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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윌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마태오 20,20-28
성장하려면 제대로 분노하라!
오늘은 성 야고보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도 있지만, 오늘의 야고보는 요한과 함께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이들은 야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들의 어머니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높은 자리에 앉으려면 그만큼 고생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마시게 될 잔이 온유함과 겸손의 잔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야고보는 열정이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섬기는 삶을 열정적으로 살았을 것이고
그렇게 순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어디서 나올까요?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불을 내려 멸망시켜버리려고 분노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은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사실 열정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모든 성취는 바로 ‘분노’에서 시작됩니다.
1948년 가난한 어촌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나, 가발공장, 식당 등에서 일하였고 총으로 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폭력이 심한 남편을 피해 단돈 100달러를 갖고 미국으로 식모살이를 떠난
여자. 미국에서는 식당에서 일하며 대학을 다녔고, 76년 미 육군에 들어가 소령으로 예편,
50세가 넘은 나이에 하버드 박사과정에 다니는 여자, 서진규.
그녀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에서 ‘이만큼 성공하기까지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반항심과 복수심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항심과 복수심, 곧 분노에 대해 제대로 알아봐야 합니다.
서진규 씨는 정말 남편과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으로 살았을까요? 물론 그들로부터 당연히 무시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복수심은 결국 자기를 향해야 했습니다.
참다운 복수는 자신이 그러한 처지로 살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내는 것입니다.
그녀는 분명 누군가에게 - 아마 부모 중 적어도 한 명 일 수 있을 것입니다 – 사랑받았습니다.
사랑 안에는 ‘기대’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왜 우리 몸의 회충이나 모기를 사랑하지 못할까요?
기대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기생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태아를 사랑합니다.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러한 기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기대에 못 미칠 때 분노하는 것입니다.
만약 타인이나 세상만 탓한다면 그 사람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그러한 처지를 타인의 탓을 하며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분노는 이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데 나는 물 위로 뛰어내릴 용기조차 내고 있지 못하다면 분노가 일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처럼 박차고 뛰어내릴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 용기가 바로 분노에서 나옵니다.
분노는 나를 사랑해 준 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솟아나는 나를 변화시킬 유일한 힘입니다.
‘그릿(GRIT)’의 저자 앤절라 더크워스는 아버지로부터 “니가 아무리 내 딸이긴 하지만,
머리가 나쁘니 성공하긴 어려울 거다.
재능이 없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기 힘들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이 말이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뭐랄까, 단순히 ‘내가’ 재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기보다는, 재능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내고 싶었어요.”
그때부터 성공에 관한 연구를 계속 진행했고, 10년이 넘어가는 연구에 다들 시간 낭비라고 했지만, 그녀가 43세 되던 해 전 세계 단 20명의 천재만 받는다는 맥아더 상을 받게 됩니다.
분노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살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을 기르기 위해 “작은 일이라도 완료하는 습관”을 만들어보라고 말합니다.
거창할 필요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지킬 수 있는 아주 작은 계획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신에 정한 계획은 ‘무조건’ 끝까지 완료해야만 합니다.
끝까지 해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지금 드는 힘보다는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난 여기까지야.’라고 말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구도 자신이 갈 수 있는 한계까지 가보지 못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건 재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중간에 포기했기 때문이에요.”
야고보는 이러한 분노로 그리스도를 닮아갔던 사도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께서 주시는 잔을 마실 수 없을까요? 저는 특별히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제 자신에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를 바치면 나의 죄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고 있음을 알게 되고 그분께 계속 아픔만 드리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나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저를 발전시켰고 그 길을 바로잡아주는 거울과도 같은 것은 『하.사.시.』입니다.
말씀은 이렇게 내 안에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고 그것이 나를 분명 그리스도의 삶과 닮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마태오 20,20-28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도 ‘서열’은 꽤 중요했던가 봅니다.
당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 같은 존재였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습니다.
장남과 차남 사이의 격차 역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가식적인 행동들이 참으로 한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더욱 실망하신 것은 그토록 오랜 기간 계속 반복해서 특별교육까지 시킨 제자들마저도
아직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측근 제자들끼리, 그것도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싸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한때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의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에브라임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두 아들을 옆에 세워둔 채 그녀는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인사청탁을 하러 온 어머니가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한손에는 품질 좋은 토종꿀 한병을, 다른 손에는 잘 키운 씨암탉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가 보인 행동은 꽤나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용서해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야망이라기보다 강한 모성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물 좋은 자리, 총리 자리와 당 대표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도가 보여준 모습 중에 꽤나 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한가한 시간에 스승님께 면담을 신청하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직접, 솔직히 표현하고 청했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앞세워 간접적인 인사청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는 스승 그리스도를 망신시키고 악용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종교가 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될 때, 주님께서 참으로 슬퍼하고 분노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픈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고 싶은 욕심이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야고보 사도 축일 강론>
(2024. 7. 25. 목)(마태 20,20-28)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0-23)”
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두 사도의 어머니를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는데,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볼 때, 어머니가 등장한 일 자체에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두 사도의 요청은 앞의 19장 28절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사도들이 열두 옥좌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열두 옥좌를 약속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요청한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는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입니다.
<기왕이면 높은 자리를 달라는 뜻으로 요청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달라는 요청은, 다른 사도들에게는 낮은 자리를 주시라는 요청과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이 그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긴 것은, 즉 화를 낸 것은(24절) 당연한 반응입니다.
2) 예수님의 답변은 거절도 아니고 승낙도 아닙니다.
<두 사도가 높은 자리를 욕심낸 것을 꾸짖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를 따르는 길이 어떤 길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나의 수난에 참여하는 일이 먼저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7).”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가 되기 때문에, ‘메시아 왕정’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열두 옥좌도
당신의 왕정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옥좌에 앉으려면, 예수님의 고난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묵시록을 보면, 열두 사도는 하느님 나라의 열두 주춧돌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묵시 21,14).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에페 2,20).” 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사도들이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한데,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 특별함이 어떤 모습이 될지, 그것은 그날이 되어봐야 알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열두 옥좌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섬기는 자리’입니다.>
3)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특혜나 특권 같은 것은 작용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라고 해서, 또는 고위 성직자라고 해서, 또는 무슨 업적을 쌓았다고 해서, 무조건 그 나라에 들어가서 옥좌에 앉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든지 고위 성직자든지 누구든지 간에
심판과 자격 심사는 지극히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자격 심사는 “신앙인으로서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살았느냐?”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높은 자리를 욕심내지 말고,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노력부터 하여라.”, 즉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먼저다.” 라는 뜻입니다.
4) 25절-28절의 말씀은 ‘낮춤’과 ‘섬김’에 관한 가르침인데, 이 가르침은 사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즉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따라가면 안 된다.”, 또는 “너희는 세속 사람들처럼 살면 안 된다.”입니다.
신앙인은 안 믿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인생의 목표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남을 섬기는 사람만 있는 나라,
그래서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형제가 되어서 모두가 모두를 섬기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는 높은 자리나 낮은 자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 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