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각 교단의 상황들을 잘 몰라서 일수도 있습니다만, 이성호 교수님과 같은 저러한 주장을 저렇듯 선명하고, 확고하게 하시는 분은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영적 임재설’에 대한 이성호 교수님의 이해가 과거도 그렇지만 특히 현재의 개혁교회의 어떤 자료와 교회에서 저렇듯 “명확하게” 주장하는지 묻고 싶습니다.(궁금해서...) 또한 이성호 교수님의 글에 예수님의 몸이 영적으로 떡에 임한다. 라고 해놓고 그것으로 주님의 몸을 믿음으로 먹음으로 참여하면 되는데 우리의 영혼이 왜 굳이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의 실체적 몸을 먹어야 하는지도 제게는 하나의 모순으로 보일뿐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벌코프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이성호 교수님과 같은 칼빈의 개념을 소개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한편으로는 수찬자가 믿음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계신 하늘로 들어올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감화를 수찬자에게 내리는 것으로 표현된다. 댑니는 마치 수찬자가 성찬시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 자체를 받아먹은 것처럼 말한 칼빈의 표현을 단호히 거부한다. 이것은 분명히 칼빈의 표현에서 애매한 부분이다. 어떤 때는 문자적인 의미의 육체적인 몸과 피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말은 성례적으로 곧 비유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다.”
이성호 교수님의 글은 벌코프의 말대로라면 ‘애매한’것들을 지나치게 확정적으로 묘사하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글은 성찬에 있어 영적 임재설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영적임재설의 개념이 주로 예수님의 신성에 연관하여(물론 결코 그 신성이 인성과 분리되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설명하고, 또한 현재적으로 승귀의 상태의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라는 개념보다는 주로 이전에 단번에 이루신 십자가의 은혜를 “눈에 보이는 말씀으로서”의 성찬에 현재적으로 신성으로 임재하셔서 그 몸으로 주신 은혜를 지금 ‘더욱더’ 현시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보게하고, 누리게 한다는데 더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경험하는것을 먹는다, 혹은 마신다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들을 더욱 확고히 깨닫고, 체험하게 해주기에 성찬을 “표와 인”으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는 과거이지만 “표와 인”으로서의 성찬은-그 자리에 신성으로 임재하심으로- 현재적인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벌코프의 해석처럼 칼빈의 글을 “비유적으로” 볼 때 칼빈의 영향을 받은 다른 신앙고백&교리문답의 성찬에 있어 영적 임재설에 관한 내용들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버트 레이몬드의 "최신 조직신학"의 내용들을 참고합니다.
「비록 개혁주의 교회들이 그리스도가 주의 만찬에서 신자들에게 “실제로 그러나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한 칼빈의 주장에 일반적으로 따르지만, 모든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모든 부분에서 칼빈의 해석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찰스 하지는 칼빈의 견해를 “별난”것으로 언급하고, 커닝햄은 다소 지나치게 비판하여 칼빈의 교리가 “실패한”것이라 하는가 하면, “루터의 공재설처럼 난해하며, 아마도 만이의 교사로서 칼빈의 업적의 역사상 최대의 오점”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대브니는 칼빈의 교리가 “해괴하고” “난해할 뿐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커닝햄의 논평의 배경에는 칼빈의 노력에 대한 그의 오해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그가 생각하기에 칼빈은 “신자들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인성에 의하여 미친 참된 영향과 같은 어떤 것을 분명하게 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루터의 공재설처럼 난해한 것을 결과시켰을 뿐이다."
대브니에 의하면, 칼빈은 루터파와 쯔빙글리파 간의 틈을 메우려는 생각에서 가르치기를 “그리스도의 신성 뿐만 아니라 인성, 한마디로 그의 전인격이 영적으로 그러나 실제로 수찬자들의 신체적인 입이 아니라 영혼에 임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인성이 비록 하늘에만 있지만, 신자들의 영혼들이 형언할 수 없으나 실제적이고 여자적인 방식으로 여전히 먹는다”고 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칼빈의 표현을 특별히 거부하지는 않지만, “받아들일 수 없거나 비성경적인 요소를 모두 수정하였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칼빈이 주장한 바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살과 피를 믿음으로 먹으며, 이로써 신격으로부터 주어지는 “생명을 주는”공덕을 그리스도의 인성으로부터 얻어내는 것이 된다. 이 같은 칼빈의 표현은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격과 동일하게 신격화 할 것을 제안하는 격이 되고, 적어도 주의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구원의 유익들을 이제는 하늘에 자리 잡고 계시는 그의 인성에 직접적으로 돌리는 위험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만일 주의 만찬을 해석하는데 요한복음 6장의 표현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칼빈이 좀 더 깊이 인지하였다고 하면, 그는 지금처럼 그렇게 글을 쓰지 아니했을 것이고, 또 후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을 당혹케 하는 문제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후에 로버트 레이몬드는 이러한 균형 잡힌 평가를 덧붙입니다.
“...하지만, 주의 만찬에 대한 칼빈의 해석의 몇 가지 세부적인 것들에 대하여 제시한 비평이나 이견을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 된다. 이는 칼빈의 해석이 대부분 성경적이요, 주의 만찬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임재의 본질에 대한 최상의 지침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는 이승구 교수님의 견해가 좀 더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영적 임재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분이 쓰신 "성령의 위로와 교회"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처럼 성례의 떡과 포도주는 또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칭의하시며,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분명히 확신시켜 주시고, 십자가 사건이 분명히 우리에게도 일어난 것임을 확신시켜 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오직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십자가에서 이루신 수난과 속죄를 가르치고 표하는 의미에서만 하는 것이(Zwingli)아니고, 그 이상으로 그 때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효를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고 적용시켜 주는 영적 사건으로서의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칼빈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라고 불렀습니다."
'영적인 임재'에 대한 설명이 이성호 교수님의 그것과는 분명한 견해차가 있습니다. 이승구 교수님의 견해에 대한 좀 더 분명한 이해를 위해 그 다음 부분의 글도 올립니다.
"...성찬과 관련해서 이를 좀 더 부연한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은 항상 무소부재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있는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것은 그의 영적인 임재 입니다.
이제까지의 논의와 관련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에 하늘에 계심을 아주 분명히 이해하고 천명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서 베드로가 잘 표현하고 있듯이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고(행3:21) 우리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늘은 "우주 어디에나 다"가 아니라, 아주 명확히 그 경역을 차지하고 있는 하늘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성으로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으로는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명확히 의식하고, 항상 그의 큰 통치를 인정하고, 그 통치를 기꺼이 받아 가면서 이렇게 우리를 다스려 주심에 대해서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인성으로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이 땅에 있는 우리 사이에 영적인 교통이 있는 것입니다. 이 영적 교통을 아주 현저하게 드러내 주는 것이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첫댓글 zizia님. 반갑습니다. 우리의 견해가 서로 맞지 않더라도 "영적인 임재" 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난해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것 이라고 생각되어 공감이 됩니다. 또한"이해와 체험"에 대한 말씀에도 진심으로 공감하게 됩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찬은 우리의 체험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부분의 말씀에는 좀 더 구체적이며, 신중하셨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에 제가 올린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이 zizia님의 견해와 다르기 때문에 "누구의 책을 읽어보면 그의 글이 더 신빙성있게 여겨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단지 책 소개를 하신 것이라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이 없는 반론은 논의의 본질과 그 진리됨을 쫓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러기 싫어서 고민하다가(물론, 대단한것은 아니지만요...) 없는 시간을 쪼개서 "이성호 교수와 견해가 다른 책 몇권이 있더라"라고 말하고 끝낸것이 아니라, 신뢰할만한 신학자들의 다른 견해를 소개한 것입니다.
반갑습니다 곰돌아빠님. 자기전에 혹시 제 꼬리말에 결례를 범한 부분이 있지는 않은지 다시 확인하러 왔다가 꼬리말 보았습니다.
저의 꼬리말은 곰돌아빠님의 서두의 질문.. [또한 그 ‘영적 임재설’에 대한 이성호 교수님의 이해가 과거도 그렇지만 현재의 개혁교회의 어떤 자료와 교회 전통이 그렇게 “명확하게” 주장하는지 묻고 싶습니다.(궁금해서...) ]
에 대한 답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이것을 의도하여 답글을 달았습니다. 논쟁을 위함은 아니고 이성호 교수의 글을 낯설게 여기시는듯 싶어서 기타 견해를 소개해 드린 것입니다. 즉, 곰돌아빠님의 성찬에 대한 이해의 폭에 도움을 드리기 위함이지 이성호 교수의 견해를 납
득시키려는 의도는 별로 없습니다. 물론 본의 아니게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음을 인정하며, 그렇게 느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평안하시길.
헉! 꼬리말을 잘못 달아서 옮긴후에 잘못단 꼬리말을 지우던 중 본래의 꼬리말까지 지웠습니다. 혹시 곰돌아빠님께서 복사하셨다면 옮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은 제가 본래 달았던 꼬리말입니다. 기억력에 의존한 것이어서 완벽한 복원은 아닙니다.
존 오웬의 성찬설교(나를 기념하라)를 읽어보시면 이성호 교수의 견해가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르시누스의 스승이자 세련된 성찬글을 남겼던 버미글리도 이성호 교수의 견해와 비슷합니다.
성찬을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이해하는건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성찬을 여러가지로 설명하다가 결국 '백문이불여일견' 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개혁주의 선배의 글을 통해 '올바로 이해'하고, 참믿음으로 참여하여 '체험하는것', 두가지를 병행할때 성찬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그런 실수 가끔 합니다...^^ 추천하신 책은 참고할께요. 그런데...으~ 대상을 읽어버린 제 댓글들은 어찌하는게 좋을런지요.ㅠㅠ 아! 그리고 버미글리에 대한 짧은 견해는 저도 봤습니다만 구체적인 것은 찾기 힘들군요. 버미글리 또한 우리의 영혼이 하늘에 올라간다는 표현을 했다는 건가요? 아니면 예수님의 몸을 영적으로, 믿음으로 먹는다는 말을 했다는 건가요?
아니면 둘 다를 주장했다는 건가요? 아무튼...버미글리의 제자이자 성찬론에 대해서는 칼빈에게 극찬을 받았던 울시누스에게는 그런 견해가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올린글의 이승구 교수님의 견해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강해2 - 성령의 위로와 교회"이기도 하고, 하이델베르크에도 그런 직접적인 표현은 없습니다. 그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에도 제가 찾질 못하는건진 몰라도 화체설과 공재설에 반대해 신성의 임재에 대한 강조가 반복될 뿐 그와 같은 견해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의 댓글이 구체적이지 못해 죄송합니다.제가 포커스를 맞춘 것은 '예수님의 몸을 영적으로, 믿음으로 먹는다는 말' 입니다.
http://blog.naver.com/pleeq/80022178056 이곳에 가보시면 이성호 교수가 버미글리의 견해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찬론에 대해서 칼빈이 우르시누스를 극찬했다는건 금시초문인데 출처를 알 수 있을까요? 오히려 성찬론에 있어서 칼빈에게 극찬을 받은건 버미글리이고 이때문에 칼빈이 여러번 버미글리를 제네바에 초청하길 원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버미글리에 대해선 http://kr.blog.yahoo.com/passmanko/1324581 과
http://juwana.blog.me/110007439616 이곳의 글을..
곰돌아빠님이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바보새님 제가 글을 올리기도 전에 오해했다는 말을 먼저 쓰시는건 좀... "존 칼빈이 숨지기 전에 자신의 방대한 예레미야서 주석을 "가장 고명하신 프리드리히 제후께"헌정했다. 1536년 7월, 선제후를 위한 헌사에서 "폐하의영웅적인 용기.....남다른 믿음.....지극한 공손함으로 인해 제가 폐하께 품었던 깊은 경의를.....오래전부터 어떤 공개적인 행위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분별없는 자들이 마치 폐하께서 그리스도의 성찬에 관한 올바른.....교리를 경건하게 채택"했기 때문에 특별히 예레미야서 주석을 선제후에게 바치는것이라고 했다." "하이델베르크에 온 세 사람"의글과 "성찬에 관한 교리는 분명히
개혁주의를 따르고 있지만 몇가지 교리는 루터파와 개혁주의의 중간노선을 취하는 것도 있다. 칼빈이 이 문서를 검토한 후 극찬할 만큼,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고 경건한 내용이 특징이다."개혁신학의 광맥"의 글입니다. 또한 같은 책에서 "...하지만 이미 언급한 것처럼 칼빈은 1563년 7월 예레미야 주석을 프레데릭3세에게 헌정하면서, 그의 건전한 성찬론을 칭송한바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따라 그리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단정적으로 말해서 기분이 상하셨나보군요... 그런 의중은 없었습니다. 부주의한 표현이었네요 ^^;;; 제 표현은 오해하신 것 같다는 표현이었는데..
이미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성격은 성찬이 당시 핵심적 논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루터파 지역에서 나온 개혁파적 고백이라는 점 말입니다.
바보새님. 기분이 상한것은 아닙니다. 다만... 좀 조급하셨던게 아닌가 하는 마음을 담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죄송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급함을 다시 사과드립니다. 서로 배워가기를 소망하면서....^^;;;
zizia님 감사합니다. 그것 하나하나가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되어 좀 더 명확히 이해하는게 좋을것 같아 질문드렸던 것입니다.
예~바보새님.^^ 그런데 이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바보새님은 닉네임을 '바보새'라고 하시는 건가요? 뭔가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느낌이 풍기긴 하는데 왠지 윗분에게 바보라는 말을 계속 쓰려니 좀 죄송스럽기도 하구요...
윗분은 무슨 당치 않는 말씀을 ㅎㅎㅎ 바보새는 알바트로스라는 새의 별명입니다. 바다의 제왕이라 날기는 잘하여도 사냥에는 미숙한 새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은 마도로스의 친구인 새... 하늘을 꿈꾸며 사는 이 땅을 젬병이처럼 사는 삶에 제 모토가 있길래 ^^
돌트 신조에 첨부된 성찬 예식서에도 sursum corda가 나옵니다. 이성호 교수님이 제시하신 성찬관이 보다 개혁주의적인 성찬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종래 한국교회가 가진 성찬관은 개혁교회적이기보다 쯔빙글리의 기념설에 훨씬 더 많이 경도된 성찬관이라고 여겨집니다.
칼빈의 엠블럼도 믿음의 이러한 성격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심장을 들어 올리는 엠블럼 기억하시지요? 성찬의 참여는 믿음에 의한 참여입니다.
페이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하인리히 헤페의 개혁교의학을 찾아보시면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해석과 신학 게시판 2536번 <Re:성찬시행 및 참여의 방법> 를 보시면 칼빈 역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돌트의 성찬 예식서를 보실 있습니다.
위 바보새님께서 말씀하신 2536번 글은 아래의 주소입니다.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lPO/2536
글 우측 상단에 보면 '복사' 라고 작은 글씨로 있습니다. 그걸 클릭하면 주소복사가 됩니다.^^
zizia 님 제가 조금 모자라나 봅니다. ㅠ.ㅠ 제 눈에는 아무리 찾아도 흑흑...
워낙 작고 눈에 띄지 않게 자리잡고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으셨을 겁니다. 글을 클릭하면 내용이 나오지요?
제목이 상단에 있고 그 아래 아이디와 조회수와 작성일자 등이 있지요?
그 우측으로 시선을 옮기시면 주소와 함께 '복사' 라는 글씨가 있을 겁니다. 그걸 클릭하시면 게시물 주소가 자동 복사가 되고 ctrl + v 를 누르시면 붙여넣기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사 찾았습니다. ^^~~~
바보새님, 오히려 바보새님의 칼빈적 이해를 구체적으로 잘 담아놓은 자료는 "제2스위스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쯔빙글리의 기념설에 성찬개념이 머물러 있다는 것에는 깊이 공감합니다. 그 우울한 장례식 분위기도 그렇구요.... 성찬을 좀 더 깊이 연구하지 않는 모습들이 역력한것 같습니다. 견해의 차이가 있겠지만 세례또한 장로교의 살수례나 관수례를 신학적 차이로 보는것이 아닌 침례의 약식으로 보는 분들도 많은것 같더군요.
스위스 신앙고백이 자세히 담고 있지요. 들어올림은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고 성령의한 임재는 표지가 아니라 그 실제에 영적으로 참예함을 설명한 것이지요. ^^ 성찬의 신학적 이해가 더 깊어지길 저도 같이 소망합니다. 세례에 관한 곰돌아빠님의 생각을 좀 더 듣고 싶군요 살수례와 관수례에 관한 것 말입니다. 저의 무지를 씻어 주시겠습니까? ^^
그리고 저는 이성호 교수님의 글이 칼빈의 개념이라는것을 모르기에 글을 올린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제가 위에 올린글의 다섯번째줄에 보시면 "벌코프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이성호 교수님과 같은 칼빈의 개념을 소개한 후 이렇게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히려 너무 직접적으로 적용을 하셔서 이런 글을 올렸던 것이지요.
네 ^^~~ 곰돌아빠님 입장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바보새님(닉네임의 의미를 알았으니 이제 좀 편하게...^^) 그분들의 견해에 반대하신 분들을 한번 보시면 알겠지만 그들은 칼빈주의의 반대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시대에 칼빈주의를 강력하게 변호하고 사랑했던 분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이승구 교수님도 그렇지만 우선 저 인용한 글들이 있는 책의 저자인 루이스 벌코프, 로버트 레이몬드 그리고 로버트 댑니와 윌리엄 커닝햄, 게다가 찰스 하지 까지가 포함됩니다. 그저 변두리에 있는 신학자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의 개념들을 안고 더 성경적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더 깊이 숙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네 ^^;; 곰돌아빠님 저도 그점 알고 있습니다. 훌륭한 개혁파 신학자들이지요 그럼에도 이들의 주장은 신학자들의 의견이고 돌트와 제 2 스위스 신앙고백은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이지요 ^^;;;
신학자들이 합의된 바 그러한 결론을 낸 것이 아니라면 옛 지계석을 옮기는 것을 옳지 않다고 봅니다. ^^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성찬의 신비적 성격을 그러한 이해 비유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쯔빙글리적 인문주의적 이해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성례전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바보새님의 말씀도 일면 공감이 가지만 칼빈의 영향력에 의해 그것에 동조하는 귀한 선배님들에 의해 그러한 신앙고백이 만들어진 것처럼 그분들의 견해를 통해 하나의 의견이 어떤 시대에 지배적이 될 수 있다는것 또한 염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앙고백서들이 그렇게 이성호 교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고백하지는 않는 측면도 있습니다.
물론 신앙고백서들이 다 동일한 고백을 하지는 않겠지요 ^^;;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신조로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돌트신경은 개혁파의 핵심적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을텐데요 ^^ 그 점에 방점을 찍어 말씀드린 것입니다. ^^
예, 바보새님. 잘 알겠습니다.^^ 저도 이 개념들을 가지고 더 깊은 묵상의 세계로 나가봐야 겠습니다.
별말씀을요 ^^ 저도 곰돌아빠님을 통해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움에 감사합니다. ^^~~~
물론 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이야기가 되지만 말입니다.
세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에 하면 좋을것 같습니다. 이미 아시리라 생각되는데... 간단히 말해보자면 개혁주의, 그중 장로교는 예수님의 전체사역을 염두해 두고 그 사역의 공효를 통해 (물론 그 정점이자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지만...) 우리의 죄가 "씻어짐"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 씻어짐을 의미하는 측면에서 뿌리거나(살수례, 쇄수례라는 말도있더군요.) 머리에 붓는(관수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민의조항에 "세례를 받는 사람을 물속에 잠기게 할 필요가 없고, 세례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물을 붓거나 뿌려서 베푸는 것이 좋다"라고 합니다. 구약의 피를 뿌리는 의식과도 연관시킵니다.
침례교의 이해는 예수님의 '묻히심'과 '부활'에 촛점을 맞추어 물에 잠기는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의미하는 '묻힘'을 상징하고, 물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음을 상징합니다.
그렇군요 ^^~~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