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개념
자, 그 다음.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깨달음의 개념입니다.
화두타파 한 사람도 깨달았다고 하고,
《화엄경》을 보면 부처님도 깨달았다고 하고,
또 어느 방송을 들으니까 어느 민족종교 어떤 분이 처음 개교한 분도
크~게 깨달았다고 하여 대각이라 하고... 이랬으니
이 깨달음에 대한 그 개념이 이렇게 되어가지고서야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견성은 공부의 시작이라 하는 것을 꼭 말을 해줘야 되겠다.
화두타파의 깨달음은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 시작이거든요.
거기서 부처님의 정각(正覺) 깨달음에 가자 하면 백천만리 백천만리도 더 가야 되요.
그래서 오늘 내가 한 스물다섯 가지 측면에서
견성과 아라한과 보살과 붓다의 차이점을 좀 간단히 적어 봤거든요.
내가 대충 써보니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스물다섯 가지더라고.
이제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고,
그 다음에 돈점논쟁(頓漸論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고,
선불교(禪佛敎)의 삼신관(三身觀)에 대해서 비판하고 싶습니다.
선불교에서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을 많이 하거든요.
앉아서 가고 서서 가고... 뭣 한다고요. 그건 허구입니다.
그건 하늘밖에 못갑니다.
잘못하면 지옥 가지요. 지장보살님한테 잡히면요.
그건 우주이법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건 대적정삼매에 들어가서 하는 것이 아니어요.
이제 조그마한 선정을 익혀가지고 3번 영체가 몸에서 나가는 거예요.
기체(基體)가 몸에서 나가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생명줄을 끊어버리면 스스로 죽어버리는 거예요. 안 와요.
그러면 도인이라고 하지요. 세상사람들은 모르고 말입니다.
그러면 지장보살님이 탁~, 지장보살님은 대보살이거든요.
부처님 다음가는 대보살인데 눈에 탁 띈다고요.
앞에서 부처님은 무한극수까지 안다고 했는데,
이 무한극수, 그러니까《금강경》에 있지요.
항하사 수, 갠지스강의 모래 수만큼 많은 불국토,
그 불국토를 가루로 만들어서 그 가루만큼 많은 수의 불국토,
그 속에 사는 중생들의 마음을 부처님은 다 아는 거예요.
앞의〈아승지품〉에서처럼 말입니다.
지장보살님은 그건 못하지만 대단하다고요. 딱 엉킨다고요.
“내 눈은 피하지 못하리!” 그럽니다.
가끔 지장보살님이요.
누구 큰스님 말하면 “오! 내 눈을 피하지 못하리!” 그 말처럼 바로 걸려요.
중생의 눈을 속이면 중생을 오도하면 큰일 나요. 극무간지옥 간다고요.
진리를 잘못 이야기하면 사람으로 오더라도 삼중고(三重苦) 사중고(四重苦)를 받아와요.
스님이 스물다섯 가지를 이야기하려면 시간이 없네요.
그래 좌탈입망은 할 말이 더 많은데 이 다음시간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스님이 격외(格外)로 선문답 하는 것, 법거량 한다고 하지요.
그것도 이 다음에 하고.
출처:2013년 자재 만현 큰스님 법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