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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야호♬ (lil_ili@hanmail.net)
친정 ★ 야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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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법칙>
법칙 47. 숨쉬는 것으로도 축복인 당신.
무거운 침묵이 어색하게 맴도는 가운데 유일하게 들리는 것이라곤 다솔이의 오열뿐이었다. 저러다 탈진으로 쓰러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목 놓아 울던 다솔이는 가끔 호흡이 곤란한지 꺽꺽거리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가철이 다솔이를 끌어안고 몇 번이나 다독였지만 다솔이의 오열은 쉽사리 작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크게 소리내어 오열해야 할 단 한 사람, 산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내뱉지 않고 있었다.
“…산하씨라고 했죠?”
차분하게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던 초하의 엄마, 김강리였다. 오열하고 울부짖을만도 한데 그녀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덤덤했다.
마치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처럼.
“초하가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 유명인이었다니, 초하와 셋이 만났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네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촬영 중에도 다친 적이 있었는데 금방 저희 집으로 달려온 녀석이니까요.”
“산하씨.”
덤덤하게 불러지는 자신의 이름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져 산하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가만히 내려놓은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당장 아무라도 붙잡고 죽을 때까지 팰 것만 같았다.
그게 누구든 상관없었다. 너무 끓어올라 터질 수조차 없는 이 분노를 쏟아낼 수만 있다면.
산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평온한 표정으로, 하지만 큰 슬픔을 삼켜버린 듯한 눈빛으로 초하의 엄마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
“우리 딸을 사랑해줘서.”
아무런 대꾸도 없이 산하는 고개를 돌렸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더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 느껴졌다.
마치 초하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아니 벌써 죽은 것처럼 얘기하는 초하의 엄마를 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환하게 웃으며 날 맞이해야하는 네가 어디로 사라져버린 거지?
어쩌다, 지독한 알콜 냄새를 풍겨대는 하얗기만 한 이곳에서 널 기다려야 하는 걸까.
네게 줄 반지는 내 품에서 이렇게나 빛나고 있는데…….
“민초하씨 보호자분! 민초하씨 보호자분 여기 계십니까?”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피 범벅인 가운을 입은 인턴 의사 한 명이 다급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제일 먼저 산하가 자리에서 튕겨나듯 일어났고, 그 뒤로 초하의 엄마가 일어섰다.
“…찾았나요?”
“예. 지금 바로 수술 들어가야 해서 동의서가 필요합니다.”
“우리 초하는……?”
초하의 엄마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지만 차마 말 끝을 모두 맺지는 못했다. 굳은 표정으로 망설이던 인턴 의사가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조용히 숙였고 지켜보던 다솔이가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아무런 확신도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수술 동의서 작성을 위해 앞서 걷는 인턴 의사의 뒤를 따르던 산하가 느닷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옆에서 걷던 매니저가 의아한 듯 산하를 쳐다보았을 때, 산하는 무언가를 예감한 듯 흔들리는 시선으로 의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산하야?”
“…….”
“산하야, 왜그래? 어디 안 좋아? 쓰러질 것 같아?”
충격을 받아서 이러나 싶은 마음에 매니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산하의 안색을 살폈다.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굳은 얼굴로
앞을 쳐다보던 산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형.”
“응, 그래. 어디 안 좋으면 말해. 이러다 너까지…”
“저 가운에 묻은 피, 누구 피야?”
산하의 말에 매니저가 순간 행동을 멈췄다. 그는 놀란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쳐다보았고, 의사의 하얀 가운을 비웃기라도 하듯
더럽히고 있는 새빨간 핏자국을 보았다. 너무 경황이 없어 살피지 못한 것이었는데 꽤 많은 양의 피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의 피인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산, 산하야 저건… 당연히 사고가 났으니까…… 아, 아예 멀쩡할 수는 없고…”
“말도 안 돼.”
산하는 자신의 팔을 붙잡는 매니저를 뿌리치듯 밀어내고는 다급한 표정으로 뛰기 시작했다. 119 구급대원들이 응급실에서 나옴과
동시에 산하가 응급실로 들어섰다.
환자들의 고통에 찬 신음 소리와 보호자들의 울음 속에서 산하는 정확하게 찾고자하는 사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인턴 의사와 초하의 엄마인 김강리가 서있는 곳 앞에 놓여진 단 한 사람, 새하얀 시트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단 한 사람.
“초하, 초하야! 안 돼, 우리 초하 좀 살려주세요! 초하야 정신차려. 나야, 나 왔어. 나 왔단 말이야! 으흑, 초하야… 제발…….”
가철의 부축을 받으며 뒤늦게 응급실로 들어온 다솔이가 울부짖으며 초하를 향해 달려갔다. 산소호흡기를 찬 채 두 눈을 굳게
감고 있는 초하를 붙잡고 오열하는 다솔이를 보며 산하는 천천히 무너지듯 그 앞에서 무릎 꿇었다.
침대 아래로 툭, 툭 떨어지고 있는 붉다 못해 원망스러운 피를 보며 산하는 그제서야 참고 참았던 오열을 터트렸다.
「탁-」
산하가 손에 꽉 쥐고 있던 작은 반지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동그란 원을 그리며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반지는 힘없이 땅 위로
쓰러졌고, 인기 연예인이자 국민 배우인 독고산하는 무너졌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단지, 사랑하는 마음뿐이었는데…….
*
시간을 조금만 돌리면, 피투성이의 초하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면 세상은 너무나 평온했고 사랑스러웠다. 아무것도 모르던 그들처럼.
“아마 초하가 우리를 보면 놀라서 어버버거릴 거야!”
산을 오르는 것에 지칠 법도 한데 다솔이는 신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곽하주따윈 이미 잊어버린 듯 신경조차 쓰지
않고 초하의 흉내를 내는 다솔이의 모습에 산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 지금 민초하 흉내냐?”
“응! 똑같지 않나규.”
“어. 전혀 안 똑같아. 한 번만 더 하면 저기로 던져버릴거다.”
그러면서 산하의 손 끝이 가리키는 곳은 물이 콸콸콸 흘러내리고 있는 계곡이었다. 결코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 산하의 말에
다솔이가 툴툴거리면서도 초하의 흉내내는 것을 멈췄다.
곽하주라는 존재가 계속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서 거슬리긴 했지만 일단 초하가 절에 있다면 곽하주 쯤이야 보내버리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마미!”
절의 모습이 시야에 확 들어서자 다솔이가 반가운 듯 활짝 웃으며 절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뒤에서 따라걷던 산하와 산하의
매니저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서운 체력이야.’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절 입구 앞에 서자 초하에게 줄 반지와 초하의 어머니, 그러니까 장모님에게 드릴 선물을 쥔 산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길게 호흡을 내쉬며 절 안으로 산하가 한 걸음 내딛을 때였다.
“초하가 없다니? 마미, 그런 거짓말 안통해. 우리 다 알고 왔어. 초하 여기 있잖아. 히히, 마미도 참.”
다솔이가 장난치지 말라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누군가의 어깨를 툭 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마미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초하의 어머니인 듯 했다.
“마미, 초하 데려가려고 내가 직접 내려왔는데 그런 뻥치면 섭섭하지. 봐, 초하의 그이까지 왔는 걸!”
어깨를 쫙 펴고 키득거리며 즐거운 표정으로 다솔이가 산하를 가리켰다. 졸지에 초하의 어머니와 시선을 마주하게 된 산하가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매니저가 작게 속삭이듯 ‘초하씨랑 완전 닮으셨다.’라고 얘기하는 것이 산하의 귓가로 들려, 산하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아니, 그래 와줘서 고마워. 그리고 다솔, 고마운 건 고마운거고 우리 초하 진짜 없어.”
“에? 왜? 어디 갔어? 나물 뜯으러? 그럼 가서 놀래켜 주…”
“곽…하주가 와서 데리고 갔어. 그게 저기 저 총각이 아프대서 병문안 가야한다고…….”
“마미?”
“너한테 전화하겠다고 했는데, 연락 못 받았니?”
그제서야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게 모두의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곽하주의 이름이 거론됨과 동시에 산하의 심장이
빠르고 불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초하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에 산하가 고개를 들고 다솔이의 앞까지
걸어왔다.
“아까 초하가 전화한 게 언제쯤이었지?”
“어? 어 그러고보니까…”
핸드폰을 급하게 꺼낸 다솔이가 몇 번이나 버튼을 잘못 눌렀다. 다급한 마음에 평소라면 저지르지 않을 실수가 터져나오자
다솔이가 짜증스러운 듯 핸드폰 버튼을 꽉 눌렀다.
한참을 버벅거린 후에야 통화목록을 띄운 다솔이가 통화 시각을 산하에게 보여주었다.
굳은 표정으로 액정을 쳐다보던 산하가 이번엔 초하의 어머니를 향해 조심스럽지만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초하가 여기서 출발한 게 이쯤 되나요?”
“응? 아, 응. 아마 그럴 거야.”
곽하주가 데리러 와서 출발한 거고, 그때 전화를 한 것이라면 시간상 한번쯤은 도로에서 봤을 법도 한데 그냥 지나쳐버리다니.
산하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다솔이의 핸드폰을 빼앗아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통화를 할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간다는 듣기싫은 여자의 목소리뿐이었다.
만약 지금 초하가 곽하주와 함께 있다면, 그렇다면……?
“아까 초하 전화 이상하게 끊었지?”
“어? 어, 끊었다기보단 끊켰어.”
“내가 아프다고 했다고?”
“응. 그래서 가는 중이라고… 가는 중이라는 건 서울로 온다는 거였겠지?”
그랬겠지, 라고 나지막이 대답하며 산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연결이 되지 않는 핸드폰을 던지듯 다솔이에게 넘긴 산하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굳어졌다.
의문을 품을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초하와 곽하주가 같이 있다는 게 확실했다.
갑자기 끊켜버린 전화, 그리고 더이상 연결되지 않는 전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여러 상황들이 떠오르자 산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그 멍청이는 왜 쫄래쫄래 곽하주를 따라가서…”
「Rrr- Rrr- Rrr-」
그때였다.
산하의 말을 싹둑 잘라먹고 울려퍼지는 벨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다솔이에게로 향했다. 다솔이도 깜짝 놀란 듯 자신의 핸드폰을
쳐다보았고, 곧 더 놀란 표정으로 산하를 쳐다보았다.
“곽하주야.”
“줘 봐.”
빼앗는 것과 다름없이 핸드폰을 낚아챈 산하가 액정을 쳐다보았다. 틀림없는 곽하주의 번호였다.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은 산하가
기다렸다는 듯 거칠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곽하주, 너 지금 초하 데리고 뭐…”
「혹시 핸드폰 주인의 보호자되십니까?」
“뭐?”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산하가 날카롭게 반문했다. 뭐? 하고 내뱉는 산하의 목소리가 심상찮다는 걸 느낀 듯 다솔이가 산하의 팔을
꽉 붙잡았다.
마주치는 시선으로도 통화 상대가 초하는 물론이고 곽하주 또한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누구야?”
“몰라. 기다려봐.”
다솔이를 향해 짧게 대답한 산하가 핸드폰을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야, 너 누구야. 어떤 새끼야. 지금 민초하랑 같이 있냐? 곽하주 어디있어. 바꿔.”
「지금 사고 현장에서 환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나와서 연락 드린겁니다. 핸드폰 주인 보호자 되십니까?」
“뭐? 아까부터 대체 뭐라고…”
「차량 전복 사고가 났고, 신원을 알 수 있는 물품 중 유일하게 찾은 것이 핸드폰입니다. 통화 목록 순으로 전화드리는 겁니다.」
“거…짓말……. 거짓말 하지 마. 바꿔, 민초하 바꾸라고!”
「핸드폰 소지자가 민초하씨입니까?」
“헛소리 말고 민초하 바꿔. 당장 바꾸라고!”
산하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뒤에 서있던 매니저가 아차 싶었는지 얼른 산하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산하가 당장이라도 팰 듯
매니저를 노려보았으나 매니저는 단호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손에 쥔 채 넘겨주지 않았다.
산하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다솔이가 초하의 엄마 손을 꽉 잡으며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래요?”
“잠깐만.”
매니저가 통화를 하기 위함인지 차분한 표정으로 다솔이에게 기다리라 말하고는 핸드폰에 귀를 기울였다. 소란스러운 소음들과
어우러져 들려오는 목소리에 매니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이내 ‘알겠습니다. 곧 가겠습니다.’하는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뭐래요? 누군데 그래요? 어딜 가요?”
“…병원.”
“네? 병원에 왜요? 초하가 곽하주 또 때렸대요? 그래서 병원으로 오래요? 나참, 합의금으로도 또 왕창…”
“사고가 났대.”
“네?”
다솔이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으로 매니저를 쳐다보았다. 이미 상황을 짐작한 듯 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물끄러미 매니저와 산하를 쳐다보던 초하의 엄마가 다솔이와 붙잡았던 손을 풀었다.
“어느 병원이라고 하던가요.”
“아, 대학병원이요. 원주에 있는…”
“여기서 제일 큰 병원이네요. 큰 사고인가요?”
“예. 근데 그게…….”
매니저가 말 끝을 흐리며 다솔이와 산하의 눈치를 살피듯 망설였다. 머뭇거리며 쉽사리 얘기하지 못하는 그의 태도에 사고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아차린 듯 모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아까 오다가 길이 막히는 구간이 있었어요. 차 한 대가 추락해서… 사람을…… 아직 못 찾은 사고 였는데…”
“마, 말도 안 돼.”
초하의 엄마에게 설명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연 매니저가 내뱉는 말에 다솔이가 작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다시 전화를 걸기 위해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전화는 연결 되지 않았다.
“안 될 거야. 곽하주 보호자들에게도 연락해야해서 통화중일 테니까.”
“거짓말…”
“우리보고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와 달래요. 사람을 찾으면 바로 수술에 들어가야해서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고…….”
매니저의 말에 다솔이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애꿎은 핸드폰을 바닥에 던지며 어깨를 부들부들 떠는 다솔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초하의 엄마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숙소가 있는 곳으로 뒤돌아섰다.
‘외투를 좀 챙겨야겠네요.’하고 덤덤하게 말하던 초하의 엄마가 순간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뒤돌아서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저…”
“예, 말씀하세요.”
“설마 해서 묻는건데 ‘사람을 찾으면’이라는 건, 아직 우리 초하를 못 찾았다는 얘기인가요?”
“아…….”
더이상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리는 매니저의 태도에서, 곱게 들고왔던 장미꽃 한다발을 떨어트리는 산하의 태도에서
대답은 이미 나왔다.
‘그렇군요. 알겠어요.’하고 차분히 대답한 초하의 엄마가 걸음을 옮기다말고 비틀거렸다. 매니저가 놀란 듯 얼른 다가가 부축했고,
초하의 엄마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결국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서늘한 바람이 그들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가운데, 폭포 소리에 묻혀 목탁 소리와 다솔이의 오열이 귓가를 어지럽혔다.
‘어머 저 처자는 왜 운대요?’, ‘저거 독고산하 아닌가?’하고 신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산하는 그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곽하주씨 보호자 되십니까?”
단속 카메라까지 무시하며 무지막지하게 밟아 도착한 병원에서 들은 말은 곽하주의 보호자냐는 물음이었다. 너무 어이가 없어
산하가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차량엔 둘이 탑승했을 겁니다, 곽하주 말고 다른 탑승자 보호자인데요.’하고 매니저가 침착하게 말하자 간호사는 난처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아직 다른 탑승자는 발견되지 않았나보네요. 응급실에 도착한 건 곽하주씨 한 분이세요.”
빌어먹을.
산하가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미 절에부터 오열하며 꺽꺽거리던 다솔이는 지치지도 않는 지 두 발만
동동구르며 울고 있었다. ‘오빠 초하가 없어! 없대!’하고 누군가와 통화하며 울부짖는 다솔이의 모습에 한숨을 내쉰 산하가 쓱
응급실을 쳐다보았다.
“곽하주는 도착한 거 확실합니까?”
“예? 예, 30분 전에 도착하셨어요.”
초하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두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아있는 초하의 엄마를 힐끔
쳐다보던 산하가 걸음을 돌려 응급실 쪽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걸 느낀 매니저가 다급하게 손을 뻗어 산하의 팔을 붙잡았다.
“왜? 곽하주는 봐서 뭐할건데? 그냥 둬.”
“내가 왜? 죽겠다고 뛰어들었을 테니 죽여줘야지. 그래야 공평하잖아.”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브레이크를 밟은 흔적이 없었으니까.’라고 경찰이 말하는 걸 산하가 듣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하는 매니저였다.
하지만 일단은 산하를 말리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산하의 팔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놔.”
소리 치는 것보다 더 무섭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산하가 말했다. 너무나 차분하고 침착하게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 매니저는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산하를 놓아주면 당장 살인자가 될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찰나,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가 들렸다.
“하주는요? 우리 하주는 어디 있죠?”
우아하게 내뱉으려 애쓰지만 날카로움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에 산하가 고개를 돌렸다. 간호사를 붙잡고 얘길 들으며 응급실을
쳐다보고 있는 여자, 곽하주의 엄마였다. 초하의 엄마 또한 곽하주의 엄마를 발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하군? 그리고 그쪽은…….”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돌린 하주의 엄마가 의아한 듯 산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그 옆에 서있는 초하의 엄마를 발견하고는
말 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초하의 퇴학 이후 5년만에 만나는 불쾌한 인연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그쪽도 여기에 일이 있나요? 산하군까지 온 걸 보면, 그 난잡한 애가 또…”
「짜악!」
다솔이가 촬영장에서 보여준 것은 우스울 정도의 소리였다. 날카롭게 병원을 울리는 마찰음에 모두가 놀란 듯 시선을 고정시켰고
꺽꺽거리며 울던 다솔이까지 울음을 멈췄다.
“나, 날 때렸어? 감히 날? 하? 왜, 그때 먹은 콩밥으로는 부족한가보지? 누가 경찰 좀…”
“만약…”
초하의 엄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척이나 단조롭고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곽하주의 엄마는 이유 모를 위압감에 입을 다물었다.
“내 딸이 죽으면.”
“…뭐, 뭐야?”
“그땐 이정도로 끝나지 않아.”
더이상의 말은 없었다. 초하의 엄마는 입을 다문 채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황을 지켜보던 간호사가 뛰어와 휴게실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초하의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산하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얘기 좀 해줘. 내가 왜 저 여자한테 맞아야하는 거지?”
한때 사위가 될 지도 모르는 사이었기에 그나마 가장 낫다고 생각한 건지 하주의 엄마가 표독스레 두 눈을 치켜뜨며 산하를 향해
물었다.
산하는 물끄러미 초하의 엄마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하주의 엄마는 숨을 헙- 삼켰다. 평소에 보이던 표정이 아닌 서늘하게 식은 눈매를 마주해야했기 때문이었다.
“사, 산하군?”
“곽하주는 바로 수술에 들어가나요?”
“우리 하주? 으응, 당연하지. 내가 수술 동의서 작성했고 그이도 바로 온다고 했으니까…”
“살인을 저지르려던 사람을 위해 수술하다니, 세상 참 관대하죠?”
“그게 무슨 소리야? 살인을 저지르려던 사람이라니?”
산하는 물끄러미 하주의 엄마를 쳐다보았다. 더이상의 설명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한 듯 하주의 엄마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응급실을 힐끔 쳐다본 산하가 걸음을 옮기기 위해 발을 떼며 하주의 엄마 어깨를 꾹 눌렀다.
“‘살인’이 아니라 ‘살인 미수’에서 그치고 싶으면 초하가 살길 간절히 바라시는 게 좋을 겁니다.”
“…….”
“아니면 아예 곽하주가 죽어버리길 바라시든지.”
그리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주의 엄마를 스쳐지나가며 산하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응급실로 달려가서 죽이지 않은 것으로도
큰 자비를 베푼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큰 복수가 어디있을까.
여러 사람의 울음 소리, 말 소리로 소란스러운 병원임에도 불구하고 하주의 엄마에겐 산하의 뚜벅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이 똑똑히 들렸다. 마치, ‘더 이상의 자비는 없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
초하가 수술에 들어간지 8시간하고도 42분을 넘길 때쯤 다급한 발소리가 병원 복도를 울렸다. 하아하아, 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들어선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곧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산하씨.”
“빨리 오셨네요.”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유진태 감독이었다. 너무 울어 탈진한 다솔이가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수술실 앞에 남아있는 사람은 산하와 초하의 엄마뿐이었다.
초하의 엄마는 유진태 감독이 굳은 표정으로 나타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저희 딸이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더군요. 뒤늦게 감사 인사를 드리네요.”
“아, 아닙니다. 신세는 무슨… 것보다 초하씨는?”
초하의 엄마가 내뱉는 말에는 묘한 뉘앙스가 담겨있었다. 마치 내 딸은 죽을지도 모르니 제가 대신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는
느낌의 말투.
대사를 주고받는 직업을 가진 산하도 느낀 것이었으니 감이 빠른 유진태 감독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유진태 감독은 두 손을 내저으며 얼른 화제를 바꿔 초하에 대해 물었다.
“아직 수술이 덜 끝나서요.”
산하가 나지막이 대답하며 턱 끝으로 수술중인 수술실을 가리켰다. 빨간 불이 들어와있는 수술실은 두껍고 무거운 문으로 굳게
닫혀있어서 심리적인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굳은 표정으로 수술실을 가리키는 산하를 힐끔 쳐다보던 유진태 감독이 산하의 옆에 앉았다.
“언제쯤 끝날거라고 하던가요?”
“아무리 빨리 끝나도 아홉시간은 넘길거라고 했어요. 게다가 먼저 수술 들어간 곽하주도 아직 안끝났으니 초하가 일찍 끝날 리가
없죠.”
“아……. 영화사 사장님은 좀 늦을거라고 했어요.”
“어차피 장례식도 아니고 수술인데 다 부를 필요 없으니 늦는 거 신경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세요.”
딱 잘라 단호하게 대답하는 산하의 태도에 유진태 감독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유독 장례식이 아니라는 것에 힘을 주어
말하는 건 산하가 누구보다 그런 상황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계속 자신만 남겨두고 떠난다는 건 얼마나 잔인한 일일까.
아무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유진태 감독은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나랑 초하씨가 혈액형이 같아서 다행이네. 아이고, 감독님 오셨네요.”
뚜벅거리는 걸음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수술중 공급할 피를 뽑으러 갔던 산하의 매니저였다. 그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유진태 감독이 왔다는 사실에 잠시 놀라더니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고가 났을 때 경황없는 모두를 대신해서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 산하의 매니저였기에 유진태 감독은 멋쩍은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연락 안주셨으면 산하씨 없어서 촬영 지연된다고 난리 피울 뻔 했어요.”
“아닙니다. 해야할 일을 한건데요 뭘.”
수술이 끝나고 축하 자리가 될 지 장례식이 될 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기에 누구도 쉽게 언급하지 않았다. 어두운 공기가
무겁게 짓누를 쯤, 여러개의 수술 진행 상황을 알리던 전광판에서 하주의 이름 옆에 끝났다는 표시가 떴다.
산하네 일행과 마주치기 싫었는지, 두려웠는지 먼 자리에 앉아있던 하주의 가족들이 일어나서 수술실 앞으로 걸어왔다.
“끝났나보군.”
산하가 나지막이 말을 내뱉으며 물끄러미 하주의 가족을 쳐다보았다. 매니저를 통해 모든 상황을 전해들은 유진태 감독도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주시했다.
하주의 가족은 수술실에서 나오는 의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더니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이 잘 됐다는 얘길 전해들은 듯 했다.
“수술이 잘 된 모양이네요.”
“잘 되야죠. 사람 목숨이니까.”
나지막이 말을 내뱉는 산하의 말투는 무척이나 냉정했다. 마치 표면적으로 그렇게 얘기하곤 있지만 속으로는 다른 뜻을 담고
있는 것처럼.
유진태 감독이 고개를 살짝 돌려 산하를 쳐다보았고, 산하는 물끄러미 시선을 하주의 가족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곽하주도 사는데, 초하가 사는 건 당연한거겠죠?”
천천히 말을 내뱉는 산하를 유진태 감독이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연한거에요. 초하씨 무척 좋은 사람이니까.”
우리들에게 무척 소중한 사람이니까.
유진태 감독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말을 마치 마음으로 들은 것처럼 산하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누가 막지 않아도, 등을 밀지 않아도 언제나처럼 일정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은 온전히 남아있는
사람의 몫이라는 걸 산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게 일분 일초가 이토록 초조하고 안타까운 것이었던가.
꽉 감은 산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때쯤 초하의 이름 옆에 수술이 끝났다는 표시가 떴다. 수술실에 들어간지 13시간 만이었다.
“…끝, 났네요.”
유진태 감독의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산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 일어난 산하를 말없이 쳐다보던 초하의 엄마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모으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복잡한 마음을 가진 채 수술실 문을 쳐다보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초하는…….”
의사는 초록색 수술 가운을 풀며 산하를 쳐다보았다. 의사의 가운데 튀긴 새빨간 피를 쳐다보는 산하의 표정이 썩 좋진 않았다.
초하를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얀 가운에 묻어있던 핏자국이 생각나서였다.
유진태 감독도 자리에서 일어나 의사를 쳐다보았고, 의사는 물끄러미 그들을 쭉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수술 자체는 성공입니다.”
그 뒤에 남은 것은 살고자하는 환자의 의지입니다만, 하고 뻔한 말을 내뱉는 의사의 입이 닫히기 무섭게 자리에 앉아있던 초하의
엄마가 정신을 잃었다.
덤덤한 척 견뎌낸 것이 ‘살았다.’라는 말과 함께 안도감에 무너진 탓이었다.
“어머님!”
“괜찮아, 괜찮아요. 잠시 정신을 잃으신 것 뿐이야. 긴장이 풀리셨을거에요.”
유진태 감독이 얼른 초하의 엄마를 부축하여 매니저의 등에 업히게 했다. 산하의 매니저가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다솔이가 쉬고
있는 병실로 안내했고, 남아있는 산하와 유진태 감독은 침묵을 지켰다.
“경과를 두고봐야 알겠지만, 의식이 돌아온다고 해도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장담은 드릴 수 없습니다.”
“일단 숨은 쉬겠죠? 우리 초하, 숨은 쉬죠?”
살아만 준다면, 살아만 있다면.
산하가 절박한 표정으로 의사를 향해 물었다. 의사는 물끄러미 산하를 쳐다보더니 별다른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의사가 산하를 지나쳐가기 무섭게 산하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렸고 유진태 감독이 손을 뻗어 부축했다.
“괜찮아요? 이러다 산하씨까지 쓰러지겠네.”
“안쓰러져요. 절대로.”
민초하가 정신 차리고 날 쳐다볼 때까진, 날 보고 사랑한다 말하며 손 뻗을때까진… 절대 안쓰러집니다, 라고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한 산하가 숨을 길게 내쉬며 수술실을 쳐다보았다.
뒤늦게 수술실에서 나온 간호사가 산하와 유진태 감독에게 민초하의 보호자 되느냐고 묻더니 집중 회복실로 바로 보내질테니
그곳에서 기다리라 말했다.
이별 후에 보내야했던 날들보다 더 지독히 그리웠던 13시간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
“으…….”
온 몸이 신음을 내뱉는다는 게 이럴 때 쓰면 제격이겠구나 싶은 게 눈물이 핑 돌았다. 내가 무사히 살아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겪어야 하는 아픔이 더 고통스러웠다.
갈기갈기 찢긴 몸들이 제각각 ‘나 아파!’ ‘나도!’ ‘너도? 나도!’하고 아우성치는 것만 같았다.
“으으! 아, 아무도 없…어요? 아으…!”
약한 소리를 내려고 내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고통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가 추락할 때 앞 유리창에 머리를 박은 것까지의 기억 이후로는 생각나는 게 없다. 그럼 내가 지금 고통을 느끼며 하얀 천장을
쳐다보고 있다는 건 살았다는 얘기인데…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았겠다 싶을 정도로 몸이 쑤셨다.
게다가 팔 하나 제대로 들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무거웠고, 고개를 돌릴 수 없을 정도로 꽉 끼는 깁스가 목을 압박하고 있었다.
내가 내 몸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과 점점 강도가 강해지는 고통에 눈물이 꾸역꾸역 차오르더니 기어코 넘치고야
말았다.
“…언제 의식을 차릴지도 모른다고 하고…….”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로 들렸다. 고개를 돌려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목은 돌아가지 않았고, 눈물은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사고가 컸으니 수술을 한 것이 당연할 텐데 마취가 풀리면서 찾아오는 통증은 말 그대로 고통스러웠다.
아니 고통이라고 정의할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웠다.
“민초하!”
“으으… 의, 의사…… 아파…….”
턱 주변을 다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맛이 간 건지 말이 어눌하게 흘러나왔다. 내가 의식을 차렸다는 사실로도 충분히 놀랐을 텐데
손 끝을 바들바들 떨며 얘기하자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란 것을 드러낼 새도 없이 의사를 호출해야 했다.
몇 초나 흘렀을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약품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의사가 내 앞에 얼굴을 내밀었다.
“민초하씨 손 끝 움직일 수 있습니까?”
“으으…”
“대답하기 어려우면 그냥 손 끝만 움직여보세요.”
고마워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줘서.
손 끝에 힘을 살짝 주자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의사는 내 반응에 ‘네, 잘하셨습니다. 발가락도 움직여보세요.’라고 얘기했다.
오른쪽, 왼쪽을 차례대로 움직이자 의사는 내 동공을 확인하고는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기계를 체크하는 듯 부지런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간호사에게 어려운 용어를 남발한 뒤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민초하씨 큰 수술을 하셨으니까 아프신 건 당연합니다. 진통제 놓아드릴거지만 많이 놓아드릴 수가 없어요. 참으셔야 합니다.”
알았으니까 일단 진통제부터 좀 놔주고 얘기해.
대답 대신 두 눈을 깜빡거리자 간호사가 링겔로 다가와 진통제로 생각되는 주사를 놓아주었다. 진통제 맞으면 바로 고통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이게 서서히 사라지는 건지 고통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움직이는 것도 불편한 와중에 온 몸이 아프자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결국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꾸역꾸역 넘쳐흘렀다.
아, 제기랄.
“심하게 아파하는데 방법이 딱히 없습니까?”
“예. 의식이 돌아오셨으니 앞으로 검사해야 할 것들이 많고 이후 수술일정이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에 많이 놓아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사는 꽤 바쁜 듯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통증이 정말 참기 힘들면’ 자신을 다시 호출해달라고 했다. 장난하냐? 나 지금 진짜 아파!
미간을 확 찌푸리며 의사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고개도 안돌아가고 안면 근육도 아팠기에 꾹 눌러참았다.
그때였다. 익숙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뺨 위로 흐르는 내 눈물을 쓱 닦아주며 물끄러미 날 쳐다보았다.
그건 몹시 반가운 일이면서 한편으로는 내 상황이 상황인지라 무척 쪽팔리는 일이기도 했다.
“나… 어때?”
진통제 덕인지 천천히 입을 열자 아까보단 덜 고통스러웠다. 내 눈물을 꼼꼼하게 닦아주며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산하는
내 느닷없고 쌩뚱맞은 질문에 어이없다는 듯 허무하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 첫마디가 그거냐?”
“응……. 나… 예뻐?”
“아니, 미워. 엄청나게 못생겼어. 얼굴도 퉁퉁 붓고 여기저기 상처도 나고, 미라도 아닌 게 붕대에 칭칭 감겨서…”
산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보였다. 녀석이 왜 여기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얼마나 놀랐을까 싶은
녀석의 마음뿐이었다.
사랑해서 지켜주겠다고 큰소리 치며 떠난 건 나인데 결국 온갖 걱정을 다 시키고 마는구나.
“그래서… 못났어…?”
“그걸 질문이라고 해? 얼마나 못났는데… 너무너무 미워. 가뜩이나 멍청한 게 더 멍청해보이잖아.”
마음 같아선 나도 손을 들어 녀석의 얼굴을 쓰다듬고 몇 번이나 내 앞에 있는 게 독고산하가 맞는 지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양 손 모두 깁스를 한 상태라 팔을 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팔을 조금만 움직여도 어깨까지 고통이 전해져서 내겐 도저히 무리였다.
“…그래도… 나 사랑하지?”
내 질문에 산하가 하하, 하고 소리내어 웃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원한 건 사랑한다는 직접적인 말이었는데.
아쉬움에 입맛만 살짝 다시며 산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산하도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와 녀석 중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들리는 것은 복잡한 기계들이 내뱉는 삐익- 거리는 소음들 뿐이었다.
“…너… 아프댔는데…….”
딱히 내뱉을 말이 생각나지 않아 (빌어먹을) 곽하주에게 들은 얘기를 꺼냈다.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긴, 독고산하가 아프다는 얘기를 내가 모른 척 쌩까고 외면할 수 있을 리가 없었겠지만.
가볍게 웃으며 녀석을 쳐다보자 산하는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옮겨 내 손 끝을 꽉 잡아주었다.
나 때문에 꽤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아깐 몰랐는데 녀석의 손 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아파, 아팠어.”
날 물끄러미 쳐다보며 산하는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미소와는 어울리지 않게 내뱉는 말은 무척이나 날 아프게 했다.
나 없이 느닷없는 이별에 얼마나 아파했을까, 내 거짓말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했을까.
안쓰러운 마음에 녀석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깁스한 팔이 간지러워져서 우물쭈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나… 팔 간지러워. 긁어줘.”
“하?”
산통 깨서 미안.
내 쌩뚱맞은 부탁에 산하는 어이없다는 듯 날 쳐다보다가 가볍게 웃더니 깁스 끝자락에 살짝 보이는 곳을 간지럽히듯 긁어줬다.
사실 간지러움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지만 (오히려 더 간지러웠다) 무척 진지하게 내 팔에 집중하는 녀석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결이 좋은 녀석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생각에 팔을 움직일 수 없는 지금의 내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결국 난 녀석의 정수리에 대고 천천히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산하야… 있지… 아픈 거…… 지금은 다… 나았어?”
어눌하게 내뱉어진 말이었지만 녀석의 정수리를 향해 말하고 있다는 게 너무 우스워 나도 모르게 킥킥 웃음이 새어나왔다.
웃을 때 가볍게 떨리는 어깨가 아팠지만 참을만 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해야할 말을 내가 하고 있는건지. 남들이 보면 자지러지겠구나.
키득키득 웃으며 시선을 옮겨 하얀 천장을 쳐다보았다. 희미한 시야너머로 산하가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민초하, 앞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 만나러 오지 마.”
“…왜?”
이제 내가 싫어졌어?
시선을 내려 다시 산하를 쳐다보았다. 산하는 꽤 진지하게 굳은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산하가 내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아플 정도로.
얘가 날 더 병자로 만들 생각인가 싶어 물끄러미 녀석을 쳐다보자, 산하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내 손 끝에 입을 맞췄다.
“내가 널 만나러 갈 테니까.”
몸의 고통과는 별개로 눈물이 다시 차오른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사랑하는구나. 사랑은 정말 멋진 감정이야.
뿌옇게 변하는 시야 너머로 녀석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그럴게……. 그럼 너 이제… 안 아파?”
“안 아파.”
‘네가 곁에 있는 한.’하고 나지막이 대답하는 산하의 목소리를 들으며 두 눈을 감았다. 따듯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눈물이
퉁퉁 부은 눈 밖으로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내 손을 세게 붙잡은 산하의 손이 점점 따듯하게, 떨림을 멈춰가는 것을 느끼며 희미하게 웃음지었다.
“민초하, 사랑해.”
“응, 나도…….”
…살길, 잘했어. 넌 내게 숨쉬는 것으로도 축복인 사람이야.
***
설 연휴가 엄청난 추위와 눈을 동반한 채 시작되어버렸네요. 토요일날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엄마랑 마트까지 걸어가다가
당황했어요.-.,- 뭐여 이거...이러면서;
엄마의 충실한 우산기사가 되어드렸지요 으하하하.
춥습니다.
그래도 읽어주고 꼬리말 달아주는 우리 예쁜이들은 따듯하고 즐겁고 유쾌한 설 연휴 보내세요!
꺄!
야호♬ 올림.
첫댓글 초하가 살아서 정말 다행이다.. 에휴.. 곽하주는 왜 살려 주셨나요? -_-^^^
안되 곽하주나쁜애같으니라고 초하살아서다행이에ㅛㅠㅠ
초하 살아서 다행이예요..ㅠㅠ
으갸갸갸!!! 초하가살았어!!!!엄마 ㅠ_ㅠ.
으아!!! 사고날때 정말 뜨끔했었어요 ㄷㄷㄷㄷㄷㄷㄷㄷㄷ휴 다행이다. 곽하주 쌔껍네요ㅋㅋㅋ작가님 새해복많이받으세요!!
아다행이네용! 새해복많이받으세요
다행이다 ㅎㅎ
다행이당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앗 정말 다행이네요. 초하랑 제발 별탈없길.
이제 곽하주가 착하지겠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으으 ㅠㅠㅠㅠ슈발로...ㄴ<ㅋㅋㅋㅋㅋㅋ개뇽..ㅜㅜㅜㅜ곽하주 이런 XXX!!!! 진짜 밉지만요. 정말 자기한테 잘어울리는 사람만났으면 좀..ㅜㅜㅜㅜ사랑좀받고살아라!!!삐뚤게자라지말고 ㅜㅜㅜ흑흑. 제발좀!!!!
으흐 그래도 수술이 성공해서 다행인거같아요! 하주는... 당분간 살려뒀다가..으흐흐흐...
수술잘되서다행이구나ㅜㅜ근데곽하주끝까지재수없게나가는구나
역시 작가님은 쫌많이 짱이세여ㅠㅠ 역시 우리 초하를 살리셨군여 아아아그래 초하야 넌독하다는거 알고있었어ㅠㅠ 엉엉 ㅠㅠ망할 곽하주 넌 죽여버릴거야ㅠㅠ 우리 초하랑 산하랑 다시재회하게되니까 왜제가다기쁜지ㅠㅠ 아악 이제곧완결이라는게 와닿네여ㅠㅠ 끝나지 않기를 바랬건만ㅠㅠ 아악 담편너무궁금해여!!기대할게여!!
예!! 역시 초하짱!! 이참에 하주를 그냥 콱!<;;
와와!! 초하의 저 살겠다는 의지가 큰 덕을 본거같아요 ㅠㅠ 역시 초하는 강해!!! 곽하주 고년은 콩밥좀 먹어봐야대 - - 나쁜!!! 아휴우... 욕만 나오네 이제 서로 열심히 사랑하는일만 남았구나!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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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앍....ㅠㅠㅠㅠㅠ진심중간쯤엉엉울며읽다 다른일때문에 잠시 막신나게떠들다와서 ㅠㅠ감정몰입이안될줄알아슨데 읽다보니다시울고잇네요 ..ㄱ-
초하가 죽을리없죠,, 헤헷 초하가 살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 둘이 행복해질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