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경제 평가 : 부제 복붙] 10년 넘게 여기서 활동해왔는데 가장 긴 글(병맛의 끝)이 될 것 같네요.
각종 위키 및 서적, 블로그, 기사 등등 유리한대로 마음껏 복사 붙여넣기 하고 각 챕터당 사족(+표시)은 조금씩 반영해서 작성했는데 혹여 이 글이 저작권 위배로 문제가 되어 고소, 고발당하면 비스게이들이 지켜주세요. 믿습니다.
바쁘신 분은 본론에 중요 표시된 [01], [12], [14]번만 읽어보세요.
[서론] 존경하는 인물은 노무현입니다.
[본론]
[01] << 이상적인 경제 성장?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 - 중요
[02] << 경제 개발 계획 : 박정희와 장면 정부 >>
[03] << 한국의 새마을 운동, 북한의 천리마 운동, 중국의 대약진운동 >>
[04] << 미국의 원조 : AID 경제 전문가 부대 >>
[05] << 중공업 :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핵심 >>
[06] << 일본 차관 >>
[07] << 김종필 주가조작 사기 >>
[08] << 화폐 개혁 >>
[09] << 베트남전 파병 >>
[10] << 경부고속도로 건설 >>
[11] << 한강의 기적, 아시아의 네 마리용 >>
[12] << 통계로 보는 박정희 >> - 중요
[13] << 싱가폴 리콴유 총리의 립 서비스? >>
[14] << 프레이저 보고서 논란 >> - 중요
[15] << 국가와 국가주의, 관치에 대한 오해와 편견 >>
[결론] 저는 박정희를 싫어합니다.
[서론]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해 분석하기에 앞서 몇가지 (조금은 긴 주저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다소 내용이 길어 지루할 수도 여러분의 공감대를 얻지 못할수도 있겠지만
무분별한 인신공격보다는 제시한 주장에 대한 반론을 해주셔서 저도 이를 통해 많이 배울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글을 작성하기에 앞서 전에 댓글에서 느꼈던 점이 있습니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상대방을 무조건적인 비난 및 조롱하는 시점에서의 토론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비스게에서 뛰어난 회원님들의 좋은 글을 읽으며 무지했던 정치를 배우고 생각의 폭 또한 넓혀 왔습니다.
간혹 아쉬웠던 건 몇몇 회원들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고, 도덕적 우월감을 가지고 상대방을 대한다는 것 입니다.
토론을 할 때 도덕적 우월감에 빠지지 마십시오. 당신만 착한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를 반으로 쪼개서 좌우로 구분하면 새누리당은 우(보수)이고, 새정연은 좌(진보)입니다. 우리나라에 보수가 어디 있고? 진보가 어딨냐? 이런식으로 들어가면 또 끝이 없습니다. 잠시 접어두십시오.
좌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국민의 60프로는 새누리를 지지하고 40프로는 새정연을 지지하는 행태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전 새누리당이 싫습니다. 어떤 뛰어난 인물이 나온다 한들 죽을 때 까지 새누리당에 표를 던질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60프로가 그 정당을 지지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지 대해서는 고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입니다.
저 놈은 예전부터 나쁜놈이야 저 놈들이 하는게 뭐 다 그렇지? 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해결책 없는 대립만 지속될 뿐입니다. 상대방의 주장을 일단 들어보고 그에 맞는 반박을 조목조목 하나하나 따져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다른 사안을 들고 와서 너 그때 이거 잘못했지? 그럼 니 말은 안 들어봐도 뻔해 다 틀린거야 식의 토론은 다시 이야기하지만 끝이 없습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잘못된 건 고치고 그렇게 하나둘씩 수정해나가면서 발전해나가는 게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서론이 길지만 본문도 길어질 것 같아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겠습니다.
어떻게 조영래 변호사 이야기에 감동 받았다고 이곳에 글을 올리는 제가 인권을 경시하겠습니까?
제 블로그에서 가져온 글 입니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감동받아 리뷰를 올리는 사람이 노동자의 비참함에 대해 경시하겠습니까?
어렸을 때 저 역시 박정희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비판만 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논리는 간단했습니다.
[인권을 유린을 한 독재자 - 나쁜놈 - 고로 경제정책도 엉망이다] 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오늘 토론은 인간 박정희가 아닌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관한 것 이기 때문에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리뷰에 있는 인상깊은 구절 :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과 영국은 마치 고상하게 산업화 과정을 거쳤을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그 나라들도 한 때 우리 보다 더한 착취와 저임금의 시기를 거쳤습니다. 에 관한게 이 글이 중심적으로 다룰 부분이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도덕적 우월감은 잠시 집어 넣어두십시오.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이야기를 풀겠습니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정치와 경제는 따로 떼어 놓을수 없는 부분입니다. 같이 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때문에 인권을 경시하고 유신 헌법을 제정하여 독재를 자행한 박정희 정권에게 낙제점을 주고 싶습니다.
또한 그 당시 노동자에 가한 무분별한 착취와 인권유린, 정경유착으로 인해 오늘날 그에 대한 병폐로 경제가 발전해도
몇몇 기업가들이 자본을 독점하고 지금 우리 사회 곳곳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는 풍토를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추가적으로 조영래 변호사와 전태일 평전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은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는 댓글을 읽고
상처받은 제가 그 나름의 변을 한 것 입니다.
장하준 교수의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예로 든것은 비스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저 또한 존경하는 노무현 대통령 역시 이 책을 추천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권했다는데...경제부처 ‘쾌도난마’ 독서열풍 "발췌 - [이 책이 경제부처 공무원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서 청와대 내 비서관들에게 읽어볼 것을 권한 사실이 알려지면서부터.
즉 대통령의 경제철학을 담고 있거나 최소한 대통령이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경제부처 공무원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112&aid=0000015943
[박정희 전 대통령 간단 요약]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과 접전을 벌이며 승리하여 제 5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게 된다.이 과정에서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60~70년대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제는 이 시기 매년 2자리 수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으며, 현대 한국 경제의 기초가 되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닦았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논란이 많다. 그는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집권을 추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탄합하였고, 물리적 정치적 테러 역시 개의치 않았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결국 이로말미암아 인권외교를 주창한 미국 카터정부와의 불화와 중화학 공업 몰빵으로 인한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제가 집권 말기에 악화되기 시작하는 악재가 겹치게 되었고, 그로인해 YH무역 사건과 이를 도화선으로 부마항쟁이 시작된다. 이른바 유신 공화국의 종말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결국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차지철 등과 함께 부마항쟁 진압에 대하여 논의하던중 5.16 혁명 동지이자 육사 동기인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탄 에 의해 암살당했다
전에 댓글의 반론 대부분 위키 [부정적 평가]에 들어가 있는 내용이기때문에 ↓밑에 그대로 따왔습니다.
박정희 경제 정책에 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두개의 상반된 평가가 있기 때문에 양쪽 다 읽어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점이 될 만한 사항들을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경제정책]
박정희는 통일의 길은 조국 근대화에 있고, 근대화의 길은 경제적 자립이며 자립은 통일의 첫 단계라고 보았다. 이후 근대화를 통해 개발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낙후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였으며 재임 기간 중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식량 자급 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일제 침략기와 한국 전쟁을 거쳐 황폐화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경영인인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박 대통령이) 독재자라지만 이 시대(당시)에 열심히 엔진을 돌려놓았기 때문에 엔진이 꺼진 지금도 관성에 따라 우리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며“지난 40여년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배 이상 늘어났는데 이런 수치를 두고 어떻게 박 대통령 시대에 대해 뭐라 말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특히 “박 대통령은 어느 정도 규모의 공장이면 준공식에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기업활동과 경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며 여타 대통령들과의 차별성을 지적했다. 윤 부회장은 또 “산업화의 기틀이 된 새마을운동을 ‘정치적 목적이 있다’며 이후 정권에서 없애버린 것도 개인적으로는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은 2004년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 당선자 워크숍에서 “경제민주화와 균형성장 정책이 오히려 한국경제의 역동성을 앗아갔다”며 의원 당선자들에게 “여러분이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열린우리당의 청산 대상인 박정희 패러다임이 한강의 기적을 가져왔고 이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소신발언을 토해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현대, 금성, 삼성 등의 여러개 중소기업이 재벌과 대기업으로 성장하고 포항제철로 대변되는 중화학 공업이 중추 산업으로 등장했다. 특히 새마을 운동은 베트남, 네팔, 라오스등의 개발 도상 국가에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어 호평을 받고 있다.개발지상주의자로 평가받는 박정희 정부의 그린벨트 정책과 조림사업은 양대 환경 치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08년 3월, 유엔 본부에서 열린 빈곤ㆍ질병 퇴치를 위한 `새천년개발목표` 아프리카 주도그룹 회의 후 기자회견을 열어 경제 발전과 초고속 인터넷 접근에서 가장 성공한 사례인 한국에서 배울 점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한국이 성공한 데는 많은 요인이 있을 수 있다"며 "나는 유엔 일부 직원들에게 아프리카 국가들이 한국 성공사례를 배울 것이 없는지에 관해 얘기해왔다"며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긍정적으로 소개했다.
세계은행 이사회에 한국에 관한 기조연설자로 초청된 김정렴은 "강력한 정부주도의 '수출 지향적 공업화 경제 정책'으로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김정렴에 의하면 "박정희는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이라는 꿈과 미래상을 비전으로 국민에게 제시하였고 '잘살아 보자'고 호소하며 국민의 단결을 고무하였으며, 박정희 시대의 한국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고 마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미르달이 정의한 '경성국가'였다" 라고 평가하며 "덩샤오핑은 한국을 최빈국에서 중진국 선두주자로 끌어올린 박 대통령 집권 18년간의 실적을 높이 평가했다"고 덧붙였다. 노회찬의 비판적인 평가에 대해서 당시 한나라당 홍준표“국가가 통제하는 경제 체제를 선택한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도 좌파정책이었지만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고 평가했다.
[경제정책 비판]
경제학자 김수행은 그의 저서 《박정희 체제의 성립과 전개 및 몰락》에서 경제학적 분석을 통해,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국민생활의 개선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상지대학교 교수인 홍성태도 박정희 시대의 경제 정책을 '토건 국가'적인 정책이라고 비판하였으며, GNP 성장 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 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으로 평가하였고 개발을 위해 그의 독재가 필연적인 것도 아니었으며,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고 비판한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 5월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2.3%를 기록했고, 석유제품의 가격은 59%, 전력요금은 35% 상승한 반면, 저임금 정책이 지속되어 경기가 위축되었다. 이미 당시부터 재벌들이 부를 독점하기 시작하여, 1979년의 제조업 출하액 중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를 기록하였다. 이에 반해 경제성장률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1976년에는 14.1%, 1977년에는 12.2%, 1978년에는 9.7%를 기록했다.
박정희 정권의 차관 정책과 대외무역 의존에 대한 비판도 있다. 우리사회연구소 이동훈 상임연구원에 따르면, 박정희의 차관 정책은 미국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해 한국 경제는 겉으로는 규모가 커졌으나 실제로는 미국의 사양산업과 공해산업을 떠맡아 사실상의 '하청경제'가 되었고, 핵심기술의 도입을 차관을 준 나라에 의존하게 되어 불공정 무역이 조장되었다. 역사학자 정운현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 과정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차관 정책에 따라 수출이 강요되었고, 불공정 무역으로 인해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무역수지 적자가 223억 달러에 달했다. 박정희 정권은 적자 해소를 위해 저임금, 저곡가 정책을 주도했고, 이는 노동자 계층과 농촌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더욱이 박정희 정권 말에는 중화학 공업 정책의 실패로 무리한 중복 투자가 이루어졌고, 이는 재벌의 영토 확장과 비대화를 불러 일으키는 동시에 사회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러한 악순환은 결국 YH 사건으로 대변되는 노동자 투쟁을 불러왔다. 서중석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은, 박정희 정권에서 만들어진 취약한 경제구조가 이후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IMF 외환위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비판했으며, 이 시기에는 박정희가 아니라도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박정희는 아시아 각국의 독재자들과 같이, 대기업 중심의 경제 정책은 중소기업간 성장의 불균형을 야기했고, 소비에트 연방을 모방한 강력한 국가주의적 경제정책으로 산업 전체를 독점하는 개발독재관치경제를 띠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비판이 있다. 미국은 제2공화국 정책과 비교하면서 군사정부의 제1차경제개발계획이 지나치게 의욕적이라며 경계하며, AID원조자금을 축소하기도 했다.1997년 일어난 외환 위기 IMF 구제금융사건 이후,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일부 비판적인 견해가 일었다.미국 경영자들은 주주가치를 창출하는데 매진하는 동안, 아시아 경영자들은 현대 군벌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그 결과 경영자들은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자회사 분사나 합병 파트너 모색 등 재빨리 대처할 자유나 탄력성을 갖지 못하고, 대기업과의 정경 유착으로 인한 한국 재벌의 관치금융, 통제금융 의 의존적 총체적 부실이 결국 한국 경제의 부실로 이어져 외환 위기의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적 견해의 해석이 있다.
+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가 안티 박정희에서 경제 발전 만큼은 공이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아마도 위에 언급한 책(쾌도난마 한국경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게 논문이라면 반칙이겠지만, 저보다는 뛰어난 경제 학자의 말이 더 논리정연하기 때문에 그대로 차용하겠습니다. 저작권은 많이 침해하겠네요. 대다수의 글이 그렇게 흘러갈 것 같습니다.
이 점 다시 한번 양해 부탁드립니다.
[본론]
[1] << 이상적인 경제 성장?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쾌도난마 한국경제 中 발췌]
저는 경제개발에 관한 한 박정희가 성공했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그가 시장 주도형이 아닌 국가 주도형 경제 개발 노선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시장주의 덕분에 경제 개발에 성공했다는 거죠.(46쪽, 정승일) 박정희는 자본가를 통제했습니다.… 남미경제에서 가장 곤란한 문제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열심히 착취해서 경제잉여를 창출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자국에 재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해외로 빼돌리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박정희는 이런 현상을 막았지요. 박정희는 심지어 자본가들의 소비도 규제했습니다.… 박정희는 자신부터 솔선수범해 가며 부유층들이 외제와 사치품들을 못 쓰도록 한 겁니다.… 박정희가 자본가를 통제한 세 번째 측면은 투자를 규제한 겁니다. 그게 바로 산업정책이고 경제개발계획이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면 노동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고 세련 화해야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본을 통제하는 것이거든요. 그에 비하면 노동착취는 훨씬 쉬운 거죠. 제3세계 신흥독립국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62-64쪽).
만약 1950년대의 이승만 식 경제 시스템이 지속되어 미국식으로 개방하고 어쩌고 했으면 우리나라에는 지금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기업은 없을 겁니다. 기껏해야 다국적 기업의 아시아 지사나 몇 개 있는 정도겠지요 .저는 이른바 개방과 자유화 전략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노동자·농민을 억압하지 않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나라는 불행히도 없습니다.(67-69쪽, 장하준)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들에게만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 셈이고요. 그러나 그 폭력이 결국 자본을 통제하는 산업정책의 한 수단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한국경제를 고도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왠지 씁쓸하군요. 그래서 박정희 체제의 특징을 첫째 민주주의가 아니었고 둘째 자유주의도 아니었다고 하는 겁니다.… 박정희가 자본을 통제해서 자본가들의 사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을 보면 사적 소유권과 시장을 절대시하는 자유주의자도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고요." (82쪽, 장하준)
박정희 경제정책의 ‘성공’을 말하는 건 독재를 찬양하는 게 결코 아니다. 사실 민감한 문제라는 건 잘 안다. 당시 투옥되는 등 피해를 본 분들이 많다. 선뜻 용납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이분법을 극복할 때만이 군부독재 유산이 청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미국과 영국은 마치 고상하게 산업화 과정을 거쳤을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그 나라들도 한 때 우리 보다 더한 착취와 저임금의 시기를 거쳤습니다.역사적으로 보면 노동자·농민을 억압하지 않고 경제를 발전시키는데 성공한 나라는 불행히도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 경제 개발 계획 : 박정희와 장면 정부 >> - 네이버 민쭈리님 블로그 링크
* 장면정부의 경제 제일주의 : 왜? 장면은 박정희가 되지 못했나?
*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진실 : 박정희가 과연 우리 경제를 성장시켰나?
* 군인들이 망친 경제 : 우리나라는 어떻게 수출위주 성장으로 전환했을까?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sn76&logNo=220309071043&parentCategoryNo=&categoryNo=48&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 끝나지 않은 백년전쟁 논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2426135
+ 위 민쭈리님의 블로깅 내용 대부분은 안티 박정희 입니다. 여기서 몇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박정희가 안해도 장면이 했을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장면정부는 유능했을까?
미국이 반대하고 장면의 계획에 없었던 우리 경제를 파탄시켰다는 중공업 그건 과연 우리에게 독이 었을까? 미국의 지원으로 기사회생한 한국, 미국이 유독 우리만 이뻐했을까? 한 번쯤 곱씹어 볼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E H 카(1892∼1982)는 객관적 사료뿐 아니라 시대정신을 바탕에 둔 역사가의 해석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역사가는 사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다”라고 말했습니다.
양쪽의 상반된 의견을 들어보고 박정희에 대해서 공정히 한번 생각해봅시다.
[3] << 한국의 새마을 운동, 북한의 천리마 운동, 중국의 대약진운동 >>
새마을 운동은 1970년 초 대한민국 농촌의 현대화를 위해 시작되어 범국가적으로 시행된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풀뿌리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새마을 운동 계획자는 농업전문가로 유명한 류태영이다.
천리마 운동은 1958년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시작된 운동이다. 1972년의 《인민민주주의헌법》 제13조에는 "천리마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1998년, 2009년 총 3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대약진 운동은 공산 혁명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근대적인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1958년부터 1961년말-1962년초 까지 마오쩌둥의 주도로 시작된 농공업의 대증산 정책이다. 마오는 《생산성 이론》에 근거해 이 정책을 실시했지만, 농촌의 현실을 무시한 무리한 집단농장화나 농촌에서의 철강생산 등을 진행시킨 결과 3,000만 명에 이르는 사상 최악의 아사자를 내고 큰 실패로 끝이 난다. 이때문에 마오의 권위는 추락하고 이 권력회복을 목적으로 문화 대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새마을 운동은 농업 경쟁력을 향상시켰고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공동체 의식, 자발적 참여 의식을 회복에 기여하였다. 세계적으로는 농촌 개발의 모델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유엔은 새마을 운동을 바탕으로 한 '새천년마을계획'이라는 아프리카의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추진할 만큼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또한 아프리카의 유엔 산하기관에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배워볼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현재 해외 74개국으로 새마을 운동이 수출되었고, 후진국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배우겠다며 방한하는 해외지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탄자니아는 2012년까지 팡가웨 지역에 새마을 운동을 기반한 마을을 짓는다고 하였다. 일각에서는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농촌진흥운동과 비슷하다는 지적을 하고 있지만, 총독부와 같은 일방향적인 구도보다는 일반민의 호응을 얻어 시행되는 구 소련, 북한 등의 인민 동원 체제와 유사하다. 허은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는 '냉전과 지역사회'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의 새마을 건설계획은 말레이반도·필리핀·베트남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을 완전히 차단하려는 미국의 안보적 이해와 연관성 속에서 전개되었다"라고 설명하였고 이 논문은 새마을 운동을 냉전사 속에 위치시켜 관련 연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새마을 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새마을운동은 북한의 천리마운동에 대응하는 의미도 지닌 채 70년대의 국가발전에 기여한 점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박대통령의 유신체제를 지탱하는 통치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새마을 운동이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을 모방한 것으로 파시즘 체제 유지를 위한 도구였다는 비판도 있다.
+ 먼저 시작한 북한과 중국의 농촌운동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혹자는 새마을운동의 창시자는 류태영 박사라고 합니다. 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최종 시행 결정을 내리고 국민에게 장려한건 박정희이고 이는 당시 농촌이 중심이던 우리 사회의 경제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3%88%EB%A7%88%EC%9D%84_%EC%9A%B4%EB%8F%99
[4] << 미국의 원조 : AID 경제 전문가 부대 >>
개발원조(Development Aid)는 개도국의 경제·사회개발에 대한 원조를 가리키며 군사원조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를 개발원조에 포함시킬 것인지 그 한계는 뚜렷하지 않지만,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DAC)에서는 정부가 재정자금으로 실시하는 완화된 조건의 원조를 공적개발원조(ODA)라 정의하고 국제비교에 이용하고 있다. 개발원조는 내용에 따라서 자금원조와 기술원조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자금원조 중에는 프로젝트원조와 상품원조가 있다. 기술원조는 한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전문기술을 제공하는 원조의 한 형태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A%B0%9C%EB%B0%9C%EC%9B%90%EC%A1%B0
1951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1990년 가격 기준으로 볼 때 787달러에 불과했다. 아프리카 대륙 53개국의 평균 912달러에도 못 미쳤다. 이런 경제를 재건하고 1960년대의 고도성장으로 이끈 것이 미국과 유엔의 원조였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총 31억달러의 경제 원조가 이뤄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경제를 재건하고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세계 각국에 많은 원조를 제공했다.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많은 원조를 받았다. 미국의 어느 학자는 "한국 한 나라가 아프리카 대륙 전체보다 더 많은 원조를 받았다”고 했다. 이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중략) 원조의 방향을 둘러싸고 양국 정부 사이에는 심각한 의견 대립이 생기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원조 자금으로 전기·비료·시멘트 등의 기간산업을 건설하고자 했다. 반면 미국 정부는 소비재 공급과 인플레 억제가 우선이라며 경공업의 재건을 중시했다. 원조 내역은 대체로 공여자인 미국의 입장에 따라 결정됐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5/22/2015052200399.html
(중략) 2차 대전 후 미국 원조를 받은 나라들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미국의 원조를 고맙게 받아들인 나라들이 있는가 하면, 그 원조가 미국만을 위한 속임수 지원이라고 여겼던 나라들이 있다.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인 나라들은 대부분 경제 부흥에 성공했고, 도움 뒤에 뭔가 숨겨진 뜻이 있다고 의심한 나라들은 아직도 정치 혼란, 경제 침체를 겪고 있다. 성공 사례는 유럽·아시아에 얼마든지 많은 반면 중동과 중남미, 아프리카에서는 실패 국가의 본보기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라크의 혼돈, 이슬람국가(IS)의 등장에서 보듯 미국의 잘못된 개입과 지원이 가끔은 더 큰 문제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원조의 애초 의도가 무엇이었든 한 나라의 운명은 미국의 힘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06/2015030603915.html
+ 냉전시대에 미국의 지원으로 우리 경제가 성장한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위의 장하준 교수, 본 챕터의 이영훈 교수, 밑에 프레이저 보고서 3개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박정희 정부는 기간 산업을 건설하자 했고, 미국 정부는 경공업의 재건을 중시했다는 겁니다.
저는 그때의 이 결정이 현재 우리 산업에 큰 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단점은 훗날 재벌 경영 중심인 우리나라와 중소기업 중심인 대만으로 좀 더 심화해서 다뤄볼 부분이 많겠지만 여기서는 이만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5] << 중공업 : 대한민국 경제개발의 핵심 >>
+ 다행히 저만 박정희가 공이 있다고 생각한건 아니였네요. 제가 좋아하는 안희정 충남도지사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종합뉴스]‘친노 핵심’ 안희정, 출간 저서에 ‘박정희 재평가’ http://news.ichannela.com/politics/3/00/20131113/58880194/1
우리나라는 제1, 2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인 1960년대에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주로 섬유 합판 가발 신발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제품을 생산해 수출했다. 1972년 5월 30일 무역확대진흥회의 직후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국보(國寶)’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오원철 경제수석에게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려면 무슨 공업을 육성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오원철 수석은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정과 같습니다. 그 후 일본의 수출액이 20억달러에 달했을 때 중화학공업화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때가 1957년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67년에 일본은 100억달러의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박 전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이 작성한 자료를 검토하고 중화학공업 육성에 대한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중략) 1973년 1월12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중화학공업 육성에 중점을 둔다는 ‘중화학공업 선언’을 하고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화학 등 6개 전략업종의 생산시설을 건설해 각 분야의 생산능력을 얼마까지 늘린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이러한 1970년대 정부의 지속적인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으로 중화학공업 제품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12.8%에서 1980년에는 41.5%까지 늘어났다. 1977년에는 한국 전체 수출액이 100억달러를 넘어섰다. 당초 정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로 1981년까지 1인당 국민총생산(GNP) 1,000달러와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내걸었는데 조기 달성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이 엄두도 못 낸다는 중화학공업화에 성공하면서 노동집약적 산업구조가 기술집약적 구조로 전환됐다. 철강 비철금속 화학 등 공업이 필요로 하는 원재료를 국산화해 공업의 자립을 이룩하면서 고도산업국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은 1980년대 초반 과잉투자의 폐해를 부르기도 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전체 투자액 21조 5,650억원의 19.3%에 달하는 4조 1,357억원이 중화학공업에 투자됐고 심지어는 공장건설의 90%를 정부 의도대로 대출하는 정책금융에 의존한 사례도 있었다. 재벌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중화학공업에 투자했고 이로 인해 중공업에서는 생산이 너무 많은 반면 경공업에서는 생산 부족현상이 벌어졌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세계경제가 수요 감소에 직면하게 되자 과잉 설비에 대한 구조조정을 해야 했다. + 공업지구 조성, 제철 산업, 조선 산업 등등 다 알고 있으시란 판단하에 패스하겠습니다.
http://eiec.kdi.re.kr/click/click/click_view.jsp?sendym=201004&idx=1182
[6] << 일본 차관 : 나 >>
[7] << 김종필 주가조작 사기 : 쁜 >>
[8] << 화폐 개혁 : 놈 >> + 딱히 잘한 것도 없어 보이고, 이미 양이 많기에 패스하겠습니다.
[9] << 베트남전 파병 >>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군을 파병한 사건을 말한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박정희 정부는 차관 마련 등의 군사, 경제적인 이유로 집요한 파병제안을 했으나, 당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에 한국군을 파병할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도발할 가능성과 중국, 소련 등의 공산권 국가를 자극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원래 구상했던 SEATO(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중심으로 구상했던 베트남 지원 계획이 프랑스와 파키스탄의 반대로 어려움에 빠지자 1964년 5월 9일 《남베트남 지원》을 호소하는 서한을 발송하게 된다. 이에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 최초로 1964년에 국군을 해외 파병하여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했다. 한국이 공산침략을 경험한 국가로서 아시아지역의 안보와 자유 수호를 위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기간에 파병 국군장병이 해외근무 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총 2억 3556만 달러였다. 이 중 82.8%에 달하는 1억 9511만 달러가 국내로 송금되었고, 이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기여되었다. 전쟁에 조달할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 투입 등으로 한국 기업들은 베트남전 특수(特需)를 톡톡히 누렸다. 국군의 파병 대가로 들어온 외화 송금에 힘입어 당시 내수산업과 수출이 성장하여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전투병 파병 직전인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03달러에서 한국군 철수가 끝난 1974년에는 5배가 넘는 541달러로 국민 소득을 향상되었다.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sn76&logNo=220325792331&categoryNo=48&parentCategoryNo=0&viewDate=¤tPage=1&postListTopCurrentPage=&userTopListOpen=true&userTopListCount=30&userTopListManageOpen=false&userTopListCurrentPage=1
+ 인권적인 측면에서 베트남 파병은 옮지않다. 하지만 이 돈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됐다.
[10] << 경부고속도로 건설 >>
* 경부고속도로 건설 : 세계에서 가장 싸게, 가장 빨리, 가장 허술하게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sn76&logNo=220378996026
박정희 대통령은 왜 없는 돈을 들여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고자 했을까. 그는 1965년 12월 서독 방문길에 오른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원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덧붙여 제2차세계대전 패전의 잿더미를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의 경제발전 노하우를 배우고 싶은 열망도 있었을 것이다. 조국 근대화를 꿈꾸었던 그에게 서독은 경제개발의 모델이었다.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의 기적으로 바꾸어 보고자 하는 열망이 가슴에 가득했으리라. 그는 본에서 쾰른에 이르는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달리면서 기적의 출발이자 상징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구상을 했을 것이다. 1968년 2월1일에 착공하여 70년 7월7일에 준공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완공된 고속도로로 기록되고 있다. 그런 만큼 경부고속도로는 광복 후의 한국 현대사에서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중략)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정식 출범했지만 50년대 국가 예산의 많은 부분은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많을 때는 무려 절반을 넘기도 했다. 국가 재정에서 자립적인 기반을 갖추지 못한 국가가 과연 국가다운 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서구 사회를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조국 근대화를 위해 국가의 인프라를 제대로 구축하는 일은 무엇보다 긴요한 일이었다. 국가 총동원을 통해 수도인 서울을 중심으로 나라 전체가 하나로 움직이기 위한 고속도로라는 인프라를 하루 빨리 갖추어야 했던 것이다. 고속도로는 조국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수단이자 그 상징인 셈이었다.(중략)
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50416.010090748240001
↑ 위 사진의 진위여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강적들에도 나왔다고 하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11] << 한강의 기적, 아시아의 네 마리용 >>
한강의 기적은 대한민국에서 한국 전쟁 이후부터 아시아 금융 위기 시기까지 나타난 반세기에 이르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용어이다. 1965년 한국은 일본과 한일 기본 조약을 맺은 것으로, 무상금 3억 달러와 유상금 2억 달러, 민간 차관 3억 달러 이상(당시의 한국의 국가 예산은 3억 5천만 달러 정도)의 일본에서의 자금 제공 및 차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여 아시아의 네 마리 용 중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한강의 기적은 원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에 걸친 서독의 경제적 발전을 이르는 말인 라인 강의 기적에서 유래한 말이다.
1960년 1인당 국내 총생산은 소련을 흉내내 계획경제를 추진하고 있던 북한이 대한민국을 웃돌고 있었는데, 이는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었다. 한편, 장면 내각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으나 5.16 쿠데타로 실각하였다는 평가 때문에 일각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아니어도 한강의 기적은 충분히 이루어낼 수 있었다고 말하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국가 내에서 반대의견이 많았던 사업들과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조선소와 포항제철 사업 등과 같은 중화학 공업 육성을 추진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맞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중략) 한국은 수출 주도의 경제발전 계획을 세워 초창기 경공업 중심 위주의 발전, 후에는 중화학 공업 중심 위주의 발전을 추진했다. 박정희 정부의 대표적인 경제개발 정책으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 새마을 운동을 통한 농가 소득 증대, 주민등록증 발급, 포항제철소 건립, 현대조선(현재, 현대중공업)의 추진, 강남 지역 개발, 월남전 파병을 통한 군무기 현대화 및 외화 소득 증대,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 등 현대 한국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요인들이 있다. http://ko.wikipedia.org/wiki/%ED%95%9C%EA%B0%95%EC%9D%98_%EA%B8%B0%EC%A0%81
아시아의 네 마리 용, 또는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한 동아시아의 네 국가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홍콩, 싱가포르, 중화민국을 일컫는 말이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은 대한민국, 싱가포르, 중화민국, 홍콩을 지칭한다. 이들은 모두 과거 제국주의 열강의 통치를 받았으나, 열강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고도의 경제적 성장과 번영을 이루었다. 20세기 중후반 용어가 처음 나온 당시에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 해당하는 나라들은 신흥공업국으로 중진국 수준이었으나, 그 후에도 지속적인 빠른 경제성장을 통해 21세기 현재 대한민국, 싱가포르, 중화민국, 홍콩은 선진국이라고 평가된다. 몇몇의 경우는 정식국가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2011년을 기준으로 홍콩과 싱가포르의 경우 소득수준이 3만 ~ 5만 달러를 상회하며 국제적인 금융허브도시이자 도시국가가 되었고, 중화민국은 그나름의 경쟁력을 갖췄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은 4소룡 중 유일하게 G20(주요 20개국) 및 OECD의 일원으로 2011년 기준 GDP(명목) 세계 15위, GDP(PPP) 세계 12위, 무역규모 세계 8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12] << 통계로 보는 박정희 >>
동아시아 경제 성장률인데요. 한국만이 특별히 성장한 것이 아니란 것, 오히려 박정희 시대 한국의 성장은 동아시아 선발 개도국과 비교해서 미흡했고… 민주화 되면서 더 탄탄해 졌다는 것. 대부분의 독재국가는 망했고 망하게 되어 있는데 독재자를 찬양하는 이유가 뭘까요?
한국 국민들이 깨어 있어서 일하면서 독재자에 저항한 결과가 오늘의 한국이다. 독재자 덕이 아니다. 독재자는 쿠테타로 자리 차지하고 있었을 뿐. 그 당시 그 누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60-70년대는 말뚝 박는 시대였다.
+ 라고 적혀있는데 이거야말로 통계가지고 장난치는 겁니다.
+ 맞습니다. 우리 나라가 꼴찌입니다. (대만은 국가로 인정되지 않아 없습니다.)
+ 응? 근데 저 두 나라는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다 포함해도 전 세계에서 1등인 경제가 성공한 나라입니다.
우리와 비교하는 홍콩, 싱가폴, 대만... 실상은 세나라 다 합쳐도(△위위 사진 참고) 우리보다 땅 덩어리 작고, 인구도 적은 나라입니다.
홍콩이랑 싱가폴은 경제대국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대만도 그렇지만) 서울이랑 땅 덩어리 비슷한 도시국가입니다. 애당초 올바른 비교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홍콩이랑 싱가폴을 미국보다 잘산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 그리고 대만 장개석과 비교하여 우리나라 경제구조 및 박정희 까는 글도 봤는데... 실수로 날라가서 링크는 없습니다.
전 대만에 잠시 살았었습니다. 현실은 한국사람인거 안 밝혀도 대만 티비에는 매일 선덕여왕이 나오고(2006년쯤) 한국이랑 비교합니다.
근데 저는 거짓말 안보태고 우리나라 사람이 대만 이야기 하는 걸 들은적이 없습니다. HTC 폰 쓰는 사람은 지금까지 딱 한명 봤고요.
대기업 중심인 한국경제와 중소기업 중심인 대만경제를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건 또 경제학적으로 접근해야하니 복잡해지겠죠. 그냥 그렇다고요.
+ 그리고 급격히 성장한 저 세 나라 역시 독재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대만(장개석) : 1925년 - 1975년, 싱가폴(리콴유) : 1959년 - 1990년, 홍콩(총독 기간) : 1959년 - 1997년.
+ 1963년 우리와 비슷한 국내총생산량을 가진 다른 아시아 국가와의 비교입니다. 이 그래프는 제가 만든거고요. 여러분도 쉽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빨간 박스안이 박정희가 집권한 기간(1963년~1979년)입니다. 꼴지에서 엄청나게 치게 올라가죠? 박정희 집권 말에 두배 정도 차이가 나는데 지금도 딱 그정도 비율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 스타로 치면 팀플하는데 잘하는 얘가 (미국) 방어해줄테니까 배럭(경공업) 지어서 마린 뽑으라고 했는데 쌩까고 팩토리(중공업) 엄청 늘린겁니다.
그리고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물량(벌쳐, 탱크) 터지기 시작한겁니다. 직접 한번 눌러보세요. 각 종 통계 자료 클릭만으로 비교 / 분석 할 수 있습니다.
구글(데이터 세트) : http://www.google.com/publicdata/directory (세계 개발지표 - 경제정책과 채무 - 국내총생산 - 국가 선택)
+ 이와 유사한 자료 많이 보셨죠? 박정희 경제발전의 허구에 인용되는 통계표입니다.
전 똥통(동문들아 미안ㅠ) 경제학과를 나와서 물가상승률, GNI, 소비자 뭐 어쩌고 저쩌고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려워요. 그래도 한번 확인은 해봐야죠. 다행히 밑에 출처가 있네요.
출처) 한국은행, IMF / http://climate.snu.ac.kr/wrms/DATA/econo_data/main.html
재정경제부 / http://home.hometer.com/GNP.htm
재정경제부 / KOSIS > 온라인통계간행물 > 주요경제지표
대만자료는 http://www.dgbas.gov.tw/, 行政院主計處 第三局
+ 그럼 한번 들어가 보겠습니다.
+ 응? 못 믿겠으면 직접 들어가 보세요.
+ 밑줄 친 부분(사진:좌)을 보면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자료는 현재 1인당 국민 소득이랑 주거면적 밖에 없습니다.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cc/2/2/1/3/index.board?bmode=read&aSeq=62575&pageNo=86&rowNum=10&amSeq=&sTarget=&sTxt=
주거면적은 필요 없고 그럼 1인당 국민 소득(사진:우)으로 한번 보겠습니다. 아- 몰랑 20배 늘었네요. 다른 시기랑 비교해보세요. 2배 늘리기도 벅찹니다.
+ 혹시나하고 다시 한번 찾아봤습니다. 아쉽게 영국은 안나오네요. 그리고 이번에도 대만은(안습) 없습니다. △위위 표에 김대중 정부[98~03] 연평균 성장률은 11.4%입니다.
원칙적으로 1인당 GNI 기준이라고 쓰여있습니다. 검은색 박스표입니다. (1998년 : -7.27%, 1999년 : +10.29%, 2000년 : +8.43%, 2001년 : +3.8, 2002년 : +7.15, 2003년 : +2.44%) 제일 높은게 10.29%인데 계산 안해도 평균 11.4%는 나올수가 없네요.
다른 것도 한번 해보고 싶긴 한데, 이제 못하겠어요. 힘드네요. 구글(데이터 세트) : http://www.google.com/publicdata/directory (세계 개발지표 - 경제정책과 채무 - 1인당 GNI 증가율 - 국가 선택)
[펌글] 놀라운 사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 업적" http://www.kgh.or.kr/column/17318 + 자꾸 통계가 있는데 왜? 믿지를 않느냐? 그런 댓글이 많아서 찾아봤더니 대부분 여기에 기인한 것이 더군요. 아닌가요?
[펌글] 박정희와 경제발전 http://hypervandervilt.tistory.com/215?srchid=BR1http://hypervandervilt.tistory.com/215 + ↑ 반박글입니다.
[펌글] 노빠들의 졸렬함을 고발한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ad4good&logNo=90186717705&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 일베스러워 차마 인용할 수 없어 복붙 안하고 위에 그래프 만들어 설명드린겁니다.
+ 그래요 그것만 인정하자는 거에요.
+ 3분 30초. 그래요 그것만 인정하자는 거에요.
박정희 개발독재는 시장경제 발전의 암세포 - 고려대 이필상 교수 (중략) 고도성장의 요인 중 하나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경제발전에 대한 확실한 신념과 일관성 있는 전략,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비전 등이지요. “그런 것들이 상당히 긍정적으로 작용한 건 사실입니다. 고도성장에 견인차가 됐죠. 그건 인정하자는 거에요. 그런데 그걸 통치수단, 정권연장 수단으로 악용했고 그 결과 경제 전체가 병들었다는 점은 구분해 평가해야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발전에 대한 열정이나 신념은 누구도 흠잡을 수 없는 덕목인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경제철학이다. 이교수에 따르면 그는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그릇된 경제철학과 신념이 결합한데다 정치논리가 개입되면서 그 폐해가 더욱 커졌다는 것이다. (중략) + 그래요 그것만 인정하자는 거에요.
[13] << 싱가폴 리콴유 총리의 립 서비스? >>
리콴유 역시 비판 받을 점이 많습니다.→ 해외에서는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내부적으로는 가혹할만큼 강력한 반부패 정책으로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그 중에서도 최대 부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독재에 가까운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에 따른 폐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벌금과 태형 같은 엄격한 통제를 통해 국가경영의 효율성을 강조한 탓에 물질적으로는 부유해졌지만 국민행복지수는 한때 전 세계 최하위 수준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권력 쟁취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아도 된다는 마키아벨리 신봉자로 '국민의 사랑을 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단언하기도 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리콴유 전 수상이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에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세 지도자로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와 중화인민공화국의 덩샤오핑 그리고 한국의 박정희를 꼽고 싶다, 오직 일에만 집중하고 평가는 훗날의 역사에 맡겼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며 그를 극찬하였다. 포브스는 리 전 총리가 박 전 대통령을 6차례 방문했다는 사실도 전하면서 그가 박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감탄했다고 덧붙였다. "리콴유·박정희는 닮은꼴 지도자"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3/30/0200000000AKR20150330003600072.HTML?input=1179m
+ 반론으로 들으신 박정희와 카다피의 공통점 역시 인정합니다. 저는 카다피가 독재자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박정희도 독재자라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는 하는 것은 독재자 박정희가 아닌 대한민국 경제발전 과정에서의 박정희 입니다.
[14] << 프레이저 보고서 논란 >>
[27분 - 27분 30초] 한마디로 말해서한국의 5천년 역사는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다. 과거 우리민족은 너무나도 의도적이고 사대주의적이었으며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고 극복해나가겠다는 자주적인 정신이 너무나도 결핍되었다고 이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박정희가 하면 과대망상증이고, 노무현이 하면 명연설이다?
양 진영에서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노무현과 박정희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파병도 있겠고... 물론 당시 시대적 상황과 국제정서를 고려해서 판단해야겠지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 그 둘의 공통점은 미국을 대했던 태도입니다. 누가 옮다는게 아닙니다.
위에 있는 동영상(백년전쟁)과는 다르게 미국(형님) 말이 항상 다 맞는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도 과연 미국의 주장이 옮기만 할까요?
노무현의 의식 심연에는 박정희가 자리잡고 있다. 리더십 스타일에서 노무현·박정희의 공통점이 많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공통점은 (중략) ⑨실질과는 거리가 먼 상징적 수준의 포퓰리즘, ⑩밑바닥에서 일어난 ‘코리안드림’의 상징성 활용 등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두 가지다. (중략) 이는 농촌을 죽이는 정책을 편 박정희에게 뜨거운 지지를 보낸 농민들이 많았던 것과 매우 유사한 현상이다. 그 이유가 바로 두 사람이 효과적으로 이용한 상징적 수준의 포퓰리즘과 밑바닥에서 일어난 ‘코리안드림’의 상징성이다.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128000/2007/04/021128000200704190656032.html + 뭐 대부분 전혀 공감 안가는데요. 공통점이 있다는 거 (아니 미국 뜻대로 안했다는거) 딱 그것만 동의합니다. 실은 강준만 교수 이야기가 나와서 그냥 집어 넣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족특별위원회의 정신과, 평생을 친일문제 연구에 바친 사학자 임종국(林鍾國)의 유지를 이어 1991년 설립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한국 근현대사의 쟁점과 과제를 연구·해명하고, 한일 과거사 청산을 통해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며,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통해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설립되었다.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재정은 회원들의 회비와 후원금 등으로 충당한다. (중략) 주요 활동으로는 박정희기념관 건립 저지, 친일파 기념사업 저지, 조선일보 반대운동, 일제하 강제동원 진상규명, 한일협정 개정, 한일 교과서 바로잡기 등을 해오고 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8m2157n8
임헌영은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람 가운데 한명이었다. (중략) "임씨는 경향신문이 발행하는 ‘주간경향’ 등에서 재직하다 지난 1974년 1월 ‘문인간첩단사건’에 연루돼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 1976년 7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남민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에서 활동하다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며 비난했다. (중략) 이에대한 개인적인 입장표명은 없다. 하지만 보수 측에서 제기하는 '선정위원들의 성향'에 대해서 논란이 있는 것에 대해 '보수언론들이 제기해온 색깔론에 불과하다'는 반론 지적도 있다. 편찬위원회에는 임헌영을 비롯한 민족문제연구소만이 단독적으로 활동한 게 아닌 역사문제연구소,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국사편찬위원회 등 각 분야에 학술적으로 권위 높은 역사학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 100% 신뢰하실 수 있겠어요?
프레이저 보고서의 정식 명칭은 『한미관계보고서』이다.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를 위원장 도널드 M. 프레이저(Donald M. Fraser)의 이름을 따서 프레이저 위원회로 불렀으며,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프레이저 보고서로 통칭하여 부른 것이다. 프레이저보고서는 ‘코리아게이트’ 이후 한미관계를 파헤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경제의 “괄목할 만한 업적은 결단력 있는 지도력과 단련되고 근면한 한국대중, 그리고 자금지원자 및 조언자로서의 미국의 성원에 따른 결과”라고 평가하였으며, 수많은 성공 요인들 중에서 교육받은 근면하고 훈련된 한국 사람들 자신을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들고 있다. 이어서 “한국정부는 경제성장에 주안점을 두고 확고한 신념으로 경제를 주도해 왔기 때문에 신뢰를 얻었다”고 기술되었다. 그 다음으로 미국의 역할을 들었는데, “미국은 1970년대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재정지원을 했으며 한국이 그 문제를 극복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한국과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여 미국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도와주는 역할이었지 한국경제의 주체적 행위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서 한국경제가 성장하면서 한국은 점점 자립해갔고 자연적으로 미국의 역할은 감소했으며, 1960년대 말경 미국정부는 한국 경제정책에 대해 관여했으나 그 정책들을 바꿀 수 없었다고 평가했다.또한 프레이저 보고서는 개발도상국가에 대한 미국원조가 성공한 유일한 사례가 한국이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프레이저보고서는 코리아게이트 이후 미국 의회가 한미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사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보고서를 통해 미국은 박정희 정부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가했지만, 한국경제의 발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다큐멘터리 프레이저보고서는 박정희시대 수출지향적 산업화의 드라이브를 걸었던 것이 미국이라고 주장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3669
+ 밑줄 친 부분 유의해서 살펴보시고 아래 두 개의 링크는 다른 관점의 해석입니다. 들어가시면 원문도 볼 수 있습니다. 영어 잘하시면 한번 읽어보시고 저 동영상이 100% 신뢰할 수 있는지 확인 해보세요.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2979991 http://m.todayhumor.co.kr/view.php?table=sisa&no=360939
[15] << 국가와 국가주의, 관치에 대한 오해와 편견 >> [쾌도난마 한국경제 中 발췌]
결국 '정부는 무조건 나쁜 것'이란 인식이 개혁·보수·진보 세력 모두에게 깊숙이 박혀 버린 셈이죠. 그 경우 기업들이 마음껏 이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모든 게 잘 된다'는 식인데, 그거 정말 무식한 소리예요. 그렇게 시장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준다면 정부라는 게 왜 필요합니까? 그냥 무정부로 살아야죠. 관료주의와 관치 금융을 비판한다는 명분하에 행정부의 경제적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되죠.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정도(正道)'이고 '개혁의 길'로 인식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191쪽, 장하준) 한국이라는 나라는 아직 국가가 할 일이 많아요. 성장 산업을 육성해야 하고, 그에 걸맞게 노동 시장도 조정해야 합니다. 또 복지 제도를 제대로 실시해서 사회를 안정시켜야 하고, 노동자에 대한 기술 교육 시스템을 다듬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하루라도 빨리 전직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합니다.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고 잘 굴러가야 노동력의 질이 높아져 세계 시장의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형성되는데, 그렇게 하려면 국가의 역할을 우습게 여긴다거나 무시한 채 시장만 우상시해서는 안 됩니다. 시장에 맡긴다는 것은 돈 많은 사람들 마음대로 하라는 겁니다.(202쪽, 장하준)
+ 이건 하도 관치 관치 해서 그냥 넣었습니다.
[결론]
결론 : 쿠테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를 살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냉전중인 국제정서에 기대어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과거사를 무시한 채 일본에게 차관을 빌리기도 하였다. 또한 국내의 노동자와 자본가를 규제하고 탄압했으며 제왕적 정치기반을 바탕으로 국가를 한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는 결론적으로 오늘날 숱한 인권문제와 사회 병폐를 자아냈지만 이를 밑받침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지금의 경제대국으로 올라선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출처] 인터넷 - 무단으로 도용했습니다. 너그럽게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영리 목적이 전혀 없는 토론 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중 잘못된 점에 관해 수정 및 비판 적극 환영합니다. 고소, 고발만 하지 말아주세요. 이상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첫댓글 읽고싶은데 모바일로는 엄두가 안나네요. 집에가서 성의껏 쓰신 글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공감 못 하실 부분도 많을 거에요. 잘못된 거 있으면 지적해주세용.
저도 집에가서 꼭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공감 못 하실 부분도 많을 거에요. 잘못된 거 있으면 지적해주세용. 좋은 하루 보내세요.
공과과로 본다면 경제개발과 그에따른 문제점이 상쇄될 수 밖에 없죠 경제는 개발되었으나 그로인해 생겨난 문제가 21세기까지 이어지니까요 사실 공과과로 구분하기 힘든 부분도 있죠 어느쪽에 더 중점을 둘것이냐에 따라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지니까요 결국 개인성향에 의해 해석은 달라지리라 봅니다 그러나 경제만으로 판단 할 수 없기에 결국은 박정희라는 인물의 살아온 역사를 봐야 그사람이 왜 그랬는가를 알 수 있겠죠
본문에도 주구장창 쓰여 있지만, 박정희 싫어하고요. 경제적인 부부만 떼놓고 봤을 때 산업화의 공이 있다는 거죠. 저번 비스게의 전체적인 의견은 경제발전도 허구라는 거였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거에요.
@vs KG 허구라기보단 그 방식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거였다고 봅니다 경제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노동인권탄압은 어느나라나 겪는 과도기 같은 것이죠 그러나 그걸 국가가 주도하고 그것이 영웅화 되었을때 21세기까지 이어져 올때 공과과로 봐도 과가 더 큰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듭니다
@vs KG 개인성향이라고 표현한건 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이지 박정희의 호불호를 말하는건 아니였습니다 오해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과가 더 크다고 생각해요. 그냥 단순히 경제 발전에 박정희는 없어도 원래 성장하는 거였다는 주장에만 반박하고 싶었어요.
@vs KG 박정희가 없었다면 보단 저방식자체가 어느나라나 한번쯤 겪는 시기라고는 생각합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한 인물을 평가할 때 공과 과를 떨어뜨려놓고 보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지만 한 항목마다 평가도 무조건적으로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대개의 박정희 옹호론자들의 문제점은 '경제적 공이 크니까 나머지는 좀 넘어가자'라는 식의 평가를 해서였죠
물론 박정희가 너무나도 월등히 뛰어나서 경제적 성과를 달성한건 아닙니다 분명 독재와 억압, 착취라는 구조속에서 더 수월한(그리고 경제 5개년 계획도) 측면이 있었죠 또 정경유착을 비롯한 각종 부작용을 만들기도 했고요 하지만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은 상황에서 사회구조 자체를 바꿀 정도의
정책을 실시하고 이끌어낸 것은 공이라고 할만합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와 동시기에 수많은 독재자들이 있었지만 그 나라들중에 우리나라만큼의 성과를 낸 나라는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국민만 특별하게 더 노력했고, 특별하게 더 착취당하고, 특별하게 더 억압당했다고만은 볼 수 없죠 세상 모든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지 않은 일에는 양면성이라는게 존재하죠 또 다른 용어로는 기회비용이라는 말이 가능할거고요 한국은 급속도의 경제발전을 얻었지만 그 댓가로 수많은 목숨과 인권, 정경유착이나 정치권의 저급화(오랜 군부독재의 폐해)를 지불했다고 봅니다 역사를 평가하는 우리는 그 공과 과 모두를 고려해서 볼 때
박정희가 독재자였고, 그가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예 공조차 없었냐고 하면 그렇게만은 볼 수 없다고 봐요 물론 그 공의 크기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입장 차이가 있을 수 있죠 하지만 과정 못지 않게 결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과만 중시하자는게 아님)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에요. 보통 지금 너무 치우쳐서 평가하더라고요. 우파들의 박정희 신격화도 문제 있지만, 우리도 박정희를 깔 때 공과 과 구분해서 까야죠. 산업화의 성공은 인정하지만 그 과정에서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하나 반박해야죠. 단순히 박정희는 경제도 못 했어. 그거 알아? 다 장면이 계획 했던 거야? 누가 해도 성공했을 거라는 논리와 몇몇 자료들로 사람들 혼동시키는데 그게 맞는 건인지 올바른 토론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찾아보면서 느낀건 반대쪽 정치인들도 기본적으로 산업화의 공은 인정한다는 겁니다.
@vs KG 꼭 공과 과를 구분해서 까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둘은 항상 같이 묶어봐야죠 잘한게 있다고 박정희가 훌륭한 대통령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그 공과 과를 판별함에 있어서는 개별적인 판단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잘못한 것이 있고 그것과 관계가 되있으니까 전부 다 잘못했다!! 라는 결론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어요 박정희의 경제적 성과를 어느정도 인정하더라도 그는 결코 훌륭한 대통령은 아닙니다 되려 경제적 성과를 인정하면 박정희는 훌륭하다라고 여기는거다라는 식의 결론으로 도출되는게 저쪽의 프레임에 말려드는거죠
@키드가 되고싶어요~~^^;; 이 글 적고 나니 뭔가 부끄럽습니다. 다음에 시간 날 때 박정희 쿠테타로 인한 민주주의 후퇴, 오늘날 발생한 재벌구조 및 정경유착의 폐해에 관해 포스팅 하겠습니당 T T
@vs KG 부끄러워하실 일은 아닌거 같아요 굉장히 민감한 부분인데도 설득력 있는 논지를 제시하셨다고 생각되고 공도 많이 들이신거 같다고 느껴졌네요 다음번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마침 제가 다음주에 이거로 세미나할 일이 있는데 주말에 시간될 때 찬찬히 읽어보고 답글도 달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제 새벽에 봤는데 댓글을 다려니 그새 글을 지우셨더라구요.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 평가 문제는 항상 어려운 문제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던 입장, 외향적 수출공업화전략, 불균형 성장전략, 종속적 산업발전이라고 비판하던 연구자들은 대부분 기존의 입장을 접고 선회했습니다. 최장집, 이병천, 김정주처럼 박정희 정권에 분명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연구자들도 돌아섰습니다.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사실 전 이런 쪽으로 배우는 입장이지 가르치는 쪽이 아니라서요. 글 작성하면서도 지울까 말까? 고심 많이 했거든요. 잘못됐거나 편향된 거 있으면 잡아주세요. 그리고 실은 어제 새벽에 작성한 글인데... 갑자기 모든 사진이 엑박이 떠서T T 지금 다시 수정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차후 다른 글을 통해 이야기하겠지만, 그럼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이 사실상 어렵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조건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성과를 인정하면서 비판 지점을 다르게 가져가고 있는게 대부분의 스탠스죠. 흥미로운 점은 이를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비판적 관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단 겁니다. 저 역시 이러한 입장들을 많이 견지하고자 하구요. vs KG님께서도 많이 공부하셨겠지만, 이러한 입장들과 관련하여 조희연의 <<동원된 근대화>>나 김보현의 <<박정희 정권기 경제개발>>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아마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ㅎㅎ
@vs KG 아닙니다. 저도 뭐 공부하는 입장이라ㅎㅎ 개인적으로 이번 글을 통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이야기하고자 하시는지 알 수 있었고 그 진지하신 태도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부끄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랑 비슷한 견해군요, 저역시 안타깝지만 발전을 위한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 제왕적 독재자의 필요성과 노동자 탄압을 인정 하는편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런과정없이 자본을 축적한 나라는 없다고 볼수 있죠.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을 위해 인권과 노동자를 탄압한 박정희를 찬양하기 보다는 그당시 저임금에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노예처럼 일한 노동자들에게 후 세대로서 감사와 존경을 보내야 한다고 봅니다. 뭐 이런 이야기 하면 여기저기서 까여서 함부로 이야기 하기 좀 뭐하죠, 성공한 독재자로서 박정희는 인정하지만 독재자로서 박정희를 싫어하니...
비슷하네요ㅎㅎ 이 글 적고 나니 뭔가 부끄럽습니다. 다음에 시간 날 때 박정희 쿠테타로 인한 민주주의 후퇴, 오늘날 발생한 재벌구조 및 정경유착의 폐해에 관해 포스팅 하겠습니당 T T
매우 동감가는 글입니다.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잘 보았습니다.
박정희의 평가는 항상 엇갈리지만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나누어 보는 미분적사고는 조금 위험하다고 보는 입장에선 vs.KG님의 스탠스가 우려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경제발전에 있어선 공이 있다.라는 생각은 어찌본다면 '식민사관'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36년간 일제통치를 받아 수많은 병폐가 있었지만 결국은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이루지않았는가라는 입장도 허용되기 때문이죠.
물론 비유의 적합성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독재와 식민지의 큰 차이를 제외하곤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식민사관의 문제점은 공과 과를 나누는데부터 생기는 게 아닌가 합니다.
강제로 합병하여 우리의 주권을 빼앗았지만 대한민국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를 하였지만 경제정책을 통해 대한민국을 먹고 살 게 해주었다.
큰 틀은 똑같다고 봅니다.
미군정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겠죠.
보는 시각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독재라는 것은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노동자의 인권을 탄압하여 장시간 저임금으로 쥐어짜 이룩해낸 경제성장을 감싸려 독재는 가려두고 그 경제성장만 보자라는 시각을 쉽게 저는 동의하기 힘듭니다.
어찌 보면 절대적 상대주의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경제성장을 위해선
사실 글 작성과정에서 지웠다 적었다를 반복했습니다. 그게... 저는 기본적으로 박정희를 싫어합니다. 옹호하는 입장에서 글을 쓰게되는거 같아 상당한 위화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 식민사관까지 확장하서 이야기하면 많이 복잡해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한다고 하면 단순히 좌우 진영논리로 비교하는 것보다 일본의 침략을 받았지만 우리와는 반대로 일본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대만과 싱가폴을 다시 끄집어내서 비교분석하는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근데 제가 원래 가르치는 입장이 아닌 배우는 쪽이라 여기까지 건드리기가 쉽지가 않네요.
그리고 본문에는 지속적으로 박정희 인권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정경유착, 인권유린, 독재 등등 어느 하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경제 이외에는 칭찬한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으로는 분배를 통한 성장이 옮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식 경제발전을 신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경제 발전에는 박정희식 경제정책이 일정부분 일조 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아쉽게도 다른 부를 축적한 나라도 어느정도 독재가 있어왔다는 걸 지적 하는거고요. 그렇다고 경제대국이라고 좋은 나라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박정희가 경제 발전에 공이 있다고 말한걸 확대해석 안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지 박정희가 우리 경제에 파이를 키운건 분명한 사실이니, 그건 인정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점, 해결책, 앞으로에 대한 논의를 하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박정희가 싫다고 그 자체를 부정하고 통계를 외곡하는건 잘못됬다고 생각해서 긴 글 작성하게 됐습니다.
노동자들의 인권은 탄압받아도 경제성장을 한 면이 있으니까 따로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 라는 것 말이죠.
삼성을 보더라도 이건희를 위시한(이전엔 이병철이겠죠) 왕좌를 물려주는 방식같은 것도 그들이 대한민국의 경제를 떠받들고 있으니 그건 그거고 경제적인 면을 보는 건 어떤가하는 시각과 닯아있지 않을까요?
저번 댓글에도 제가 좀 이상하게 삼성을 예로 들었는데ㅎㅎ 삼성이 핫하네요. 삼성을 포함한 우리나라 재벌 기업 어느 하나 정경유착, 탈세에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교보생명 정도는 자유롭겠네요. 물론 잘못된겁니다. 비판받아야죠. 하지만, 우리나라 현 경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삼성을 탈세했다고 뚝 떼어놓을 수는 없잖아요. 삼성이 핸드폰을 많이 팔았는데 적게 팔았다고 조작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이재용 부회장도 지분 정리 들어갈텐데 그때 그 시절처럼 주먹구구식으로 얼럴뚱땅 넘어가진 못할 겁니다. 비록 우리 기대에는 한참 못미치지만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발전해나가는 거죠.
정성껏 쓰신글 잘보고 많이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본문에 꽤 많이 동감합니다. 비슷한 댓글을 예전에 달았다가 논란이 길어진 뒤로는 박정희 관련하는 내용에 의견조차 달지 못했습니다. 제 댓글 하나에 몇개씩 달리는데 너무 힘들더라고요.
박정희에 대한 잣대들을 볼 때마다 느끼지만 다들 너무 이상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경제적으로 이미 성정한 나라들 중 이런 과정이 없었던 나라도 거의 없었고 거기에 대부분 식민지 수탈을 안했던 나라들도 거의 없었거든요.
독재 자체에 대해서는 저도 비판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비슷한 스타트 라인이거나 훨씬 앞에서 출발한 나라 중 독재로 이 정도까지 끌어올린건 박정희가 거의 원탑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도 밑에 댓글 달았다가 좀 속상했었습니다. 그래서 쓸데없이 서론도 길게 작성한 것 같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