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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9: 4 때가 아직 낮이매 - 요 9: 7 실로암 못에 가서
요 9: 4 때가 아직 낮이매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일반적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쉰다.
낮은 현재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하고 밤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마치는 때를 가리킨다.
인생에게 낮과 밤이 있다. 젊음도 한 때이며 평안한 환경도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할 만한 때에 시간을 아끼며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힘써야 한다.
1]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낮"이란 말은 예수님이 땅에 계신 기간을 가리킨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어서 영원토록 선을 행하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국한하셔야 될 일들이 별도로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런 의미의 사명 실행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2]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그는 사명 실행의 때가 지나간 다음에는 밤과 같은 일할 수 없는 때가 온 줄 아셨다.
사람들이 땅 위에 있는 시기는, 낮과 같이 귀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금보다 귀한 시간인 것이다.
기회는 귀하다. "기회는 오직 한 번만 문을 두드린다."(Opportunity knocks the door only once).
요 9: 5 세상의 빛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라.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
예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자신이 활동하는 때를 낮에 비유하셨다.
그는 살아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일을 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잡혀 죽으실 때가 오면 그때는 밤 같아서 그가 일하실 수 없을 것이다.
1]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라.
예수님께서 이제 빛을 소유하지 못한 시각장애인에게 눈을 밝히는 권능을 행하시기 위하여, 먼저 자기가 누구심을 알려 주신다.
여기 그의 알리는 말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라"고 하신 것은, 영적 의미를 가진 넓은 범위에 속한다.
그는 시각장애인을 고치시는 빛이 되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시각장애인이 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을 고쳐주시는 영생의 빛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가 누구이신 것을 먼저 알려 주신다.
실상 이 시각장애인은, 자기의 눈이 밝아지기를 원함보다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그에게도 예수님을 바로 아는 참된 지식이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명백히 알고 거기서 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있어서 눈 뜨는 것보다도 더 귀한 것은,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다.
요 9: 6 땅에 침을 밷어 -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그 시각장애인을 고칠 수 있으셨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 시각장애인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그 시각장애인으로 하여금 주께서 고치시는 것을 느끼게 하시고 또 그에게서 믿음과 순종을 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1]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 때에,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시각장애인의 눈에 바르신 것은, 혹설에 의학적 치료를 위하여 그리하신 것이라고 한다. 실상 침은 안질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행동은, 그런 자연적 치료에 의하여 그 시각장애인의 눈을 밝히시려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셔서 그로 하여금 보게 하신 것은,
(1) 그가 어떤 피조물을 가지시고라도 능력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2) 진흙은 예수님의 인간성을 비유하고, 침은 그의 말씀의 신성을 비유한다.
(3) 하나님 아버지께서 맨 처음에 사람을 지으실 때에 흙으로 하신 것 같이, 예수님도 그와 같은 원리로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셨다.
(4) 이것은, 그 시각장애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곧, 시각장애인은 본래 보지 못하여 매우 갑갑함을 느끼는데,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른 것은 그로하여금 더욱 갑갑함을 느끼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 명령을 따라 실로암 못에 가서 그것을 씻었다.
이는 마치,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게 하여, 그의 문둥병이 고침 받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왕하 5: 10-14).
비켄하우젤(Wikenhauser)도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Nicht weil das Wasser des Teiches besonders heilkraftig ware, sondern um seinen Glauben auf die Probe zu stellen.-Das Evangelium nach Johannes, P.187).
예수께서 왜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하셨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칼빈은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지만 보는 이들로 하여금 반대의의 어이없는 행동을 취함으로 시각장애인의 믿음과 순종을 단련시키고자 하셨다고 했다.
진흙은 인간의 육체가 만들어질 때 사용되었다.
* 창 2: 7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병자를 고치실 때 침을 사용하신 적은 마가복음에서도 두 번 등장한다.
* 막 7: 33 -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 막 8: 23 -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이런 예수의 행동이 진흙을 이기신 것은 안식일 율법 10번 '반죽하지 말라'를 어기신 것이 되었다.
요 9: 7 실로암 못에 가서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예수님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라고 말씀하셨다.
1]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실로암"이란 것은, 히브리 원어 쉴로아크(*)란 말과 같다.
이 말은, 사도 요한이 해명한 것과 같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시각장애인을 실로암 못에 보내신 목적은, 그 시각장애인의 눈을 예수님 자신이 고쳐 주신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실로암 못을 관설하신 것은, 실상 그 때 유대인들이 반대하는 하나님의 참된 종교를 반영시킴이다. 하나님의 참된 종교는 요란스러운 폭력이나 인간의 수단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에 의하여 고요히 진리로 역사한다.
* 왕상 19: 12 -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옛날부터 이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사야도 말하기를,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기뻐하느니라.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엎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라고 하였다(사 8: 6-8).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실로암 물로 상징된 여호와의 종교를 반대하는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적에 대하여 불신앙으로 논란하였다. 그것이 14-34절에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의 참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대표되었으며, 실로암 물로 상징되었다. "실로암 못"은 예루살렘 동남쪽으로 성 안에 있다. 그것은 히스기야 왕이 전쟁 때에 사용하기 위하여 팠던 것이다.
진흙이나 '실로암 물'이 눈을 뜨게 하는 어떤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시각장애인을 보고 멀찍이 떨어져 다니던 유대인들과 달리 예수께서는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시면서 가까이 시각장애인에 다가가셨던 것이며 그에게 자애로움을 함께 보여주셨다.
실로암에 못에 씻으라고 하신 것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과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사야가 당시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사 8: 6)의 일로 책망한 일을 상기시킨다.
지금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시는데 배척 당하심을 뜻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실로암 못의 뜻을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다.
2]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참 믿음과 순종이다.
그 시각장애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순종했다. 그는 그의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었다. 그러자 그의 눈은 시력을 회복했다.
그의 죽은 시신경이 되살아났다. 그 시각장애인은 이제 보는 자가 되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인 순간이었겠는가! 그것은 기적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을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는 역사상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 간에 처음에 논쟁이 붙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범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반응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눈을 띄우는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3] 하나님의 하시는 일 (요 9: 1-7)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던 한 청년을 만나게 되셨다. 제자들의 화제가 이 시각장애인인 청년에 쏠렸다. 그들은 주님을 향하여 이처럼 질문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인간의 모든 질병과 저주는 그 근원이 바로 죄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눈먼 청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으로 났으니 자기의 죄는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그 부모의 죄인가?
그러하다면 어찌하여 그 부모는 멀쩡한데 그 아들에게 죄 값의 저주가 나타났을까? 이 같은 의문을 풀어보겠다는 심산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질문하였다.
(1) 누구의 죄입니까?
우리는 성경(특히 구약)에서 죄와 저주가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① 우리의 조상인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의 죄는 모든 사람의 죄와 동일시되어 있다. (이를 대표성의 원리라 한다.)
* 롬 5: 12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리고 죄 값으로 인생이 받게 된 사망이란 인간 최대의 저주로 이 안에는 질병이나 육신의 모든 장애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 창 2: 17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② 인간의 저주가 부모의 죄로도 온다.
* 출 20: 5-6 –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 민 14: 18 -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미워한 자의 부모의 죄가 자식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은 인간의 저주가 부모의 죄로부터 연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③ 인간의 저주는 자신의 죄로 인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 신 28: 15-19 – 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16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17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18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2)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참으로 깜짝 놀랄만한 대답을 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아직까지 알고 있는 율법적인 지식과 모순되는 일이었음으로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①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저주가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신 말씀이 아니다.
인간 사회에는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죄가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하여 저주가 왔다.
그런데 이 청년의 경우는 모든 인간이 겪어야하는 이 같은 저주에서 해방된 사람은 물론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시각장애인인 것이 그 부모나 그의 죄로 인한 것도 아니라고 밝히셨다.
②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 가지 구원 섭리로 죄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신다.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이 청년이 예수님과 만남이 되어 그의 눈이 떠졌다는 사실은 눈이 떠졌다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빛을 보았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사망에서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이 청년의 경우는 이런 경우에 해당하므로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이다.
(3)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예수님은 이 청년을 고쳐주시는 이유에 대하여 4절에서 이처럼 밝히셨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때가 낮이란 말씀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때를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라고 하셨다.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에 반드시 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데 색다른 방법을 사용하셨다. 능히 말씀으로 고치실 수 있으셨지만 그의 눈에 진흙을 침에 묻혀 바르신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신 것이다.
주님이 이처럼 하신 뜻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청년과 우리에게 순종에서 오는 하나님의 축복과 위대한 능력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이 청년은 죄로 소망이 없는 죄인의 상태를 말해준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빛을 보지 못하고 소망이 없는 생애를 지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실로암 못에 찾아가 눈을 씻으니 나음을 입은 것이다.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 연못의 물은 예수님의 사죄의 보혈을 상징하므로 우리들의 눈을 실로암 못에 가서 주님의 보혈로 씻음 받을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져서 신령한 세계를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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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건강을 가져오고 행복을 안겨 줍니다.
사랑이 꽃피고 행복이 넘치는 웃음 가득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