回生회생의 기쁨
이시은(시인. 청하문학회 고문)
연록의 물결이 출렁인다. 겨우내 삭막한 풍경은 사라지고 한바탕 봄꽃들이 축제를 끝낸 나무들은 모두 새움을 틔워 하루가 다르게 잎새를 키우고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하고 즐겁다.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창가 목련나뭇가지에 꽃눈이 맺히기를 기다린다. 목련이 연미색 꽃잎을 피워 올리면, 어김없이 뒤뜰의 살구나무도 꽃눈을 맺고 목련을 따라 꽃을 피운다. 해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창가의 꽃들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행복하다.
일상이 자유롭지 못한 지난겨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고 답답함이 쌓여 더욱 봄을 기다리게 했다. 다른 해와 같이 앞뜰의 목련나무는 풍성하고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찾아왔지만, 뒤뜰의 살구나무는 죽은 듯이 서있다. 겨우 잔가지 서너 개에 꽃을 매달고 있을 뿐이다. 저렇게 큰 나무에 다 꺾어 담아도 화병에 꽂을 만큼 잔가지에 매단 엉성한 꽃이라니,,,. 해거리를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서너 개의 잔가지를 빼고는 꽃눈도 꽃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웬일일까. 말없이 서서 겨울바람에 몸을 맡겼던 저 나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역병이 사람들을 얽어 맬 때, 나무는 말 못하고 무슨 일을 당했단 말인가. 나의 답답함과 우울함에 젖어 관심을 두지 않은 사이 몹쓸 고통이라도 치룬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기 그지없다. 살구나무가 돌담 너머로 가지를 뻗어 연분홍 꽃을 피우고 웃을 때면, 덩달아 살구꽃 같은 웃음을 머금던 고향의 봄 이었다. 살구꽃을 바라보며 좋아하던 유년을 생각하며 볼우물에 화색을 띄우게 하던 살구꽃이 아니던가. 그리고는 잎새를 키워 가을까지 나를 즐겁게 하는 나무였다.
온종일 봄비가 내렸다. 흠뻑 젖어 더욱 색이 짙어진 가지에 간신히 매달린 꽃들이 마치 조화를 보는 듯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했을 텐데 앙상한 저 나무에 생기를 주어 살아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그 기도를 알기라도 했는지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다. 내가 잠든 사이에도 비는 그치지 않고 앙상한 가지를 어루만졌나보다.
정원수들이 새움을 틔우고 연록의 옷을 입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눈길을 보내곤 했다. 비와 나의 마음을 알아서 일까. 뒤늦게 마른 삭정이 같은 나뭇가지에 물감을 찍어놓은 듯 포롯한 새순이 돋아나 살아있음을 알려 왔다. 고맙고 반가웠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마음을 보내면 알아듣는다고 하더니, 저 나무가 나의 마음을 알아서 일까. 하루가 다르게 잎을 키워 나의 염려를 내려놓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비 덕분인 것 같다.
눈 뜨면 덧창을 열고 창 가득 들어앉는 나무와 이야기를 한다. 연록의 무희를 보는 것은 참으로 즐겁다. 눈이 시원해지고 하늘거리는 몸짓은 나에게도 경쾌한 몸놀림을 하게한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약 저 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뻗은 채 죽어갔다면, 이토록 나의 일상을 즐겁게 해주기는커녕 그 모습을 보는 것이 힘겨웠을 것이다. 회생하여 함께함이 기쁘다.
그간 잠재웠던 고향의 봄을 생각하며 봄나물이라도 사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시장으로 향했다. 자연산 달래와 두릅을 사고 돌아보니, 쪼그리고 앉아 쑥을 뜯어와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 듯 은회색으로 연하며 살점이 통통하다. 제법 많은 쑥을 떨이를 해서 가져왔다. 끓는 물에 대쳐 봉지봉지 냉동실에 넣고 남은 것으로 쑥버무리를 만들었다. 쑥 인절미 보다 쑥버무리가 더욱 고향의 봄을 생각나게 하고, 봄을 가까이 느끼는 것 같아서이다.
냉이로 간장을 만들고, 두릅을 데쳐놓고, 쑥버무리를 앉혀둔 냄비에서 쑥 익는 향내가 집안에 가득하다. 그간 염려했던 살구나무도 새 옷을 흔들며 부엌일을 하는 나와 즐거움을 함께한다. 사월이 가고 오월이 오면 연약한 저 잎새도 싱그러운 녹음으로 우거져 갈 것이다.
건강이 좋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환자나 고난의 시간을 견디는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힘겹고 어려울 지라도 단비 같은 마음들이 모여 위로가 되고, 회복되어 일어나 저 나무처럼 활기찬 모습을 되찾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하루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이 하루의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
한국문학신문<이시은의 여유로운 일상>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