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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4대사찰 금강산 건봉사
한국의 3대 사찰
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불보 사찰)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법보 사찰)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승보 사찰)
* 위는 불.법.승 3보를 상징하는 사찰로서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3보사찰입니다.
통상 불교에서는 3보사찰 또는 3대사찰이라 고 표현을 합니다.
* 참고로 일제시대까지 한국 4대사찰은
경남 양산 영축산 통도사(불보 사찰)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법보 사찰)
전남 순천 조계산 송광사(승보 사찰)
강원 고성 금강산 건봉사
<< 건봉사 >>
민족의 영산인 금강산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끝자락을 이룬 곳에 있는 건봉사는 삼팔선이 이 국토를 나누기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나라 4대사찰의 하나 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그러나 6· 25의 전란으로 절은 폐허가 되었고, 그 유지조차 민통선 안에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다행히 1992년 여름부터 이곳의 출입이 가능해져서 누구나가 옛 성지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건봉사의 창건은 지금으로부터 14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기 520년 당시 고구려 땅이었던 이곳에 아도스님이 절을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13년 뒤인 553년에 부속암자인 보림암과 반야암을 지었습니 다. 그러나 이 절이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758년(경덕왕 17)에 발징화상이 중건하고, 정신·양순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개설한 다음부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효시가 된 이 염불만일회에는 31인의 승려와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신도중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담당하여 염불승에 게 베풀었습니다.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원각사(圓覺寺)라 이름하였다. 758년(경덕왕 17)에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만일회의 시초이다.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重修)하고 서봉사(西鳳寺)라개칭하였는데 1358년(공민왕 7)에는 나옹(懶翁)이 중수하고 다시 건봉사라고 개칭하였다. 1464년(세조 10)에는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역대 임금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그 뒤,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사리와 치아를 봉안하였는데, 옛 절터와 대웅전, 불이문(강원 문화재자료 35), 9층탑을 비롯한 7기의 탑, 48기의 부도(浮屠), 31기의 비석이 있다. 6 ·25전쟁 때 건물의 대부분이 불타 없어졌다.
<< 건봉사 창건 내역 >>
발징화상(發徵和尙)
원각사(지금의 건봉사)를 창건하고 만일염불회를 창도한 스님 역사적인 예로보면 발징화상(發徵和尙)의 만일염불회가 있습니다. 만일염불회의 동참대중은 승려 31인, 신도 1,828인이었습니다. 신라 경덕왕 17년(758)에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일만일 염불정진을 시작, 29년 만인 병인년(786)에 만일이 되었습니다. 그날 금빛찬란한 아미타불이 현신하여 염불대중을 차례로 극락으로 인도하였음을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염불만일회가 처음 개설된 도량이 바로 금강산 건봉사이며 발징화상에 의하여 창도 되었습니다. 건봉사의 염불만일회를 기점으로하여 한국의 대소사찰에는 염불당이 들어서고 만일회의 염불결사운동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현풍 유가사 산내암자인 도성암에서는 1624년 성범(成梵)화상의 주도로 일만 팔천일 염불회가 개설되기도 하였습니다. 근래들어 염불에 대한 불교인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만일염불결사가 새롭게 계승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헤이안시대 말에서 가마쿠라시대로 들어오면서 법연이 정토종을 개창하고 그의 제자인 친란은 정토진종을 개창하였습니다. 또한 일편은 각지를 돌아다니며 춤추며 염불하는 법을 가르쳐 종교적인 절정을 맛보게 했으며, 신기(神祇)신앙과 아미타신앙을 융합하여 모든 것이 나무아미타불의 명호밖에 없다고 설하는 시종을 열었습니다. 이들 정토교의 교파는 그 후 각각 발달하여 일본불교의 큰 흐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릅니다. 현재 대표적인 정토교는 정토진종과 서산정토종, 시종이 있습니다.
건봉사는 진부령과 거진읍 중간에 위치한 고찰이다. 인적이 뜸해 한적한 고찰이지만 여름 이면 숲이 무성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아름답다. 야트막한 기와담으로 둘러친 건봉사에는 50여 기에 달하는 부도와 탑비가 있다. 원래 건봉사에는 2백개가 넘는 부도와 탑비가 흩어져 있 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많이 분실되었고 이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어 현위치에 부도전을 조성하였다.
건봉사는 금강산이 시작되는 초입에 위치해 있어서 특별히 '금강산 건봉사'로 불리우고 있다. 설악산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사찰이었던 건봉사는 법흥왕 7년(520년)에 신라의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다. 사실 법흥왕 7년이 면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기 이전이고 아도화상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승려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대사가 승병들을 훈련시켰는데, 그들이 공양할 쌀을 씻은 물은 개천을 따라 10리를 넘게 흘러갔다고 한다. 1878년 건봉산에 큰불이 나면서 당시 건봉사의 건물 중 3천칸이 소실되었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인해 완전 폐허가 되었고 지금은 단지 절 입구의 불이문만 남아 있다. 건봉사 불이문은 독특하게도 기둥이 4개다. 1920년에 세워졌으며 해강 김규진 선생이 글씨를 썼다.
불이문을 지나면 왼쪽으로 솟대 모양의 돌기둥을 만나게 되는데 높이가 3m로 규모가 꽤 크 며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들어졌지만 꼭대기에 오리가 앉아 있어 솟대라 할 수도 있겠다. 돌 기둥이 서있는 부분은 널직한 공터로 되어있는데, 과거 건봉사의 번창했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곳 절터와 대웅전 사이 좁은 계곡에는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가 놓여 있다. 능파교라 하는 이 돌다리는 건봉사의 수많은 건물터 중 그나마 형상이 제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주위 풍경과 잘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다.
대웅전 앞에도 또한 돌기둥이 서 있는데, 이 돌기둥에는 십바라밀을 형상화한 상징기호가 5 개씩 10개가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은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10단계 수행을 말한다.
팔상전은 최근에 새로 지은 것으로 그 앞에는 석종형 부도 2기와 팔각원당형 사리탑과 부도 각비가 하나씩 서 있다.
건봉사 진신사리탑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불사리와 치아사리를 약탈해간 것을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되찾아온 뒤 세운 것으로 이로부터 석가의 치아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만들게 되었다.
이 밖에도 건봉사에는 임진왜란때 사명대사에 의한 의승병봉기처이기도 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의승병기념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6월부터 9월말까지 문화유산해설사에 의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호랑이 등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7번 국도, 이 7번 국도를 타고 북쪽 방향으로 가다가다 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쯤에 건봉사가 있다.
남한 땅에서 제일 북쪽에 자리한 사찰이다. 군사분계선이 금강산 길을 가로막아 지금은 오지 사찰로만 취급되지만, 예전에는 금강산에 가려면 일부러 하룻밤 정도 묵고 갔을 만한 명찰이고 대찰이었다.
재작년 건봉사의 능파교가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지난 6월, 능파교가 보수작업 중 훼손되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제는 꼭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속초에서 건봉사를 가려면 고성 죽왕면을 거쳐야 한다. 죽왕면 일대는 8년 전에 엄청난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곳이다. 이런 규모의 산불이라면 적어도 50년이라는 세월이 걸려야 온전한 생태계를 되찾는다고 한다. 그래도 불에 데인 맨살은 치유가 된 듯 키 작은 잡목이 맨살을 덮고 있다.
청간정, 천학정, 어명기가옥, 왕곡마을을 뒤로 하고 길을 재촉하여 대대리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접어드니 여기는 죽왕면의 풍경과 달랐다.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으나 그 숲이 나무를 삼켜 버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 숲에 빠져들면 영영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강한 빗줄기도 조용히 숨죽이며 떨어지는 낙숫물이 되어버릴 것 같고 강렬히 내려 쬐는 햇빛도 그 빛을 잃고 스러질 것 같다.
그리 높지 않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비교적 넓은 터가 나온다. 길 왼쪽으로 금세 눈에 뜨일 정도로 넓은 부도밭이 있다. 부도탑과 부도비가 키재기라도 하듯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나중에 들를 요량으로 부도밭을 지나쳐 흙 길을 밟고 올라서니, 족히 100살은 넘었음직한 기품있는 소나무가 길을 내주고 비켜서 있다. 길 양 옆으로 서 있는 모양이 마치 일주문을 보는 느낌을 준다.
난 보통 안내판을 보지 않는데 여기 안내판은 다른 데하고 달라 눈길을 주었다. 1920년의 건봉사 전경을 담은 사진이 있는데, 한국전쟁 이전의 건봉사의 규모를 짐작케 해준다. 복원 작업이 한창이라 몇 년 후에는 이 사진 속의 모습이 실제의 모습이 될 것이다.
건봉사의 역사는 150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사력에 따르면 신라 법흥왕7년(520)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758년에는 염불만일회를 개최했는데 신도가 1820명 정도 참석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 6000여 명을 이 곳에서 훈련했다고 하니 이 절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건봉사는 설악산의 신흥사와 백담사, 양양의 낙산사를 말사로 거느렸던 대찰이었다.
고성은 일단 산불이 나면 큰불인가 보다. 죽왕면 산불이 나기 전 100여전 1878년에 이 곳에 큰 산불이 있었다. 이 때 건물 3183칸이 소실되었다 한다. 그 후 앞에 있는 1920년대 건봉사 사진처럼 복원이 되기도 했으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문화재를 남기지 못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절에 극락정토로 향하는 훌륭한 문이 없을 리 없다. 초입의 문을 일주문, 가운데 문을 천왕문, 마지막 문을 해탈문 혹은 불이문이라 하는데 이 절에는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1920년에 만든 것인데 한국전쟁의 화를 면한 유일한 건물이다. 네 개의 기둥에 팔작지붕을 얹어 그냥 보아서는 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집이라 할 만하다.
불이문 현판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해강은 백양사, 전등사, 가야산해인사, 상왕산개심사 등의 현판을 쓴 분인데 대자를 잘 써서 전국의 명승고적, 사찰 등 그의 필적이 닿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기둥의 특이한 무늬는 금강저로 손잡이 끝에 예리한 칼날이 달린 방망이 모양의 무기로 천둥을 본뜬 것이라 한다. 천왕문의 사천왕처럼 사악한 것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보면 된다.
*** 건봉사 망실토지 700만평 찾았다 ***
봉명학교 건립 등 옛 대가람 복원 ‘본격화’
강원도 고성 건봉사(주지 영도)가 99년과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700여만평의 망실토지를 되찾은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특히 이 토지를 점유하고 있던 군부대가 이달 중으로 철수할 것으로 알려져 건봉사는 봉명학교를 건립하는 등 옛 대본산의 모습을 되찾는 복원작업을 본격화할 방침이어서 관심을 끈다.
건봉사가 되찾은 망실토지는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산2번지~7번지, 거진읍 탑현리 산1번지~4번지 일대 임야 500만평과,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 563번지 일대 임야·대지·전답 200여만평이다.
지난 93년 사찰 주변 냉천리와 탑현리 일대 500여만평의 임야가 고성군 토지·임야 대장에 등재돼 있지 않은 땅(지적 미복구 토지)임을 확인한 건봉사는 98년 4월 고성군에 ‘지적 미복구 토지의 지적복구’를 요청하고, 그 해 7월 지적복구가 이뤄지자 춘천지방법원 속초지원에 소송을 제기, 99년 1월 소유권 인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 토지는 건봉사 법당을 중심으로 사방 10리에 해당되는 규모로 현재 건봉사 소유로 등기를 마친 상태다.
건봉사는 또 현내면 명파리 일대의 토지 200여만평에 대해서도 재경원과 국방부, 산림청을 상대로 소유권 확인 소송을 제기, 지난해 4월 대법원으로부터 건봉사 토지라는 최종판결을 받았다. 건봉사는 이 땅에 대해서도 조만간 등기를 마칠 계획이다.
토지환수작업을 주도해 온 건봉사 신도 배선희씨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지은 <건봉사 본말사지기>와 <세조실록>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건봉사 사유임야도’ 등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 과거 건봉사가 1천여만평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아직 지적 복구가 되지않은 토지에 대해서도 환수작업을 벌여 대본산의 위상을 되찾는데 주력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건봉사의 한 관계자는 “토지 환수를 계기로 건봉사는 교육 및 호국도량으로서의 기틀을 계승·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건봉사는 신라 때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당시 최초로 염불만일회를 개최하고, 임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집한 호국도량이자 일제시대 민족사상 계몽교육의 산실이었던 봉명학교가 세워졌던 선교양종의 대본산이었다. 그러나 6·25때 건물이 모두 전소됐으며 민통선에 묶여 있다가 89년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됐다.
마음을 비우고 싶은 법우님들은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건봉사를 적극 추천 합니다. 주변의 경관이 신비스로울 정도로 아름 답고요 주변에 우리 나라에서 제일로 물리 깨끗한 하진포 해수욕장이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첫댓글 주지스님으로 계시는 영도스님께서는 늘~잃어버린 절터를 찾는데 마음쓰고 계시지요...철원에 심원사에서도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합장삼배올립니다..........()()().....
건봉사 적멸보궁에서 철야기도하던 생각납니다. 성지중의 성지입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 석가모니불()()()
그렇군요.. 읽고 갑니다...
얼마전 금강산으로 통일템플스테이를 갔었는데, 첫째날은 이 건봉사에서 숙식하였습니다. 영도스님의 법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영도스님 자주 하시는 말씀-=부처님 감사합니다~부모님 감사합니다~남편님 감사합니다~아내님 감사합니다~아들딸님 감사합니다~모두모두가 다 감사합니다~.............감사한마음을 알려주시는 법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