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장씨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
장말손(張末孫) 1431년(세종 13)~1486년(성종 17). 자 경윤 (景胤). 호 송설헌(松雪軒). 시호 안양(安襄). 홍산 현감(鴻山縣監) 증 병조 판서(贈兵曹判 書) 옥산군(玉山君) 안량(安良)의 아들. 고려( 高麗)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계(桂) 의 후손. 그는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입격 하고 아울러 문과에도 급제하였다. 그는 처 음 인동현(仁同縣) 발영전리(拔英田里)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다 관직 생활을 하던 32세 때에 한양의 창동(倉洞)으로 이거하였고, 47 세 때에 예천의 화장(花庄)에 살 곳을 정한 후에, 52세가 되어 사직하고 완전히 낙남(落 南)하였다. 이때 집의 서쪽에 송설헌을 지었 다. 그는 이미 4, 5세 때부터 그 안모(顔貌)가 풍 수(豐秀)하고 풍채(風采)가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위엄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6세 때부 터 독서를 시작하였고, 11세 때에는 백형(伯 兄)인 장선손(張善孫), 중형(仲兄)인 장경손( 張敬孫)과 더불어 서숙에서 공부하였다. 그 는 ??????소학(小學)??????과 ??????효경(孝經)?????? 등을 연이어 암송할 때에 조금의 차오(差誤)도 없 었다고 한다. 이에 부친이 이르기를 “훗날 문 호(門戶)의 희망은 오로지 이 아이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15세 때에는 군학(郡學)에서 공부하였는데, 특히 ??????중용(中庸)?????? 과 ??????대학(大學)??????을 정밀히 연구하였다. 그는 이들 책을 공부하 면서 단순히 암송(暗誦)에 치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진(先進)들이 그를 큰 그릇으로 인 정하였다고 한다. 17세 때인 1447년(세종 2 9)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때 그는 아직 장 가를 가지 않은 나이였으나, 거상(居喪)에 있 어 다 자란 성인과 같은 몸가짐을 갖추고 슬 픔을 지극하게 하니, 효자로서 이름이 나게 되었다. 1452년(문종 2)에는 향시(鄕試)에 입격하였고, 이듬해인 1453년(단종 1)에 생 원과 진사시에 모두 입격하였다. 김종직(金 宗直)은 그와 진사시 입격 동년이다. 그는 마 침내 1459년(세조 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김종직과 홍귀달은 그와는 동년(同年)의 관 계로서 서로 두터운 교분을 맺으며 많은 시 를 수창(酬唱)하였다. 특히 김종직은 그가 문 장뿐만 아니라 성리(性理)를 논변하는 데에 도 뛰어남을 보고, 그를 경중(敬重)하였다고 한다. 문과에 급제한 그는 1463년(세조 9)에 승문 원 박사(承文院博士)에 임명되었고, 곧 한성 부 참군(漢城府參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 察),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1465년(세조 11)에는 함길도 병마도사(咸吉 道兵馬都事)에 특별히 임명되었는데, 이는 재신(宰臣)들이 그가 문무를 겸비하였다고 세조에게 추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해 초에 야인(野人) 어랑가(於郞可)와 마상가(麻尙可 ) 등이 인축(人畜)을 죽이고 사로잡기 위해서 군사를 냈다가 조선군에 격퇴를 당하였는데, 이때 그는 도절제사(都節制使) 강순(康純)의 명을 받고 나아가 적을 다시 사로잡기 위해 형세를 살폈다. 이해 8월에는 북평사(北評事 )로 임명되어, 절도사(節度使) 허종(許琮)의 막부(幕府)로 부임하였다. 9월에는 변경의 각 요해처(要害處)를 돌며 민정을 살피고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이때 김종직(金宗直)은 그에게 시를 지어 주기를,
황금 갑옷, 담비 갖옷 입은 나그네의 정이 金甲貂裘遊子情 쓸쓸히 낙엽 떨어지는 변방 성에 울리누나. 蕭蕭落木響邊城 시서(詩書)에 종사한 유장(儒將)이니 詩書從事詩書將 요기가 변방에서 일소될 것을 기쁘게 보리라 . 喜見妖氛塞外淸
라고 하였다. 그는 1466년(세조 12) 가을에 회령(會寧)에 이르렀다. 이때 야인(野人) 아 지발(阿只發)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싸 움을 걸었으나, 그는 성벽을 굳게 지키고 나 오지 않으면서 격문(檄文)과 담소(談笑)로써 그들을 타이르니, 야인의 무리들이 곧 물러 났다고 한다. 또한 그는 홍원(洪原)에 이르러 해적(海賊)을 물리치고, 곧 몇몇의 서생(書生 )들과 함께 배를 띄우고 연음(宴飮)하였다. 이해 11월에 조정으로 복귀하니, 세조는 그 에게 패도(佩刀)?옥적(玉笛)?은배(銀杯)를 친히 내렸다. 그는 이듬해 2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임명되고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직 하게 되었으며, 5월에는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의 막부에 들어가서 이시애(李施 愛)의 난을 진압하게 되었다. 길주(吉州) 사 람으로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지냈던 이시 애는 조정에 배반할 마음을 품고 그 일당으 로 하여금 “하삼도(下三道)의 군사는 바다와 육지를 통하여 동시에 진격하고, 충청도 군 함은 경성(鏡城) 후라도(厚羅島)에 닿았다. 조정에서 평안도?황해도의 군사를 보내어 장차 본도(本道) 사람들을 모두 죽이려한다.” 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게 하였다. 이에 관찰 사(觀察使) 오응(吳凝)도 이를 믿고 각 고을 에 공문을 띄워 백성들로 하여금 산에 오르 게 하니, 민심이 크게 소란해졌다. 이윽고 이시애는 “본도의 절도사(節度使) 강 효문(康孝文)이 제진(諸鎭)의 장교들과 반역 을 도모한다.”라는 유언을 퍼뜨리고는,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공모하여 강효문 및 길주 목사 설정신(薛丁新) 등을 죽이고 본격적으 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는 한편, 사람을 시 켜서 “강효문 등이 서울의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과 결탁하여 본도의 군대 를 이끌고 서울로 가서 모반하려 하기에 본 도의 민심이 흉흉하니, 본도의 사람으로 수 령을 삼아 민심을 진정시키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글을 조정에 올리도록 함으로써, 세 조와 조정 중신(重臣)을 이간하였다. 이에 세 조는 신숙주?한명회 및 그들의 자서(子壻)를 궐내에 일시 구금하여 조사하다가, 그들의 내응(內應) 혐의가 벗겨지자, 마침내 문무(文 武)의 장사(壯士) 28인을 선발하여 이를 토 벌하게 하였다. 반란이 종식된 후, 강순의 막부에서 활약하 며 토벌에 참여하였던 그는 그 공로로 김국 광(金國光)?허유례(許惟禮)?손소(孫昭) 등과 더불어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 臣)에 책봉되었다. 아울러 조봉대부(朝奉大 夫)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으로 승진되었 다. 이후 그는 공신의 자격으로 회맹(會盟)에 참여하고, 선정전(宣政殿) 등에서 여러 차례 시연(侍宴)하기도 하였다. 세조는 그에게 내 린 공신 교서에서 “생각건대 너는 성품과 자 질이 순각(醇慤)하고 학식이 달통하였다. 젊 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자못 명성이 있 었다. 충의의 도리는 실로 마음에 지닌 바였 다.[惟爾性資醇慤, 學識疏通. 早捷科第, 頗有 名稱. 忠義之道, 實所佩服]”라고 하였다. 1468년(세조 14)에 그는 우의정(右議政) 강 순(康純)의 추천을 받아 함길도 경차관(咸吉 道敬差官)에 잠시 임명되었으나, 사복시 판 관(司僕寺判官) 이평(李評)이 그를 대신하여 함길도로 나아갔다. 1470년(성종 1)에는 장 악원 부정(掌樂院副正)에 제수되었으며, 이 해 2월에는 감조관(監造官)으로서 예종(睿宗 )의 산릉(山陵)에 나아가 역사를 감독하였다. 1471년(성종 2) 여름에는 장악원 정(掌樂院 正)으로 승진하고, 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부사직(行副司直)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첨 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공조 참의(工曹 參議),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고, 가 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그는 1481 년(성종 12)에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나아 갔으나, 이듬해 봄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물 러나서 송설헌(松雪軒)을 지었다. 그는 이해 가을에 연복군(延福君)으로 봉해졌다. 1486 년(성종 17)에 마침내 생을 마쳤는데, 조정에 서는 철조(輟朝)?조제(弔祭)?예장(禮葬)을 관례대로 시행하였다. 그에 관계된 전후 문적(文籍)이 병화를 겪은 나머지 대개 산일되었으나, 공신책봉 관계문 건 및 화상(畵像) 등의 유물은 문화재로 지정 되어 장수면 화기리 종택에 건립된 유물각( 遺物閣)에 보전되어 있으며, 조선초기 정치 사 및 고문서 연구 등에 중요 자료로 활용되 고 있다. 성종(成宗)이 그에게 내린 사제문( 賜祭文) 가운데에 이르기를,
타고난 성품은 순수하고 성실하며 性質純 慤 학식은 통달하였다네. 學識疏通 충의의 도리는 忠義之道 실로 패복(佩服)한 바였네. 實所佩服
라고 하였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이 ? 장안양공화상찬(張安襄公畫像贊)?을 짓고,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가 묘갈명을 찬하 였다. 이원윤(李源胤)이 신도비명을 찬하였 다. 후손 장준문(張駿文) 등이 연보(年譜)를 포함한 그에 관한 여러 사적(史蹟)을 정리하 여 ??????송설헌선생실기(松雪軒先 生實紀)??????를 간행하였다. 송계서 원(松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출처] 인동장씨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