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부평, 부천 전투
9월 16일 새벽 6시, 북쪽을 맡은 제5해병연대는 김포공항을 목표로 진격을 시작했다. 2대대가 선봉이었고, 1대대와 3대대가 뒤를 따랐다. 시내 소탕 전투는 한국 제1해병연대가 맡았다. 제1해병연대는 경인선 철도를 중심으로 북쪽은 1대대, 남쪽은 3대대가 맡아 작전을 전개하였다. 북한군의 상당수는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고 숨어 있었는데, 일부는 시민들의 신고로 체포되고 일부는 저항하다가 또는 도주하다가 사살되었다. 181명은 투항하였다. 인천시청도 3대대에 의해 탈환되었다.
종군 기자의 증언에 따르면, 상당히 거칠게 시민들을 다룬 한국 해병대 덕분이기도 했지만, 제1해병사단이 인천 시내를 지나는 동안 전투는 거의 없었고 인적이 끊겨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인천은 연기가 치솟는 죽음의 도시였고, 특히 담배공장이 불타면서 엄청난 악취가 진동했다. 3명의 북한군 수병을 포로로 잡았는데 미군의 상륙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김일성은 낙동강 돌파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인천 상륙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하늘에서는 코르세어 기들이 오전 7시, 인천 쪽으로 향하는 T84/85 6대를 발견하고 공격을 퍼부어 3대를 격파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 대가 격추되어 조종사 윌리엄 심슨(William Simpson) 대위가 전사했는데, 그는 서울 탈환전의 첫 전사자로 역사에 남았다. 남은 3대는 재빨리 숨었지만, 조종사들은 2차 비행에서 파괴된 전차들을 다시 부수고 6대 모두 격파한 것으로 착각하였다. 남은 3대는 해병대의 M26 전차가 정리하였다.
16일 밤에 5중대를 지휘하는 스미스 대위는 부평 외곽에서 북한군 트럭 한 대를 노획하고 장교 1명과 병사 5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들은 후속 부대의 선두였는데, 미군의 진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과연 북한군 제42전차연대 소속 T34/85 전차 6대와 250여 명의 병사들은 주먹밥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접근해왔다. 해병대는 일단 선두를 통과시켜 완벽한 포위망을 만든 뒤 전차포와 무반동총, 바주카포로 맹공을 퍼부어 불과 5분 만에 전차 6대를 모두 격파하고 공황상태가 된 250명을 거의 사살하였다. 그야말로 보전 합동 대전차전의 표본인 이 전투에서 해병대가 입은 피해는 경상자 1명뿐이었다. 이 전투는 작긴 했지만 1129일 동안 벌어진 한국전쟁의 전투 중 가장 완벽한 승리이기도 했다. 맥아더와 알몬드는 전선을 시찰하는 길에 기자들을 불러 부서진 전차를 촬영하게 하면서 홍보에 열중하였다. 그 덕분에 진격 속도가 늦어져서 대원들은 냉소를 보냈지만 말이다.
그사이 제5해병연대의 다른 부대들은 도중에 있는 100미터 남짓의 고지들을 장악하면서 김포공항을 향한 진격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9월 17일 오전 7시, 공항에 이르렀고 전차를 앞장세워 공격을 시작하였다. 전차 한 대는 격납고 문을 밀고 들어가 멀쩡한 전투기 한 대를 노획하기도 하였다. 급조된 북한군 제1항공사단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18일 새벽 3시에는 야습을 시도하여 근접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일부는 활주로 사이의 무성한 수풀 속에 숨어 최후까지 저항했으나 거의 다 사살되었다. 제1항공사단장은 40세의 왕연 준장이었는데 그는 인천 상륙 작전-서울 탈환전에서 이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북한군 고위 지휘관이다. 하지만 사실 그조차도 중국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결국 18일 오전 10시, 김포공항은 해병대의 손에 들어왔다. 오후 4시부터 항공기들이 속속 김포공항에 착륙했고, 다음 날 제10군단은 이곳에 전술항공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일본에 있던 3개 항공대대가 이곳으로 이동하여 작전을 펼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로 내륙 깊숙이 진격하면 함포의 지원이 불가능했기에 그만큼 포병과 항공대의 활용이 중요했다. 그런 점에서 길이 2킬로미터 폭 50미터에 달하는 활주로를 갖춘 김포공항의 가치는 아주 컸다. 공중 보급에도 아주 유리했음은 물론이다. 제5해병연대는 곧바로 한강 도하를 준비했다.
한편 제1해병사단 지휘부는 9월 16일 정오에 인천항 남동쪽에 지휘부를 설치했는데 고베에 도착하여 정비를 마친 제7해병연대가 21일에는 인천에 도착한다는 희소식을 받았다. 그사이 공병대는 인천역에 있는 기차를 수리하여 부평까지 병력과 물자 수송을 할 수 있게 준비하였다. 하지만 이 기차가 지나갈 기찻길은 공짜가 아니었다. 제5해병연대가 김포공항을 맡았다면, 제1해병연대는 부평과 부천을 확보하고 영등포로 진격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고 훨씬 치열한 전투를 각오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