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금실 법무의 인기비결
보신탕집서 폭탄주
업무처리는 수준급
자유분방·거침없는 행동으로
인기 ‘상한가’
과천 정부종합청사 법무부에 가면 요즘 노랑색 결재 서류철이 생겨났다. 결재 처리가 급한 것은 노랑색 판, 급하지 않은 것은 파랑색 판을 쓴다. 직접 장관실을 찾는 ‘대면(對面) 보고’도 대폭 줄어들었다. 장관급 회의라도 간단한 회의 때엔 일절 국민의례를 생략한다. 의전과 절차 모두 가벼워졌다. 2층 장관 집무실 복도에는 꽃화분들이 늘어서 한결 화사해졌고, 벽에 건 그림들도 다채로워졌다. 장관이 각 과별 직원들과 함께 하는 회식이나 토론회 수도 늘었다. 지난 9월 19일에도 6급 이하 직원 대표 열댓 명은 장관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 모두 강금실(康錦實ㆍ46) 법무부 장관의 작품이다. 취임 초기에, 불쑥 법무부 직원들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강금실입니다” 하며 깜짝 놀라게 했던 그는 요즘도 급하면 전화로 찾는 일이 잦다. 지난 봄만 해도 업무 보고를 장관실서 받지 않고 직접 사무실을 도는 바람에 직원들을 놀라게 했는데, 요즘 들어 일정이 너무 많아지면서 ‘사무실 순례’는 다소 줄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 조각 발표가 난 지난 2월부터, 강금실 법무부 장관은 숱한 화제를 뿌렸다. 개혁 성향의 판사 출신 여성 변호사란 경력도 눈에 띄었지만 검찰과 법원들과의 의사소통 방식, 화사한 옷차림, 액세서리, 춤과 노래 솜씨에 이르기까지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장관에 임명된 지 6개월이 흐른 지금, 그에 대한 세간의 평은 단순한 ‘관심’ 그 이상이다. 청와대 내에서 ‘일 잘하는 장관’으로 통하고 법무부 내에서도 업무 처리 능력이나 리더십 면에서 인정받는다고 한다. 지난 9월 16일 한국리더십센터가 ‘가장 신뢰받는 리더’를 물은 설문조사에서 네티즌 5169명 중 1108명이 강금실 법무부 장관을 지지, 정부 관료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야당도 그의 임명에 대해선, 문제 많은 노무현 정권의 초기 인사(人事) 중 ‘유일한 성공작’이라고 한다. 한나라당 최병렬(崔秉烈) 대표가 “남자 장관들 다 합한 것보다 법무부 장관 한 사람이 낫다”고 하는가 하면 몇몇 야당 의원들은 “여자 이회창”이라며 추켜세운다. 대중적 인기까지 모아서 ‘스타 장관’으로서의 입지도 굳혔다. 지난 3월 대통령과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표정 없고 당당했던 강 장관의 모습이 방송 전파를 탄 뒤, ‘강사모(강금실을 사랑하는 모임)’와 ‘강금실 법무장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모임도 생겨났다. 지난 9월 15일 서울대에서 강연을 마친 뒤, 강 장관은 밀려드는 사인 공세 때문에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장관에게 쏟아지는 시선과 인기에 대해 법무부 내에선 반기다 못해 당황하는 눈치다. “실력과 지도력까지 갖췄다”고도 하지만, 일각에선 “법무부 정책이나 입장보다는 장관 개인 한 명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쏠려있다”며 부담스러워하기도 한다.
사실 지난 2월 그가 법무장관으로 임명될 무렵 “서열주의를 파괴하고 검찰 개혁을 할 유일한 인물”이라는 환영의 목소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얼마나 버티겠느냐. 거친 데 가서 만신창이가 돼 나올 것”이라는 등 악담도 따랐다. 한데 검찰 개혁이나 한총련 문제 등에 있어 다소 ‘파격적인’ 행동들을 보여줬지만, 전체적으로 국정 수행도 잘했다고 평가한다.
야당, “노 정권 인사 중 유일한 성공”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강 장관은 1981년 23회 사법고시에 합격한 뒤, 1983년 서울지법 남부지원을 시작으로 14년 간 판사 생활을 했다. 1996년 변호사 생활을 시작, 2000년 법무법인 지평의 대표 변호사를 맡은 뒤로 단시간 내에 업계 10위권 로펌으로 부상시켜 놓았다. 법조계 안팎에서 ‘선하고 상식적인 법조인’으로 통해 왔다. 지금도 법원 내에서 여성 판사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강금실만큼만 일하라”는 말을 고참 선배들로부터 듣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경력이 강 장관의 인기를 설명하진 못한다. 그는 ‘매력 있는 리더십’ ‘엔터테이너적인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이다.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그의 예술적 재능과 기질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 승무나 탈춤, 판소리 솜씨가 수준급이라는 그는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끼를 내보였다. 그의 경기여고 동창들은 아침 조회 때에 애국가 지휘를 하거나, 수학 여행 가서 최신 팝송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는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금실아, 노래 한번 불러보라”고 하면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같은 뽕짝을 구성지게 불러보였다. 수재급 모범생이지만 늘 스스로 즐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강 장관이 ‘신선’한 것은 단순히 법조계에서의 첫 여성 장관이라서가 아니다. 그의 거침없음과 자유분방함이 더 큰 몫을 하는지 모른다. 고교 동창이나 측근들은 “여성스럽고 부드럽다기보다는 지나치게 솔직한 편”이라고 한다.
강 장관은 판사 시절, 집에 갈비 선물세트가 배달된 걸 알고는 노발대발하며 되돌려보내고 “다시는 그런 일 없도록 하라”며 화를 낼지언정,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개인 운전사를 둔 차를 탔다. 장관이 된 뒤로도 그는 본인의 판단에 따라 움직였다. 전국의 검사 1400명 전원에게 사적(私的)인 느낌의 이메일을 보냈는가 하면, 최근 보신탕집에서 송광수(宋光洙) 검찰총장과 폭탄주를 기울인 뒤 “우리 사이에 오해는 없어요”라며 팔짱 끼는 포즈까지 취했다. 대학생들 앞에서 “사법고시 준비할 때 한창 연애 중”이었다며 웃고, 초청 세미나 자리에서 “중매 서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의에 “일단 소개받고 나서 느낌이 확 오면~”이라며 능청을 떤다. 이같은 파격적인 자연스러움은 철저한 국정 수행 능력과 당당함 위에 탈권위적인 이미지까지 얹어놓았다.
그러나 검찰 개혁이나 강연회 등에서 그가 보여준 일련의 처신에 대해 “고도의 정치적인 쇼맨십”이라느니 “고급스러운 내숭”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긴 한다.
경기여고, 서울대 법대 동기인 대전고법의 김영란(金英蘭) 부장판사는 “옳고 그름에 대한 신념이 강하고 직언을 서슴지 않는 스타일”이라며 “그러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여 실천하게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강 장관 본인은 “솔직하게 진심으로 사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는다”고 줄곧 말해왔다.
강 장관은 물론 그의 전 남편 김태경씨와도 친분이 두터운 통합신당의 김부겸(金富謙) 의원은 “판소리와 춤 솜씨가 뛰어난 걸 봐도 알 수 있듯이 매사에 열려있는 사람”이라며 “법조인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충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화적 수용성이 탈권위 시대에 힘을 발하지 않았겠느냐”고 했다. 검찰과의 갈등 해결 방식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권력자로서의 강한 이미지를 내세우기보다는 소탈하고 친근한 누이의 느낌으로 접근했다는 것이다.
고교 수업 중 ‘뽕짝’ 부르기도
강 장관의 화려한 경력과 거침없음은 그를 ‘튀게’ 할 요소를 충분히 갖고 있다. 한데도 사람들은 그를 “나서는 듯 나서지 않는 사람”으로 본다. 실제 강 장관은 1993년 ‘사법 파동’ 때에 ‘평판사 회의’ 설립을 주도해 당시 대법원장에게 사법개혁 건의서를 전달했지만, 당시에도 결코 나서는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원칙대로 조용히 추진하는 쪽에 가까웠다.
3년 전 결별한 전 남편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 출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을 당시에도 현직 판사였던 그는 하소연하기보다는 휴가를 내고 구속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장문의 의견서를 제출하는 방식을 택했다. 대학 친구들은 “예술적인 끼는 넘쳐났지만 사회 운동에 심취한 운동권도 아니었고 그저 공부 잘하는 조용한 친구였다”고들 한다.
장관으로서의 그의 출발은 일단 순항을 하고 있다. 검찰 개혁이나 한총련 문제 등에서 보여준 그의 업무 처리력도 인정을 받은 듯하다. 파격적이고 권위적이지 않은 강 장관의 언행에 젊은 네티즌들은 환호하고, 여성이라고 하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시선을 보냈던 남성들까지도 “실력 있고 자신감 넘치고, 부드럽고 예쁘기까지 하다”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모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는 “여성 정치인, 여성 장관이라고 하면 일단 엄숙함을 떠올리는데, 능력도 검증받은 사람이 자신감 있고 솔직하면서 부드러워 보이니 인기를 모으지 않겠느냐”고 한다.
우상(偶像)을 갈구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강 장관의 행보는 일단 신선해 보인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기간에 이룬 그의 사회적 성취와 대중적 인기가 자칫 거품으로 끝나지 않기를 더욱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강 장관 개인의 절제와 노력, 공인으로서 헌신이 더욱 중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