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전라남도 나주시 남외1길 16 (남외동 128) 나주초등학교 전면 화단
병인박해 때 세분의 순교자를 낸 사형터
기해박해 때 한 명, 병인박해 때 세 명의 순교자를 낸 사형터다. 현재 나주초등학교 안 한쪽 화단이 박해 당시 사형터로 쓰였던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진다.
참혹한 박해시기에 그보다 더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장렬하게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의 순교자로는 기해박해 때 이춘화(베드로)를 비롯하여, 병인박해 때는 조선군 병영의 정문인 무학당 앞에서
강영원(일명 성운, 1822~1872, 바오로), 유치성(일명 치경, 1825~1872, 안드레아), 유문보(일명 작객, 1822?~1871) 등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침과 백지사형, 옥사(고문사) 등으로 순교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그들이 처형당한 곳으로 무학당 원래의 터였다고 전해지는 자리는 지금의 나주초등학교 정원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최근 학교 내 구시장터로 새롭게 고증되고 있는데, 그 근거로는 《여지도서》나 《호남읍지》 등의 관련 기록이나
공개 사형터로서의 일반적인 입지, 그리고 새롭게 녹취된 구전 등을 들 수 있다.
나주에 천주교 신앙의 씨가 뿌려진 역사는 1866년 병인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병인박해 중인 1871년 천주교 신자 세 명이 잡혀와 모진 고문 끝에 무학당 앞에서 1872년 순교하였다는 사실과
그들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 《치명일기》에 수록되어 있다.
강영원은 전북 용담 사람인데 정읍에서 1871년 11월 23일에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
아 장살, 석형 또는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1872년 51세에 치명하였고, 두 번째 순교자 유치성은 본래 경상도가 고향이나
전북으로 이사와 무장 암티에서 살다가 같은 해에 체포되어 30여 대의 태형과 돌로 침을 받는 형벌을 받아 강영원과 함께
같은 날 48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강영원의 치명 형태에 대해서는 장사(杖死), 무더기 돌에 맞음, 백지사 등 여러 가지로 증언이 다르게 나오고 있다.
그중 《병인치명사적》(21권 22~24쪽)에는 강영원 등과 같이 옥에 갇혀 있다가 나온 서윤경 안드레아의 목격 증언에는
강영원과 유치성은 태장 30도를 맞은 다음 백지사로 절명했다고 한다.
이 증언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마지막 순교자 유문보는 장성 삭벌리에서 살다 1872년에 잡혀 감옥에 끌려와 갖은 고문과 질병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872년 정월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사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나주는 조선 시대에 정3품의 목사(牧使)가 관장하는 고을로 정3품의 무관직인 진영장(鎭營將, 아마도 종3품의 첨절제사가
겸임한 것으로 보임)이 관장하는 병영(진영)이 있었으니, 무학당은 나주의 진영장이 치안 및 군사 관련 정사를 보던
동헌(東軒)에 해당되므로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신문과 고문이 이루어지고 때로 갖가지 법외의 처형이 이루어진 곳으로 여겨진다.
■ 순교자
◆ 강영원 바오로 (? ∼1872)
전북 용담인으로 1871년 11월 23일 정읍에서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하옥되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포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통경으로 기도를 바쳤다.
당시 함께 갇힌 유치성과 유문보에게 유감에 빠지지 말자고 격려하며 용감하게 참아 견디었다.
마침내 나주 무학당 앞마당에서 영장의 지휘아래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얼굴에다 물에 적신 창호지를 여러 겹으로 덧씌워 질식시키는 백지사형을 받아 1872년 3월 9일에 치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 유치성 안드레아 (? ∼1872)
본래 경상도 사람으로 전북 무장 암틔에서 살다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갇혔다.
그는 신문을 받으며 “만번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다”고 하자 영장은 유치성의 발등에 불을 지지도록 하고
나아가 돌무더기에 묻혀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다 동료 강영원과 함께
같은 날 백지사형으로 치명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 유문보 안드레아 (? ∼1871)
전남 장성 삭벌리에서 살다 나주 포교 김용운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에다가
염병에 걸려 1871년 11월쯤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사하니,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 분의 순교자와 같이 잡혀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순창 묵상 사람 최성화(안드레아)와
장성 수도 사람 서윤경(안드레아)이 1898년 11월 16일 증언하였고 이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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