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 [김대우]1900~1977
일제강점기관료,경상북도 지사,
경북지사 근무 공금 횡령,
1960년 제5대국회의원 선거 출마했으나 낙선
2대 - [김광연]1929~서울송도병원(대장항문) 원장 + 배우자[이영희]
[김광순]한국하우톤(충남아산) 회장
[김숙연][여] 재미교포
김대우
김대우(金大羽, 1900년 7월 10일 ~ 1976년 4월 22일)는 일제 강점기의 관료로,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이다.
191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김대우는 탑골 공원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7개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1925년 조선총독부 관리로 임명되면서부터는 유명한 친일파 관료가 되었다. 김대우는 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평안북도 박천군의 군수(1928),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장(1930)으로 승진했다.
1936년 총독부 학무국의 사회교육과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민화 정책의 첨병인 이 자리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들이 앉는 요직이었다. 김대우는 이 직위에 근무하면서 1937년 학무부 촉탁 이각종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작성하도록 하고, 각급 학교 등에서 이를 암기, 제창하고 출판되는 모든 서적에도 반드시 실을 것을 강요하였다.
1939년에는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 금융조합연합회 전남 감리관, 전남 방공위원회 위원, 광주 사상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에 임명되었고, 1940년 경상남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을 거쳐 1943년 전라북도 지사에까지 올랐다. 전북 지사를 지낼 때는 징용을 관장하는 근로동원원호회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김대우의 빠른 승진 비결은 일제에 대한 특별한 충성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군수를 지내고 광복 후 여러 차례 당시의 행적을 참회한 이항녕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경상남도 하동군 군수로 있을 때 경남 산업부장으로 근무하던 김대우가 군별로 공출미를 강제로 할당한 것은 물론, 보고된 재고량을 못 믿겠다며 할당량을 터무니 없이 늘려 수탈을 조장한 바 있다고 한다.이렇게 승진을 거듭하던 김대우는 태평양 전쟁 종전 두달 전인 1945년 6월 경상북도 지사에 임명되어 광복을 맞았다.
광복 직후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지시에 따라 임시로 경무국장 대리에 임명되어 행정권 인수 인계를 위한 송진우 등과의 협상에 참가했으며, 미군정이 총독부의 행정 기능을 그대로 인수하면서 그도 계속 경북 지사로 근무하다가 10월 19일에야 미군 도지사의 고문으로 물러났다.
미군정 경북지사로 근무할 때 공금을 횡령한 것이 드러나 1946년부터 도피 생활을 하였고,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처벌은 받지 않고 풀려났다. 이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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