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님 산문집에서 몇 구절...
(복지요결, "진정한 애너키스트"에 각주로 추가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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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봉화 전우익 선생님이 안동에 오신다고 시내까지 나오지 않겠느냐고 전화하셨다. 약간 볼 일도 있고 해서 오후 2시 버스로 나갔다.
책방에 들렀다가 함께 사베리아 수녀님이 지키고 있는 한살림 식품 가게에 갔다. 지난번에도 몇 번 들기름도 사고 현미가루도 샀는데 나는 아직 한살림 회원이 아니어서 그냥 자꾸 사가려니 염치가 없어 1만4천 원 회비를 내고 가입을 했다. 입회원서에 주소, 이름, 주민등록번호까지 쓰고 손도장도 찍었다. 한살림기금이라는 저금통장 같은 것을 받고, 현미가루 한 봉지, 들기름 한 병, 쌀 한 봉지도 샀다.
전선생님은 서울 볼일 보러 가신다고 남고 나는 5시 버스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사가지고 온 쌀봉지, 가루봉지, 기름병을 꺼내놓고 갑자기 내가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괴로워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도 잠도 안 오고 괜히 가슴이 시원치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름 마을 구멍가게에서 음료수 한 병도 사지 않았다. 겨우 백열등 전구 - 그것도 15촉 짜리 - 두 개 산 것 외에는 가게엔 거의 안 갔다. 전에는 가끔 라면도 사고 필요할 때는 3킬로들이 밀가루도 한 봉지씩 샀는데 유해식품 안 먹기로 하고부터 거의 발길을 끊어온 것이다. 가까운 장터에서 방석전을 벌여놓고 쌀장사를 하는 만물동 아주머니한테도 1년이 넘도록 가지 않았다. 국수가게에도 안 갔고 호준이네 정미소에도 안 갔다.
한살림에서 무공해식품이라는 걸 잔뜩 사다놓고 왜 이렇게 갑자기 괴로워지는지 화가 또 난다.
진짜 한살림은 이웃끼리 마을사람끼리 서로 사고 팔고 주고받으며 살아야 되는데 가까운 이웃은 다 버리고 먼 데서 깨끗한 음식만 먹겠다고 한 것이 정말 잘한 것일까? 먹는 것만 깨끗하게 먹는다고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것일까?
- 중략 -
차라리 죽을 때 죽더라도 이웃집에서, 가까운 장터에서 쌀도 사고 밀가루도 사고 국수도 사는 게 옳지 않을까?
마음 편한 게 위장 편한 것보다 더 소중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정말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용기가 안 난다.
- 권정생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녹색평론사, 90~92쪽에서
첫댓글 마음 편한 게 위장 편한 것보다 더 소중하다. 철암시장에서 좌판을 펼쳐놓고 갖가지 채소를 파는 할머님들이 생각나네요. 내일은 시간내서 그분들을 찾아뵙겠습니다.
이 내용을 요약해서 복지요결에 각주로 추가했습니다. http://welfare.or.kr/goodnews/복지요결1.hwp 를 내려받아 "진정한 애너키스트"에서 각주를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