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부는 없어지지
않는다
근자
우리사회의 첨예한 화두중 하나가
심화되고있는 ‘빈부격차의 문제’ 다.
인간이 모여사는 사회공동체에는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빈부가
있어왔으며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빈부(貧富)는
가난함과 부유함이란 의미의 단어다.
貧은 구차할 빈이다.
구차 하다는 것은
살림이 가난해서 어렵다는 뜻이며,
富는
부자부 이며
부자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다.
격차(隔差)는
비교대상이나 사물간의 수준차이를
뜻한다.
따라서 빈부격차는
가진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를 이르는
말이다.
그 차이가
심화(深化) 되고 있다는 것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쉽게말해
부자와 가난한자 사이의 골이
점점 깊어져서
건널수 없는 것이 되고있다는 뜻이다.
계층이동이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니
문제가 안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같은 인간들이 모여사는 사회공동체 안에
빈부가 함께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빈부는
언제 어디서나 ‘경쟁’ 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경쟁은 ‘우,열’ 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낸다.
우리의 먼 조상인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는 채집과 수렵으로
살았다.
이미 그때부터
어떤 인간은 더 많은 것을 채집했고,
다른 인간은 그렇지 못했다.
수렵도 마찬가지 였다.
그 경쟁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있으며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더 세련되고 예민해 지고
있다.
2014년 3월기준,
빌 게이츠의 재산은 760억 달러로 세계
1위다.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81조 4000억원
정도다.
이건희가
111억달러로 102위인 것을 감안하면
빌 게이츠가
얼마나 부자인지를 가늠할수 있다.
빌 게이츠는
컴퓨터라는 첨단기기의 운영시스템인
‘윈도우’를 발명,
상업적으로 성공한 탁월하게 우수한
인간이다.
창의적인 두뇌의 소유자인 것이다.
우, 열을 전제로
또다른 우수한 인간을 살펴보자.
‘바로셀로나’ 에 소속된 축구선수 리오넬 메시는
2013년 기준 총계 4100만 유로를
벌었다.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611억원이다.
그는
같은 축구선수들이 따라갈수 없는
우수한 기량으로 공을 잘 차서
이런 천문학적인 돈을 번
것이다.
빌 게이츠도,
리오넬 메시도 같은 분야의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크게 이겼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다.
찰스 다윈의 명저 ‘종의 기원’ 도
결국은 같은 얘기다.
똑같은 자연조건에서
우수한 종은 살아남았고 열등한 종은
소멸했다.
우,열은
모든 생물체들 에게는 운명적인
조건이다.
인간사회가 발전을 거듭한것도
경쟁을 통해
우수한 인간들이 더앞선 기량으로
기여해 왔기
때문이다.
그 총합이
문명이며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어떤면에서
경쟁은 자연의 섭리라고 말할수도
있다.
동물들은 ‘약육강식’ 으로
강한쪽이 약한쪽을 잡아먹고 살지만,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빈부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를
이미 오래전에 하고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칼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다.
그는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무산계급 노동자-푸롤레타리아가 혁명을 일으킬
것이며
자본주의는 소멸할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1917년의 볼세비키혁명은
74년간의 실험을 끝내고 완전히
실패했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가져간다’ 는
구호는
그 비현실성과 비인간성 때문에
당초부터 성립될수 없는 착각이었다.
덜 일하고
많이 가져가는게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만큼 분배받는 것’ 이
자본주의다.
많이 가져가기 위해
그만큼 많이 일할 수밖에 없다.
능력의 총량보다
필요의 총량이 커지면서
망한게
사회주의이며 공산주의 이다.
결국
빈부의 문제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는
해결할수 없다는 것이 입증됐다.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 안에서도
‘노멘클라투라’ 라는 새계급-특권계급이
생겨나서
엄청난 부와 사치를 누리지 않았는가.
그 빈부격차는
자본주의보다 더 심했다.
지금의 북한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는
‘가난’ 에 대해
아주 큰 편견이 존재하고 있다.
‘가난, 곧 선’ 이라는
잘못된 도식이 그것이다.
가난한자,
약자는 선하고 부자는 악하다는
이 단순하고 위험한 이분법이 반재벌
분위기까지 확산시킨게 사실이다.
선과 악을 기준할 때,
그것은
가난한자들 안에도 있으며
부자들 안에도 존재하는 보편적인 개념이다.
가난하니까 선한것도,
부자니까 악한것도 아니다.
가난을 선으로,
부자를 악으로 보는 시선안에는
세련되지못한,
미숙한 사회주의적 진보개념이 묻어있다.
사회주의는
이미 실패했고 용도폐기된 이데올로기다.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는
전혀 새로운 시각과 생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빈부는
결코 없어지지 않으며 없앨수도 없다.
이점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출발해야
차선책 이라도 끌어낼수 있다.
가난한자들도, 부자들도
결국은
하나의 사회공동체 안에서 같이 살아가고 있는
서로
다른 이웃인 것이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난’ 에
대해
공정하고 올바른 생각을 가지는 일이다.
가난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최선을 다 했지만 실패,
가난해진 사람들이 그 하나이며,
천성이 게으르고 무능해서
가난해진 사람들이 다른 하나다.
여기에는
가난의 대 물림현상도 있다.
전자는
어떤의미에선 ‘소외된 사람들’ 이고,
후자는
복지를 통해
지켜내야 하는 대상이다.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빵과함께 재기할수 있는 프로그램을 적용,
다시
자기일을 해나갈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선진국들이
이미 이 분야에서
‘재활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복지로 지켜야 할 대상은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도록 돕는 것이다.
특히
사람의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난지금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수 있는 사람들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다.
똑같이
복지의 개념과 제도도 크게 바뀌어야 한다.
예산과 함께
인원도 동시에 늘어나야
이 문제를 감당할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비참하게 살고
부자는 더없이 행복하게 산다고
단정하고 속단한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 보면
빈부에는 이상한 공통점이 있다.
나는 하는일 때문에
양쪽의 속성을 알게됐다.
그게 비일상성-非日常性 이다.
여기에서
일상성은 보다많은,
평균적인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뜻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산층이 누리는
‘삶의질’을 누리지 못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부자들은 돈이 너무 많아서,
그 돈 때문에 일상성을 상실하고 있다.
돈이 요구하는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이다.
돈이 아주없는것도,
돈이 아주 많은것도
평균을 벗어난 수준이기 때문에
그 일탈성이 일상성을 배척하게
된다.
부자들이
저지르는 대부분의 범죄가
돈 때문임을 볼 때 이건 사실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쉽게 범죄의 유혹에 빠지는것도
맥락은 같은 것이다.
빈부는 똑같이
교도소 담위를 걷고있다고 봐서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은 극단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극단에는
언제나 치러야할 대가가 크기 때문이다.
성철스님이나 법정,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은 언제나 빈부를 초월해
계셨다.
아무도
그들을 가난하거나 부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 범주(範疇)
나 차원(次元)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물질은 없었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정신적 풍요를 따라가지 못한다.
왜 그들은
지금도 뭇사람들의 추앙을 받는가.
그 높은 가르침
때문이다.
그건 빈부나 우열에서 나오는게 아니다.
이 세상은
빈부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그분들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
빈부가
‘화두’ 가 되는 것은 빈부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해결해야할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편리와 속도에 밀려
근본적인 것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넓이와 깊이를 잃어버리면
작은 충격에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약자가 된다.
그래서
빈부이외의 문제도 알아야 된다.
인생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빈부의 문제에서 자유할수 있을까.
참으로 오래된 질문이며
긴 세월 해답을 찾고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의 대답은
‘주관적’ 일때만 의미를
가진다.
‘앱’은
절대 대답할수 없는 ‘인생’ 의 문제이기도
하다.
수분(守分) 하는 자세가 그것이다.
제 분수나 본분을 지킨다는 뜻이다.
‘극한직업’ 이라는 TV 프로가 있다.
모두가 힘든 노동이며
어떤 한계까지 가는 직업들이다.
10시간동안
밥도 못먹고 쉬지도 못하면서
일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직업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실로 놀라운점을 발견하게된다.
일할수 있으니 감사하고,
자기의 노력으로 가족이 편히 살 수
있고,
아이들을
공부시킬수 있으니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남과 자기를 비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빈부의 문제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다.
스스로 만족하고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 같지만 대단한 사람들이다.
빈부문제에 대해 예민해 지는 것은,
특히
가난은 곧
선이라고 편견을 가지는 것은,
자기자신이
가진게 없는 백수이거나,
남과 자기를 비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물질과는 또 다른 자기의 세계가 없기
때문이다.
‘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 는 옛 말이있다.
가난은 스스로 벗어나야지
남의 도움을 받을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빈부는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빈부격차는 영원한 숙제다.
우리모두는
부자가 될 확률보다는
가난한자가 될 확률이 더큰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만큼
스스로의 준비에 충실해야한다.
그래서
결정적인 키워드는 ‘가치관’ 이다.
빈부가 아닌
다른것에의 가치관이 있어야한다.
자기의
‘주관적
가치관’ 이 분명한 사람은
어디에 있든 풍요롭게 살 수 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막은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랍인들은
그곳을 ‘사하라’ 라고 부른다.
아무것도 없는곳 이란 뜻이다.
그러나
사막은 보이지않는 것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이 거기에서
나왔다.
그래서
사바의 빈부는 생각하기 나름이다.
정당한 소유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지만
지나친 소유는 소유자를 노예로 만든다.-
니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