, 성음이 맑고 큰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화평하고 유원(悠遠)한 것이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는데, 명나라 사람들은 당대의 시를 배울 적에 오직 비범하고 활달함만 배우고 자연스럽고 기품이 있는 것은 터득하지 못하였으며, 오직 고상하고 수려한 것만 배우고 온후하고 깊고 담박한 것은 터득하지 못하였으며, 오직 성음이 맑고 큰 것만 배우고 화평하고 유원한 것은 터득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완전히 딴판이 된 것이다.
● 시는 성정(性情)의 발현이자 타고난 기지가 동한 것이다. 당(唐)나라 사람들은 이 점을 터득하고 시를 지었기 때문에 초당(初唐), 성당(盛唐), 중당(中唐), 만당(晩唐)을 막론하고 대체로 다 자연스러웠다. 지금은 이 점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성음과 모습을 모방하고 분위기와 격식에 힘써 옛사람을 따르려고 하는데, 그 성음과 면모가 비록 혹 비슷하기는 하나 기상과 흥취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 명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점이다.
● 송(宋)나라 사람들의 시는 역사 사실에 대한 의론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는 시인들의 큰 병통이므로 명나라 사람들이 이 점을 공격한 것은 옳다. 그러나 그들 자신이 지은 시가 꼭 이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고 간혹 도리어 이보다 못하기도 한데, 이는 어째서일까? 송나라 사람들은 비록 역사 사실에 대한 의론을 위주로 하기는 하였으나 축적된 학문과 가슴에 맺힌 뜻이 뭔가에 감격하여 촉발되고 솟구쳐 나와서 격식에 구애되지 않고 관습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기상이 호탕하고 힘이 넘쳤으며 때로는 타고난 기지가 발하는 데에 가깝기도 하였으니, 그 시를 읽노라면 그래도 성정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명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격식에 얽매이고 걸핏하면 모방을 일삼아 전체적인 맥락에 맞지도 않는 것을 본뜨려고 애쓰다가 더 이상 천진함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그들이 도리어 송나라 사람들보다 못하게 된 까닭일 것이다.
● 시는 실로 당(唐)나라 시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또한 당나라 시를 닮을 필요는 없다. 당나라 사람의 시는 성정이 일어나 담기는 것을 위주로 하고 역사 사실에 대한 의론을 일삼지 않았는데, 이것이 본받을 만한 점이다. 그러나 당나라 사람은 당나라 사람이고 지금 사람은 지금 사람이다. 서로 간의 시간적 거리가 천백여 년이나 되는데 성음과 기상이 조금도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는 이치와 형세상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억지로 비슷하게 하고자 한다면 나무를 깎아 만들거나 진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 같은 것이 될 뿐이니, 형체는 비록 흡사하다 할지라도 그 천진성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이 어찌 귀할 것이 있겠는가.
● 송나라의 시 중에는 산곡(山谷.황정견)과 후산(后山.진사도)의 시가 당대에 으뜸으로 숭상되었다. 그러나 황씨의 함부로 격식을 어겨 생경한 시와 진씨의 앙상하여 매우 딱딱한 시는 온후(溫厚)한 맛이 없는 데다 또 초탈한 운치가 부족하여 당나라의 시에 비해 매우 수준이 낮을 뿐만 아니라 두보(杜甫)의 시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니, 공동(空同.이몽양)의 “색(色)과 향(香)이 흐르지 않는다.”는 비판이 정말로 확론이다. 간재(簡齋.진여의)는 비록 기상이 다소 부족하기는 하나 소릉(少陵.두보)의 가락을 터득하였고 방옹(放翁.육유)은 비록 격조가 다소 낮기는 하나 시인의 흥치(興致)를 극히 잘 체화하였으니, 산곡, 후산을 배우는 것보다는 차라리 간재, 방옹에게서 취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들은 시도(詩道)와의 거리가 그래도 가깝기 때문이다.
●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이전의 구양공(歐陽公), 형공(荊公.왕안석) 같은 이들은 비록 당나라의 시를 순전히 체화하지 못하기는 하였으나 율시와 절구 등 여러 시체(詩體)들이 그래도 당나라 시의 격조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았다. 다만 구양공은 지나치게 유창하고 형공은 지나치게 정밀한 데다 또 역사 사실을 의론하는 누(累)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동파(東坡.소식)가 나와 비로소 한 번 변하고 산곡(山谷), 후산(后山)이 나옴에 이르러 또 한 번 크게 변하였다.
● 모녹문(茅鹿門)이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를 지은 것은 왕세정(王世貞), 이반룡(李攀龍) 등 여러 사람들의 표절하는 습성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금의 문장에 대해 치우치거나 바름, 잘되거나 잘못됨을 논한 말이 대체로 적절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지은 문장을 보면 만연체로 쓸데없이 길고 경박하고 사치스러워 말은 많으나 뜻이 부족하고 수사에 치우쳐 실질이 약해서 엄주(弇州.왕세정)의 문장이 체재가 정돈되고 구성이 치밀한 것보다 도리어 못하다. 이는 기풍 있고 유창한 구양공(歐陽公)의 문장을 배우려다가 법도와 조리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니, 문장을 짓기란 참으로 어렵다 할 것이다.
● 명(明)나라 문장가 중에 예를 들어 손지(遜志.방효유), 양명(陽明.왕수인), 준암(遵巖.왕신중), 형천(荊川.당순지)은 모두 구양수, 소식의 유파인데, 이 가운데 손지는 규모가 크고 필력이 활달하기는 하나 수렴하여 불필요한 것을 잘라내 버리는 노력이 부족하고, 양명은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고 민첩하여 글을 다루는 능력이 있고 열고 닫는 등의 변화를 잘 구사하기는 하나 깊고 전아(典雅)하고 중후한 운치가 부족하다. 이것이 구양수, 소식의 경지에 미치지 못한 점이다. 준암, 형천은 큰 규모가 손지만 못하고 뛰어나고 민첩한 재주가 양명만 못하지만 체재는 더 정밀하다. 그러나 요컨대 방효유, 왕수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 명나라의 시인 중에 예를 들어 서창곡(徐昌穀.서정경), 고자업(高子業.고숙사)은 비록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과 서로 화응(和應)하기는 하였으나 그 타고난 재주가 본디 당나라 시인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룩한 경지가 당대에 매우 출중하였다. 서창곡은 기풍과 수려함이 뛰어났고 고자업은 그윽하고 담박함이 뛰어났는데, 고자업은 성정(性情)에 있어 더욱 근사하였다. 이 밖에 당응덕(唐應德.당순지), 채자목(蔡子木.채여남) 같은 이들도 모두 당나라 시를 배웠으니, 이들의 시는 온화하고 한가하고 고요하여 목청 높여 부르짖거나 과격하게 특이함을 추구하는 습성이 없었다.
● 고자업의 시는 은은하고 질박하고 심오하고 온아(溫雅)하니, 비록 말은 간단한 듯하나 맛이 실로 깊다. 그리고 그 빛이 어두우면서도 소리가 맑아서 독자로 하여금 반복하여 읊조리기를 그치지 못하게 하니, 만약 당나라 때에 있었다면 그도 명가(名家)가 되었을 것이다. 일찍이 그의 자서(自序) 몇 편을 읽어 본 적이 있는데 대체로 그의 시와 비슷해서 매우 좋아하고 많이 얻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 엄주(弇州)의 무리가 비록 공동(空同.이몽양)을 추앙하는 것 같기는 하나 그들의 논의를 보면 늘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이는 공동이 시어를 골라내고 다듬는 노력이 미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보건대, 공동의 장점은 거칠고 혼연(渾然)하며 고집스럽고 질박한 것으로, 이는 바로 시어를 골라내고 다듬는 노력이 미진한 까닭에 참된 기운이 그래도 다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엄주 등 여러 사람의 경우는 헤아리기를 공교롭게 하고 다듬기를 정밀하게 할수록 참된 기운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이것이 도리어 공동보다 못하게 된 까닭이다.
● 하대복(何大復.하경명)은 타고난 자질이 온아(溫雅)하였다. 그래서 비록 옛것을 배운다고 자처하기는 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처럼 괴벽하고 과격하지는 않았으니, 그의 시가 비록 진지하고 뛰어남이 부족하기는 하나 기상이 넓고 평탄하며 온화하고 전아(典雅)하여 그래도 시인으로서의 풍도가 있었다.
● 헌길(獻吉 이몽양(李夢陽))은 사람들에게 당나라 이후의 글을 읽지 말도록 권하였는데, 이는 실로 너무나 협소하고 비루한 견해이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작법을 배우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괜찮다. 이우린(李于鱗.이반룡)의 무리는 시를 지을 때에 전고를 사용함에 있어 당나라 이후의 말은 쓰지 말도록 금지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가소롭다. 시를 짓는 데에 있어 중요한 것은 성정을 풀어내고 사물을 묘사하되 생각과 느낌이 닿는 것마다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한 일과 거친 일, 아담한 말과 속된 말도 가려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고금을 구별한단 말인가. 이우린의 무리는 옛것을 배움에 있어 애당초 정신적으로 오묘한 이해와 깨달음이 없이 그저 언어를 본뜰 뿐이었다. 그래서 당나라의 시를 배우려고 하면 당나라 사람의 시어를 사용해야 하고 한(漢)나라의 문장을 배우려고 하면 한나라 사람의 문자를 사용해야 했으니, 만약 당나라 이후의 전고를 사용한다면 그 말이 당나라의 시어와 같지 않을 듯했다. 그 때문에 서로 이처럼 경계시키고 금지한 것이니, 이들에게 어찌 진정한 문장이 있겠는가. 원미(元美.왕세정)도 처음에는 이 경계를 지키다가 속고(續稿)에 이르러서는 다 그렇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만년에 식견이 진보한 데다 형세상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 요사이 호곡(壺谷.남용익)이 엮은 《기아(箕雅)》의 목록을 보니 이규보(李奎報)의 문장을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고 칭찬하였는데 내 생각에 그 논의는 매우 옳지 못하다. 이규보의 시는 동방에 명성을 떨친 지가 오래되었으니, 여러 선배 공(公)들도 모두 따라 미칠 수 없다고 추앙하였다. 이는 그의 재능이 민첩하고 축적된 식견이 풍부하여 많이 짓고 빨리 짓기를 겨루자면 당대에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조어(造語) 능력이 있어 과거 사람들의 언어를 답습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않았으니, 또한 시인으로서의 재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학식이 비루하고 기상이 용렬하여 시의 격조가 비천하고 잡되며 언어가 잗달고 의미가 천박하였으니, 고체시(古體詩), 율시, 절구 수천 수백 편 가운데 한 자 한 구도 맑고 깨끗하며 고상하고 광활한 의미를 담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의기양양하게 스스로 기뻐하며 ‘남들이 쓴 적이 없는 말’이라고 한 것은 대체로 다 서응(徐凝)의 나쁜 시와 같은 부류이니, 참으로 엄우(嚴羽) 경(卿)의 이른바 “저열한 시마(詩魔)가 폐부에 들어간다.”라는 경우이다.
그중 몇 구를 들어 보면, 예컨대 “솔과 대가 사원 가득 중은야 부귀하고, 안개 끼고 달빛 비친 강가의 절 운치 있네.[滿院松篁僧富貴 一江煙月寺風流]”, “땅 위 솟은 대 뿌리는 굽어진 용의 허리, 창 앞의 파초 잎은 기다란 봉황 꼬리.[竹根迸地龍腰曲 蕉葉當窓鳳尾長]”, “호수는 잔잔하여 한 가운데 달 비치고, 포구는 넓어서 밀물 한껏 들이켜네.[湖平巧印當心月 浦濶貪呑入口潮]” 같은 구들은 모두 사람들이 즐겨 읊조리며 뛰어나고 재치 있다고 평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 이들을 살펴보면 시골 학동이 익히는 《백련초(百聯鈔)》의 어구와 거의 흡사하니 어찌 숭상할 가치가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그가 풍부하고 민첩한 글로 독장치는 것을 직접 보았으므로 외경하여 심복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 글을 논할 적에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3, 4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감히 이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시만 가지고 말한 것이고 다른 문장의 경우는 깊이 논할 가치가 더욱 없으니 비록 사(詞), 부(賦), 변려문(騈儷文) 중에 취할 만한 것이 상당히 있기는 하나, 만약 그것들이 목은(牧隱.이색) 등 여러 사람들의 작품을 압도하여 우리나라에서 으뜸이 된다고 평한다면 수긍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문장을 논할 적에 누구 한 사람이 으뜸이라고 단정하기는 실로 어렵다. 그러나 문장은 목은을 대가로 추앙해야 하고 시는 읍취헌(挹翠軒.박은)을 훌륭한 시인으로 추앙해야 한다. 목은은 비단 문장으로만 대가인 것이 아니라 시도 규모가 크고 호방하여 그 기상이 볼 만하니, 이규보가 도량이 좁은 것과는 같지 않다.
● 읍취헌은 비록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의 글을 배우기는 하였으나 타고난 재주가 매우 높아 그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시문의 운치가 맑고 혼연하며 풍격이 호탕하고 분방하였으며, 흥이 생긴 대목에 이르러서는 천진함이 난만히 드러나고 기운이 가득 흘러넘쳐 사람의 힘으로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는 황정견, 진사도의 문장이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 나는 일찍이 읍취의 시가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와 꼭 닮았다고 생각하였으니, 안평대군의 글씨는 송설(松雪.조맹부)을 본보기로 삼았으면서도 필획이 이왕(二王.왕희지와 왕헌지)과 같았고, 읍취의 시는 황정견, 진사도의 시를 배웠으면서도 분위기와 정취가 당나라의 시인을 닮았다. 이는 모두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 읍취의 시 중에 예컨대 “바람이 나뭇잎을 솨아솨아 불어댈 제, 아내에게 술을 맡겨 조금씩 치게 하네.[風從木葉蕭蕭過 酒許山妻淺淺斟]”, “흐린 봄날 비 올 듯해 새들 서로 지저귀고, 늙은 나무 무정한데 바람 홀로 서글퍼라.[春陰欲雨鳥相語 老樹無情風自哀]”, “성난 폭포 하늘 저편 메아리를 울리고, 근심 어린 구름이 해 주변에 끼려 하네.[怒瀑自成空外響 愁雲欲結日邊陰]”, “깊은 밤 눈썹달이 빛을 내기 시작하고, 고요한 산 차가운 솔 절로 소리 내누나.[夜深纖月初生影 山靜寒松自作聲]”, “한 해 중에 가을 흥취 남산 빛이 좋은데, 외로운 밤 슬픔 속에 이지러진 달이 떴네.[一年秋興南山色 獨夜悲懷缺月懸]”, “벗은야 스스로 청운에 올랐는데, 늙은 나는 외로이 황국 곁에서 읊조리네.[故人自致靑雲上 老我孤吟黃菊邊]”, “비 갠 뒤라 바다와 산 빛깔 모두 빼어나고, 봄이 오니 새들의 소리 절로 화기롭네.[雨後海山皆秀色 春還禽鳥自和聲]”, “돛은 불룩 바람 안고 밀물 함께 올라오고, 어부 집들 몰린 언덕 기울어지려 하네.[風帆飽與潮俱上 漁戶渾臨岸欲傾]” 같은 말들은 비장하고 노련하고 힘이 있으며 맑고 산뜻하고 매우 뛰어나니,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같은 것 속에 어찌 한마디라도 이와 같은 말이 있겠는가.
● 용재(容齋.이행)의 시는 비록 풍격이 읍취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나 원만하고 화기롭고 전아하며 의취가 노성(老成)하여 당대의 맞수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의 오언고시 중에는 왕왕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 동악(東岳.이안눌)이 따라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세상에서는 우리 조선의 시가 목묘(穆廟.선조) 때보다 성한 때가 없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시의 도가 쇠한 것이 실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목묘 이전에는 시를 짓는 이들이 대체로 다 송(宋)나라의 시를 배웠기 때문에 격조가 대부분 전아(典雅)하지 못하였으며 음률도 간혹 조화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요컨대 질박하고 진실하며 중후하고 노련하면서도 힘이 있었지 곱게 겉치장을 하거나 화려하게 문식하지는 않아서 각자 일가언(一家言)을 이루었다. 목묘 때에 와서 문사(文士)가 많이 나오고 당나라의 글을 배우는 이들이 점차 많아졌으며 중국의 왕세정(王世貞), 이반룡(李攀龍)의 시도 차츰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사람들이 비로소 그들의 시를 사모하고 모방하여 정교히 다듬었으니, 그 이후로는 문사들이 따르는 작법이 한결같고 음조가 서로 비슷해져서 천진함이 더 이상 보존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목묘 이전의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나 목묘 이후의 시를 읽으면 그 사람을 좀처럼 알 수가 없는데, 이것이 시의 도가 성하고 쇠한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점이다.
● 노소재(盧穌齋.노수신)의 시는 선묘(宣廟) 초기 시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으니, 무게 있고 함축적이며 노련하고 힘이 있으며 드넓고 비장한 것이 두보(杜甫)의 풍격을 깊이 체득하였다. 그 뒤에 두보를 배우는 이들 중에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으니, 그는 공력을 많이 들인 끝에 우환 속에서 터득한 것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노인은 19년 동안 섬에서 오직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만 지었으면서도 그 의리를 그다지 잘 받아들여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 나왔을 때에 기개와 절조가 태반은 사그라져 버린 것 같다. 다만 두보의 시를 배운 것만이 이처럼 좋았던 것이다.
● 세상에서는 호음(湖陰.정사룡), 소재(穌齋), 지천(芝川.황정욱)을 병칭하지만 세 사람의 시가 실은 같지 않다. 호음은 글의 짜임과 수사가 상당히 서곤체(西崑體)와 흡사하나 풍격이 소재만 못하고, 지천은 힘차고 기발한 것이 황정견(黃庭堅), 진사도(陳師道)에게서 나왔으나 활달함이 소재만 못하니, 소재가 가장 낫다고 할 것이다.
● 간이(簡易.최립)는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사람들은 시가 그의 본색이 아니라고 하나 요컨대 그의 시도 소재, 지천과 같은 부류이다. 그의 시는 풍격이 강직하고 바탕의 운치가 깊고 두터운 것은 소재에 미치지 못하나 필력이 힘 있는 것은 그보다 낫다. 그리고 그 뛰어난 부분은 성음이 마치 금석(金石) 악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맑게 울리는 것이 요컨대 후세의 시인들이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일찍이 들으니, 권석주(權石洲.권필)가 간이를 만나 묻기를, “지금 문장에는 실로 우리 어른(권벽)이 계십니다만 시에 있어서는 누구를 독장친다고 추앙해야 하겠습니까?” 하였으니, 이는 그 뜻이 간이가 필시 자신을 인정해 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간이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이르기를, “늙은 이 몸이 죽은 뒤에는 누가 독장칠지 알 수 없네.” 하였다. 이에 석주가 무안하여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으니, 간이는 자부심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 명(明)나라 문장의 폐단은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에게서 시작되어 왕세정(王世貞), 이반룡(李攀龍)에게서 깊어지고 종성(鍾惺), 담원춘(譚元春)에게서 전환 개변되어 극도에 달하였다. 근래에 전목재(錢牧齋.전겸익)의 문장을 보니 이에 대해 논한 것이 매우 상세하였는데, 그 본말을 미루어 밝히고 폐단의 핵심을 지적한 말이 대부분 절실하고 엄격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아도 수긍할 만하였다.
● 근래에 목재(牧齋)의 《유학집(有學集)》을 보니 그는 역시 명나라 말기의 제일가는 대가였다. 그의 글은 본보기로 삼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대체로는 구양수(歐陽脩), 소식(蘇軾)에게서 나왔으니, 손 가는 대로 써서 겉치레에 구애되지 않은 것은 상당히 소장공(蘇長公.소식)과 비슷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 감개하는 가운데 기풍이 돋보이는 것은 또 구공(歐公)과 비슷하다. 다만 호방함과 자유분방함이 지나쳐 이따금 협기(俠氣)가 있고 또한 이따금 들뜬 감정이 있으며 전아하고 중후하며 엄중한 운치가 부족하고 또 괴이하고 불합리한 말이 상당히 섞인 것이 품격 높은 시에 큰 누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래도 그 초탈하고 자연스러워 이것저것 주워 모으거나 관습에 속박당하지 않아서 엄주(弇州.왕세정), 태함(太函.왕도곤)의 무리처럼 한결같이 남의 작품을 표절하지 않은 점이 좋았다.
● 목재의 비문은 한퇴지(韓退之), 구양수의 작법을 완전히 본받지는 않았으니, 그 가운데 대작은 사실을 서술하고 의론을 제시하되 경위(經緯)를 착종하고 묘사를 잘하여 요컨대 사정을 다 밝히고 경색(景色)을 그대로 묘사하였으며 또 때로는 육조(六朝) 시대의 어구를 섞어 글을 이루었으니, 나름대로 일가(一家)의 문체가 되었다. 예를 들어 〈장익지묘표(張益之墓表)〉와 〈진우모묘지(陳愚母墓誌)〉 등 몇 편은 기풍과 감정의 기복이 구공(歐公)의 글과 매우 흡사한데, 이는 명나라의 문장 중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 목재의 비문 중에 서울을 말한 곳은 대부분 장안(長安)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매우 온당치 못하다. 장안은 본디 관중(關中)의 한 작은 고을인데 한(漢)나라, 당(唐)나라 때에 그곳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서울이라 칭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서울은 연(燕) 지방인데 어찌 다시 관중의 한 작은 고을의 이름으로 그곳을 일컬을 수 있겠는가. 시문에 옛말을 인용할 경우 가차하여 써도 되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지명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시는 그나마 괜찮지만 문은 더욱 안 되고 다른 문장은 그나마 괜찮지만 비문처럼 일을 서술하는 문장은 더욱 안 된다.
● 주자의 〈장위공행장(張魏公行狀)〉, 왕엄주(王弇州)의 〈서계행장(徐階行狀)〉, 전목재(錢牧齋)의 〈손승종행장(孫承宗行狀)〉은 모두 분량이 2권이나 되는데, 이는 전에 없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서는 오직 동파(東坡.소식)의 〈사마공행장(司馬公行狀)〉이 상당히 길었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 길지는 않았다.
● 모녹문(茅鹿門)이 구양수의 문장 가운데 〈장응지묘표(張應之墓表)〉에 대해 비평하기를, “송나라의 제도에 따라 관찰추관(觀察推官)으로서 참군(參軍)으로 옮겨 양무현(陽武縣)을 맡고 또 미주(眉州)의 통판(通判)으로서 들어가 원외랑(員外郞)이 되고 다시 양무현을 맡았으니, 당시에 직책을 중복하여 맡기기를 이와 같이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송나라의 관제에는 계관(階官)이 있고 직사관(職事官)이 있다. 지금 장응지가 역임한 것을 가지고 말하자면 그는 처음에 저작좌랑(著作佐郞)으로 옮겨 양무현을 맡고 미주의 통판이 되었다가 또 누차 옮겨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이 되어 다시 양무현을 맡았는데, 저작좌랑과 원외랑은 모두 계관이고 통판과 지현(知縣)은 직사관이다. 그가 통판이 되고 지현이 되었을 때에 본디 좌랑, 원외랑의 직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지 들어가 원외랑이 되고 또 원외랑에서 나와 양무현을 다스린 것이 아니다. 녹문의 “들어가 원외랑이 되었다.”는 말은 이 점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말인 것 같다. 송나라 사람의 비문에서 이력을 서술한 대목을 볼 적에는 계관과 직사관을 분별하여 혼동되지 않게 해야 한다.
● 한유(韓愈)의 문장인 〈공사훈묘지(孔司勳墓誌)〉에 이르기를, “전 부인을 시부모의 묘역에 장사 지냈는데 점쟁이가 올해는 합장할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점쟁이의 말을 따라 합장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모녹문이 비평하기를, “전 부인을 시부모의 묘역에 미처 합장하지 못한 까닭을 덧붙여 기록하면서 사훈과 합장한 곳을 상세히 밝히지 않았으니 이해할 수 없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본디 글의 뜻은 ‘전 부인이 처음 죽었을 때에 시부모의 묘역에 장사 지냈다. 지금 사훈과 합장해야 하는데 점쟁이가 뭐라고 했기 때문에 합장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녹문은 ‘점쟁이[卜人]’ 이하도 모두 시부모의 묘역에 장사 지낼 때의 일로 오인하고 도리어 한공(韓公)이 글을 엉성하게 쓰지 않았나 의심하였으니 정말 가소롭다.
● 녹문의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鈔)》에 논하기를, “세상에서 한유의 문장을 논하는 이들은 모두 맨 먼저 비문을 일컫는다. 그러나 나는 한공의 비문은 대부분 기괴하고 음험하여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서사법(敍事法)을 체득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기풍에 혹 힘차고 자유분방함이 부족한 것이다. 구양공(歐陽公)의 비문의 경우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의 정수를 체득했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녹문의 이 논의는 그럴듯하다. 그러나 비문과 역사서의 전기가 비록 모두 서사문(敍事文)에 속하기는 하나 그 기본 성격은 실로 같지 않다. 게다가 한공의 문장은 세상에 이름이 날 정도로 훌륭하여 《사기》의 작법을 모방할 필요가 없는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한공은 비문을 지을 적에 오로지 엄격하고 간략하며 깊고 중후하며 예스럽고 심오함을 위주로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상서(尙書)》, 《춘추좌전(春秋左傳)》을 근본으로 한 것이다. 금석문(金石文)은 영원히 이것을 종조(宗祖)로 삼아야 할 것이니 어찌 굳이 《사기》의 기풍을 요구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한공이 일을 서술한 부분은 왕왕 나름대로 한 가지 특색이 있는데, 다만 한결같이 문장을 유창하게 구사하다가 간결하고 엄격한 문체를 손상하는 결과를 초래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구공으로 말하면 문체가 본디 태사공(太史公 사마천)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비문에 일을 서술한 것이 대부분 《사기》의 기풍을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범으로 말하면 또한 《사기》, 《한서》의 문체를 완전히 그대로 사용하지 않은 한공의 문장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 한유의 비문은 양식이 실로 극히 간결하고 엄격하여 본받을 만하나 그 자구는 이따금 너무 무참하게 분할하거나 아주 생소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조성왕비(曹成王碑)〉는 전편이 모두 그러하여 후인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니, 녹문(鹿門)의 비판도 일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오로지 《사기》, 《한서》를 기준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동방의 문인들은 비문을 지을 적에 대체로 한유의 비문에 있는 자구, 예를 들어 “때를 벗기고 가려운 데를 긁다.[櫛垢爬痒]”, “선조의 훌륭한 공덕을 품다.[胚胎前光]” 같은 말들을 그대로 가져다 쓰지만 전편의 양식은 실로 한유의 비문과 같지 않다. 이는 마치 성긴 베로 만든 치마에 비단실로 수놓은 천 조각을 붙여 놓은 것과 같으니 어찌 어울리겠는가.
● 한유의 문장 가운데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序)〉는 일을 서술한 것이 극히 복합적이니, ‘남제운이 구원하러 가게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에[南霽雲乞救]’부터 ‘이러한 다짐에 대한 징표이다[所以志也]’까지의 한 단락은 노인이 한 말이고, 그 아래에 삽입된 ‘정원 연간에[貞元中]’ 한 단락은 또 한공(韓公)이 일찍이 직접 보았던 것을 스스로 기술하여 그 일을 증명한 것이며, 그 아래에 또 이어진 ‘성이 함락되자[城陷]’ 한 단락은 또한 노인의 말이다. 그리고 ‘장순(張巡)은 키가 일곱 자 남짓이고[巡長七尺餘]’부터 ‘나이가 마흔아홉이었다[年四十九]’까지의 한 단락은 모두 장적(張籍)이 우숭(于嵩)에게 진술한 것이고, ‘우숭은 정원 연간 초에[嵩貞元初]’ 이하는 또 장적이 스스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장적이 말하였다[張籍云]’ 세 글자로 맺은 것이니, 그렇게 쓰지 않으면 누구의 말인지 모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주제별로 서술하면서 서로 의미를 보충해 주는 내용이 거듭 나오되 모두 지극한 법도가 있는데, 바로 이것이 《사기》, 《한서》의 오묘한 부분으로 후인들이 참조하여 연구해 보아야 할 점이다. 그중에 ‘성이 함락되자’ 한 단락은 독자들이 그냥 지나쳐 버리기가 매우 쉽다. 일찍이 우옹(尤翁 송시열(宋時烈))이 “이는 당연히 노인의 말이다.”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그러하다.
● 한유의 문장 가운데 〈공좌승묘지(孔左丞墓誌)〉 같은 것은 역임한 벼슬과 행한 일에 대한 서술이 매우 상세하면서 그 사람됨에 대해서는 도리어 상세하지 않아 간략한 것 같다. 그러나 명(銘)에 이르기를 “흰 낯빛 큰 키에, 웃음 적고 과묵했네.[白而長身 寡笑與言]” 하였는데, 이 여덟 자를 보면 공공(孔公)의 용모와 기상을 또렷이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서문에 공공을 만류해 달라는 한공(韓公)의 상소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절개를 지키며 빈궁하게 살았고 논의가 올바르고 공평하였습니다.[守節淸苦 論議正平]”, “나라를 걱정하느라 집안을 잊었으며 마음을 쓰는 것이 극진하였습니다.[憂國忘家 用意至到]” 하였으니, 그 사람됨의 대체를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어 실로 더 이상 번거롭게 서술할 필요가 없다. 〈왕홍중지문(王弘中誌文)〉에서도 명(銘)에 그 사람됨을 상세히 서술하기를, “기상이 예리하고 방정했으며, 게다가 굳세고 엄격했으니[氣銳而方 又剛而嚴]”, “다른 사람 사랑하고 성심 다하기, 싫증 나 그만둔 적이 없으니[愛人盡己 不倦而止]”, “벗과 함께 있을 적엔, 여인처럼 유순했네.[與其友處 順若婦女]” 하였는데, 왕홍중의 자품과 행실이 여기에 모두 드러나 있다. 이들은 모두 본받을 만하다.
● 한유의 비문 가운데 〈조성왕비(曹成王碑)〉, 〈평회서비(平淮西碑)〉, 〈오씨묘비(烏氏廟碑)〉, 〈원씨묘비(袁氏廟碑)〉, 〈전홍정선묘비(田弘正先廟碑)〉 등의 글은 모두 ‘야(也)’ 자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상서(尙書)》를 본받은 것이다.
●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금석문자 중에는 그와 맞먹을 만한 것이 결코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한유의 〈평회서비〉, 구양수(歐陽脩)의 〈농강천표(瀧岡阡表)〉가 그런 경우이다.
● 이공동(李空同.이몽양)의 글은 좌씨(左氏)와 사마천(司馬遷)을 본받았으니, 비록 모방한 것이 지나치게 드러나고 자신의 것으로 녹여낸 것이 충분치 않아서 전편 중에 가작(佳作)이랄 것이 드물기는 하나 왕왕 고아(古雅)하고 질직(質直)하고 굳세어 한두 가지 좋은 곳이 있다. 일찍이 우옹(尤翁)이 그의 글을 상당히 칭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우옹은 명나라 문장에 익숙지 않은 상황에서 일찍이 그의 〈주자실기서(朱子實記序)〉를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뿐이다. 공동의 이 글은 의론이 좋은 데다 체재도 법도가 있으니, 참으로 가작이다.
● 나는 또 일찍이 ‘두보(杜甫)의 글은 비록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 통창(通暢)하지 않기는 하나 그 기상과 격조는 또한 고풍스럽고 힘차서 좋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공손대랑검무서(公孫大娘劍舞序)〉는 겨우 백여 자에 불과한데도 기복과 변화가 많으며 감개가 물씬 배어 나고 기상이 거침없는 것이 태사공(太史公)의 글과 매우 흡사한데, 이는 재주가 비슷한 까닭이다. 뒤에 보니 우옹도 자미(子美.두보)의 문장이 매우 좋다고 하였는데, 우옹은 문장에 있어 특이한 것을 숭상하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 우옹은 계곡(谿谷.장유)의 문장을 자주 추앙하여 동방에서 제일간다고 하였다. 한번은 정관재(靜觀齋.이단상)에게 말하기를, “계곡은 구양수, 소식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 명나라 300년을 통틀어 그와 견줄 만한 문인이 없었으니, 양명(陽明)은 비록 과장된 글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는 하나 실상은 그와 같지 않았다.” 하였는데, 이 의론은 옳지 않은 것 같다. 계곡의 문장은 전아(典雅)하고 통창하여 문사와 조리가 모두 갖추어지고 체재가 구차하지 않아서 우리 동방에 있어서는 실로 대가이다. 그러나 그 기상과 격조 및 재주와 능력은 사실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였다. 명나라 사람 중에 공동(空同), 엄주(弇州)의 유파로 말하면 실로 한유, 구양수의 맥을 바르게 이어받지 못하였으나 손지(遜志), 양명(陽明), 준암(遵巖), 형천(荊川) 등 몇몇 대가는 모두 경술에 대한 조예가 깊고 이치에 밝아 규모가 크고 깊이가 있으며 고상하고 힘있고 간결하였으니, 모두 계곡이 따라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양명은 참으로 글을 과장되게 쓴 부분이 있기는 하나, 그는 타고난 재주가 본디 높아 문장 구사에 뛰어났던 것이니 부질없이 장황하게 벌여 쓰기만 한 것이 아니다. 우옹은 사실 명나라의 문장을 많이 보지 못하여 “명나라 사람들은 모두 고문의 껍데기만 배웠다.”고 싸잡아 평가하고 준암, 형천의 유파가 있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계곡의 수준은 바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 계곡의 문장은 구성과 법칙, 의리와 정취가 비록 송(宋)나라의 대가들과 가깝기는 하나 지나치게 평탄하고 완만한 것이 흠이다. 송나라의 문장 가운데 예를 들어 구공(歐公)의 문장은 비록 평탄하고 완만하기는 하나 그의 상소와 차자는 이해(利害)에 대한 지적과 사정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고 절실하여 골수에 사무친 나머지 임금으로 하여금 그것을 듣고서는 마음을 움직여 깨닫지 않을 수 없게 하였고, 서(序), 기(記), 비문, 제문 등의 글은 기풍이 힘차고 수려하며 음조가 호탕해서 깊은 생각에 잠겨 감개한 마음으로 감탄해 마지않게 하고 왕왕 숨이 끊길 듯 목메게 하는 부분도 있으니, 이것이 남들이 따라 미칠 수 없는 점이다. 그런데 계곡의 글은 한결같이 평탄하고 완만하기만 하고 격하거나 절실한 부분이 전혀 없어서 소장을 지으면 임금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비문을 지으면 생동하는 기풍이 없고 제문을 지으면 구슬픈 오열을 자아내는 맛이 없다. 이는 그의 타고난 자품이 너그럽고 평탄한 데다 문장을 짓기도 손쉽게 하여 깊은 사색을 기울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룩한 경지가 그러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글을 높여 원숙하고 혼연(渾然)하여 인위적으로 다듬은 흔적을 전혀 지적해 내어 의론할 수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그가 이룩한 경지에 대해서만 하는 말이라면 괜찮으나 만약 옛사람의 글과 견주어 본다면 나른하여 미치지 못함을 잘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어찌 의론할 점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 계곡의 비문은 비록 초연한 음조가 부족하기는 하나, 일에 대한 서술에 있어서는 번다하고 간략한 정도가 적당하고 인물의 훌륭한 점을 칭찬한 부분도 철저하게 잘 헤아려 하였으니, 이 때문에 그의 비문이 훌륭한 것이다.
● 간이(簡易.최립)의 문장은 계곡이 충분히 논하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문장을 계곡의 문장과 비교해 보면 수준이 높은 곳은 계곡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수준이 낮은 곳은 계곡이 그런 글은 짓지 않을 정도로 낮으니, 요컨대 수준이 엇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 《간이집(簡易集)》 가운데 중국에 올린 주문(奏文)은 매우 좋다. 이러한 글은 무엇보다 상투를 그대로 답습하기가 쉽고 그것을 피하려면 또 사정이 두루 상세히 언급되지 못하는 문제가 있게 되는데, 간이의 주문들은 실정을 진술한 것이 간절하고 곡진한 데다 문장 구사도 고아(古雅)하고 간결하여 한마디도 쓸데없이 들어가거나 천박하고 속된 말이 없다. 이를 보면 그가 재주가 높고 공부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중국 사람들이 탄복하여 몹시 칭찬한 것도 당연하다.
우옹(尤翁)이 이르기를, “간이의 비문은 소편(小篇)은 좋으나 대편(大篇)은 좋지 않다.” 하였는데, 정말 그렇다.
● 택당(澤堂 이식)의 문장은 전체적인 모양새의 혼연(渾然)함이 계곡의 문장만 못하나 짜임새의 정밀함은 그보다 나으며 계곡의 사부(詞賦)와 택당의 변려문(騈儷文)은 또 서로 맞먹을 만하니, 옛사람에 견주어 보면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과 매우 흡사하다. 근세의 채호주(蔡湖洲.채유후)는 늘 장유(張維), 이식을 일컬으며 이르기를, “택당의 시가 계곡의 시보다 낫다.” 하였는데, 이 점도 자후(子厚.유종원), 퇴지(退之.한유)와 비슷하다.
● 택당의 글은 너무 상세하고 치밀하여 문자 이면의 여지(餘地)를 볼 수 없는데, 이는 계곡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다. 그러나 상소, 차자 등 일을 논한 글로 말하면 정밀하고 상세하며 절실하고 깊이가 있어서 계곡의 글이 평범할 뿐 격하게 논파하는 곳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 월사(月沙.이정귀)와 상촌(象村.신흠)은 동시대에 나란히 이름이 났는데, 지금까지 논자들의 평이 서로 엇갈려 왔다. 당시 문단의 논의는 상촌을 상당히 우위에 두었으니, 계곡이 쓴 두 공의 문집 서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근세에 이르러 우옹이 비로소 월사를 우위에 두었는데, 이는 상촌은 옛 수사법에 비해 꾸미는 노력을 많이 기울인 데에 반해 월사는 마음 가는 대로 풀어내어 곡절을 묘사한 흥취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문사를 중시하는 이들은 상촌을 우위에 두고 이치를 위주로 하는 이들은 월사를 높이 산 것이니, 이는 실로 각기 주안점이 있는 것이다.
● 상촌은 타고난 재주가 민첩하고 묘하나 성품의 깊고 두터운 점이 부족한 데다 제자(諸子)와 《전국책(戰國策)》을 배우고 또 명나라의 대가들을 좋아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문장은 뛰어나게 아름다운 기품이 있고 광채가 찬란한 반면에 꾸밈없이 진실한 뜻과 의미심장한 맛이 부족하다. 월사는 타고난 재주가 아름답고 넉넉하나 청고(淸高)함과 간결함이 부족한 데다 옛사람의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 문장을 짓기를 매우 쉽게 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문장은 변화가 있고 통창하여 난삽하고 궁색한 모습이 전혀 없는 반면에 체재에 엄격함이 부족하고 격조가 고아하지 않다. 이 두 문장가의 장단점은 대체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선배를 따르겠다고 한 공자의 뜻을 가지고 보면 우옹의 논의가 상당히 그에 가깝다 할 것이다.
● 신최 계량(申最季良.신최는 신흠의 손자)의 문장을 혹자는 상촌의 문장보다 낫다고 하는데, 지금 그의 원론(原論)의 여러 편을 살펴보니 풍부하고 웅대한 것이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글들의 경우는 명나라 사람들의 기습(氣習)을 벗지 못하였으니, 요컨대 물려받은 가법(家法)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가 그 조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 동회(東淮.신익성.신흠의 아들)는 명나라의 문장을 배웠으나 너무 심한 정도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 문장이 상당히 힘이 있고 간결한 장점이 있는 것이니, 비록 창작력의 민첩함과 묘함이 상촌에 미치지 못하기는 하나 간결함과 단정함은 도리어 좀 낫다. 동시대의 금양위(錦陽尉.박미)도 명나라의 문장을 배웠는데, 그는 오로지 난삽한 문체와 표절을 일삼는 것만 답습하여 쓸데없이 번다하고 장황할 뿐 전혀 요점이 없으니 동회보다 훨씬 못하다.
● 동회 부자(父子)는 시재(詩才)가 모두 신계량(申季良.신최)보다 못하다. 시는 더욱 좋지 못하여 조화로운 성음이 부족한 데다 기력도 없으니, 그의 문집 가운데 고시, 율시는 좋은 작품이 전혀 없다. 동회가 다소 낫기는 하나 그래도 상촌에 미치지는 못한다.
● 정동명(鄭東溟.정두경)은 말세에 나와서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고시와 악부시(樂府詩)가 본받을 만한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가(歌), 행(行) 등 장편은 이백(李白), 두보(杜甫)를 따르고 율시, 절구 등 근체시는 성당(盛唐)의 작품을 모방하여 만당(晩唐)의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을 전범으로 삼으려 하지 않았으니 위대하다. 그러나 그는 재주와 기력이 실로 읍취(挹翠.박은) 등 여러 공에 미치지 못한 데다 일찍이 세심히 독서하고 시(詩)의 도(道)를 깊이 탐구하여 깊은 사색 속에 스스로 터득하고 확충, 변화시켜 본 적이 없이 그저 한때의 의기(意氣)로 옛사람들의 자취를 따랐을 뿐이다. 그래서 그 시가 비록 청신(淸新)하고 뛰어나서 세속의 악착스럽고 진부한 기운이 없기는 하나 정한 말과 묘한 생각이 옛사람의 심오함을 엿보지 못하고 분방한 필치가 또 시가(詩家)의 변화를 다 구현하지 못하였으니, 요컨대 그가 이룩한 경지는 석주(石洲.권필), 동악(東岳.이안눌)을 뛰어넘지 못하였다.
● 동명의 시가 유속(流俗)에서 높이 평가받기 쉬웠던 것은 그가 평소에 《마사(馬史.사마천의 사기)》를 즐겨 읽은 데다 옛 악부시에 뜻을 두어 시가(詩歌)를 지을 적에 그 말을 잘 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는 모두 세상 사람들이 익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언뜻 보았을 때에 이목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옛사람의 이른바 ‘둔한 도적’이라는 것이지 흰 여우 갖옷을 훔쳐 내는 솜씨가 아니었다.
● 《좌전(左傳)》에 관계(官階)를 낮추는 일을 물은 정정(程鄭)의 질문에 대해 연명(然明)이 논하기를, “이미 높은 자리에 올라서 관계를 낮추려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정정에게는 있지 않으니 도망할 징조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심병이 있어 죽음을 앞두고 근심하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만약 정정에게 있지 않다면 그 집안이 장차 도망하는 화가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이 주는 잘못된 것 같다. 내가 살펴보건대, ‘부재정정(不在程鄭)’은 위에서 말한 지혜로운 사람이 정정 같은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이니, 지금 관계를 낮추는 일을 물은 것은 그 자신이 장차 도망할 징조가 있어 그런 것에 불과하고 그렇지 않으면 장차 죽게 될 것이란 말이다. 이는 위 글의 “그는 장차 죽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망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과도 서로 호응하는 것으로, 도망하는 것과 죽는 것이 모두 정정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 어찌 다시 그의 집안을 말했겠는가. 주를 낸 사람은 ‘부재정정’ 한 구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이같이 빗나가게 한 것이니 따를 수 없다.
● 옹규(雍糾)의 처는 남편이 자신의 아비를 교외의 연향(宴享) 자리에서 죽이려는 것을 알고 제중(祭仲)에게 그 일을 고하였는데, 옹규는 그 때문에 모의가 실패로 돌아가 죽임을 당하였다. 노포계(盧蒲癸)의 처는 남편이 자신의 아비를 사당의 가을 제사 자리에서 죽이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일을 고하여 경사(慶舍)를 격동시켰는데, 경사는 그 때문에 결국 가서 화를 당하였다. 이 두 부인은 처한 상황이 서로 똑같았는데 대처하기는 정반대로 하였다. 내 생각에 이 두 부인의 입장에서는 다만 지극한 정성과 애통절박한 심정으로 남편을 만류하고 남편이 따르지 않으면 죽는 것이 마땅하지, 남편과 아비 사이에서 상황을 좌지우지해서는 결코 안 된다. 노포계의 처는 함정을 파 화를 재촉한 것이니 그러한 일은 더더욱 차마 해서는 안 된다.
● 《좌사(左史.춘추좌씨전)》의 최저(崔杼)가 장공(莊公)을 죽인 일에 대한 전(傳)을 읽어 보면 동곽강(東郭姜) 한 사람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장공, 가거(賈擧), 주작(州綽), 병사(邴師), 공손오(公孫敖), 봉구(封具), 탁보(鐸父), 양이(襄伊), 누인(僂堙), 신괴(申蒯), 신괴의 가신과 종멸(鬷蔑), 태사(太史) 2인, 동곽언(東郭偃), 당무구(棠無咎), 최성(崔成), 최강(崔强), 최저 등 모두 19인이고 그 자신도 부녀(婦女)의 재앙을 면치 못하였으니 두려워할 일이다.
● 《좌전》은 일을 서술한 것이 극히 간결하고도 묘한 부분이 있으니, 예를 들어 진(晉)나라의 장격(張骼)과 보력(輔躒)이 정(鄭)나라의 완야견(宛射犬)과 함께 초(楚)나라 군대에 가 도전한 일을 서술한 한 단락은 앞뒤의 곡절이 매우 많은데도 끝내 두 사람과 완야견의 이름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처음 볼 때에는 어지럽게 뒤섞인 듯하나 자세히 음미해 보면 피차의 주객 관계가 모두 극히 분명하니, ‘모두 승거(乘車.문인들이 타는 편안한 수레)를 탔다’, ‘모두 자루에 걸터앉아 거문고를 탔다’, ‘모두 자루에서 투구를 꺼내어 썼다’, ‘모두 수레에서 내려 초나라 사람들을 손으로 쳐서 수레로 집어던졌다’, ‘모두 수레에 뛰어올라 활을 뽑아 들고 쏘았다’, ‘모두 웃었다’는 말은 모두 두 사람의 행동을 가리킨 것이고, ‘고하지 않고 수레를 내몰았다’,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는 말은 모두 완야견의 행위를 가리킨 것이다. 두 사람을 말할 때에는 다 ‘모두[皆]’ 자를 썼으므로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것이 두 사람임을 알 수 있고, 이것이 저것과 대가 되게 하였으므로 또 이름을 들먹이지 않아도 저것이 완야견임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일을 서술함에 있어 간결하고도 묘한 부분이다. 그리고 앞뒤로 여섯 개의 ‘모두[皆]’ 자를 여기저기 배치한 것이 또 매우 묘하다.
● 젊었을 적에 《좌전》의 “들어가 시를 읊기를, ‘땅속 길 안에 오니 즐거워 화목하네’ 하고[入而賦 大隧之中 其樂也融融]”, “나와서 시를 읊기를, ‘땅속 길 밖 나서니 즐거워 근심 풀리네’ 하였다.[出而賦 大隧之外 其樂也洩洩]”는 대목을 읽고는 이것이 일을 서술한 것이라 여기고 너무나 익살스럽다고 의심했다. 뒤에 비로소 두 ‘부(賦)’ 자에서 구두를 떼어야 하고 ‘대수(大隧)’ 이하의 18자는 읊은 시로 보아야 함을 깨닫고는 전에 품었던 의심이 대번에 풀렸다. 근래에 전목재(錢牧齋) 문집을 보니 이미 이 단락에 대해 논변한 것이 있었는데, 당시에 종성(鍾惺), 담원춘(譚元春)의 무리가 꼭 내가 어렸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이 글을 잘못 읽고서 경솔하게 감히 옛사람을 비평한 데에 대해 목재가 매우 명쾌하게 논변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옛사람의 문장은 거친 마음으로 읽고 지나쳐도 안 되고 함부로 비평을 해도 안 됨을 알게 되었다.
● 주 선생(朱先生.주희)이 〈남헌(南軒)에게 준 편지〉에 정자(程子)의 문집을 교정하는 일과 관련하여 ‘질(姪)’과 ‘유자(猶子)’를 비교하여 논하기를,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여자가 형제의 자식을 일컬어 질(姪)이라 한다.’ 하였는데, 그 주에 《좌씨전(左氏傳)》에 ‘조카가 고모를 따라갈 것이다.[姪其從姑]’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풀이하였다. 그런데 반복하여 살펴보아도 끝내 남자가 형제의 자식을 일컬어 뭐라고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한서(漢書)》를 가지고 살펴보면, 이소(二疏.소광과 소수)는 바로 오늘날 이른바 숙질간(叔姪間)인데 전(傳)에 부자(父子)라고 일컬었으니, 그렇다면 옛사람들이 곧바로 ‘자(子)’라고 일컬은 것은 한(漢)나라 사람들도 그러했던 것이다. 옛사람들은 순박하여 혐의스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일컫는 것을 편안히 여겼던 것이다. 후대로 내려와서는 마음에 구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있게 되어 고모가 자신을 일컫는 말을 빌려 칭하게 된 것이니, 이것이 비록 옛 제도가 아니기는 하나 혐의스러운 것을 분별하고 미묘한 것을 밝히는 뜻이 있다.” 하였다. 내가 《마사(馬史)》의 〈전분전(田蚡傳)〉을 살펴보니, “위기(魏其)를 모시고 술을 마실 적에 무릎 꿇고 일어서고 하는 것을 마치 자질(子姪)처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볼 때 남자가 형제의 자식을 일컬어 질(姪)이라고 하는 것은 한나라 때부터 이미 그러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정자의 문집에 질(姪)이라고 일컬은 근거가 될 수 있다. 주 선생이 위와 같이 말한 것은 어쩌면 우연히 이 글을 기억하지 못한 소치일 것이다. 다만 《한서》를 살펴보면 ‘질(姪)’이 ‘성(姓)’으로 되어 있는데, 어쩌면 《마사》에도 본디 ‘성(姓)’으로 되어 있던 것을 뒤에 글자가 비슷한 관계로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알 수 없다.
● 또 이 편지를 살펴보건대, 아래의 글에 “유(猶)는 곧 같다는 말이니, 그 뜻이 위의 글에 매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뚝 끊어 버려서는 안 됨이 분명하다. 만약 위의 글을 떼어 버리고 이것만 일컫는다면 세속의 헐후(歇後)한 말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헐후’의 뜻을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겠다. 내가 《야객총서(野客叢書)》를 살펴보건대 홍구보(洪駒父)가 이르기를, “세상에서 형제를 일러 ‘우우(友于)’라 하고 자손을 일러 ‘이궐(貽厥)’이라고 하는데, 이는 헐후어(歇後語)이다. 내가 역사서를 살펴보건대 동한(東漢) 이래로 이러한 말이 많이 쓰였으니, ‘이궐(貽厥)의 초기에 살면서’, ‘우우(友于)의 정이 더욱 두텁다’라느니, ‘색사(色斯)’, ‘혁사(赫斯)’, ‘측철(則哲)’ 따위의 말이 매우 많다.” 하였다. 또 육방옹(陸放翁.육유)의 《노학암필기(老學菴筆記)》를 살펴보건대, “한퇴지의 시에 ‘저녁에 좌천되어 조양 가는 길이 팔천[夕貶潮陽路八千]’이라 하고, 구공(歐公)이 이르기를 ‘이릉은 여기서 또 삼천이나 된다네[夷陵此去更三千]’ 하였는데, 이는 팔천 리, 삼천 리를 이르는 것이다. 혹자는 이것을 헐후어라고 하는데 아니다. 《서경》에 ‘오복(五服)의 제도를 도와 이루되 오천에 이르게 하고’라 하였는데 그 주에 ‘오천 리’라고 하였으며, 《논어》에 염유(冉有)가 ‘사방 6, 7십이나 5, 6십 되는 나라’라고 하였는데 그 주에도 ‘6, 7십 리’, ‘5, 6십 리’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두 설에 근거하면 ‘헐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우우(友于)’라고만 말하면 벗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이궐(貽厥)’이라고만 말하면 끼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혁사(赫斯)’라고만 말하면 혁연(赫然)한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고, ‘측철(則哲)’이라고만 하면 명철한 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고, ‘팔천’, ‘삼천’이라고만 하면 팔천, 삼천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실제적인 일과 바른 뜻을 빠뜨리고 빈말만 하기 때문에 헐후하다고 하는 것이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유자(猶子)의 의미는 본디 상복의 규정은 형제의 아들을 자신의 중자(衆子)와 같이 한다는 말인데 지금 앞의 글 여섯 자가 없이 ‘유자’라고만 일컫는다면 ‘이궐’, ‘우우’의 부류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선생의 설이 이와 같은 것이다.
● 마영경(馬永卿)이 지은 《난진자(嬾眞子)》에 강절(康節.소옹)의 일을 기록하기를, “낙양의 소강절 선생은 술법(術法)이 높은 데다 지모(智謀)도 남보다 뛰어났다. 거처하는 곳에 ‘홀(笏) 모양의 구멍[圭竇]’과 ‘동이 창문[甕牖]’이 있었는데, 홀 모양의 구멍은 벽에 문을 뚫되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나게 하여 홀 모양으로 만든 것이고, 동이 창문은 깨진 동이의 입구를 방의 동서쪽 벽에 박고 붉은색 종이와 흰색 종이를 발라 해와 달을 상징한 것이다. 그 거처를 안락와(安樂窩)라고 하였다. 선생은 날씨가 따뜻한 봄이나 시원한 가을이면 안거(安車)를 타고 누렁소에 멍에하여 제공(諸公)의 집으로 놀러 나가곤 하였는데, 제공들은 선생이 오기를 바라서 각기 안락와 한 곳을 설치해 두었다. 선생이 그 집에 이르게 되면 노소, 부녀, 양천(良賤)을 막론하고 모두 문에서 맞이하여 안락와로 맞아들이고는 앞 다투어 노고를 여쭙는 한편 선생의 말을 들었는데, 집안의 고부간에, 동서 간에, 비첩(婢妾)들 간에 다툼이 있어 시일이 지나도 결판나지 않는 일을 스스로 선생 앞에 진술하면 선생이 낱낱이 분별하였다. 그러면 사람마다 각기 기뻐하여 술과 안주를 다투어 내오곤 하였다. 선생은 이에 며칠 동안 배불리 먹고 마시며 한집에서 놀다가 달포 만에야 돌아가곤 하였으니, 비단 선생의 지모가 오묘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낙양(洛陽)의 선비들의 기풍이 아름다웠음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 일은 사마문중 집(司馬文仲𢜱)에게서 들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는 다른 책에 기록된 것과 대략 다 같으나 홀 모양의 구멍에 관한 일 및 동이 창문으로 해와 달을 상징한 것, 안거를 누렁소에 멍에한 것은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록하는 바이다.
● 당(唐)나라 배정유(裴廷裕)의 《동관주기(東觀奏記)》에, “선종(宣宗)이 시를 읊고 직학사(直學士) 소치(蕭寘)에게 주어 화답하게 하였는데, 소치가 수장(手狀)을 올려 사양하기를, ‘폐하의 이 시는 「계수는 나날이 천리를 흐르는데, 평소의 이내 회포 그 물에 부치노라.[桂水日千里 因之平生懷]」는 시구도 그보다 낫지는 못합니다.’ 하였다. 이튿날 선종이 학사(學士) 위오(韋澳)를 불러 이 두 구에 대해 묻자 위오가 아뢰기를, ‘송나라 태자가령(太子家令) 심약(沈約)의 시입니다. 소치는 성상의 시가 청신(淸新)하여 심약의 시에 비길 만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불쾌해하며 이르기를, ‘남의 신하를 나에게 비길 수 있단 말이냐.’ 하더니, 은혜로운 대우가 점차 줄어들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위의 두 구는 바로 강엄(江淹)이 휴 상인(休上人.탕혜휴)의 〈원별시(怨別詩)〉를 본떠 지은 시인데 지금 심약의 시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위오가 잘못 대답했거나 아니면 배정유가 잘못 기록한 것일 것이다.
● 《동관주기》에, “남전위(藍田尉) 직홍문관(直弘文館) 유규(柳珪)가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자 급사중(給事中) 소방(蕭倣)과 정예작(鄭裔綽)이 논박하여 조서를 봉환(封還)하기를, ‘폐하께서 벼슬을 높이 매달아 두셨던 것은 본디 현량(賢良)을 기다린 것이었는데 경박한 자를 임명하셨으니, 이는 유능한 자를 권면하고 무능한 자를 징계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유규는 집 안에 있을 적에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는데 나라를 섬기면서 어찌 충절을 다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형부 상서(刑部尙書) 유중영(柳仲郢)이 동상합문(東上閤門)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려 ‘아들 유규는 재주와 기국이 용렬하여 외람되이 간원(諫垣)에 기용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효하다고 무함한다면 참으로 원통한 일입니다.’ 하고, 태자소사(太子少師) 유공권(柳公權)도 조카가 사실과 달리 비방당하였다고 쟁론하였다. 그러나 상은 유규의 관직을 면직시키는 한편 집 안에서 몸을 닦고 반성하게 하였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유씨의 가법(家法)은 당대에 으뜸이었는데 그 자제가 불효로 논핵을 당하였으니 불행하다고 할 만하다. 그리고 유중영, 유공권이 모두 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쟁론하였으니, 그것이 사실과 달리 무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옛사람은 자손을 위해 억울함을 쟁론하기를 혐의스러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요사이 누구에게 《패해(稗海)》를 빌려 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명(明)나라 사람이 한(漢), 당(唐), 송(宋) 이후의 소설을 수집하여 한 부(部)의 책으로 엮은 것이었다. 그중에는 비록 신괴(神怪)하여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나 근거 없는 농담으로 급총서(汲冢書), 제동야언(齊東野言)에 가까운 것도 있기는 하나,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일과 처음 듣는 말, 명언과 아름다운 이야기는 역사서에 빠진 내용을 보충하고 예문(藝文)의 문채를 갖추어 줄 만하였다. 또한 명교(名敎)에 관계되고 이치를 돕는 내용도 많을 뿐이 아니었으니, 풍부하고 고상한 문사(文辭)를 돕기에도 충분하였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판각이 정하지 못하여 오류가 매우 많은 것인데, 심지어 편목(篇目)조차 극히 엉성하고 잘못되었다. 예컨대 《석림연어(石林燕語)》는 송나라의 섭몽득(葉夢得)이 지은 것인데 목록에는 정모(程摸)가 지었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본서의 권수(卷首)에 쓰기를, “섭몽득이 짓고 아들 섭간, 섭정, 섭모가 교정하였다.[葉夢得撰 子揀挰摸校]” 하였다. 이 세 사람은 곧 섭몽득의 아들인데 책을 엮은 사람이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정모(挰摸)’를 사람의 성명으로 오인하고는 함부로 ‘정(挰)’을 ‘정(程)’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또 《냉재야화(冷齋夜話)》는 바로 송나라의 중 혜홍(惠洪)이 지은 것으로, 이른바 홍각범(洪覺範)이라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런데 편목에는 그 이름이 빠져 있다. 그리고 《속박물지(續博物志)》에 대해 편목에는 당나라 농서(隴西)의 이석(李石)이 지었다고 하였는데, 그 글 속에 송나라의 일도 상당히 들어 있다. 예컨대 “관상가가 이르기를, ‘신하가 용의 지체(肢體)를 하나라도 얻으면 벼슬이 삼공(三公)이나 재상에까지 이른다. 증공량(曾公亮)은 용의 척추를 얻었고, 왕안석(王安石)은 용의 눈동자를 얻었다.’ 하였다.” 하고, 또 ‘역대 임금들이 남달리 총애한 구양수(歐陽脩), 석연년(石延年) 같은 이들’이라 하고, 또 “진정민(陳正敏)이 높이 산 이들은 진단(陳摶), 이독(李瀆), 임포(林逋), 위야(魏野) 등으로 모두 세상을 피해 은둔한 선비들이다.” 하였다. 어쩌면 혹시 후세 사람이 딴 데서 따다 넣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알 수 없다.
● 《속박물지》에 또 이르기를, “지금 임금은 이전 왕조 때에 수양 태수(睢陽太守)였는데, 개국하여 대송(大宋)이라고 국호를 정함에 이르러서는 또 대화(大火 28수(宿) 중의 하나인 심성(心星)) 아래에 도읍을 건설하였다.”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볼 때 이 책의 작자는 또 송 태조 때의 사람인 것 같다. 그러나 왕안석, 증공량이라는 말이 또 그 뒤에 들어 있으니 누가 지은 것인지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
● 당(唐)나라 사람들의 시에 쓴 ‘차막(遮莫)’ 자는 그 말뜻을 상고해 보면 애당초 금지하는 말이 아니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대부분 잘못 사용하였으니, 《학림옥로(鶴林玉露)》에 ‘비록……라 하더라도[儘敎]’로 풀이한 것이 옳다. 일찍이 최여화(崔汝和.최석정)와 이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최여화가 이르기를, “그것은 정말 그렇다. 하지만 예컨대 이백(李白)의 시에 이 말을 쓴 것은 금지하는 말로 쓴 것 같다.” 하였다. 이에 내가 이르기를, “그 말은 어찌 ‘차막지근장백장(遮莫枝根長百丈)’, ‘차막인친연제성(遮莫姻親連帝城)’의 두 구를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내 생각에 이는 바로 ‘비록……라 하더라도’의 뜻이니, 이백의 뜻은 ‘설령 종손과 지손들이 뒤얽히고 인척과 친척들이 신분이 귀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래도 교유하는 이들이 많고 자기 자신이 부귀한 것만은 못하다.’는 것이다. 만약 금지하는 말로 본다면 이 두 구는 말이 되지 않는다.” 하자, 최여화도 그렇겠다고 하였다.
● 남곤(南袞)이 지은 탁영(濯纓.김일손)의 만사(挽詞)에 “인물은 송나라 원풍(元豐), 희령(熙寧) 연간의 인물이다.[人物宋豐熙]”라는 말이 있는데, 《계곡만필(谿谷漫筆)》에는 이 말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설은 너무 융통성이 없는 것 같다. 희령, 원풍 연간에 조정에 있던 사람은 실로 대부분 왕안석(王安石)의 당인(黨人)이었다. 그러나 당대의 인물 중에는 명현(名賢)이 실로 많았으니, 이 때문에 소자(邵子.소옹)의 〈사현음(四賢吟)〉에도 “송나라 희령 연간에 당대의 으뜸가는 인물들이 되었다네.[有宋熙寧之間 大爲一時之壯]”라고 한 것이다. 이에 근거하면 ‘희령, 원풍 연간의 인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희령, 원풍 연간의 옛사람[熙豐舊人]’이라는 지목은 바로 당시 사람들이 서로 지목할 적에 오로지 권력가를 가리켜 말한 것이기는 하나 이 때문에 혐의스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곤의 시에 경력(慶曆), 원우(元祐) 연간을 말하지 않고 원풍, 희령 연간을 말한 것은 운을 맞추기 위한 것일 뿐이다.
● 《강인기잡지(江隣記雜志)》의 〈호사자기(好事者記)〉에 “봄 한 철 가운데 날씨 좋은 날은 20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근년을 살펴볼 때 90일 중에 날씨 좋은 날 20일을 얻는 것도 매우 어려우니, 천지의 기후가 나날이 이상해져 감을 알 수 있다.
● 미원장(米元章.미불)이 이르기를, “붓이 마음먹은 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마치 썩은 대나무를 상앗대 삼아 배를 움직이고 굽은 젓가락으로 음식물을 먹는 것과 같다. 세상에 좋은 붓이 없어진 지 오래되었는데, 요사이는 더욱 심하여 예사로운 글자를 쓸 때에도 사람의 기력을 극도로 소모시킨다.” 하였다. 우연히 미원장의 이 말을 보고는 적절한 비유가 좋아서 기록하는 바이다.
● 이하(李賀)의 작품 중에 〈오립소송가(五粒小松歌)〉가 있는데, ‘오립(五粒)’은 곧 ‘오렵(五鬣)’으로 우리 동방의 해송(海松)이 그것이다. 보통 소나무는 잎자루마다 두 개의 바늘잎이 달려 있는데 오직 해송만은 다섯 개의 바늘잎이 달려 있다. 이 수종(樹種)이 중국에는 매우 드물어 화산(華山)에서만 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화산송(華山松)이라고 부른다. 오대(五代) 때에 정오(鄭遨)가 화산에 은거하면서 오렵송(五鬣松)을 먹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있는데,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이르기를, “껍질에 비늘이 없고 열매를 맺는데, 대부분 신라에서 심은 것이다.” 하였다. 이로 볼 때 천하에서 우리나라[海東]에만 이 소나무가 많음을 알 수 있으니, ‘해송’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소나무가 보통 소나무와 비록 모습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요컨대 소나무의 별종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소나무라고 통칭하고 오직 바늘잎의 개수로 명칭을 달리할 뿐인 것이다. 우리 동방의 풍속에는 잣나무와 혼동하여 일컫는데, 통속적인 말에서만 그와 같을 뿐 아니라 시문에도 잘못된 용어를 그대로 이어받아 그렇게 일컫고 있는 실정이니 매우 온당치 못하다.
● 도연명(陶淵明.도잠)의 〈여자소(與子疏)〉에 이르기를, “내 나이 50을 넘겼다. 나는 젊어서 곤궁하였으니, 늘 집안이 가난하여 동서로 돌아다녀야 했다.” 하였는데, 이는 이 소(疏)를 지을 때의 나이가 바로 50세 남짓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위 글의 ‘장수와 요절은 정해진 운명이 있어서 달리 요청할 수 없다.’는 뜻을 이어 자신의 수명이 부족하다고 할 수 없음을 보인 것이다. 그리고 ‘젊어서’ 이하는 바로 출처가 곤궁하게 된 까닭을 서술한 것이니, 50세를 넘겨서야 동서로 돌아다니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조천산(趙泉山)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도연명은 나이가 50을 넘겼을 때에 10년 동안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유환(游宦)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50은 30이 되어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 송나라 마영경(馬永卿)이 지은 《난진자(嬾眞子)》에 이르기를, “어릴 적의 이름과 어릴 적의 자(字)는 〈이소경(離騷經)〉에서 비롯되었다.” 하였다. 이는 굴원(屈原)은 자가 평(平)이고 정칙(正則), 영균(靈均)은 그의 어릴 적의 이름과 어릴 적의 자라는 뜻인데 매우 옳지 못하다. 주자(朱子)의 《초사(楚辭)》 주에, “이름은 평(平)이고 자는 원(原)이다. 정칙(正則)과 영균(靈均)은 각기 그 뜻을 풀이하여 아름다운 칭호로 삼은 것이다.” 하였는데, 평(平)을 정(正)으로 풀이한 것은 그 뜻이 실로 알기가 쉬우나, 원(原)을 균(均)으로 풀이한 것은 《시경》의 ‘개간된 언덕과 습지[畇畇原隰]’라는 글을 기초로 한 것 같다. 마영경은 이 점을 살피지 못하고 마침내 영균은 어릴 적의 이름이고 정칙은 어릴 적의 자라고 하였으니 잘못되었다.
● 옛 법에 우물을 파는 사람은 먼저 수십 개의 동이에 물을 담아서 땅을 팔 곳에 두는데, 밤에 보아 동이 속에 뭇별과 달리 큰 별이 있는 자리에서 반드시 감천(甘泉)을 얻는다 하니, 이것을 송나라 방작(方勺)의 《박택편(泊宅編)》에서 보았다. 또 근래에 신무(愼懋)라는 사람이 있는데 지술(地術)에 상당히 밝다. 그가 이르기를, “우물을 파려면 먼저 동(銅)으로 만든 동이 몇 개를 땅 위에 엎어 두고는 밤을 지낸 뒤 관찰해서 그중에 이슬 기운이 많이 맺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를 파면 반드시 샘물을 얻게 된다.” 하였는데, 이 말도 일리가 있다. 우리 집 농암(農巖)은 안타깝게도 샘이 없어서 늘 시냇물을 길어다 마시곤 하는데, 이 두 가지 방법을 시험해 볼 일이다.
● 육방옹(陸放翁)의 《노학암필기》에 이르기를, “유자후(柳子厚)의 시에 ‘바다 위 뾰족한 산 예리한 칼끝처럼, 가을 들자 곳곳에서 수심에 찬 간장 끊네.[海上尖山似劍鋩 秋來處處割愁腸]’ 하였는데, 동파(東坡.蘇軾)가 그 구절을 응용하여 이르기를, ‘시름을 끊는 건 칼끝처럼 뾰족한 산[割愁還有劍鋩山]’이라고 하였다. 이에 혹자는 ‘시름에 찬 간장을 끊네.[割愁腸]’라고 할 수는 있어도 ‘시름을 끊는[割愁]’이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작고한 형 중고(仲高.陸升之)는 이르기를, ‘진(晉)나라 장망(張望)의 시에 「밀려오는 시름을 끊을 수 없네.[愁來不可割]」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시름을 끊는[割愁]」이라는 말의 출처이다.’ 하였다.” 하였다. 내 생각에, ‘밀려오는 시름을 끊을 수 없네’는 시름을 억제하기 어렵다는 말이고 ‘수심에 찬 간장 끊네’는 수심이 지극하여 간장을 끊는다는 말로, 두 가지 뜻이 정반대이다. 지금 동파의 시는 실로 유자후의 시를 기초로 하였으니, 그렇다면 장망의 시를 가지고 증거를 삼아서는 안 된다. 어쩌면 동파공은 실로 장망의 뜻을 취하면서 유자후의 말을 사용하여 번안한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시름을 끊는’이라는 말의 온당치 못함이 정말 혹자의 의심과 같을 것이다.
● 《노학암필기》에 이르기를, “한(漢)나라의 예서(隷書)는 세월이 오래되어 풍우에 벗겨지고 침식되었다. 그래서 그 글자에 더 이상 봉망(鋒鋩)이 없는 것이다. 근래에 두중미(杜仲微)는 일부러 모지라진 붓을 사용하여 예서를 쓰고는 스스로 한나라 각자(刻字)의 유법(遺法)을 얻었다고 말하는데, 어찌 그렇겠는가.” 하였다. 내가 볼 때 근세에 허목(許穆)이 쓴 고전(古篆)도 이와 똑같다. 비단 전서(篆書), 예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시도 그러한 것이 있으니, 옛 악부시(樂府詩)의 요가(鐃歌), 고취(鼓吹) 따위는 자구에 단속(斷續)이 많아 왕왕 이어 읽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로 자구가 빠져서 그런 것이다. 이반룡(李攀龍)의 무리는 이 점을 살피지 못하고 난삽한 말을 만들어 고체(古體)라고 하는데, 이는 바로 두중미의 한예(漢隷), 허목의 고전과 같은 부류이다.
● 나는 일찍이 가야산(伽倻山)을 유람하다 ‘치(寘)’ 운을 사용하여 오언 장편(五言長篇)을 지은 적이 있는데, 그 가운데 ‘취(觜)’ 자로 압운(押韻)하여 “이건 마치 은하수 새벽 맞을 제, 뭇별 중 삼성 취성 남은 것 같네.[髣髴雲漢曉 列宿餘參觜]”라고 한 구가 있다. 나중에 운서(韻書)를 살펴보니 ‘參觜’의 ‘觜’는 바로 ‘지(支)’ 자 운에 있었다. 그래서 압운이 잘못된 줄 알았지만 고칠 수도 없었다. 지금 마영경(馬永卿)의 기록을 보니 “28수 가운데 ‘觜’의 음이 자(訾)라는 것은 잘못되었다. 서방(西方)의 별자리는 백호(白虎)인데, 취성(觜星), 삼성(參星)이 호랑이의 머리에 해당한다. 그래서 ‘부리[觜]’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다. 이와 같다면 내 시에 압운한 것은 잘못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이 밖에 ‘宿’의 음을 ‘수(繡)’, ‘亢’의 음을 ‘강(剛)’, ‘氏’의 음을 ‘저(低)’라고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분별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근거가 있는 듯하다. 요컨대 운서에 오류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 소자유(蘇子由.蘇轍)의 《용천지(龍川志)》에 이르기를, “범 문정공(范文正公)은 충량(忠亮)에 독실하여 비록 공명을 좋아하기는 하였으나 붕당을 짓지는 않았으니, 젊은 시절 여 허공(呂許公.여이간)을 배척하고 훌륭한 일을 이루는 데에 용감하면서도 그의 무리가 그로 인하여 지나치게 엄하고 지나치게 꼿꼿한 것은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월주(越州)에서 조정으로 돌아왔다가 서쪽 변방을 다스리러 나가게 되었는데, 여 허공이 도와주지 않으면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을 탓하는 글을 써서 원한을 풀고 갔다. 그 뒤에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섬서(陝西)를 안무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미 늙어 정주(鄭州)에 살고 있었던 여 허공과 길에서 서로 만났다. 범 문정공은 자신이 중서성(中書省)에 있어 봐서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오직 허물을 뉘우치는 말만 하였다. 이에 여 허공이 날이 저물도록 흔연히 함께 이야기하였는데, 여 허공이 묻기를 ‘어찌하여 급히 조정을 떠났습니까?’ 하자, 범 문정공이 말하기를 ‘서쪽 변방을 다스리고 싶어서입니다.’ 하였다. 여 허공이 이르기를 ‘서쪽 변방을 다스리는 것은 조정에 있는 것이 편함만 못합니다.’ 하자, 범 문정공이 그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그래서 구양공(歐陽公)이 범 문정공의 신도비문을 지으면서 ‘두 공이 만년에는 기쁘게 서로 마음이 맞았다.’ 한 것이다. 후생(後生)들은 그런 줄을 모르고 모두 구양공을 비판하는데, 나는 장공(張公)이 말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믿게 되었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주자(朱子)가 주 익공(周益公.周必大)에게 준 편지에 범 문정공과 여 허공이 원한을 푼 일에 대해 논하기를, “《용천지》는 이에 대해 또 장안도(張安道.張方平)의 말을 직접 들었다고 하여 증거를 삼았는데, 장안도는 실로 여 허공의 당인이므로 믿을 만한 증거로 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였다. 지금 이 지(志)에 기록된 것을 상고해 보면 오로지 범공이 지난날 여 허공을 공격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그와 화해했다고 한 것 같은데, 소자유는 아마도 장안도의 말을 근거로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은 것일 것이다. 이는 바로 장안도가 여 허공의 편을 들어준 뜻인 만큼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주자가 도리어 “장안도는 실로 여 허공의 당인이므로 믿을 만한 증거로 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한 것은 어째서일까? 어쩌면 오로지 범 문정공이 허공이 도와주지 않으면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을 염려하여 자신을 탓하는 글을 써 원한을 풀고 갔다는 한 대목만을 가리켜 그런 것이 아닐까?
● 나는 일찍이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閔維重)의 만시(挽詩)를 지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상고대[樹稼]’라는 글자를 썼다. 그것은 편(篇) 안에 따로 ‘목(木)’ 자가 있기 때문에 ‘수(樹)’ 자로 ‘목(木)’ 자를 대신한 것이었으니, 의미를 말하자면 그것이 실로 해로울 것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처가 없는 생경한 말이라고 의심하였다. 뒤에 보니 《동헌필록(東軒筆錄)》에 이르기를, “당(唐)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상고대가 피었는데 영왕(寧王)이 죽었다. 그래서 당시 속언에 ‘얼음이 초목에 맺혀 상고대가 피면 높은 벼슬아치가 두려워한다.[冬凌樹稼達官怕]’고 하였다.” 하였는데, 이에 근거하면 ‘수가(樹稼)’라고 쓰는 것이 옳은 것이다. 옛날 소자첨(蘇子瞻.蘇軾)은 글을 지을 적에 전고를 사용하려면 반드시 자제, 문생들로 하여금 그 출처를 상고하게 하였는데, 이는 그렇게 한 뒤에야 마음에 흡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 왕년에 청풍(淸風)에 있을 적에 종인(宗人) 김해보(金楷甫)와 이것저것 담론하다가 고금에 절의(節義)를 지킨 인사가 많고 적은 데에 이야기가 미쳤다. 김군이 이르기를 “송나라 때에는 예의로 사대부를 배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강(靖康) 연간의 변란에 의리를 위해 순절한 이가 이 시랑(李侍郞.李若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어찌하여 그리도 적었단 말입니까?” 하므로, 내가 답하기를 “그것은 알기가 어렵지 않다. 왕안석(王安石) 이래로 올곧은 인사는 내쫓고 소인배들을 끌어다 썼으며, 소성(紹聖), 숭녕(崇寧) 연간에 이르러서는 장돈(章惇), 채경(蔡京)의 무리가 서로 이어 권력을 휘둘렀다. 그리하여 당대의 현인, 군자는 내쫓기지 않으면 지방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었을 뿐 조정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요직을 채우거나 외번(外藩)에 포진된 자들은 오직 채경, 왕보(王黼), 동관(童貫), 양방평(梁方平)의 사인(私人)들뿐이었다. 이런 무리와 함께 변란을 당하였으니, 나라를 저버리고 임금을 팔아넘기며 달가운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어찌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당시에 변경(汴京)이 포위된 지 몇 개월도 되기 전에 두 황제가 북쪽으로 끌려가고 고종(高宗)이 남쪽으로 강을 건넜다. 그래서 비록 충신, 의사(義士)가 있기는 했으나 먼 지방에 있는 관계로 미처 때맞추어 일어나 변란에 달려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뚝이 충절을 바친 자가 어찌 한두 사람에 그쳤겠는가. 지금 이 점을 살피지 않고 사람이 없었다고 싸잡아 말한다면 이는 빈틈없이 충실한 논의가 아니다.” 하였다. 김군은 이에 깊이 수긍하였다. 오늘 우연히 장채(張采)의 〈명신속록서(名臣續錄序)〉를 보았더니 그가 이미 이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뜻이 내가 지난날 말한 것과 완전히 부합하였다. 다만 김군이 먼 곳에 있어 이 서문을 꺼내어 함께 읽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 나는 일찍이 〈귀거연서(歸去淵序)〉를 지은 적이 있는데, 도연명(陶淵明 도잠(陶潛))이 팽택(彭澤)을 버린 일을 논하여 이르기를, “연명은 기괴한 것을 찾고 괴상한 일을 행하는 부류가 아니다. 그가 벼슬한 것은 본디 가난 때문이었으니, 어찌 일개 독우(督郵)에게 허리를 굽히기를 꺼려서 버리고 떠나기를 그처럼 단호하게 하였겠는가. 당시에 기노(寄奴.남조 송 고조 劉裕)가 정권을 잡을 만한 형세가 이미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를 구실로 떠나기를 마치 공자가 제사 고기를 보내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魯)나라를 떠난 것처럼 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이러한 의론을 낸 것은 한 때의 억견에서 나온 것으로, 과연 도연명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뒤에 왕위(王褘)의 〈여산기(廬山記)〉를 읽어 보니, “정절(靖節.陶潛)은 팽택 영(彭澤令)이 되었다가 관복을 갖추고 독우를 만나는 것을 꺼려 마침내 벼슬자리를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해에 유유가 유중문(劉仲文)을 죽이고 장차 진(晉)나라의 국권을 잡으려 하였는데 도연명은 의리상 두 성씨를 섬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를 핑계 삼아 사직하고 떠나기를 마치 공자가 사소한 죄 때문에 떠나려고 했던 것처럼 한 것이니, 어찌 일개 독우 때문에 그처럼 발끈하여 벼슬을 그만둔 것이겠는가.”라고 하여, 내가 전에 논한 것과 완전히 부합하였으며, 더욱이 공자의 일을 끌어 댄 것마저 부합하였다. 나는 내 소견이 그다지 잘못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뻤으며, 또 고금의 사람의 생각이 이처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독창적인 견해를 내었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것이 애당초 과거 사람들이 이미 설파하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다.
● 중국에서 ‘동(洞)’이라고 칭하는 것은 모두 바위에 뚫린 굴이나 구멍으로서 그 속이 비어 거처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킬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아니하여 모든 산골짜기의 깊은 곳을 ‘동’으로 명명하곤 한다. 운서(韻書)를 살펴보면, “동(洞)은 ‘비었다.[空]’는 말이다.” 하였는데, 두 산 가운데 골짜기가 있으면 이 또한 비어 있는 뜻이 있으니 ‘동’이라고 칭하는 것이 안 될 것도 없다. 그러나 경성(京城)의 방리(坊里)의 이름을 또한 ‘동’이라고 칭하는 것은 더욱 온당치 못한데, 언제부터 이런 오류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주(周)나라 사람들은 옥을, 송(宋)나라 사람들은 쥐를 똑같이 박(璞)으로 명명한 것을 보면 지방의 풍속에 따라 익숙해져 이름이 같으면서 실상이 다른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이니, 비단 이 한 가지 일뿐만이 아니다. 이는 또한 각기 그 명칭에 따르면 될 뿐이다. 《명산기(名山記)》를 읽다가 우연히 기록하는 바이다.
● 또 중국인들은 바위에 구멍이 있는 것을 ‘암(巖)’이라고 칭하는데, 예컨대 영주(永州)의 조양암(朝陽巖), 시흥(始興)의 영롱암(玲瓏巖), 영복(永福)의 방광암(方廣巖), 계림(桂林)의 여러 복파암(伏波巖)이 모두 그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천 길 짜리 거대한 바위라 하더라도 ‘암’이라고 칭하지 않는다. 그런데 《운서》를 살펴보면 “암(巖)은 ‘봉우리[峰]’이다.” 하였다. 구멍이 있는 바위에 대해 어찌하여 봉우리라는 뜻을 취하여 굳이 이렇게 칭하는지, 그 가소로운 것이 우리나라에서 방리(坊里)를 ‘동(洞)’으로 칭하는 것과 거의 다름이 없다. 내 생각에 이는 본디 남방의 풍속에서 칭했던 말인데 마침내 중국에서 통칭하는 이름이 된 것이 아닌가 한다.
● 황보숭(皇甫嵩)은 부풍(扶風)에 주둔하여 동탁(董卓)을 토벌하려고 개훈(蓋勳)과 모의했는데 동탁이 성문교위(城門校尉)로 부르자 나아갔고, 주준(朱雋)은 하남(河南)에 있으면서 이각(李傕)을 토벌하려고 도겸(陶謙)과 모의했는데 이각이 태복(太僕)으로 부르자 나아갔다. 이 두 사람은 처음에 모두 황건적(黃巾賊)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으며 그 지혜와 용기도 서로 필적하였으나 말로에는 모두 거취를 잘못 정하여 군자들의 비판을 샀으니, 일이 똑같아 우습다.
● 하서(河西)의 삼명(三明) 중에 황보규(皇甫規)는 지조와 절개가 뛰어나 가장 어질었다. 장환(張奐)은 얼떨결에 속임을 당하여 충량(忠良)을 해쳤으므로 비록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후작(侯爵)을 힘껏 사양한 데다 진번(陳藩), 두무(竇武)를 위해 글을 올려 해명해 주었으니 그 또한 허물을 잘 만회한 자이다. 오직 단경(段熲)만은 환관에게 아부하여 재물을 바치고 벼슬을 얻었다가 끝내는 또한 그 때문에 몸을 망쳤으니, 가장 저급한 인물이다.
● 원본초(袁本初.袁紹)의 부하 중에는 명사가 매우 많았으나 저수(沮授), 전풍(田豐)이 가장 어질었는데, 저수는 지모, 계략이 특히 뛰어났으니 저수 같은 이는 당대의 인걸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닌 자에게 몸을 맡긴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 근준(靳準)은 연총(淵聰.劉曜)의 자손을 죽일 적에 유씨의 남녀를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베었고 염민(冉閔)은 석호(石虎)의 38명의 손자를 죽여 석씨를 완전히 멸족시켰으니, 그 일이 똑같다. 이는 모두 하늘이 이들의 손을 빌린 것이다.
● 위현(韋賢)이 이르기를, “자식에게 황금 만 광주리를 남겨 주는 것은 자식에게 경전 하나를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 하였는데, 세상에서 이를 명언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식에게 영예를 가르치는 것이 부유함을 남겨 주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있겠는가. 방공(龐公)이 유표(劉表)에게 대답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위태로운 것을 남겨 주는데 나만은 편안한 것을 남겨 주겠습니다. 비록 남겨 주는 것이 다르기는 하나 남겨 주는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이 말이 한층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말일 것이다.
● 귀진천(歸震川 귀유광(歸有光))의 문집에 실린 〈하씨선영비명(何氏先塋碑銘)〉에 “진나라서 처음으로 은택을 받고, 여강에서 명성이 드러났으니, 문목공이 정성스레 유주(幼主) 도왔네. 훌륭하다, 효성스러운 자식들이여. 참으로 이들은 형이며 아우, 모두 다 명망과 덕망 있었네.[晉興恩澤 著自廬江 文穆贊密 懿哉孝子 實維昆季 皆有名德]” 하였는데, 그 주에 이르기를, “하구(何求)와 아우 하점(何點)ㆍ하윤(何胤)을 세상에서 하씨삼고(何氏三高)라고 칭하는데, 하점은 또 효성스러운 은사라고 지목받는다. ‘훌륭하다, 효성스러운 자식들이여. 참으로 이들은 형이며 아우, 모두 다 명망과 덕망 있었네.’라는 말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비문에 이미 “하씨는 진(晉)나라의 효자 하기(何琦)의 후예이다.”라고 하였으니 명(銘)에 말한 ‘효자’는 바로 이 하기이다. 어찌 하점이 될 수 있겠는가. 주를 낸 사람은 하점 형제가 명망이 있었다는 생각에 형제들이 모두 명망과 덕망이 있었다는 글에 이들을 견강부회한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른바 형제라는 것은 바로 하기가 하충(何充)의 종형이고 위의 글의 ‘문목(文穆)’을 이어 말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일 뿐, 하점 형제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 일찍이 동파(東坡) 문집의 〈장익로제금찬(張益老諸琴贊)〉을 읽고는 그 글이 다른 글들과 비슷하지 않음을 매우 이상하게 여겨 생각하기를, ‘이 노인이 일부러 변격(變格)으로 특이한 글을 써서 이처럼 침중(沈重)하고 정교한 작품을 지은 것일 뿐이다.’ 하였다. 뒤에 《산곡집(山谷集)》을 읽다 보니 거기에도 이 글이 실려 있었고, 또 산곡이 장익로에게 답한 글도 보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여러 거문고들에 대해 두루 품평하고 싶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더욱 분명한 증거이다. 그제서야 《동파집》에 잘못 실린 것임을 알게 되었다.
● 동파의 〈차운등원발허중도진소유(次韻滕元發許仲途秦少游)〉 시에
두 공은 시격이 늙을수록 참신한데 / 二公詩格老彌新
취하여 읊조리는 야인도 허여하네 / 醉後狂吟許野人
앉아 보니 푸른 언덕 못의 티끌 삼키는데 / 坐看靑丘呑澤芥
흙탕물과 시내 마름 대접하기 부끄럽네 / 自慚潢潦薦溪蘋
두 고을 깃발이 밝게 서로 비추는데 / 兩邦旌纛光相照
십 묘 밭에 쟁기 호미 손에 잡고 일을 하네 / 十畝鋤犁手自親
진랑은 문장 솜씨 천하에 으뜸이니 / 何似秦郞妙天下
머지않아 〈동순송〉 어찌 아니 올릴쏜가 / 明年獻頌請東巡
하였는데, 그 주에 “두 고을 깃발이라 한 것을 보면 아마도 등원발과 허중도가 모두 태수였던 것 같다. 그러나 파제(破題)에 그를 가리켜 ‘허 야인(許野人)’이라고 하였으니, 알 수 없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허(許)’는 곧 허여한다는 뜻으로, 두 공이 시를 잘 지으면서도 야인이 취하여 분방하게 읊조리는 것을 허여해 준다는 말이다. 두 공은 등원발, 허중도를 가리키고 야인은 동파가 자신을 지칭한 것이니, 어찌 허중도와 관계된 말이겠는가. 그렇다면 두 고을이 등원발, 허중도에 대한 말임은 맞는 것이다. 주석에서 ‘허(許)’ 자 하나 때문에 이처럼 의심하고 논란하였으니 가소롭다. 우연히 《동파집》을 보다가 쓰는 바이다.
● 유몽득(劉夢得.劉禹錫)의 〈죽지사(竹枝詞)〉에 “동쪽에서 해 뜨더니 서쪽에선 비, 날 흐린가 하였더니 도로 개었네.[東邊日出西邊雨 道是無情還有情]” 하였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 뜻을 알지 못한다. 내 생각에 이는 고시의 〈독곡가(讀曲歌)〉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정(情)은 청(晴)과 음이 같기 때문에 동쪽의 해와 서쪽의 비를 가지고 남녀 사이가 무정한 듯하면서도 유정한 듯도 함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독곡가〉의 “단단한 돌문이 입안에 생겨, 슬픔을 머금고 말을 못하네.[石闕生口中 含碑不得語]” 와 〈석성악(石城樂)〉의 “바람이 황벽나무 울타리 불어, 안타깝게 이별의 소리 내누나.[風吹黃蘗藩 惡作苦籬聲]” 등과 똑같은 것이다. 내가 비록 이와 같이 풀이하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믿지 않았다. 뒤에 장문잠(張文潛 장뇌(張耒))의 《명도잡지(明道雜志)》를 보니, “한지국(韓持國)은 술을 마신 뒤에 늘 유삼변(柳三變)의 시가 중 한 곡을 읊조리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구에 이르기를, ‘정이 많은 까닭에 병이 많은 지경이 이르렀네.[多情到了多病]’ 하였다. 늙은 계집종이 늘 그것을 듣고 번번이 이르기를, ‘높은 분은 몸속도 늘 보통 사람들과 다르구나. 나는 비가 오려면 몸속이 좋지를 못한데 귀인은 맑은 날이 많으면 병이 난단 말인가.’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情)’을 ‘맑다[晴]’로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와 같았던 것으로, 앞서 말한 시의 증거가 될 수 있다.
● 강절(康節)이 66세에 지은 시에 이르기를, “내가 만일 십 년만 젊어진다면 조금은 성공할 수 있을 테지만, 어찌하리 천지간 이 세상에는 해가 두 번 중천하는 이치 없는걸.[使吾却十歲 亦可少集事 奈何天地間 日無再中理]” 하였는데, 이는 깊이 탄식한 것이다. 소강절의 학문은 천하의 일에 대해 이미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 말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이른바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자신을 생각해 볼 때 나는 올해에 아직도 소강절의 당시 나이보다 13세나 젊으니 진보할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전에 공부한 것이 전혀 없으니, 만약 열 배의 노력을 경주하지 않는다면 어찌 조금이라도 일을 이룰 가망이 있겠는가. 이것이 두려운 마음으로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점이다. 우연히 《격양집(擊壤集)》을 보다가 이렇게 쓰는 바이다.
산곡(山谷)의 〈유백화주이씨원(游百花洲李氏園)〉 시에
머리가 희기 전에 삼정승에 오르고 / 三公未白髮
한집안 열 사람이 붉은 바퀴 수레 타도 / 十輩乘朱輪
그건 다만 남들 눈에 보기가 좋을 뿐 / 只取人看好
백 년밖에 못 사는 이 몸에 무슨 소용 / 何益百年身
오로지 바라는 건 오늘이 영원하여 / 但願長今日
맑은 술동이 끼고 벗님 마주 대하는 것 / 淸樽對故人
하였는데, 이는 가설적으로 말하여 검은 머리로 정승이 되고 가세(家世)가 빛나는 것은 그저 남들이 보기에 좋은 것일 뿐 요컨대 자기 몸에는 무익하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주를 낸 사람은 ‘삼공(三公)’을 구 내공(寇萊公.寇準), 범 문정(范文正), 사희심(謝希深.謝絳)이라고 하였다. 이는 백화주에 이 세 공의 유적이 있는 것만 보고 이처럼 견강부회한 것으로 작자의 본의를 크게 잃었으니 가소롭다.
● 산곡의 〈화형돈부추회(和邢敦夫秋懷)〉 시에 “가을 바람 맞으며 장부의 눈물, 정호를 위하여 뚝뚝 떨구네.[西風壯夫淚 多爲程顥滴]”라고 하였는데, 이는 안타까워한 것이다. 산곡은 소식(蘇軾)의 문인이었는데도 그 말이 이와 같았으니, 어쩌면 당시의 공론을 실로 가릴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아니면 명도(明道.程顥)의 덕성이 관대하여 이천(伊川.程頤)의 방정하고 엄숙한 기상과는 달랐기 때문에 비록 소식의 당이라 해도 모나게 대하지 않았던 것일까?
산곡의 〈사마온공만(司馬溫公挽)〉에 “인물평은 관 뚜껑을 덮어야 끝나는 법, 공은야 이제 와서 명성 실로 높아졌네.[毁譽盖棺了 于今名實尊]” 하였는데, 주에 이르기를 “사람이 죽으면 칭찬과 헐뜯음도 따라서 사라지는데 오직 공만은 죽은 뒤에 그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는 말이다.”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죽은 뒤에야 완전히 정해지기 때문에 공이 죽은 뒤에 명성이 실로 더욱 높아졌다는 말이다. 주석의 설은 옳지 않은 것 같다.
● 《주자어류(朱子語類)》에 “고종(高宗)이 처음 즉위했을 때에는 아직 원우(元祐)와 희령(熙寧), 원풍(元豐) 연간의 당(黨)을 변별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왕백언(汪伯彦), 황잠선(黃潛善) 등 하는 짓이 바르지 못한 자들을 기용하였는데, 왕백언, 황잠선은 또 소인 중에서도 제일 하질인 자들이다. 조 승상(趙丞相 조정(趙鼎))이 승상 벼슬에 오르고 나서 바야흐로 조금 변별할 줄을 알았고 또한 맹 황후(孟皇后)가 궁중에서 힘껏 고종을 설득하였으며 고종이 또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등의 글을 보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고종이 하루아침에 깨달아 스스로 그들을 미워하였으니, 군자, 소인의 당이 비로소 밝혀졌다.” 하였다. 내가 볼 때, 근세에 조정론(調停論)을 주장하는 이들은 늘 “우리나라의 붕당은 이미 누대를 거쳐 와서 거의 백여 년이 되었으니, 이전 시대에 일시적으로 분당(分黨)한 것과는 같지가 않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익숙히 보고 들어 온 까닭에 갑자기 고치기는 어렵게 되었으니, 지금 비록 부정하고 바른 차이가 없지는 않으나 출척(黜陟)과 용사(用捨)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희령, 원풍과 원우 연간의 붕당이 고종이 금(金)나라에 쫓겨 남쪽으로 강을 건널 때까지도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주자의 논의는 그들을 변별하는 것을 옳다고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이 조항에서 논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정하고 바른 차이가 없다고 한다면 모르겠으나 만약 부정하고 바른 차이가 있다면 어찌 그 유래가 깊다고 하여 옥석을 가리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 또 《주자어류》에 “호정 덕휘(胡珵德輝)가 지은 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인하여 묻기를 ‘호덕휘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였는데, 대답하기를 ‘선친의 벗이다. 진릉(晉陵) 사람으로 일찍이 구산(龜山 양시(楊時))을 종유하였는데, 조 충간공(趙忠簡公 조정(趙鼎))이 국정을 담당할 적에 장얼 거산(張嵲居山)과 함께 사관이었다. 조공이 벼슬을 떠나자 장 위공(張魏公 장준(張浚))이 홀로 정승의 업무를 담당하면서 「원우 연간의 당인이라고 반드시 모두 옳지는 않으며 희령, 원풍 연간의 당인이라고 반드시 모두 그르지는 않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하윤중(何掄仲), 이사표(李似表) 두 사람을 발탁하여 사관으로 삼았다. 그리고 호덕휘, 장거산이 편수한 사서(史書)를 모두 뽑아내어 고치려고 하자 호덕휘, 장거산은 결국 자청하여 벼슬을 떠났다. 조 충간공이 다시 정승으로 들어가 마침내 하윤중, 이사표를 제거하고 호덕휘, 장거산을 기용하여 사관으로 삼고는 글을 써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하였다.” 하였다. 이를 근거로 볼 때 두 당의 다툼은 고종이 남쪽으로 강을 건넌 뒤까지도 끝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한유(韓愈)의 비문은 직설적인 서술이 많고 구양수(歐陽脩)의 비문은 종횡으로 뒤섞어 서술한 것이 많다. 한유의 비문은 문체가 근엄한데 그의 뛰어난 점은 자구를 운용하는 데에 있고, 구양수의 비문은 언어가 점잖고 기품이 있는데 그의 뛰어난 점은 편장(篇章)의 변화에 있다.
● 한유는 풍격이 바르고 힘이 있으며, 구양수는 격조가 초연하고 사물에 대한 대응이 원만하다.
● 한유는 《상서(尙書)》,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필법에 뿌리를 두었고 구양수는 《시경(詩經)》의 〈국풍(國風)〉, 〈이소경(離騷經)〉, 《사기(史記)》의 맛을 터득하였다.
● 왕세정(王世貞)의 비문은 체재는 대부분 구양수에 가까운데 언어는 때때로 한유와 비슷하다.
● 천하의 일은 모름지기 먼저 진위와 허실을 가린 뒤에 공졸(工拙)과 정조(精粗)를 논할 수 있는데, 문장도 그러하다. 예컨대 명나라의 왕세정, 이반룡(李攀龍) 등은 고문(古文)에 힘써 당(唐), 송(宋)의 문장을 모방하였으니, 언뜻 보면 고상하고 걸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모두 비슷해 보이는 말을 표절한 것일 뿐이니, 이는 바로 문장에 있어서 가짜인 것이다.
● 한퇴지(韓退之)는 문장을 지을 적에 되도록 진부한 말을 제거하였는데, 진부한 말이란 비단 저속하고 평범한 말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옛사람이 이미 한 적이 있는 말이면 모두 그에 해당한다. 예컨대 《춘추좌씨전》, 《국어(國語)》, 《한서(漢書)》, 《사기》의 문장이 비록 아름답고 특이하기는 하나 한 번이라도 혹시 그대로 답습하여 사용한다면 모두 진부한 말인 것이다. 지금 한유의 문집에 실린 수백 편의 문장을 읽어 보면 한마디도 옛사람의 성구(成句)를 그대로 답습하여 쓴 말이 없다. 예를 들어 〈평회서비(平淮西碑)〉는 오로지 《상서》를 본받았으나 《상서》 속의 말이 한마디도 없고, 〈동진행장(董晉行狀)〉은 《춘추좌씨전》을 모범으로 삼았으나 《춘추좌씨전》 속의 말이 한마디도 없고,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序)〉는 《마사(馬史)》와 매우 비슷하나 《마사》 속의 말이 한마디도 없으니, 참으로 뛰어난 식견이다. 명나라의 문장 중에 예컨대 이우린(李于鱗)은 오로지 옛사람의 자구를 취해 이어서 문장을 지었으니 참으로 비루하다. 원미(元美.王世貞)도 일찍이 이러한 문제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 자신이 지은 글을 보면 그도 이러한 병통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비문에 일을 서술한 것이 대체로 다 《사기》, 《한서》의 어구를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편마다 중복하여 나오기 때문에 보이는 것마다 모두 진부하다. 한퇴지가 되도록 제거하려고 했던 것을 바야흐로 극력 행하면서 스스로 당, 송의 문장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고 말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 형돈부(邢敦夫.邢居實)는 비단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당대에 높았을 뿐만이 아니라, 그 인물도 제공(諸公)들에게 매우 중하게 여겨졌다. 황노직(黃魯直.黃庭堅)이 일찍이 절구 10수를 지어 원우(元祐) 연간의 제공(諸公)들의 일을 차례로 서술한 적이 있는데, 그중 한 수에 이르기를,
미친 듯이 덤벼드는 노 지방의 형 상서는 / 魯中狂士邢尙書
본디 해를 부지하여 하늘 높이 가려 했네 / 本意扶日上天衢
만약 돈부 살아 있어 이 노인을 말렸다면 / 敦夫若在鐫此老
평지풍파 일으키게 놓아두지 않았을 터 / 不令平地生崎嶇
하였으니 그에 대해 기대하고 허여한 뜻을 알 수 있다.
● 소자첨(蘇子瞻.蘇軾)의 시에는 “몸은 지금 어떠냐고 산사람이 묻는다면, 아직은 등 앞에서 잔글씨를 쓴다 하리.[山人若問今何似 猶向燈前作細字]” 하고, 육방옹(陸放翁)의 시에는 “궁유 자질 타고난 줄 스스로 알겠으니, 오십이라 노년에도 등 앞에서 잔 글 보네.[自知賦得窮儒分 五十燈前見細書]” 하였다. 나는 올해 쉰네 살로 쇠병(衰病)이 벌써 심하고 늙은이의 모습을 모두 갖추었으나 유독 시력만은 젊었을 때보다 떨어지지 않아 등 아래에서 아직도 잔글자로 된 책을 읽을 수가 있다. 그래서 두 공이 말한 것에 가깝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육방옹의 시가 더욱 맛이 있다.
● 상서(尙書) 남이성(南二星)이 배천(白川)으로 유배 갔을 적에 정유악(鄭維岳)이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숙부님은 올해 운수가 좋지 않으니 과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정유악은 공의 족질로서 운수를 점칠 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당부한 것이다. 공은 답장을 쓰지 않고 그저 척독의 뒷면에 사운시(四韻詩)를 써서 돌려보냈는데, 그중 한 연에 이르기를, “나는야 세상 만사 점괘 아니 따르나니, 오직 평생 한탄하네 쫓겨난 몸 깨 있음을[萬事懶從詹尹卜 一生長恨楚臣醒]” 하였다. 이 말은 정련(精鍊)되고 요점이 있어 읽는 사람을 깊이 경동시키는 점이 좋다. 갑신년 3월 23일에 이양숙(李養叔.李頤命)에게서 들었다.
● 범난계(范蘭溪.范浚)의 〈심잠(心箴)〉을 주자가 자주 칭찬하고 《맹자집주(孟子集註)》에 실었는데 나는 그 글을 읽을 적마다 늘 그의 인물과 출처를 상세히 밝히지 않은 것이 유감스러웠다. 근래에 옥당에서 《송시초(宋詩鈔)》를 빌려 보았는데, 범준의 시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편 머리에 그의 본말을 대략 서술하기를, “범준은 자가 무명(茂明)이고 무주(婺州) 난강(蘭江) 사람인데, 소흥(紹興) 연간에 현량방정(賢良方正)으로 천거되었으며 형제들이 대부분 고관을 지냈다. 나중에 진회(秦檜)가 국정을 담당하자 출사하지 않고 꼿꼿한 절개를 지키며 향계(香溪)에 은거하였는데, 그로 인해 향계선생(香溪先生)이라고 불렸다. 그는 글을 지어 도를 밝히되 대체로 경학을 근간으로 하였다.” 하였다. 이를 근거로 보면 그는 인품이 실로 범상하지가 않았다.
● 범준의 문집에 〈독양자운전(讀揚子雲傳)〉 시가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자줏빛과 파리 소리 철부지를 기만하니 / 蠅聲紫色欺昏童
높이 나는 기러기처럼 의로운 이 떠나가네 / 義士遠引如冥鴻
어이하여 정신없이 낭관 벼슬 지내며 / 胡爲顚眩尙執戟
머리 숙여 신(新) 높이고 신하를 자처했나 / 美新屈首稱臣雄
민산의 옥야에 고구마가 크건만 / 岷山沃野蹲鴟大
불우해도 안 돌아감 참으로 잘못일레 / 拓落不歸良已過
그의 몸 위태롭기 우물가의 병 같은데 / 近危竟似井眉甁
〈반이소(反離騷)〉를 지어서 굴원(屈原)을 비웃었네 / 虛作反騷嗤楚些
양심 속여 작록 연연 남의 조롱을 받으면서 / 詭情懷祿遭嘲評
오로지 문필로써 명성을 남기었네 / 但用筆墨垂聲名
하였다. 주자 이전에는 양웅(揚雄)을 비판한 것이 이 시처럼 통렬한 것이 없었으니, 왕증(王曾) 등 여러 사람이 양자운의 편을 들어 주어 왕망(王莽)의 신하 노릇한 죄를 변호해 주었던 것에 비하면 소견이 월등히 뛰어나다.
● 구양수(歐陽脩)의 문집에 실린 〈길주학기(吉州學記)〉는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비단 자구에 증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단락과 장(章)의 선후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하나는 석각본(石刻本)이고 하나는 송나라가 태평할 적에 인쇄한 본인데, 석각본은 《육일거사집(六一居士集)》에 실려 있고 인쇄본은 그 외집(外集)에 실려 있다. 석각본은 자수가 상당히 줄었고 문장도 한층 간결하고 유창한 것으로 보아 뒤에 개수한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구양공은 글을 지음에 있어 비록 척독처럼 범상한 글이라 해도 대부분 뒤에 개수했다고 하는데, 그는 이처럼 글을 짓는 데에 있어 구차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기(記)도 그 한 가지 증거이다. 두 본을 가지고 한번 비교 대조해 살펴보면 자구를 취하고 버림으로써 자세히 하고 간략히 한 뜻과 글자를 정밀히 선택하고 윤색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주 익공(周益公 주필대(周必大))의 서(序)에 “전에 지은 것과 윤색한 새 작품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글을 짓는 법을 깨닫게 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이하는 을유년(1705, 숙종31)에 기록한 것이다. -
● 구양공(歐陽公)의 문집에 매성유(梅聖兪.梅堯臣)의 시집 서문이 있는데,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매성유가 살아 있을 적에 지은 것이다. 예컨대 “나이가 지금 쉰이다.” 하고, 또 “세상 사람들은 그가 오랫동안 곤궁하게 지내며 늙어 가는 줄은 모른다.” 하였으니, 매성유가 죽은 뒤에 지은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런데 끝에는 “15년 뒤에 매성유는 병들어 죽었다.”는 말이 있다. 공은 처음에 사경초(謝景初)가 편집한 것을 바탕으로 앞에 말한 것처럼 서문을 짓고 매성유가 죽은 뒤에 다시 그 완전한 시고(詩稿)를 편집하여 정하자 이전에 쓴 서문에 이 몇 마디 말을 사족(蛇足)처럼 보태고 전후의 글을 합하여 한 편으로 만든 것이니, 비록 의심스럽기는 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저간의 사정이 이와 같을 것이다. 그리고 공이 매성유에게 준 편지를 살펴보면 “시집의 서문을 삼가 명하신 대로 부쳐드립니다. 뛰어난 솜씨를 지닌 작자의 훌륭한 점을 기술하여 말하기는 했습니다만 마음에 들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이 또한 이 서문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 우연히 구양공의 문집을 보고 기록하는 바이다.
● 구양공의 문집에 서무당(徐無黨), 초천지(焦千之)가 지은 서(胥), 양(楊) 두 부인의 명(銘)이 실려 있다. 이는 공이 모친 정 부인(鄭夫人)의 상을 당하여 두 부인을 합장하려고 하였는데, 자신은 상기(喪期) 중에 있기 때문에 두 문인에게 명하여 대신 명을 짓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실은 공이 지은 것이니, 그 문사와 체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두 명이 모두 매우 훌륭한데 모녹문(茅鹿門)이 《당송팔대가문초》에 넣지 않은 것은 어쩌면 그것이 공의 작품임이 분명치 않아서가 아닐까 싶다.
● 두보(杜甫)의 시에 대한 소씨(蘇氏)의 주석이 위작이라는 것은 주자(朱子)가 이미 분명히 말하였으며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진씨(陳氏)의 설과 명나라의 양승암(楊升菴.楊愼), 전목재(錢牧齋)의 문집에도 논한 것이 있다. 그 주석에 인용한 옛사람의 사적과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식견이 있는 사람은 한 번만 보아도 저절로 분명히 드러나 애당초 고증할 것도 없이 그 허무맹랑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에 유서(類書)를 편찬한 자들은 왕왕 제대로 살피지 않고 간혹 도리어 그것을 인용하여 역사 사실로 삼곤 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나는 일찍이 아우들과 함께 《사문유취(事文類聚)》와 기타 유서들을 보면서 거기에 인용된 역사 사실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늘 ‘이는 필시 두보 시에 대한 소씨 주의 말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곤 하였는데, 검토해 보면 과연 그러하였으니 그 말투가 분변하기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지봉유설(芝峰類說)》을 보니, “두보의 시에 ‘집에서 온 편지는 만금 얻은 것만 같네.[家書抵萬金]’라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양(梁)나라 왕균(王筠)이 오랫동안 전장에 있던 중에 하루는 집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고 이르기를, ‘만금을 얻은 것 같다.’라 하였는데, 시의 말은 전적으로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라 하고, 또 “‘하지장(賀知章)이 말 탄 모습 마치 배를 탄 것 같아.[知章騎馬似乘船]’라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진(晉)나라 완함(阮咸)이 취하여 기우뚱하게 말을 타자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웃으며 이르기를, ‘저 노인이 말 탄 모습은 마치 배를 타고 파랑 속을 가는 것 같다.’ 하였는데, 시의 말은 이러한 뜻을 사용한 것이다.”라 하고, 또 이르기를, “이백(李白)의 시에 ‘어이하여 그리도 야위었나 물어보니, 종전에 시 짓느라 고달파서 그랬다나.[爲問如何太瘦生 摠爲從前作詩苦]’라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최호(崔浩)가 시를 읊조리기를 좋아하였는데 어느 날 병이 나자 벗이 이르기를, ‘그대는 병이 난 게 아니라 시를 짓느라 고달파서 야윈 것이다.’ 하였다. 시의 말은 이러한 뜻을 사용한 것이다.” 하였다. 이 세 가지 말을 상고해 보면 모두 소씨의 주에서 나온 것 같으니 검토해 볼 일이다. 다만, 지봉(芝峰.李睟光)이 이 세 가지 말을 인용하면서 모두 ‘내가 살펴보건대[按]’라고 하였으니, 어쩌면 나름대로 고찰한 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약 소씨의 주에서만 본 것이라면 이처럼 스스로 고증했다는 말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
● 《지봉유설》에 또 이르기를, “두보의 시에 ‘아우 생각에 구름 보다 한낮에 잠이 드네[憶弟看雲白日眠]’라 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운록만초(雲麓漫抄)》에 이르기를, ‘양선(梁瑄)이 돌아오지 않자 아우 양경(梁璟)이 동남쪽의 흰 구름을 볼 때마다 늘 우두커니 서서 서글프게 바라보곤 하였다.’ 하였는데, 시의 뜻은 이러한 뜻을 사용한 것이다.”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상고해 볼 때 이 역시 소씨(蘇氏)의 주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운록만초》에서 보았다고 하였으니, 어찌 《운록만초》의 저자 역시 소씨의 주에서 취해 쓰면서 그것이 허무맹랑한 것임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릇된 것이 계속하여 전승되는 것이 더욱 가소롭다.
● 한유(韓愈)의 문장은 고무적이어서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의기가 솟구치게 하고, 구양수(歐陽脩)의 문장은 깊은 정회를 읊는 것이어서 읽으면 사람으로 하여금 심취하게 한다.
● 〈국풍(國風)〉과 〈이소경(離騷經)〉의 맛으로 문장을 지은 것은 오직 구공(歐公)만이 그러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풍락정기(豐樂亭記)〉, 〈현산정기(峴山亭記)〉 같은 것이 그것인가?” 하므로, 내가 이르기를 “근사하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문장도 대체로 다 그러하니, 반복하여 깊은 정회를 읊은 부분을 살펴보면 그것이 바로 그러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하였다.
● 현산정(峴山亭)은 본디 양숙자(羊叔子.羊祜)를 위해 지은 것인데 구공(歐公)이 지은 기(記)에는 두원개(杜元凱.杜預)와 아울러 동등하게 말하였으며 그 사이에 양숙자에게 중점을 둔 곳은 한두 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 가닥의 터럭으로 천 균(勻)을 끄는 힘이 있으며, 필세가 민첩하고 활달한 것이 마치 잠자리가 물 위를 날면서 꼬리를 수면에 스치고 곧 다시 날아오르는 것처럼 전혀 어느 한쪽에 구애되지 않는다. 대체로 한 편 안에 혹은 열고 혹은 닫고 혹은 잡고 혹은 놓는 것이 모두 의미가 있으면서도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으니,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노련한 문장가의 솜씨가 아니면 그러한 경지에 미칠 수가 없다.
● 경전 이외에는 《사기(史記)》, 《한서(漢書)》만이 여러 번 읽을 만하고 그 나머지는 비록 한유, 구양수의 문장이라 해도 수십 번을 읽을 수는 없다. 다만 증공(曾鞏)의 문장은 여러 번 읽을 만한데, 이는 바탕이 돈후하고 운치가 깊기 때문이다.
● 남풍(南豐.증공)이 지은 《전국책(戰國策)》 서문과 《열녀전(列女傳)》 서문은 의론이 특히 극히 순수하고 올바른 데다 작법이 또 전아(典雅)하여 서한(西漢)의 문장에 가까우니, 여러 번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 증공의 문장은 순경(荀卿)의 문장과 비슷하고 소식(蘇軾)의 문장은 맹자(孟子)의 문장과 비슷하니, 순경의 문장은 풍부하여 자상하고 맹자의 문장은 간명하여 예봉이 있는데 두 사람도 문장을 그렇게 지은 것이다. 동파(東坡.소식)는 일찍이 맹자의 문장을 배운 것이 사실이나 남풍은 순경의 문장을 배웠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컨대 모두 재주가 비슷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 남풍의 〈의황현학기(宜黃縣學記)〉는 정밀하고 깊이가 있으며 빈틈이 없는데, 선왕이 학교를 세운 뜻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 내었다. 한(漢)나라, 당(唐)나라 이후로 유자(儒者)들에게는 이러한 식견과 의론이 전혀 없었다.
● 《열녀전》 서문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문왕이 흥하게 된 까닭이 내조(內助)를 얻었기 때문임은 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까닭은 알지 못하는데, 이는 문왕이 덕행을 몸소 행하여 남을 감화시킨 데에 근본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 뜻은 극히 좋으니, 종래의 논자들은 이 점까지는 언급하지 못했다. 주자가 《시서변설(詩序辨說)》에서 이미 이 설을 분명히 드러내었고 《시경집전(詩經集傳)》의 주남편(周南篇) 뒤에 논한 것도 이러한 뜻이다.
● 《전국책》 서문에 “법(法)은 변화에 맞게 하는 것이므로 굳이 완전히 같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도(道)는 근본을 세우는 것이므로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스리는 의리를 극히 간결하고 타당하게 말한 것으로, 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바꿀 수 없다.
● 동파(東坡)의 정통론(正統論)은 그 설을 전혀 바꿀 수 없으니, 주 선생(朱先生)이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취한 정통의 뜻도 이와 똑같다. 이 뜻은 본디 간결하고 쉬운 것인데 뒤에 정통설을 낸 이들은 모두 너무 지나치게 추론하였으니, 요컨대 억지로 일을 만든 것일 뿐이다.
● 남풍(南豐)이 왕심보(王深甫.王回)와 양웅(揚雄)의 일을 논한 것은 사리에 어긋난 설이 종종 있다. 그의 식견으로 그렇게까지 어긋난 말을 할 리가 없는데, 본디 양웅을 너무 중하게 보아 맹자 이후에 으뜸가는 사람으로서 지조를 잃은 일은 그가 한 일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처럼 말한 것이다. 의중에 조금이라도 치우친 점이 있으면 당장 바른 식견을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
● 한유(韓愈)의 문장 가운데 〈송맹동야서(送孟東野序)〉의 ‘사물이 평안함을 얻지 못하면[物不得其平]’ 한 구는 옛사람들이 간혹 문제점이 있지 않나 의심하기도 하였으니, 아래 글에 언급한 고요(皐陶), 기(夔), 이윤(伊尹), 주공(周公)이 평안함을 얻지 못하여 울었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퇴지(退之.한유)의 ‘평안함을 얻지 못했다’는 말이 그저 뭔가에 감촉됨을 이르는 것으로 칠정(七情)이 발하는 것이 모두 그것이지, 비단 슬픔, 근심, 원망, 분함, 감개함, 억울함만이 평안하지 못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한 것이다.
● ‘사람이 말에 대해서도[人之於言也]’와 ‘사람에 대해서도[其於人也]’의 두 구는 언뜻 보면 비록 서로 비슷해 보이기는 하나 실은 같지 않으니, 위의 구는 사람을 주체로 하여 말한 것이고 아래의 구는 하늘을 주체로 하여 말한 것이다. 이 서(序)를 자세히 살펴보면 맨 처음 사물의 울음을 말하고 다음으로 사람의 울음을 말하고 그 다음에 하늘의 울음을 말하였는데, 사물은 스스로 울 뿐이고 사람은 비단 스스로 울 뿐만 아니라 사물을 빌려 울 수도 있으니 예컨대 팔음(八音)이 그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울 수는 없고 오직 사물과 사람을 빌려서만 우는데, 사물에 있어서는 새, 우레, 벌레, 바람이 하늘이 빌려서 네 철에 우는 것이고 고요, 우(禹)부터 이고(李翶), 장적(張籍)까지는 하늘이 빌려 역대(歷代)에 우는 것이다.
“사람이 말에 대해서도 그러하다.[人之於言也 亦然]”는 것은 비단 사물만 평안함을 얻지 못하면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평안함을 얻지 못한 뒤에 운다는 말이고, “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其於人也 亦然]”는 것은 하늘이 비단 사물에 대해서만 잘 우는 것을 가려서 그것을 빌려 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잘 우는 사람을 가려서 그를 빌려 운다는 말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의 글에 열거한 역대에 잘 운 이들은 모두 하늘이 빌려 운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중간에 몇 개의 ‘하늘[天]’이란 말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하다. 예컨대 “하늘이 장차 부자를 목탁으로 삼을 것이다.[天將以夫子爲木鐸]”라 하고, “하늘이 그 덕을 추하게 여겨 돌아보지 않아서인가?[將天醜其德 而莫之顧]”라 하고, “하늘이 장차 그 소리를 화기롭게 하여 국가의 성대함을 울게 할까?[天將和其聲 使鳴國家之盛]” 하고, “세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三子者之命 則懸乎天矣]”로 끝을 맺었는데, 이는 모두 하늘을 주체로 하고 사람은 그저 하늘이 부리는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 ‘기는 문사로 울지 못하여[夔不能以文辭鳴]’라고 한 한 단락은 매우 재미있다. 하늘은 기(夔)를 빌려 우는데 기는 스스로 울지 못하여 또 스스로 소악(韶樂)을 빌려 운 것으로, ‘또[又]’와 ‘스스로[自]’라는 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는 실로 퇴지(退之)가 희극(戱劇) 비슷하게 말을 가지고 유희한 것인데, 우와 고요 이하의 운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그들을 빌려서 운 대상이지 스스로 운 것이 아님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 구양수(歐陽脩)의 문장 가운데 왕 문정(王文正.王旦)의 비문은 오로지 정승의 사업만 서술하였고 호 안정(胡安定.胡瑗)의 묘표(墓表)는 오로지 스승의 도만 서술하였고 매성유(梅聖兪)의 묘지(墓誌)는 오로지 시학(詩學)만 서술하였고 다른 일과 행적은 모두 생략하였으니, 요컨대 그는 일을 서술하는 데에 있어 이처럼 요체가 있었던 것이다.
● 왕 문정(王文正)의 비문에서 왕공이 진사가 된 것부터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기까지는 그 일을 서술한 것이 겨우 200자에 불과하나 정승이 된 뒤의 일을 서술한 것은 거의 천여 자에 달한다. 중간에 한림학사에서 추밀원(樞密院)을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된 일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먼저 그 사람됨의 대략을 써서 정승에 걸맞은 인품이었음을 보이고, 또 전약수(錢若水)의 말을 인용하여 정승에 걸맞은 그릇이었음을 증명하고, 또 진종(眞宗)과 전약수가 문답한 말을 써서 크게 쓰일 조짐을 보였다. 그런 뒤에 비로소 정승에 제수된 일을 썼으니, 이들에 모두 지극한 법이 있다.
● 구공(歐公)의 문장 가운데 비문에 일을 서술한 것은 한결같이 서로 연관이 있는 일을 취합하여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법을 썼으니, 비단 연월(年月)의 선후를 순서로 삼았을 뿐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왕 문정(王文正)의 비문은 평장사(平章事)에 제수된 일을 쓴 뒤에 곧 “정승이 되어서는 옛 일을 힘써 행하고……”라 하고 그 다음에 “정승 벼슬에 있는 10여 년 동안……”이라 하고 “지금까지 어진 재상으로 일컬어진다.”라고 끝맺어 그 대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 또 세 단락으로 나누어 서술하되 한 단락은 사람을 기용하고 선비를 천거한 것, 한 단락은 과묵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었다는 것, 한 단락은 임금의 노여움을 잘 풀고 남의 죄에 대해 변론해 주었다는 것을 주제로 매 단락마다 각기 몇 가지 일을 가지고 실증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정승이 되어 펼친 사업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환히 밝혀졌다. 만약 후세 사람들이 일을 서술할 적에 단지 연월에 따라서만 순서를 삼은 것처럼 했더라면 이러한 일은 선후의 일이 섞여 나오는 만큼 그 요점을 짚어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구공이 일을 서술한 방법은 대체로 태사공(太史公)의 필법을 근간으로 한 것이니, 《사기》의 여러 전(傳)들을 자세히 보면 그 유래를 알 수 있다.
● 구공의 문장 가운데 두 기공(杜祁公.杜衍), 유원보(劉原父.劉敞)의 묘지(墓誌)와 정원진(丁元珍.丁寶臣)의 묘표(墓表)는 일을 서술한 것이 더욱 복합적이고 변화가 많으니, 자세히 뜯어보아야 그 인물의 이력의 순서를 알 수 있다.
● 이목(李牧)의 아들이 이골(李汨)이고 이골의 아들이 이좌거(李左車)이고 이좌거의 10세손이 이응(李膺)이며, 그 뒤에 당나라에 이르러 또 이서균(李棲筠), 이길보(李吉甫), 이덕유(李德裕)가 있다. 《남풍집(南豐集)》에 실린 이우(李迂)의 묘지(墓誌)를 보면 이목은 이름난 장수였는데 그 손자 중에 또 좌거(左車)가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좌거는 스스로 진여(陳餘)를 위하여 한신(韓信)의 군대를 물리칠 계책을 낸 일 밖에는 더 이상 역사서에 보이지 않는데 그의 후세가 끊임없이 번창하여 이원례(李元禮), 이문요(李文饒) 같은 이가 연이어 나왔으니 더욱 기이하다.
● 명나라 말기의 문사(文士)들은 입을 열거나 붓을 놀릴 적에 걸핏하면 선(禪)의 이치를 말하곤 하였으나 실상은 모두 허무맹랑한 것이었으니, 선에 대해선들 어찌 터득한 것이 있었겠는가. 지금 《중랑집(中郞集)》을 읽어보면 한편으로는 선을 말하고 불가를 들먹이지만 한편으로는 술을 탐하고 여색에 연연하고 있으니, 이는 푸줏간이나 술집 사람이 경전을 외는 것과 같아 가소로울 뿐이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본디 욕망을 이치라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방종함을 좋아하고 검속함을 싫어하는 자들이 모두 그에 가탁하여 도피처로 삼는 것이니, 이는 형세상 당연한 것이다. 명나라 때의 학자들 중에 여요(餘姚.王守仁)에서부터 그 맥을 이어받은 우강(旴江) 일파는 그 설이 더욱 창광(猖狂)하여 더 이상 기탄이 없다. 유학자라는 이들이 이와 같았으니 문사(文士)는 실로 말할 것도 없다.
● 《삼선생논사록(三先生論事錄)》 서문은 《주자대전(朱子大全)》에 실려 있는데 진동보(陳同甫 진량(陳亮))의 문집에도 있고, 《이정전서(二程全書)》에 실려 있는 한퇴지에 관하여 논한 한 단락은 《동파집(東坡集)》에도 보인다. 주자와 진동보, 정자와 소동파는 그 도가 어찌 연(燕)나라, 월(越)나라처럼 거리가 멀 뿐이겠는가. 그런데도 문장이 이처럼 서로 혼재되어 있고 후세 사람들도 변별해 내지 못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옛사람의 문집에는 다른 글이 잘못 섞여 들어간 경우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한퇴지에 관하여 논한 한 단락은 정자(程子)의 말임이 실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삼선생논사록》 서문은 아마도 진동보에게서 나온 것 같다. 아쉬운 대로 기록하여 이치를 아는 자가 질정해 주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 빗대자면 긴 수염 지닌 사람이 / 譬如長鬣人
긴 것을 괴롭다고 여기잖다가 / 不以長爲苦
하루아침 어떤 이 물어오기를 / 一朝或人問
잠잘 때에 어디에 두느냐기에 / 每睡安所措
돌아와 이불 위에 뒀다 내렸다 / 歸來被上下
온밤을 지새도 둘 곳이 없어 / 一夜著無處
뜬눈으로 새벽까지 뒤척이더니 / 展轉遂達晨
모두 뽑고 싶어한 일과 같구나 / 意欲盡鑷去
위는 동파(東坡)의 〈서초산윤장로벽(書焦山綸長老壁)〉 시이다. 전에 본 소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송나라 어떤 사람이 수염이 길었는데 인종(仁宗)이 우연히 “경은 잠 잘 적에 수염을 이불 위에 두는가, 이불 밑에 두는가?”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대답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이불 위에 두어도 보고 이불 밑에 두어도 보았으나 모두 편안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밤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파는 아마 이 일을 끌어 쓴 것 같은데 주석에서 인용하지 않았다. 소설은 무슨 책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살펴볼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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