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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과 온유의 사표가 되신 박세화 목사
30여년간 학동그리스도의 교회와 천혜경로원을 섬기고 봉사한 박세화 목사께서 지난 7월 1일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평소에 존경하던 박세화 목사의 부음을 접하자 곧바로 카페와 인터넷 등에 추모의 글을 올리고 장례일체가 은혜롭게 치러지기를 기원하였다. 장례 후 교계의 신앙잡지 '참빛'으로부터 '박세화 목사의 삶과 신앙 이야기'를 주제로 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를 정리한 글이 참빛 7,8월호에 '겸손과 온유의 사표가 되신 박세화 목사'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에 그 전문을 소개한다.
겸손과 온유의 사표가 되신 박세화 목사
평생을 올곧은 믿음가운데 겸손과 온유의 삶으로 일관하신 박세화 목사께서 88세를 일기로 2021년 7월 1일에 우리 곁을 떠났다. 금년 들어 기력이 크게 쇠하여 요양원과 병원을 오가며 투병 중인 소식을 들었으나 이처럼 빨리 떠나시다니 너무나 아쉽고 슬픈 마음 가눌 길 없다. 말년의 30여 년을 광주학동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고락을 함께하며 교회와 천혜경로원의 대소사를 지켜본 교우의 한 사람으로 박세화 목사의 타계를 애도하며 하늘의 평화와 위로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부음을 접하자 곧바로 '겸손과 온유의 본이 되신 박세화 목사님, 의의 면류관 받으소서'라는 제목으로 추모의 글을 작성하여 카페 등에 올리고 이를 프린트하여 문상객들에게도 나눠드렸다. 돌아가신 다음날 아내와 함께 광주의 장례식장을 찾아 영전에 꽃 한 송이 바치고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뜻을 표하였다. 시신은 생전의 유지에 따라 조선대학병원에 기증, 장례일정은 3일째 오전에 호남지역의 목회자들이 주관하는 천국환송예배로 마무리하였다. 환송예배에서 살핀 성경구절(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시편 116편 15절)이 가슴에 꽂힌다. 박세화 목사께서 요양원 어른들의 장례 때 자주 인용한 말씀, 이제 자신이 하나님께서 귀중히 여기는 대상이 된 것을 목도하며 숙연한 마음이다. 아무쪼록 박세화 목사의 소천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남은 자들에게 은혜가 되기를 소망하며 삼가 애도와 존경의 뜻을 담아 그분의 의로운 삶과 고결한 인품을 되짚어 본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니라’(디모데 후서 4장 7~8절)
유지를 따라 조촐하게 가진 박세화 목사의 천국환송예배 모습
1. 빈 몸으로 학동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하다
학동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역사회와 교계에서 성자로 알려진 강순명(1897~1959) 목사가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2년에 천혜경로원과 함께 창립하였다. 내가 학동그리스도의 교회에 나가게 된 것은 1988년, 당시 학동교회는 여러 곡절 끝에 담임목회자 없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 시절 학동교회의 정신적 지주는 설립자인 강순명 목사의 부인이자 천혜경로원장이던 고령의 장신애 여사, 장 여사는 설립자의 인품과 덕망에 누가 되지 않을 교역자를 초빙하는 일에 전심을 쏟았다. 그때 초빙자로 선정(1989년)된 분이 영암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시무하던 50대 중반의 박세화 목사였다. 초빙당시의 예배당은 두꺼운 흙벽돌의 낡은 건물이고 사택도 없어 전세방을 구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처럼 열악한 교회에 사모와 1남3녀의 가솔을 거느리고 첫발을 내딛은 박 목사의 결단과 초야에 묻힌 보석을 발굴한 교회의 선택은 훗날 서로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상생과 승리의 훌륭한 모델이 되었다. 몇 년 후 교회는 천혜경로원의 증축공사를 통해 쾌적한 예배당을 갖게 되었고 교회 가까운 곳의 아파트에 아담한 사택을 마련하였다. 2년 전 본지에 기고한 글에서 학동그리스도의 교회와 박세화 목사를 다룬 부분은 이렇다. ‘학동 그리스도의 교회 창립자는 강순명 목사, 한국그리스도의 교회 초창기 지도자로 동석기∙강명석과 함께 널리 알려졌고 광주지역에서는 기독교계의 3대 성자로 조명을 받고 있다. 1988년에 처음 학동그리스도의 교회에 왔을 때는 담임 목자가 없어서 주일마다 서울 등지에서 오시는 목회자들이 번갈아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에 박세화 목사가 부임하여 2년 전에 노령으로 사임하실 때까지 28년간을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으로 목양하였다. 교회와 요양원의 유기적인 협력과 연대를 주목한 정부는 박세화 목사에게 국무총리상을 수여하기도. 빈 몸으로 오셔서 4남매를 훌륭하게 양육하고 명예롭게 은퇴하여 아름다운 삶의 본을 보이신 박세화 목사의 남은 때가 강건하고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생활한복 차림의 학동교회 및 천혜경로원 멤버들과 함께한 박세화 목사(맨 윗줄 가운데)
2. 목사님께 드린 편지
2003년 2월, 터키여행 때 박세화 목사에게 편지형식의 여행기를 적어 책자로 만들어 전해드렸다. 그때 적은 글을 통하여 박세화 목사의 인품과 목회하는 모습을 살펴본다.
‘존경하는 박세화 목사님,
이제 설도 쇠었으니 목사님의 연세가 70이 되셨고 저도 60세가 되었습니다. 저는 1988년부터 학동교회에 출석하였고 목사님께서는 1989년에 부임하시어 14~5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서로 간에 사랑과 우애를 변함없이 나누고 간직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목사님께 깊은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교회들이 오랜 기간 목회자를 모시노라면 여러 가지 갈등과 마찰이 일게 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여서 10년 넘게 오손도손 지내기가 쉽지 않음을 목사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목사님께서 제직이나 교인들과 화목하고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는 것은 목사님의 솔선수범과 겸손, 온유, 경건의 생활을 변함없이 실천해 오신 좋은 덕목을 지니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완전할 수 없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양보하는 마음이 없이는 약하고 작은 교회가 이만큼 성장하고 봉사하는 교회로 변모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도 마음속으로 괴로움과 고초가 많으셨을 텐데도 이를 다 참고 견디며 속으로 삭이신 일들을 미루어 짐작하게 됩니다.
인생은 험난한 나그네길이라고 야곱이 술회하였거니와 이번 여행을 통하여 나그네길이 평탄하지 않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목사님께서도 70평생을 사시는 동안 얼마나 어려운 시련과 고난을 겪으셨는지요? 그러나 초년의 고생과 시련은 우리 세대의 대부분이 겪어온 길이니 지나놓고 보면 다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도 있지만 중년, 노년에 이르러 고단한 삶을 사는 이웃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우리가 섬기는 천혜경로원의 한분, 한분의 삶이 모두 신산고초를 겪고 노년의 삶도 평탄치 않음을 목도하면서 남은 때를 평안히 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 부임하실 때 섬기던 교회와 집까지 다 후임자에게 넘기시고 빈 몸으로 오시기로 결단하실 때 얼마나 고심하였을까, 자주 아내와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힘겨운 결단을 내리신 후로 목사님과 가정, 교회와 경로원 모두 순탄하게 발전하고 성장하였으니 얼마나 현명한 결정을 한 셈인가요? 제가 목사님께 서슴없이 존경한다는 표현을 쓴 것은 그와 같이 어려운 결단을 내리시고 또한 성도 섬기는 본을 보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저에게 아들, 딸의 결혼주례를 맡게 하고 서로 존중하는 가운데 신뢰하고 사랑하는 좋은 관계를 계속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승리와 성공의 본을 보여주신 목사님의 귀한 삶의 모습을 온 성도들이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목사님이 베푼 만찬
2009년 11월 하순에 박세화 목사가 교우들을 초청하여 만찬을 베풀었다. 그때의 기록.
박세화 목사님은 1989년 11월 4일에 천혜경로원 안에 있는 학동그리스도의 교회에 부임, 금년 11월로 만 20년간 봉직하였다. 우리 교회는 이를 기려 2009년 11월 9일에 목사님의 20년 봉직을 감사하는 축하의 모임을 가졌다. 이때 교회가 목사님께 전한 감사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박세화 목사님, 지난 20년간 학동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고 목회하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교회 모든 제직과 성도들은 목사님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며 남은 때에 목사님과 온 가족에게 평강과 희락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만찬은 이에 대한 목사님의 답례이기도 한 셈이다. 이 자리에서 목사님은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는 매우 행복합니다.’라고 간결하면서도 뜻깊은 인사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목사님의 간단한 말씀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내용을 함축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박수로 감사와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20년을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교회들이 제직과 목회자간에 갈등을 빚기도 하고 특히 장기간이 경과하면 교체를 원하는 교인들과 더 머물기를 원하는 목회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풍토에서 20년간 아무런 갈등이나 마찰 없이 목회자와 교인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화목하게 지내온 것은 큰 축복이라 하겠다. 학동 교회는 양로원 안에 있는 특수한 교회이다. 교인의 다수가 연세 높은 양로원의 어른들이고 젊은 층의 비중이 낮아 활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목사님이 부임한 20여년 사이에 젊고 어린 자녀들이 장성하여 성인이 되었고 그들의 자녀가 다시 태어나고 성장하여 점점 활기 있고 짜임새가 있는 교회로 변모하였다. 목사님은 20년간 꾸준히 목회할 수 있는 원동력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 것이라고 확신에 찬 소명을 피력하신바 있는데 나도 이에 동의한다.
만찬에는 교우뿐만 아니라 가까운 이웃에 살고 있는 아들, 딸, 사위, 며느리까지 합석하여 더 평화롭고 행복한 모임이 되었다. 손자와 손녀들이 어려서부터 목사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고 지금도 교회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며 성장하고 있음도 큰 보람과 기쁨이리라. 대부분의 동년배들이 현장에서 물러난 노년에 이르기까지 건강한 가운데 아름답고 행복한 목회의 삶을 이어 가시는 박세화 목사님, 내내 평안하고 행복하십시오.
아들 가족과의 단란한 모습이 담긴 박세화 목사 부부
4. 잠언 공부의 훈수
2009년 3월부터 9월까지 교회어린이들과 잠언공부를 하면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목사님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잠언공부를 마친 후 그 내용을 ‘지혜가 부른다’는 책자로 만들어 공유하였다. 그중의 한 부분을 살펴보자.
잠언 19장 12절의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놓고 박세화 목사와 전화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성경의 여러 곳에 풀과 이슬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더러는 축복으로, 더러는 불행이나 저주로 사용되고 있다. 축복으로는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창세기 27장 28절),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세아 14장 5절),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편 3절)는 구절을 들 수 있다. 또 불행이나 저주로는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세아 6장 4절),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호세아 13장 3절)는 구절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목사님이 농사지으며 경험한 바로는 이슬이 축복이라 여겨진다는 말씀이다. 목사님은 결론적으로 잠언 19장 12절에서 ‘왕의 부르짖음은 노한 사자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고 한 말은 벌 줄 사람에게 벌을 주고 상 줄 사람에게 상을 주는 신상필벌의 원칙을 강조하는 뜻으로 이해하면 좋겠다는 의견이어서 나도 이에 동의하였다.
잠언 공부하는 어린이들과 함께 환하게 웃는 박세화 목사와 교우들(2009년 여름)
2018년 12월, 30년 넘게 살던 광주를 떠나 청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박세화 목사와의 만남도 이때가 마지막. 그 후 전화로 몇 차례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다시 뵙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았을까, 운명하시기 전 여러 번 꿈결에 만나 옛정을 나누었다. 박세화 목사를 떠나보내노라니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법대로 경기하는 자, 수고하는 농부(디모데후서 2장 3~6절)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한국전쟁 직후 엄혹한 시절의 군대생활을 믿음으로 잘 감당하신 체험담(시신 기증도 좋은 군사의 귀중한 사례), 법대로 경기하여 면류관을 얻는 운동선수 같은 믿음의 교본, 오랜 농촌목회로 체득한 농부(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한)처럼 올곧은 삶을 이루신 박세화 목사와의 교분을 회고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참빛에 감사하며 그분처럼 모두가 신실하고 아름다운 삶이기를 빈다.
우리가 광주를 떠나올 때 교회가 주는 기념패를 전달하는 박세화 목사
* 추모의 글을 접한 이들 가운데 여럿이 박세화 목사의 인품을 존경하고 별세를 애도하는 메시지를 올렸다. 그중 몇 개를 소개한다.
‘항상 밝은 미소를 머금은 목사님의 얼굴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천국에서도 주님께서 천사들을 대동하시고 미소 짓는 박 목사님을 영접하실 것입니다.’(교계의 원로목사)
‘겸손과 온유가 몸에 밴 박세화 목사님은 후배 목회자들을 존중하고 배려하셨습니다.’(호남지역 목회자)
‘박세화 목사님을 추모합니다. 오래 동안 우리에게 기억될 분입니다.’(교계의 중진목사)
‘박세화 목사님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으실 분이지요. 하늘나라에서 뵙기를 바라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렵니다.’(천혜경로원장 부부)
‘온화하신 목사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 땅에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주님 품에서 편히 쉬세요.’(신실한 성도)
첫댓글 겸손과 온유함의 정석을 보여주신 목사님, 감사합니다^^
님은 가고 없어도 홀로 피었네 그 성품의 향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