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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마태오 13,1-9
사이비와 이단, 그리고 정통은 이렇게 구분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잘 알 듯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열매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길과 돌밭과 가시밭과 같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잉태하시고 광야에 나아가 40일 동안 세속-육신-마귀의 욕망과 싸우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받을 때 받은 성령께서 당신 안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길과 같아서 말씀이 떨어져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겨 십일조를 하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습니다.
육신은 그러한 강론을 들을 때 잠깐 할 생각을 하지만, 막상 내려고 하면 아까워서 내지 못합니다.
세속은 가시밭처럼 돈에 대한 걱정으로 몇 번 내고 있던 십일조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오늘은 사이비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이단과 무엇이 다른지, 또 정통 종교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사이비는 우선 종교가 아닙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이를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구원’에 있습니다. 구원은 무엇으로 결정될까요?
‘사랑의 수준’으로 결정됩니다.
이것이 독사가 인간과 함께 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수준은 어떻게 증가할까요? ‘믿음’으로 증가합니다.
부모는 아기가 자랄 수 있도록 ‘은총과 진리’를 내어줍니다.
이 은총과 진리로 아이는 부모처럼 할 수 있다고 믿고 ‘자기와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이전의 자신은 ‘생존 욕구’에 지배당하며 모기와 같은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 성장의 과정이 그리스도교에서는 숫자 ‘40’으로 표현됩니다.
믿음이 생기면 평생이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이비는 항상 성적인 부분의 행동(정명석)과 폭력적인 성향(오대양), 그리고 돈에 대한 집착적
행동이 보입니다(다미 선교회).
그런데 그런 사이비의 성향이 밖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말씀의 열매를 맺는 목적보다는 세속-육신-마귀의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어느 정도는 사이비입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는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범죄를 다룹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사실로 밝혀졌고 이는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사제가 되어 동성애를 즐기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와 신학교가
폐쇄된 일도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제가 고해성사를 빌미로 성추행하려고 한다면 그 사제는 사이비입니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모르고 세속-육신-마귀를 이용해 종교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예 말씀의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단은 이와는 조금 다릅니다.
제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한번은 개신교의 가이드가 바티칸에 관해 설명하는 것을 엿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랑스럽게 바티칸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저 보이는 큰 성당이 바티칸 대성당입니다. 면죄부를 팔아서 지은 성당이죠.
교회의 타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장은 마치 수레바퀴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교회가 이방신인 태양신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중앙에 있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인들의 종교에서 쓰던 것인데 남자의 성기를 상징합니다.
이것들을 보면 천주교가 얼마나 이교들과의 혼합주의가 심한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영원히 성체를 영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이비는 삼구를 섬기는 이들이라면, 이단은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죄 용서의 권한을 줄 수 없다고 여겨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거부합니다.
부모도 자녀에게 살과 피를 내어주고 어떤 잘못도 덮어주는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지 못하실 정도로 자비롭지 못하실까요?
그런데 가톨릭 내에서도 제가 인간이 성모님처럼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가 되고 곧 하느님이 된다고
말했을 때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교리서에서도 하느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 하도록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 있는데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는 이단적인 생각을 지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은 사이비와 이단들입니다.
이들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 우리 교회도 끊임없이 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4일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3,1-9
올려다볼 곳은 오직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가혹하다 싶은 부르심을 받고 두려워해 본 적이 있는지요?
너무나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은 주님의 초대 앞에 난감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던 적은요?
때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너무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십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주님께서 그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그는 볼이 발그레한 미소년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렸는지, 그리고 자신감이 없었던지 예레미야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이렇게 응답합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 모릅니다.”(예레 1,6)
그러나 주님께서는 물러나지 않으십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한번 정했으면 그만이다.
일단 한번 가보자.” 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아이입니다.’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1, 7-8)
그렇게 해서 요즘으로 치면 중학생 나이의 소년 예레미야의 고달픈 예언자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힘들었던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린 예언의 내용이었습니다.
“가서 유다 고관대작들과 백성들에게 말하라.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축복하셔서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
같은 듣기 좋은 말을 전하라고 하면 저라도 흔쾌히 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해야 할 예언의 내용은 유다 민족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타락과 우상숭배를 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이 사라진 빈껍데기 같은 이스라엘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마음이 완고한 이 백성, 이 땅은 철저하게 유린되고 멸망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얼굴을 돌려 당신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예레미야 예언자가 유다 고관대작들 앞에 섰습니다.
주님께서 내리신 예언을 장엄하게 선포했습니다.
결과는 ‘뭐 이런 애송이가 와서 헛소리?’냐는 비웃음이었습니다.
백성들 앞에 가서 외치니 반응은 더 심각했습니다.
가족과 친지, 친구들마저도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마치도 무리로부터 쫓겨난 한 마리 들개처럼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광야를 떠돌던 슬픈 예언자였습니다.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은 쓴소리를 자꾸 내뱉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두고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렸습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버리자.”(예레 18,18)
예언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겹고 혹독했던지 나중에는 자신이 태어난 까지 저주합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이렇게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의 생애 내내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 앞에 서있었습니다.
오로지 올려다볼 곳은 하늘밖에 없었습니다. 민족들도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렸지, 친구들도 그를 멀리했지, 사방이 원수요 적군이지, 그가 바라보고 의지할 곳은 오로지 주님 한분 밖에 없었습니다.
하루 그가 온종일 하는 일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었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주님께 자신의 고달픈 처지를 하소연했고, ‘어떻게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실수 있냐?’며 그분께 따졌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울부짖고 기도하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선은 더욱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족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심각하지만,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는 훨씬 크다는 진리를 파악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더욱 힘차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6주간 수요일 강론>
(2024. 7. 24. 수)(마태 13,1-9)
<우리는 모두 원래는 좋은 땅이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1-9)”
1) 뒤의 19절에, ‘씨’는 ‘하늘나라에 관한 말’이라는 설명이 있는데, ‘하늘나라에 관한 말’은 ‘예수님의 복음’, ‘구원에 관한 가르침’ 등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 또는 사도들과 선교사들, 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모든 신앙인들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겉으로만 보면, 씨를 뿌리는 사람이 좋은 땅과 나쁜 땅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로 씨를 뿌리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처음에 농부가 씨를 뿌릴 때에는 좋은 땅이기 때문에 뿌리는 것이고, 많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니까 뿌리는 것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그런 곳에 씨를 뿌리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길, 돌밭, 가시덤불’은 처음에 씨를 뿌릴 때의 땅의 상태가 아니라, 추수 때의 상태를, 즉 심판 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좋은 땅이어서 많은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고 씨를 뿌렸는데, 결과를 보니 열매를 맺기는커녕 뿌려진 씨를 죽이기만 한 나쁜 땅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처음에 씨를 뿌릴 때의 상황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열매를 거둘 때의 상황에 관한 비유, 즉 복음 선포 활동의 결과에 관한 비유입니다.
처음부터 나쁜 땅으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복음을 안 믿고 거부하면서
스스로 나쁜 땅이 되거나, 믿더라도 끝까지 가지 못하거나 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든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선포됩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이 되거나 나쁜 땅이 되는 것은 각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라는 말씀에서, 개들과 돼지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우상숭배와 미신에 빠져서 그렇게 된 사람들입니다.>
2)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라는 말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좋은’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ㄱ).”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사람이고,
또 당신이 보시니 참 좋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원래는 전부 다 ‘좋은 땅’으로 세상에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면서 죄를 짓거나 죄에 오염되면서 좋지 않은 땅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성인 성녀들은 끝까지 충실하게 노력해서 좋은 땅의 상태를 유지하다가 많은 열매를 맺은 분들입니다.
<누구든지 좋은 땅에서 나쁜 땅으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쁜 땅이 되었더라도 회개하면 좋은 땅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좋은 땅으로 서는 사람은 좋은 땅인 것이고, 나쁜 땅으로 서는 사람은 나쁜 땅인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누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정해져 있는 운명 같은 것은 없습니다.>
3) “말씀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맞는데,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라는 ‘씨’가 내 안에서 ‘구원’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면, 신앙인답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고, 회개해야 하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의 씨’가 저절로, 또는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또 자기 안에 미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비유의 맨 끝에 있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라는 말씀은, “알아들었다면,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삶으로 실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