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링 외 2편
이영옥
우리가 찾던 길을 우리가 막고 있었습니다
초조했던 바늘 끝은 잊어버립시다
여기 도착하기까지 꼬박 한 세기가 걸렸습니다
지금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찌릿찌릿한 당신 심장은 언제 출발한 예감입니까
꽃나무는 기원전에서부터 숨죽여 걸어왔습니다
신이 이끈 이곳에서 환각처럼 피어납니다
셀 수도 없는 끝을 지나온 우리는
얼음으로 동기화되왔다가
봄 공기가 얼굴을 만지면 눈물이 흐릅니다
그때 흘러나오는 음악은 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서로를 지원했던 파장
끊어질 듯 이어져
지층의 뿌리에서 천상의 꽃으로 회복했습니다
우리를 맴돌던 별들이 은하수로 쏟아집니다
귓속으로 들어온 커다란 세계
연약함이 끝내 강한 것을 구했습니다
11월
나를 한 장 넘겼더니
살은 다 발라 먹고 뼈만 남은 날이었다
당신이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나의 마지막 외침을 흔들어 버리면
새가 떨어진 침묵을 쪼아 올리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텅 빈 하늘 아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는 누구인가
깊고 깊어서
부스러기도 없이
뼈만 앙상하게 만져지는 기억들
미처 사랑해 주지 못했던 사랑처럼
남겨진 몇 개는
그냥 두기로 했다
오래된 노래처럼
내 귓속에서 흥얼거리며 살도록
옆방 사람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암실이었다
의도를 가진 방 같았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잘 모르는 방
비상등이 깜박이며 무엇을 설명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사라졌다
이 방의 목적처럼
나가는 문이 없는 방은 생각보다 편했다
단서가 될까 봐 불빛 한 줌도 흘리지 않았다
후회되지 않았다
숨는다는 것은 들키겠다는 뜻이지만
무덤 같은 방이 점점 마음에 들었다
소문으로 남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옆방에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자마자 코를 골았다
옆방 사람은
나보다 간절하게 사라지고 싶었던 사람 같았다
코 고는 소리가 멈출까 봐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 이영옥 시집, 『하루는 죽고 하루는 깨어난다』 (걷는사람 / 2022)
이영옥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사라진 입들』 『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를 냈으며 부산작가상, 백신애창작기금을 수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