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지박 / 열쇠구멍으로 본 로마
김영이(김…
어쩌다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홀로 일어나 어둠과 고요 속에 앉는다. 멀리서 반짝거리는 불빛을 바라보기도 하고 맞은 편 교회의 빨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차분한 사념 속으로 젖어 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거실 한 쪽에 놓여 있는 함지박으로 마음이 옮아가지도 한다. 이 함지박은 몇 년 전 영주에 갔을 때 구해 온 것이다. 아파트 거실에 함지박을 놓아두는 것이 여러 모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우리 집에 오는 이들이 더러 한 마디씩 하기도 하지만 그냥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실 몇 군데나 터져서 함석을 대고 잔못질로 기워 놓은 것이 어찌 보면 궁상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해 모두들 그러는 모양이다. 이런 함지박은 예전 시골 농가에서 곡식이나 떡 같은 먹거리들을 넣어 두는 마른 그릇으로 널리 쓰였었다. 통나무를 가지고 일일이 파내고 깎아 만든 것이다. 만든 사람의 솜씨와 정성이 담겼고 순박한 정취와 자연의 소박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깔끔하고 세련된 현대의 어떤 그릇보다 정이 간다.
우리 집의 함지박 속엔 흙도 안 씻어낸 깨진 사금파리들이 보물인 양 소복이 담겨 있다. 그까짓 깨진 사금파리며 깨진 함지박을 뭐에 쓰겠다고 모셔 두냐는 소릴 들을 때마다 난 그저 웃고 만다. 사람들은 다 제멋에 겨워 산다고들 하지 않던가. 실은 깨진 사금파리라고 해서 아무거나 막 주워온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값나갈 거라든가 길이 보존해야 될 진기한 것은 더구나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는 다 간직하고 있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도 박물관대학을 다니며 역사며 문화재 등에 관한 공부를 하고 여러 고적지 답사를 다닌 덕분에 그것들을 주워 모으게 된 것이다. 경기도 광주 우산 리, 도마 리, 분원 리 등지의 옛 가마터를 답사 갔을 때 주운 자기 조각들이며 우리 나라 최대 사찰 터인 익산 미륵사지에서 나온 백제 와당 조각이며 암사동 신석기 시대 움집 터 언저리에서 주운 빗살무늬 토기조각 대충 이런 것들이다.
몇 년간 집안 일에만 매달려 있다가 박물관 대학에 나가 학창시절 같은 기분으로 매 시간 훌륭한 교수님들의 강의를 받으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고고학이며, 민속학, 고미술사 등 우리의 것 전반에 걸쳐 그 뿌리를 공부하는 동안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겠으나 자신이 조금씩 옛것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되고 뭔가 조금씩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일고, 없어지거나 잊혀져 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어 답사 갔을 때마다 주워온 옛 조각들을 이 함지박에 담아두곤 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때의 정성과 관심에 비해 먼지가 낀 채 놓여 있지만 때론 이런 것들이 아이들 교육에 도움을 줄 때도 있다. 각 시대별로 나타난 자기의 특징에 대해 얘기해주기도 하고 시대적인 생활 용구의 변천 등을 얘기해주노라면 아이들은
"엄마, 이거 깨진 조각들이지만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귀한 거군요."
하면서 내 기분을 알아준다.
언젠가 남편이 직장 동료 가족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아내 흉을 좀 봐야겠다며
"이 사람은 어디 가서 깨진 사금파리들을 주워 와서 깨진 함지박에 모아 두는 게 취미랍니다. 우리 집엔 성한 건 하나도 없고 주둥이가 깨진 청자 병이며 금이 간 백자 항아리, 시커먼 초 항아리 이런 것뿐입니다. "
하며 내 흉을 봤다. 남편 생각에 그게 정말 나의 큰 흉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얘기할까 싶어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난 제대로 된 좋은 것은 비싸서 못 사고 깨지고 버려진 거나 모으는 겁니다. 그리고 깨지지도 않고 정말 귀한 것은 박물관에 놓여 있어야 빛이 나고 제자릴 차지하는 겁니다."
난 오늘도 아이들과 남편의 편안한 숨소릴 들으며 함지박 속의 것들과도 마음을 주고받는다. 신석기 시대 움집 속에서의 적나라한 생활상이며 온화하고 순박했던 백제인들의 모습, 청자빛 고운 신비를 빚어냈던 고려인의 멋, 겨레의 숨결 같은 유백색 고운 백자를 사랑했던 조선 도공들의 숨결 들을 골고루 느끼며 소박한 함지박을 어루만진다.
(198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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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구멍으로 본 로마
테베레강은 한강보다 훨씬 좁았다. 로마 시는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테베레 강변에 있는 7개의 작은 언덕에서 시작되어 수백만 ㎢에 이르는 광대한 로마제국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지난 1월 로마에 갔을 때 테베레강을 따라 산책할 기회가 있었다. 세계사 시간이었던가 아니면 교육학 시간이었던가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테베(티베르 혹은 테베레) 강가에 버려진 아이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 아이가 바로 로마를 창설했다는 로물로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이며 그 창설신화의 근원지를 내가 거닐어 본다는 게 무척 감격스러웠다. 테베레 강가에 남아 있는 우아한 신전은 멀리서 지붕만 언뜻 볼 땐 우리 나라 정자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코린트식 원주로 장식되었고 건물 형태 자체는 로물로스 시대의 로마인이 살던 나무 집과 비슷하다고 하며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세워진 건축물이라고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든지 "로마에선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라고 하는 따위의 로마와 관련된 격언이나 속담이 많듯 로마에선 볼 것도 많고 연구할 것도 많고 느끼는 것도 많다. 나는 로마 표기를 'Roma’로 한 것을 보고 큰 발견이라도 한 듯 신기해했다. 영어 사전에 'Rome'로 표기된 것과는 달리 이탈리아 로마에선 로마를 'Roma'로 표기하는 것을 보고서서울의 남대문을 서울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남대문이라고 써놓았다고 우기고 서울 구경을 한 사람은 현판에 숭례문이라고 써놓았다고 한다는 얘기가 언뜻 떠올랐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 짐 검사나 입국 심사가 전혀 없다는 것이 처음엔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했으나 마치 국내 여행이라도 하는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여행객들에게 그렇듯 수용적인 것은 오랜 역사와 문화적 유산과 볼거리와 자랑거리가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로마 시내를 거닐다 보면 고대와 현대가 공존한 가운데 수많은 정령들이 떠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천 년 이상의 역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장대한 건조물들 곳곳에서 우러나오는 역사의 힘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나 시스티나 성당 박물관의 아름답고 웅장한 규모의 조각들과 미술품들은 사람의 손으로 어떻게 그렇듯 정교하게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놀랍고도 황홀했다. 천지창조를 비롯해 화려한 천장화나 벽화들은 보는 것만도 목이 아프고 힘든데 어떻게 만들었을까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원형 경기장은 공사 중이라 들어가 보진 못했지만 밖에서 보기만 해도 정치와 권력에 짓밟힌 힘없는 자들의 고통과 피울음 소리가 곳곳에 배어 있는 듯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 걸쳐 만들어져서 남아있는 로마의 유산 중 빼놓을 수 없는 판테온 신전은 돔의 정점에서부터 들어오는 빛이 신비감을 더했다. 그 신전 안에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다는 것도 의아했다.
로마 시내 유적지나 성당들을 순례하면서 원주의 양식이 그리스에서 들여온 우아하기도 하고 화려하기도 하며 또는 단순하기도 한 도리아식, 코린트식, 이오니아식 중의 하나에 속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학창시절 세계사 공부를 할 때의 기쁨을 맛보았다. 로마 시내에 있는 유명한 성당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베드로 성당, 요한 성당, 산 마리 성당 등은 각기 다른 특색과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바울성당은 건축물로서도 조금 특이했고 내부의 벽화도 좀 색다른 듯 했다. 구교의 웅대함과 위용으로 넘치던 베드로 성당, 요한 성당, 산 마리 성당과는 다른 느낌이 듦은 개인적으로 개신교의 분위기를 아주 조금 느껴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대 교황들의 사진을 죽 걸어 놓았는데 남은 빈자리가 다 채워지면 무슨 큰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미신 같은 얘기가 성당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회자되는 것도 이상했다. 청순한 오드리 헵번과 미남 배우 그레고리 팩이 주연한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이었던 스페인 광장엔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들었고, 트레비 분수 가엔 젊은 연인들이 한가롭게 쉬기도 하며 물 속에 동전을 던져 소원을 비는 모습들이 영화 속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아침에 아벤띠노 언덕을 산책하다가 오래 된 성당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천국의 열쇠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열쇠구멍으로 몇 킬로나 떨어져 있는 바티칸 궁을 보기 위해서였다. 열쇠구멍 속으로 정원을 통과하여 언덕 너머에 멀리 우뚝 솟은 돔이 보였다. 그 성당을 지을 때 얼마나 깊은 신심을 가지고 정밀한 설계와 세심한 배려를 했기에, 바티칸 궁과 마주 보이는 곳에 대문을 배치하여 열쇠구멍으로 바티칸 궁을 볼 수 있게 했을까 싶어 무척 경이롭고 신기했다. 언덕을 내려가서 조금 걷노라면 길가의 한 성당 입구에 그 유명한 '진실의 문'이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성당 안에 들어가기 전 먼저 마음을 가다듬으라고 만들어 놓은 게 아닐까 싶었고 죄의 무서움을 일깨워주는 듯 했다.
로마 시 외곽지대에 초기 기독교도들의 은신처이며 지하무덤인 카타콤이 여러 군데 있는데 그 중 몇 곳은 발굴하여 관광지로 개발했다. 겉으로 보기엔 밭이고 과수원이어서 그 지하에 대규모의 특이한 공간이 있고 삶의 터와 함께 무덤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강력한 힘으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기독교를 말살하려 했던 그 시대에 로마 외곽에 그런 지하 은신처를 만들어 신앙을 지키다 죽기까지 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하 3, 4층 정도 깊이에 미로처럼 복잡하지만 함몰하지 않게 세심한 공법으로 파 내려간 그곳에 산 사람과 죽은 자가 차곡차곡 포개지듯 함께 한 흔적들이 눈물겨웠고 마음을 저리게 했다. 안내자들은 마치 신부님이나 수녀님처럼 신실한 태도로 사명감에 불타듯 그 당시의 상황을 진지하게 설명했다.
오래 된 도로며, 곳곳에 즐비한 유적지, 우뚝우뚝 솟은 돔들이며 유명 상점들을 보노라면 로마제국시대부터 여러 인종을 흡수하고 그리스나 이집트 등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자기네 것으로 만들고 그 문화를 지켜온 로마가 과연 감탄할 만큼 위대한 역사의 도시며, 문화의 도시며, 종교의 도시요, 예술의 도시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 낙원 같기도 한 피라미테 공원에서 로만티시즘 시인 쉘리와 키이츠의 묘 앞에 서 볼 수 있었다는 것도 로마의 추억 중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기억이다.
열쇠구멍으로 바티칸 궁을 바라보듯 그렇게 일부만 보고 왔지만 로마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을 내뿜는 Roma였다.
(1999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