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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송원(茶松園) 원문보기 글쓴이: 長樂山人 이종인
남태평양 작은 나라들 3, 사모아(Samoa),니우에(Niue)쿡諸島(Cook Is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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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모아 독립국(The Independent State of Samoa)
2)니우에(Niue)
3)쿡諸島(Cook Is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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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주3회) 직항을 이용해 FIJI 에 도착 한 후, 항공기를 갈아타 사모아를 여행하고, FIJI로 다시 입국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방법이 있다.
<FIJI+SAMOA> 연계일정은 최소 6박 정도. 그러나 오래 머물 수록 체류비가 적게 들기 때문에 장기간 여행이 더 유리하다.
사모아까지 직항은 없다. 대한항공을 타고 피지 난디 국제공항[인천공항 10시간 비행]까지 간 후 여기서 사모아행 피지 항공으로 환승한다. 우폴루 섬에 위치한 팔레올로 국제공항까지 1시간 40분소요
Samoa Consulate in Seoul(사모아 영사관)
※ 무비자 60일까지 체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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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모아 독립국(The Independent State of Samoa)
백승구 월간조선10 2013
사모아, 태평양 섬나라 중 최초 독립국·西사모아에서 사모아로 改名
사진 사모아 독립국 1 남태평양
사모아 수상 관저에서 내려다본 남태평양. 수도가 있는 우포루(Upolu) 섬은 환초로 둘려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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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령 사모아(American Samoa)
동사모아(Eastern Samoa Islands)라고도 한다. 남태평양의 독립국인 사모아 동쪽의 미국 해외령으로, 면적은 약 200㎢, 인구는 약 6만 5천 명에 달하는 조그만 지역이다. 원래는 1722년 네덜란드가 발견(?)했지만, 1900년 미국이 해군 기지 설치를 시작으로 동부를 자국 해외령으로 편입시키고 서부는 독일이 점령했다(이후 서부는 독일이 패전하여 철수, 사모아로 독립했다). 주로 어업 또는 참치공장에서 주로 일을 하며, 관광도 최근 이뤄지고 있으나 극히 미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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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네시아의 요람, 사모아
사모아(Samoa)는 1962년 뉴질랜드로부터 독립했다. 태평양 섬나라 중 첫 번째 독립국가이다. 통가와 함께 남태평양의 대표적인 섬나라인 사모아는 ‘폴리네시아의 요람’으로 불린다. 통가에서 적도 방향으로 800km 정도 떨어져 있다. 적도가 가까워서인지 열대성 기후를 띤다.
국제사회에서 사모아는 과거 서(西)사모아를 의미한다(1997년 서사모아에서 사모아로 개명). 동(東)사모아는 미국령 사모아를 말한다. 사모아는 1722년 네덜란드 제독 로거린(Roggereen)이 처음 발견했다. 당시에는 항해사의 섬(Navigator Island)으로 불렸다. 1890년대 들어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영국과 미국, 독일이 이 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1899년 독일이 서사모아를, 곧이어 미국이 동사모아를 식민지로 편입했다. 1차대전(大戰) 이후 독일 점령지였던 서사모아는 영국, 미국 등 국제연맹·국제연합에 의해 뉴질랜드에 편입된다.
현재 사모아는 크게 수도 아피아(Apia)가 있는 우포루(Upolu)와 사바이(Savaii) 두 섬으로 이뤄져 있다. 두 섬은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관광자원은 사바이에 더 많다.
2차대전 때 만든 軍用비행장이 關門 역할
통가 취재를 마친 기자는 사모아를 가기 위해 남반구에 위치한 뉴질랜드를 들러야 했다. 통가와 사모아를 오가는 비행기 편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난 7월 26일 새벽 4시에 사모아 국제공항인 팔레올로(Faleolo) 공항에 도착했다. 이 공항은 2차대전 당시 미군(美軍)이 만든 군용 비행장인데 지금은 이 나라의 관문(關門) 역할을 하고 있다. 뉴질랜드와 사모아를 오가는 비행기는 매일 한 편씩 있었으나 시간대가 좋지 않아 새벽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는 도중 택시기사는 “금방 내린 비행기에 사모아 수상도 타고 있었다”고 했다. “수상, 경호원 등 정부 요인(要人)처럼 보이는 승객이 없었다”고 하자 “이 나라 높은 사람들은 일반 국민들과 같이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150여 석 규모의 비행기에 VIP를 위한 특별좌석은 없었다.
택시기사는 수도(首都) 아피아의 뜻이 ‘타운(town)’을 의미한다고 했다. 수도가 위치한 우포루 섬에는 사모아 전체 인구(약 18만명)의 70% 가량이 살고 있다고 한다. 국토 면적은 2831km²로 제주도(1800km2)의 두 배가 채 안 된다. 1인당 GDP는 미화(美貨) 약 2500달러이다(2009년 기준).
사모아는 2009년 쓰나미(지진 강도 8) 피해로 140여 명이 사망했다. 작년 연말(2012)에는 사이클론 ‘에반’이 우포루 섬을 강타해 16명이 죽고 도로, 민가, 전기, 통신 등 시설 피해가 컸다. 공항까지 폐쇄됐다고 한다. 자연재해로 뉴질랜드로 이주하는 국민이 많아 인구는 계속해서 줄고 있다는 게 현지인의 설명이다.
호텔에 도착한 후 짐을 풀자마자 열대지역의 강한 아침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호텔 관계자(135개 호텔 )는 “5월부터 10월까지 건기”라며 지역적 특징과 기후에 대해 설명해 줬다. 사모아는 화산폭발로 생긴 섬이다. 작지만 섬 곳곳에 강과 폭포가 많다고 한다. 호텔 정문에서 바라보이는 산들이 섬치고는 꽤나 높아 보였다.
어려운 경제 사정
사진 사모아 독립국 2 박정희 대통령
1968년 9월 미국령 사모아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육영수 여사. 당시 성심여고 2학년생이었던 박근혜 대통령도 동행했다(사진=한국원양산업협회).
‘사모아’라는 국가 이름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낯설지 않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1968년 고교 2학년 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육영수(陸英修) 여사를 따라 미국령 사모아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호주, 뉴질랜드를 공식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귀국길에 원양어업 관계자와 교민 격려차 미국령 사모아에 들렀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월 윤진숙(尹珍淑) 해양수산부 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그때의 기억을 술회하기도 했다. 현재 미국령 사모아에는 우리 교민 400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사모아 사람들은 통가인(人)과 같은 폴리네시안임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특징이 달랐다. 전통 폴리네시안에 가까운 통가 사람에 비해 피부색이 다소 밝았다. 외부인과 피가 섞인 듯했다.
현지인 투르나미 씨는 “1900년대 초 독일이 사모아를 점령하고 있을 때 노동자로 아시아인 특히 중국 사람을 대거 이주시켰다”며 “현재 그 후손들이 사모아에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중국 피가 섞인 사모아 사람이 대략 2만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사진 사모아 독립국 3 수도(首都) 아피아(Apia)
사모아 정부 청사에서 바라본 수도(首都) 아피아(Apia) 시내 전경.
아피아 시내를 둘러봤다. 도로 사정은 나쁘지 않았다. 동행했던 박흥식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박사와 김선욱 연구원은 “사모아의 도시 개발 수준은 태평양 국가 중에서 괜찮은 편이다. 수도 아피아는 미국령 괌과 비슷한 수준으로 개발된 것 같다”고 했다. 기자가 보기에도 통가에 비해 도시 개발이 잘 돼 있어 보였다. 박흥식 박사는 “투자를 하거나 일정 수준의 사업을 해도 괜찮을 정도의 비즈니스 인프라가 구축돼 있다”며 “무엇보다 이곳 사람들은 돈을 벌겠다는 마인드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내 거리에서 한 남성이 기자 일행에게 접근해 왔다. 멀쩡하게 생긴 이 남성은 “아내는 죽었고 딸은 병에 걸려 현재 병원에 있다. 얼마 전 지갑을 잃어버려 돈이 없다. 돈을 빌려주면 곧바로 돌려주겠다”며 구걸을 했다.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태평양 섬나라에서 외국인에게 돈을 요구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그런데 사모아에서 이런 경험을 한 것이다. 자본주의화, 도시화의 그늘진 단면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 사람을 만나고 얼마 후 열 살도 채 안 돼 보이는 남녀 어린이 두 명이 기자에게 다가왔다. 이들은 신발도 신지 않았다.
“이거 사세요.”
그들이 파는 물건은 때수건과 면봉이었다. 언뜻 얼굴을 보니 닮아 보였다. 누나로 보이는 어린이에게 “옆 아이는 남동생이니?”라고 물었더니 “그렇다”며 물건 하나만 사달라고 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남매에게 4탈라(Tala·한화 2000원)를 주고 면봉과 때수건을 건네 받았다. 남매는 “땡큐”를 연발하며 “일본에서 왔어요”라고 물었다.
“아니, 한국. 한국 아니?”
남매는 모른다고 했다.
서구식 자본주의 물결이 밀려온 지 오래된 이 나라의 경제 사정은 좋지 않아 보였다. 투일레파 마리엘레아오이(Tuilaepa Sailele Malielegaoi) 수상도 기자에게 어려운 국가 경제 상황을 인정했다.
“경제가 아주 어렵습니다. 수산업, 관광산업 그리고 원조자금을 제외하고는 큰 수입원을 기대하기 힘들어요.”
의문의 60代 한국계 남성
사진 사모아 독립국 4 사모아 젊은이들
해수욕을 즐기는 사모아 젊은이들.
사모아 시내를 돌며 출출해진 배를 채울 겸 한 음식점에 들어갔다. 주인처럼 보이는 작은 키의 동양 여성과 현지인 종업원들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2탈라(1000원)짜리 소시지 하나를 주문했다. 쿰쿰한 냄새가 났다. 중국 음식에서 쉽게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주인처럼 보이는 동양 여성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중국”이라 했다. 그녀는 기자에게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사모아에서는 동양인처럼 생겼으면 대부분이 중국인이고 나머지는 일본인이다.
사모아에는 한국 사람이 없는 것일까. 사모아의 수도에서 한국 교포를 찾아보겠다는 작은 오기가 발동했다.
여러 가게에 들렀다. 마침내 한 가게에서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가게를 안다”며 위치를 알려줬다. 물어물어 그곳을 찾아갔다. 60대로 보이는 한국인 남성에게서 뜻밖에도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다. 그는 “가게에는 왜 왔느냐”며 “한국이 우리에게 해주는 게 뭐가 있느냐.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몇 마디를 부탁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과 일본은 이곳 사모아에 돈을 엄청 쏟아 붓고 있소. 중국은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해 도로나 방파제 등을 지어줬소. 한국은 10년 전에 이곳 병원에 엑스레이 기계 하나를 지원해 준 것 말고는 없소. 방파제를 지어준다는 약속을 했지만 아직까지 지키지 않고 있소. 한국 사람들은 뜨내기들만 왔다갑니다. 이곳 정부도 한국에는 별 관심이 없소. 돈을 많이 주는 나라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지 않소.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으니 나가주시오.”
이 남성에게 “사모아에 사는 한국 교민이라도 소개해 달라”고 하자 그는 “한 명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국말이라도 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니냐”고 했더니 “한 명도 없으니 그리 알고 돌아가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는 한국에 대한 불신이 아주 강했다.
이튿날 제리 브런트(Jerry Brunt) 주(駐)사모아 한국명예영사를 만났다. 한국인 아버지와 사모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브런트 씨는 뉴질랜드에서 로스쿨을 졸업하고 현재 사모아 수도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올해 6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중국계 여성으로 ‘오라토르(The orator)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4년 동안 명예영사로 활동하고 있는 브런트 씨는 “그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나로서는 다행”이라고 했다.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한국인 아버지와 사모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제리 브런트(Jerry Brunt)
주(駐)사모아 한국명예영사와 중국계 부인.
사진 사모아 독립국 5 제리 브런트(Jerry Brunt) 주(駐)사모아 한국명예영사
―현재 사모아에는 한국 교민이 몇 명이나 됩니까.
“아쉽게도 지금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와이, 미국령 사모아 등으로 모두 이사를 갔습니다.”
―사모아를 떠나는 이유는 뭔가요.
“다들 개인적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기에서 살기 힘드니까 떠났겠지요.”
―시내에서 한국에 불만이 많은 한국계 남성을 만났습니다. 혹시 그분을 압니까.
“제가 아는 한 한국 교민은 현재 사모아에는 없어요. 한국말을 하더라도 한국 국적이 아닐 겁니다.”
―사모아에 중국계가 2만여 명에 달한다고 하더군요.
“과거 1900년대 초반 노동자로 온 사람들이 1세대인데 그분들이 현지인과 결혼하면서 2세, 3세가 늘었습니다. 중간중간에 사모아에 정착한 중국인들도 많고요. 중국 정부는 태평양 국가를 지원할 때 노동력을 직접 자국(自國)에서 데려와요. 이들이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눌러앉는 경우가 많아요. 중국 사람들은 현지인들과 결혼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중국계가 늘 수밖에요.”
중국에 대한 불만
중국계가 많아지면서 중국에 대한 반감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사모아 야당 의장인 팔루살루에 파아포 2세는 최근 호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한 기업이 사모아에 제안한 투자요건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중국기업 ‘베이징투자관리회사’가 사모아에 대한 투자조건으로 160년간의 토지 임대, 세금 면제, 3만명의 중국 근로자 이주 허락 등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팔루살루에 파아포 2세는 “중국 기업인들이 우리 사모아가 외국 투자에 목말랐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세금 면제에 노동력 이주까지, 이건 말도 안 되는 수작이다. 중국인들은 카지노를 짓거나 호텔을 지을 수 있는 해변가의 좋은 땅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사모아의 땅은 전통적 세습토지로 쉽게 임대해 줄 수 없다. 사모아 정부는 중국기업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모아 정부는 중국에 대해 이렇다 할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브런트 씨에 따르면, 중국인들이 느는 것은 사모아의 비자·시민권 발급 기준이 미국령 사모아에 비해 낮은 것도 한 이유라고 한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습니까.
“얼마 전 처음으로 한국에 가봤는데 발전 규모에 매우 놀랐습니다. 아마 한국을 가본 사모아 사람이라면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이곳 사모아 수도에는 매주(每週) 수요일 영어 자막 처리된 한국 드라마가 공중파로 방영돼요. 인구의 80%가 한국 드라마를 접했다고 봅니다. 한국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돼 있는 건 분명해요. 한국문화 특히 음식 중 갈비, 소주, 비빔밥 등은 이곳 사람들에게 통할 겁니다. 매운 음식이 인기를 끌 것 같아요.”
―4년간 명예영사로 활동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
“사모아와 한국이 외교관계를 맺은 지 40년이 됐습니다. 중국은 한국보다 늦게 수교를 맺었어요. 한국과 사모아의 관계는 오래됐지만 양국 사이에 교류가 많지는 않았어요. 사모아는 1978년 북한과 수교를 맺었다가 1983년 아웅산 테러 이후 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만큼 한국에 우호적입니다. 한국이 사모아에 적극적으로 투자했으면 해요. 한국에 공부하러 가고 싶어 하는 사모아 젊은이들도 많아요. 그들을 데려가 공부를 시킨다면 친한(親韓) 인사를 많이 만들 수 있어요. 민간 차원의 교환 프로그램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사모아와 미국령 사모아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비행기로 20분 정도에 불과하지만 두 나라가 갈라진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민족적 동질성을 느낀다든지 하는 것은 없어요. 옛날에는 사모아인들이 미국령 사모아에 넘어가 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많이 줄었어요. 대신 뉴질랜드로 가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2012년부터 표준시간대도 뉴질랜드 쪽으로 바꿨지요.”
사모아는 차량 통행 방식도 미국식(우측 주행)에서 뉴질랜드식(좌측 주행)으로 바꿨다.
1899년 동·서로 분할 통치된 사모아는 1962년 사모아가 독립할 무렵 통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령 사모아인들의 반대로 무산됐다고 한다. 서사모아와 합칠 경우 인구가 적은 미국령 사모아가 불리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또 당시 미국령 사모아의 생활수준이 서사모아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도 통일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母系 중심의 사모아 가족사회
사진 사모아 독립국 6 마이레이 알리비아(Mailei Alibia·29)
사모아는 모계 중심 사회이다
기자는 사모아 현지인의 생활문화를 접하기 위해 마이레이 알리비아(Mailei Alibia·29) 씨의 집을 방문했다. 알리비아 씨는 대학 졸업 후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다 지난해부터 아피아의 한 호텔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여덟 살 난 딸과 두 살 난 아들을 뒀으며, 부모는 수도 아피아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영어를 꽤 잘했다. 통가와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사모아어(語)와 영어로 수업을 받았다고 했다.
그가 사는 마을은 아피아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100여 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작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니 그의 집이 나왔다. 그의 부인이 나와서 반갑게 맞이했다. 알리비아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방바닥이 눈에 확 들어왔다. 집안 청결 상태를 묘사하는 것은 그의 호의에 반하는 것 같았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집 구조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원룸이었다. 방 한쪽에 작은 침대가 놓여 있었고, 맞은편에 주방시설이 놓여 있었다. 침대에는 두 살 난 아들이 자고 있었다. “딸은 어디서 자느냐”고 했더니 알리비아는 “장모댁에서 잔다”고 했다. 처갓집은 같은 마을에 있었다. 알리비아는 처갓집과 부인에 대해 한참 설명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도 장모 소유라고 했다. 사모아 가족사회는 모계 중심으로 움직였다.
알리비아는 대학에서 사모아어를 전공했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일상생활에서 사모아어보다 영어를 즐겨 사용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사모아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뉴질랜드 빅토리아대학의 사모아학과 교수인 갈루말레마나 알프레드 헌킨 씨는 뉴질랜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모아의 국민 언어가 점점 영어로 변해가고 있어 아주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며 “사모아어를 보존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모아어 사전 편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알리비아는 장래 희망에 대해 “딸과 아들이 건강하게 잘 크는 것이 첫 번째 꿈이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두 번째 꿈”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기업 삼성, LG, 현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알리비아 부부에 따르면, 사모아 사람들은 전통 문화, 종교, 생활방식을 파싸모아(Fa’a Samoa)라고 부른다고 한다. 영어로 ‘the Samoa Way’로 표현하는데 사모아 문화방식을 의미하는 이 말에는 사모아 사람들의 문화적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사진 사모아 독립국 7 문신(文身)의식
사모아인들은 12~14세가 되면 문신(文身)을 한다. 진짜 사모아인이 되는 중요한 의식 중 하나이다. 남자는 허리에서 무릎까지, 여자는 다리 쪽에만 한다고 한다.
사모아 사람들은 12~14세가 되면 문신(文身)을 한다고 한다. 이는 진짜 사모아인이 되는 중요한 의식 중 하나라고 했다. 남자의 경우 허리에서 무릎까지 새기고 여자는 다리 쪽에만 한다고 한다.
기자는 시간을 내 우포루 섬을 한 바퀴 돌았다. 승용차로 2시간이면 충분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도로에는 차가 없었다.
우포루에는 360여 개의 마을이 있는데 동네마다 교회가 하나씩은 있다고 한다. 사모아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거나 가톨릭 신자이다. 현지인에 따르면, 사모아 사람들은 일요일 오전에 교회를 다녀온 후 오후에는 집에서 대부분 휴식을 취한다.
사진 사모아 독립국 8 우포루
화산섬인 사모아 우포루는 땅이 비옥해 열대 작물이 잘 자란다.
지난해 이곳을 강타한 사이클론의 흔적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연재해마저도 하늘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한 마을에서 만난 주민은 “중국이 병원을 지어줬고, 일본은 도로와 방파제를 고쳐줬다”고 했다.
화산섬이라 땅은 비옥했다. 산과 들판에는 코코넛나무, 티크나무, 야자수, 파파야나무, 망고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뤘다. 먹고사는 데는 걱정이 없어 보였다. 갑자기 북한 주민들이 생각났다. 그들에게 이런 환경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해안가에는 어린이들과 주민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작은 판자로 파도를 타는 모습에서 태평양 섬나라 주민의 평화로운 일상을 접할 수 있었다.
“한국 발전은 강한 정치적 리더십 덕분”
사진 사모아 독립국 9 투일레파 마리엘레아오이 사모아 수상
투일레파 마리엘레아오이 사모아 수상
사모아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의회에서 선출된 수상이 12명의 각료와 함께 국정을 책임진다. 현재 집권당은 49석 중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인권보호당(HRPP)이다. 총선(總選)은 5년 주기로 치러진다. 현재 수상은 투일레파 마리엘레아오이이다.
기자는 사모아를 방문하기 전 투일레파 수상을 인터뷰하기 위해 사모아 정부 측과 사전 약속을 잡아놨다. 약속 당일 수상실을 방문했다. 수상 집무실은 남태평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피아 항구 정면 쪽에 위치해 있었다. 푸른 하늘, 하얀 뭉게구름, 에메랄드 빛 바다의 전형적인 남태평양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투일레파 수상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기자를 맞이했다. 관광부장관도 겸하고 있는 그는 준비된 원고 없이 기자의 질문에 곧장 답했다.
“사모아는 태평양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독립했습니다. 국내 인구는 18만명인데 해외에 더 많이 살아요. 뉴질랜드에 30만명, 미국에 15만명, 호주에 4만명이 거주합니다. 사모아 사람들은 럭비를 좋아합니다. 태평양 국가 중에서는 럭비 강국(强國)이지요.”
—태평양 도서국가로서 사모아의 대외(對外)전략은 무엇입니까.
“사모아는 1976년 유엔회원국이 됐습니다. IMF,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회원국이 된 지는 오래됐고 현재 수많은 유엔 기구의 멤버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제기구에 참여해 활동하는 것이 국정운영에 큰 도움이 됩니다.”
—1972년 한국과 수교했습니다. 40년이 넘었는데요.
“한국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한 나라입니다. 나는 1973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발전 속도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사모아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가 한국의 성장에 경외감을 표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들은 열심히 일합니다. 근면성이 대단합니다. 한국의 발전은 강한 정치적 리더십 덕분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사모아는 유럽, 미국 등 서구 국가와 접촉을 많이 해왔습니다.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강대국의 기준이 바뀌고 있다고 봅니다. 그 기준이 동아시아 국가로 넘어가고 있어요. 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습니다. 인도와 중국처럼 거대한 내수시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원대한 꿈을 갖고 실천하라’고 강조
—한국과의 우호증진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까.
“태평양 국가 지도자들은 중국과 일본 지도자들과 주기적으로 만납니다. 조만간 베이징에서 중국 지도부를 다시 만나기로 돼 있습니다. 한국도 태평양 국가 최고 지도자들을 한데 모아 대화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으면 합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세계 금융위기와 2009년 9월 쓰나미 피해로 사모아의 주요 산업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모아는 경제적으로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안은 무엇입니까.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사모아는 국가 규모가 작아 대규모 개발도 쉽지 않아요. 수산업, 관광업 그리고 해외 원조가 국가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쓰나미 피해 때 외국의 원조가 큰 도움이 됐어요. 뉴질랜드, 중국, 일본, 호주가 많이 도와줬어요. 국정 책임자로서 새로운 국가 수입원을 찾는 데 노력하고 있습니다.”
—관광부 장관도 겸하고 있습니다.
“관광산업은 사모아의 주요 수입원입니다. 많은 한국 관광객이 사모아에 오기를 희망합니다. 사모아에는 훌륭한 관광자원이 많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안정돼 있고, 관광 인프라도 잘 돼 있어요. 관광산업에 투자할 여건도 충분합니다.”
—수상으로서 사모아 국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까.
“농업의 중요성을 자주 얘기합니다. 아울러 국민 개개인에게 운동을 열심히 해 체력을 기르고 이를 바탕으로 ‘원대한 꿈을 갖고 실천하라’고 강조합니다. 지도자로서 희망이 있다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이죠.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관광산업을 극대화하고, 교육과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더욱 노력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2)니우에(Niue)
뉴질랜드가 국방 책임지는 니우에
주(駐)사모아 한국 명예영사 제리 브런트 씨에게 니우에(Niue)를 방문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일주일에 두 번 니우에로 가는 로컬비행기가 있지만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며 “인구 2000명도 안 되는 작은 나라여서 사모아와 인적 교류는 활발하지 않다”고 했다.
기자는 니우에를 방문하려 했으나 항공편 사정으로 가지 못했다. 브런트 씨의 설명과 니우에 관련 자료를 통해 국가 현황을 알아봤다.
니우에는 서울의 절반도 안 되는 소국(小國)이다(면적 260km2). 우리나라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2010년 현재 인구는 1400여 명이다. 니우에는 1900년 영국 보호령이 된 후 이듬해부터 뉴질랜드의 통치를 받아왔다. 1903년 뉴질랜드가 니우에를 쿡제도의 일부로 취급하자 니우에는 적극 반발했고 이에 따라 별도의 행정구역이 됐다.
1974년 뉴질랜드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은 니우에는 헌법규정에 따라 뉴질랜드와 자유연합(Free association with New Zealand) 관계를 맺고 있다. 입법권과 행정권, 대외(對外)교섭권을 보유한 독립국이긴 하지만 국토 방위는 뉴질랜드가 맡고 있다. 니우에 국민은 자동적으로 뉴질랜드 시민권을 부여받는다.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이며 뉴질랜드 총독이 니우에 총독을 겸하고 있다.
현재 니우에는 유엔회원국이 아니다. 그러나 태평양포럼(PIF), 태평양공동체사무국(SPC), 유네스코, 세계보건기구, FAO 등 여러 국제기구에 독립국가 자격으로 가입돼 있다.
‘사납다’는 의미의 니우에
니우에는 서쪽에 있는 통가에서 500km, 서북쪽에 있는 사모아로부터는 600km 떨어진 곳에 있다. 니우에는 서기 1000년 무렵, 통가·사모아·쿡제도 사람들이 이곳에 배를 타고 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라의 원래 이름은 니우에 페카이(Niue Fekai)였다. 이는 통가·사모아 언어로 ‘사납다’라는 뜻이다. 이 섬에 살았던 원주민들이 외부인에게 배타적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1774년 영국의 제임스 쿡(James Cook) 함장이 니우에를 발견한 후 유럽인들이 이곳을 들렀는데 니우에 원주민들은 이들에게도 사납게 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니우에를 ‘야만인의 섬’으로 불렀다. 이 이름은 100년 이상 사용됐다.
1846년 사모아에서 선교 훈련을 받은 한 교인이 니우에에 들어가 기독교를 전파하면서 이 나라는 기독교 국가로 변했다고 한다.
니우에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이다. 내각은 총리를 포함해 4명으로 구성돼 있다. 20명으로 구성된 국회는 3년마다 선거를 통해 새로 구성된다. 국회는 2008년 최초로 소집됐으며 당시 투표에서 토케 탈라기(Toke Talagi) 의원이 총리로 선출됐다.
니우에는 조약 체결·국교 수립 등 외교활동은 직접 한다. 현재 중국과 국교를 맺고 있다.
니우에의 경제구조는 취약한 편이다. 항공 시설도 부족하고, 제한된 국토에 토양 또한 척박하다. 사이클론으로 인한 피해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인구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 니우에 국민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 관광업(자동차 대여업, 숙박업)에 종사하고 있다.
니우에를 비롯한 태평양 섬나라들은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국가 존립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주장한다. 2009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회의에서 선진국들은 니우에를 비롯한 여러 섬나라를 경제적으로 돕겠다고 했다. 토케 탈라기 니우에 총리는 2010년 바누아투에서 열린 남태평양포럼에서 “니우에는 여러 선진국으로부터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며 “약속한 것을 빨리 이행해 달라”고 호소했다.
3)쿡諸島(Cook Islands)
과거로의 여행, 쿡諸島
과거로의 여행이었다. 7월 29일 월요일 오전 11시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을 이륙해 4시간 동안 비행, 7월 28일 일요일 오후 5시에 쿡제도(Cook Islands) 라로통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뉴질랜드에서 쿡제도로 날아가는 동안 날짜변경선을 지난 것이다.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 묘했다. 쿡제도는 지구상에서 가장 늦게 하루를 마감하는 나라이다.
250석 규모의 보잉 777 여객기는 쿡제도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승객 대부분은 뉴질랜드인이었다. 비행기에서 만난 한 노(老)신사는 “20년 만에 다시 쿡제도를 방문한다”며 “쿡제도는 뉴질랜드 사람들의 휴식처”라고 했다
“kia orana, kia orana”
사진 사모아 독립국 10 쿡제도 라로통가 국제공항
쿡제도 라로통가 국제공항은 중대형 민항기인 보잉 777 여객기도 이착륙이 가능하다.
라로통가 국제공항에 내려 입국수속을 밟기 위해 줄을 섰다. 태평양 폴리네시아 국가를 취재하는 동안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만큼 관광객이 많다는 얘기였다. 공항 곳곳에는 관광정보가 적힌 안내 책자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입국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검색요원이 기자의 여행 가방을 샅샅이 뒤졌다. 가방 안에 든 알약(소화제, 두통약 그리고 수술 경험이 있는 요로결석 대비 비상약)을 문제 삼았다. 검색요원은 기자에게 의사처방전을 요구했다. “취재차 이 나라를 방문했는데 의사처방전이 필요한지를 어떻게 알고 챙겨 오느냐”며 항의했다. 순간 쿡제도 정부 측이 사전에 보내준 공문(公文)이 떠올랐다. 검색요원에게 이를 보여주자 얼마 후 다른 검색요원이 나타나 “You visit officially! welcome(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을 환영한다)”하며 가방 검사를 중단했다. 쿡제도를 찾는 관광객들 중에는 마약 하는 사람도 있는 듯했다.
입국장을 나오자 관광청 소속 담당자 파파투아(Papatua) 씨가 “kia orana, kia orana(환영합니다)”라며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쿡제도 전통 방식으로 만든 꽃목걸이를 걸어줬다.
쿡제도 관광청 소속 파파투아(Papatua) 씨.
사진 사모아 독립국 11 쿡제도 관광청 파파투아(Papatua)씨
파파투아 씨는 숙소인 크라운비치 리조트(Crown Beach resort)로 안내했다. 미국인 소유의 이 리조트는 쿡제도에서 최고급 리조트 중 하나라고 한다. 남태평양 정취가 물씬 풍기는 환상의 리조트, 그런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리조트 여직원은 “투숙객 대부분이 뉴질랜드, 호주, 미국인”이라며 “동양인은 아주 드물다”고 했다. 그녀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오, 한국 드라마 많이 봤다. 지금도 보고 있다”고 반가워했다. 공중파로 평일 저녁에 한국 드라마가 방송된다고 했다. 제목을 얘기했지만 무슨 드라마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녀에 따르면, 쿡제도 라로통가 섬에는 중국 사람이 20명가량 있고 일본과 한국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중국과 일본이 쿡제도까지는 본격적으로 진출하지 않은 것 같았다.
쿡제도는 두 개의 군도(群島)로 이뤄진 섬나라이다. 남위 10도에서 20도 사이에 여러 섬이 남(南)섬, 북(北)섬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다. 국제공항과 주요 정부 기관이 있는 수도 아바루아(Avarua)는 남섬의 라로통가에 위치해 있다. 화산섬인 라로통가의 해변은 환초로 둘러싸여 있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적도에 가까운 북섬도 경치가 아름답다고 한다.
쿡제도 전체 면적은 240km2(참고로 서울은 약 600km2)로 니우에와 면적이 비슷하다. 그러나 인구는 1만5000여 명으로 니우에(1400여 명)보다 훨씬 많다.
수도가 있는 라로통가 섬의 면적은 67km2에 불과하다. 해안도로 길이가 32km로 승용차로 30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다. 관광지로 개발된 라로통가 섬에는 쿡제도 전체 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만여 명이 산다고 한다. 대부분 관광산업에 종사한다.
쿡제도에는 13세기부터 현재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와 사모아 사람들이 건너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쿡제도’라는 국명(國名)은 1773년 이곳을 방문한 제임스 쿡 영국 함장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1880~1890년대 쿡제도의 여러 섬은 영국령이 됐고 그 후 1900년 뉴질랜드에 합병됐다. 쿡제도는 1965년 뉴질랜드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관광산업에 집중하는 쿡諸島
사진 사모아 독립국 12 쿡諸島 개인 하우스
외국 자본으로 지은 고급 리조트 내(內) 개인 하우스
저녁식사 자리에서 할라토아 푸아(Halatoa Fua) 쿡제도 관광공사 사장 가족을 만났다. 푸아 사장은 “나는 통가 출신이고 아내가 쿡제도 사람”이라고 했다. 사장 내외는 18개월 된 딸을 데리고 왔다. 푸아 사장은 한국인의 해외관광 현황과 추세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관광공사 사장이 된 지 1년이 됐다고 했다.
“이 나라의 주요 수입원은 관광입니다. 국가 GDP의 72%를 차지합니다. 금융업과 어업이 뒤를 잇지만 비중은 낮아요. 다른 폴리네시아 국가에 비해 쿡제도의 관광 수입은 아주 높은 편입니다. 피지(Fiji)에 비해 관광 후발 주자이지만 최근 들어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습니다.”
푸아 사장은 통계 수치에 아주 밝았다.
“한 해 관광객은 12만명 정도입니다. 그중 뉴질랜드인이 관광객의 66%를 차지하고, 호주인 18%, 미국 등 북미 사람들이 12%를 차지합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연간 1000명 정도 이곳을 다녀갑니다.”
쿡제도에는 외국인이 투자한 고급 리조트가 많이 들어서 있다고 한다. 지역 자본으로는 소규모 호텔을 짓는다고 했다. 푸아 사장은 해외 관광객 유치 전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호주, 뉴질랜드의 겨울시즌은 6~8월입니다. 이때 남반구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이곳에 많이 옵니다. 비수기인 11~2월, 겨울시즌인 북반구 사람들이 따뜻한 이곳을 찾도록 방안을 강구 중입니다. 한국, 일본,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그리고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지역의 잠재고객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칠 계획입니다. 항공사, 여행사 등과 협의해 노선(路線)도 확대할 예정입니다.”
그는 사계절 내내 각종 문화 이벤트를 만들어 일년 내내 관광객이 드나들도록 할 계획이라고 했다.
쿡제도는 관광국가로서 적지 않은 경쟁력을 갖고 있었다. 라로통가의 경우, 섬 규모는 작지만 보잉 777과 같은 중대형 비행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국제공항, 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봉우리 등산로 개척 등 다양한 볼거리와 체험장(해수욕장·다이빙·낚시 시설),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섬을 돌 수 있도록 한 교통 편의시설 등이 마련돼 있었다.
푸아 사장은 “폴리네시아 여러 국가가 일자리가 없어 난리지만 쿡제도는 오히려 사람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한국 사람들에게도 원한다면 일정한 절차를 거쳐 관광업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흑진주로 유명, 해저광물자원에도 관심 가져
사진 사모아 독립국 13 벤 포니아(Ben Ponia) 쿡제도 해양자원부 차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벤 포니아(Ben Ponia) 쿡제도 해양자원부 차관.
이튿날 라로통가 섬을 둘러봤다. 해안도로를 따라 곳곳에 고급 리조트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휴식 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리조트 한편에는 어김없이 쇼핑센터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지인이 사는 마을은 해안가 안쪽으로 형성돼 있었고, 주민들은 대부분 오토바이(일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관광국가답게 물가는 통가·사모아에 비해 비쌌다. 밥값이나 물건 가격이 서울과 비슷했다.
쿡제도는 흑진주로도 유명하다. 보석상점 ‘모라나(Morana)’의 레이몬드 뉴남(Raymond Newnham) 씨는 “정부가 흑진주 산업 육성을 위해 직·간접적으로 지원해 주는데 진주 양식장 시설을 짓기 위한 낮은 대출이자 등 금융혜택도 있다”고 했다. 한국해양과기원 태평양해양연구센터장으로서 흑진주 양식에 성공한 박흥식 박사는 “흑진주 양식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했다.
7년간 태평양해양연구센터(마이크로네시아연방 소재)를 맡으며 태평양 도서국가를 오랫동안 들여다본 박흥식 박사는 쿡제도의 사회기반시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이 관광을 위해 집중돼 있는 것 같습니다. 쿡제도는 그야말로 모든 일을 접어두고 쉬는 곳, 휴식을 취하는 곳인 것 같아요. 뉴질랜드나 호주 사람들이 여기에 쉬러 오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쿡제도는 작지만 강한 나라이다. 1인당 GDP도 다른 태평양 섬나라와 달리 미화 1만 달러를 넘는다. 이 나라는 최근 들어 해저(海底)광물자원 개발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난 4월 쿡제도 해저광물관리국은 영국 데이빗 크로넌 교수 연구팀 보고서를 인용하며 “근해에 미화 약 1억7000만 달러 규모의 심해저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쿡제도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약 100억t 가량의 망간단괴가 매장되어 있으며 코발트, 니켈, 구리 등 기타 광물도 기존 추정치보다 많이 묻혀 있다고 한다.
벤 포니아(Ben Ponia) 쿡제도 해양자원부 차관은 “한국이 피지와 통가 해역에서 해저광물자원 탐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쿡제도에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한다”고 했다. 자체 탐사능력이 없는 쿡제도는 한국과의 자원개발 협력을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2015년 유엔 正회원국 진출 예상
사진 사모아 독립국 14 쿡제도 미라 모에카(Myra Moeka’a) 외교부 국장
쿡제도 미라 모에카(Myra Moeka’a) 외교부 이민ㆍ유엔ㆍ조약담당 국장
쿡제도는 지난 2월 우리나라의 190번째 수교국이 됐다. 남태평양의 오지(奧地)국가로 보이지만 국제사회에서의 전략적 가치는 결코 적지 않다. 태평양의 지리적 교두보, 원양어업의 길목, 해저광물자원 및 해양생물자원의 다양성 등에서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2012년 8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쿡제도에서 열린 남태평양도서포럼(PIF) 정상회의에 미국 대표로 참석했다. 미국 국무장관이 쿡제도를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태평양 도서국 사이에 커져가는 중국의 입지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쿡제도는 현재 세계보건기구(WHO)·아시아개발은행(ADB) 등 20여 개의 국제기구에 가입해 있다. 유엔 회원국은 아니지만 건국 50주년을 맞는 2015년 정식 회원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쿡제도의 정부 형태는 의원내각제이다. 24석으로 구성된 의회는 4년 단위로 국회의원을 선출한다. 니우에와 마찬가지로 쿡제도는 입법권·행정권을 갖고 있지만, 국토 방위는 뉴질랜드에 의존하고 있다. 쿡제도 국민은 자동적으로 뉴질랜드 시민권을 갖게 된다.
정부 청사에서 만난 미라 모에카(Myra Moeka’a) 외교부 이민·유엔·조약담당 국장은 “태평양 도서국 모임을 비롯한 여러 지역 협의체에 참여함으로써 쿡제도의 국익(國益)을 도모하고 있다”고 했다.
모에카 국장은 “우리나라는 2015년 유엔 정(正)회원국 진출을 앞두고 있다”며 향후 국가 비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지난 2011년 ‘문화와 환경 그리고 국민의 열정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삶의 질을 최고로 향유한다’는 내용의 국가비전을 선포했습니다. 이는 경제를 활성화하고, 경제적 성장을 위한 기반을 갖추며, 지속가능한 개발을 추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정부는 에너지 안보를 구축하고, 쿡제도에 사는 모든 국민이 평등한 기회를 갖도록 하며,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이룩하고, 전통적 삶의 환경을 보존하며, 안정적 사회를 이룩하는 좋은 정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2020년까지 단계적으로 이 목표를 달성할 계획입니다.”
모에카 국장은 “통가와 사모아에 비해 쿡제도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매우 개방적이고 친화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쿡제도 사람에게는 일상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고 했다.
모에카 국장은 한국에 대해 “과학기술이 발전한 나라이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대해서도 잘 안다. 올해 수교를 맺은 것을 계기로 향후 두 나라의 우호관계가 돈독해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모에카 국장은 한국이 주도하는 태평양 도서국 외교장관 회의와 코이카(KOICA·한국국제협력단) 프로그램을 높이 평가했다. 정부 공무원 중에는 코이카 초청으로 한국 연수를 다녀온 이들도 있다고 했다.
쿡제도 취재 일정의 마지막 날 밤, 할라토아 푸아 관광공사 사장의 초대로 하이랜드 파라다이스(Highland Paradise)를 찾았다. 쿡제도의 전통문화센터인 이곳에서 과거 쿡제도 원주민들의 일상생활과 변화된 모습을 춤과 노래로 엮은 공연을 관람했다. 오랫동안 내려온 식인(食人) 풍습이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화려한 원색 의상을 입은 젊은 무희(舞姬)의 전통무용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푸아 사장은 “한국의 신혼부부를 포함해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우리나라에 심리적 저항감 없어”
사진 사모아 독립국 15 박용규 주(駐)뉴질랜드 대사
박용규 주(駐)뉴질랜드 대사.
통가, 사모아, 쿡제도 등 태평양 폴리네시아 국가들을 둘러보면서 몇 가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이들 섬나라 사람은 국가, 사회의 발전이 개인 행복과 직결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상생활이 불편해도 그들 나름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서양식 문물에 익숙해 있지만 서양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는다.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자존심까지 버리지는 않는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유럽, 미국,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중국과 일본이 깊숙이 각인돼 있었다. 한국의 입지는 분명 좁아 보였다. 그러나 우리와 통하는 ‘그 무엇’이 존재했다.
현재 한반도를 주변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이 새로운 긴장관계를 조성하고 있다. 이런 국제 역학 구도에서 우리는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태평양 도서국이 바로 그들이다. 언젠가 중국, 일본, 미국이 우리의 입장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때 태평양 국가들의 지지는 적지 않은 힘을 발휘할 것이다.
다행히 이들 국가는 원조자금 액수로 상대 국가를 평가하지 않는다. 우리가 차지할 공간이 그만큼 있는 셈이다. 우리는 현지 여건에 맞는 우리만의 지원방식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결국 사람이다. 우리의 인적, 문화적 자원으로 이들 나라를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박용규(朴龍奎) 주뉴질랜드 한국대사의 말이다.
“이들 나라에는 우리와 통할 수 있는 동양적인 정서가 존재합니다. 태평양 국가들이 중국, 일본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고 있지만 경계심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심리적 저항감이 없습니다. 이미지도 좋고요. 정부 차원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민간 차원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해요. 국내 기업이 이들 국가에 투자하는 것도 좋고, 일반 국민이 이들 나라에 휴가를 가는 것도 방법입니다. 민관(民官)이 합쳐 이들 나라를 공략할 때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입니다.”
현재 우리 정부가 태평양 도서국가에 지원해 줄 자원은 제한돼 있다. 그러나 현장에 답이 있듯, 현지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그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 도서국에 대해서는 공공외교(Public diplomacy) 전략을 적극 펼쳐야 한다. 전통적 외교방식에서 벗어나 예술, 지식, 미디어, 교육 등을 통해 상대국 국민에게 직접 다가가는 외교, 이게 당장 필요하다. 외교부 공무원부터 이들 나라에 자주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