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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시대를 통한 교훈
히 3:7-19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히 3:7-10 / [하나님의 안식을 누릴 사람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뛰어난 분이기에 성령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ㄴ) `오늘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아라. 므리바에서 너희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너의 선조가 맛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ㄴ. 시95:7-11) 9) 너희 선조는 거기서 내가 어쩌나 보려고 시험하였다. 저희 위해 내가 한 일을 똑똑히 보았는데도 한번 떠보려 하였다. 사십 년 동안 10) 나는 그 백성들에게 넌더리가 나서 어쩌면 저리도 마음이 떠나 있을까. 저들은 내 도를 들어 보려고도 하지 않는구나 하고 말하였다. 11) 나, 무척 화가 나 맹세하였다. 그 땅에, 편히 쉬라고 너희에게 허락한 그 땅에 너희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12)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늘 자신을 살펴 악에 물들거나 불신앙에 빠져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13) 아직 시간이 있는 동안 날마다 서로 일깨워 주어 아무도 죄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4) 만일 우리가 처음에 믿기 시작했을 때처럼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충성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5) 그러므로 지금 이 시기가 중요합니다. 다음 경고를 잠시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므리바에서 너희 선조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너희 선조가 맛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고집을 부리지 말아라.' 16)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자기들의 지도자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빠져 나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17) 그리고 4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산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죄를 짓고 광야에서 죽어 시체가 된 바로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 18)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결코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말씀하신 것은 누구를 향해 하신 말씀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까? 19) 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은 하였으나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사건을 통하여 성도는 어떠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7-11) 율법주의에 빠져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시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성령이 이르신 바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구원의 날에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여호와의 길을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던 불순종의 결과를 반복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리라(12-14)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 받는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진리의 말씀을 믿음으로 시작하여 끝까지 견고히 잡고 지켜냅니다. 이러한 신앙의 과정을 가는 동안 늘 경계해야 할 것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이며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매일 피차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15-19) 출애굽 40년 동안의 과정 속에서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여호와의 음성을 들어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불순종의 결과로 광야에 엎드려 시체가 되었고 약속받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복음의 음성을 들려주셔도 마음이 완악하여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조상들과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과 같은 불순종의 결과,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적용: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마음이 완고하여져서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는 아닙니까?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들은 개인적으로는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권속임을 깨달아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같이 우리도 온전해야 하며 아버지께서 거룩하심같이 우리도 거룩해야 합니다.
< 설 교 >
히브리서 3:7-19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광야에서의 불신앙(7-11절)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 그리스도인의 삶의 환경은 참 척박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기록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또렷하게 소개하여, 구원받은 그들이 삶과 믿음이 더욱 신실해지도록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그중에서도 크고 작은 박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격려하기 위해서 보내어진 서신이 세 개 있는데, 베드로전서와 요한계시록, 히브리서입니다. 그런데 이 세 서신은 강조점이 약간씩 다릅니다.
베드로전서는 ‘윤리_바른 삶’을 강조합니다. 네로 황제의 무자비한 박해 속에서도 영생의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삶을 바르게 하는 것,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6-17)”라고 권면합니다.
요한계시록은 ‘계시’를 강조합니다. 로마 제국의 11번째 황제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의 별명은 ‘부활한 네로’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에 대해서 악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종교를 가져도 좋지만, 반드시 로마 황제도 숭배하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을 거역하면 재산이 몰수되었고, 반역자로 여겨져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황제숭배가 다신교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런 갈등이 없었지만,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와 기독교에게는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황제를 위한 기도를 함으로써 정면충돌을 피했고,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고 믿었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를 결코 주(主)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있는 교회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미래의 승리를 바라보고, 신앙의 절개를 지킬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와 그에 대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특히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그 그리스도는 선지자보다 뛰어나시고, 천사보다 뛰어나시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율법을 전한 모세보다도 뛰어나시고, 모든 제사장보다도 뛰어나신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 때, 히브리서를 찬찬히 읽으면 굉장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내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굉장히 존귀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빛이 빛나듯이, 우리의 삶의 길에 어둠의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질수록, 히브리서는 더욱 용기와 소망으로 다가옵니다. 저도 히브리서를 묵상하다가 가슴 벅차오르는 감격을 경험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이 어제 나눈 1-6절을 다시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권면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하심을 모세와 견주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집을 지은 분이라면,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지어진 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집을 맡은 아들로 충성했다면, 모세는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을 내리시는 분과 그 명령을 받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시선으로 볼 때 초라한 목수로 오셨다고 해도, 모세-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율법을 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몰골이 거지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영원한 거지 왕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분이시므로’가 ‘그러므로’입니다.
(7-8)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이 말씀은 시편 95:7-11의 인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앞부분에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라는 말을 덧붙이므로 이 말씀을 반드시 그리고 꼭 자신의 삶에 적용하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여 르비딤에서 장막을 쳤을 때 있었던 사건(출 17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곳, 르비딤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와 다투며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툼은 몸싸움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고,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은 신체적인 위협이나 고소·고발을 가리지 않고, 오직 물을 달라고만 떼를 썼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7:1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르비딤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 장막을 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전에 장막을 쳤던 곳은 신 광야였습니다. 거기에서 만나도 먹었습니다. 그런데 르비딤에서 모세와 다투었던 것은, 모세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못한 곳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즉 지금의 삶의 상황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못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고집을 부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하나님께서 결코 모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므리바에서만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민수기 14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이 열 번이나 시험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10)’이라는 숫자는 아홉(9)보다는 하나 많고, 열하나(11)보다는 하나 작은 숫자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은 ‘만수_가득 찬 숫자’로 ‘아주 많은’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400년 동안 노예살이하던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까? 독립운동을 했습니까? 아니면 자유인이 되는 비용을 지불했습니까? 또 그들이 홍해를 어떻게 건넜습니까? 배를 타고 노를 저었습니까? 아니면 헤엄을 쳤습니까? 또 그들이 광야 40년 동안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했습니까? 농사를 지었습니까? 아니면 외국에서 수입해 왔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렇게 증거합니다.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미혹되다’의 문자적인 뜻은 ‘길을 잃다’입니다. 그들은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출애굽기_헬.엑스 호도스’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길 밖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속적인 가치관의 길이나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길로, 사람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의 길과 사람의 길을 고집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현상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는 우리 고집을 부리다 길을 잃지 말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중고등학교 영어 수업 시간에 단순미래, 의지미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너는 잘 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너를 잘되게 하겠다”라는 화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내가 그들을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말겠다”라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은총을 맛본 1세대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배교하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경고와 권고(12-14절)
그래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12-13)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하였고, 하나님의 역사로 광야길 40년 동안 걸으면서도 만나는 물론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던 것을 경험한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악한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께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악한 마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어느 정도를 행하면 악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정답은 12절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드는 것은 전부 악한 마음입니다. 물론 우리를 하나님께 접붙이도록 하는 것은 선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계합니다. 죄의 유혹은 우리를 완고하게 만듭니다. 처음에 죄를 지을 때는 두려운 마음이 큽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두려움은 작아지고, 급기야 일상화가 됩니다. 그것은 두려움이 작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완고해져서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 자체가 이미 징계입니다.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은 ‘처음 받았던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처음’과 ‘중간_과정’, ‘마지막’은 모두 중요합니다. ‘처음’이 없다면 ‘중간’도 없고, ‘마지막’도 없습니다. ‘중간_과정’이 없다면, 성숙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집안에 아기가 태어났는데, 자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처음’도 좋고, ‘중간’도 훌륭한데, ‘마지막’ 맺음이 없다면, 지난 과정은 모두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진짜 승리자이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최후에 웃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지막이 가까워졌을 때, 열심히 하면 되겠습니까? 최후에 웃으려면 처음부터 최후의 순간까지 신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최후에 웃는 자가 진짜 승리자이다’라는 격언은 ‘최후’를 강조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사람이 되어 영원히 웃을 수 있습니다.
불신앙 복사 금지(15-19절)
15-19절은 광야를 지났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불순종을 다시 조명합니다.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완고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 뜻이나 내 생각대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최고의 권위자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가 칠칠하게 행동하지 못할 수도 있고, 공부를 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곧 부모로 하여금 격노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16-18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는지를 삼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16-18)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아니냐?’라는 말을 3번 반복합니다. 하나님께서 격노하시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듣는다’는 단지 ‘청력’만을 의미하지 않고, ‘순종’을 의미합니다.
“우리 아이는 말을 잘 들어요. 우리 아이는 말을 잘 듣지 않아요.”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곧 그 말씀이 나보다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스라엘 자손,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도 아니었고, 나이가 들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는 박해를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야 했던 당시는 삶의 터전이 참 척박했습니다. 이 시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언제나 소망이 있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또 쉽지 않은 믿음의 길을 걸어야 했던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하셨던 주님께서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머리를 들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 주님을 향해 머리를 들며,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1세기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 어려웠습니다. 그 그리스도인에 주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아무리 척박하다고 해도, 또 우리를 머리를 들 수 없는 상황이 적지 않다고 해도, 우리의 인생을 좋은 땅으로 가꾸어 가게 하시며, 우리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주님으로 인해서 소망을 갖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관의 길과 사람의 길을 고집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 주님의 말씀의 길과 하나님의 길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였음에도 하나님을 향해 완고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하나님을 향해 완고한 마음을 가졌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어떤 교훈을 얻었습니까?
2. 악한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지게 됩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선한 마음으로 바꾸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3. 우리가 처음 믿을 때의 복음을 끝까지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이 잡은 복음 중에서 더욱 굳게 잡아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향해 머리를 들며,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순종하라
히브리서 3:7-19 /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
성경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구약과 신약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약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약속이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약속인 것입니다. 구약을 그림자라고 한다면 신약은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은 유대교의 경전이요 신약은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구분할 수 도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구약의 모든 역사를 진행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도중 광야 40년간의 불 신앙과 불순종을 우리들에게 소개하며 우리들에게 순종의 삶을 살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은 전연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좋은 믿음을 갖는 대에 필요한 자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소개받는 우리 모두는 이 귀한 말씀을 듣고 변화를 받아 영원한 안식에 모두 들어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7-11) [2]불 신앙을 경계하라(12-14) [3]불 신앙의 결과(15-19)입니다.
[1]맨 먼저 7절부터 11절의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본문 히브리서 3:7-11 은 구약 시편 95:7-11을 인용한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은 받았으나 광야 생활 중에 불 신앙과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던 사건을 소개한 내용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마음이 강퍅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마음이 강퍅했다고 한 근거가 무엇일까요? 첫째 모세를 통해 바로 왕 앞에서 행한 많은 이적을 행하게 함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체험하였고 또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를 육지 같이 지나갔으나 애굽 군대가 홍해 바다에 들어섰을 때에는 물이 다시 합쳐져 몰사한 이적도 체험했던 것입니다. 그런 체험을 가진 자들인데도 목이 좀 마르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 말고 다른 지도자를 세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들 하였던 것입니다. 또 고기 생각이 난다고 차라리 종노릇을 하더라도 애굽에서 고기를 먹던 때가 좋았다고 불평하였던 이런 자들을 두고 마음이 강퍅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따라 언제나 충분히 채워주실 분이심을 믿지 못하고 40년간 계속 하나님을 시험해보는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강퍅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시어 마시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4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아니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셨던 것입니다.
애굽에서 단 3일이면 가난 땅에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몇 년 걸렸습니까? 40년 동안 고생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오직 이유는 그들의 불 신앙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40년 후에 그들이 들어갔습니까?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 외에는 광야에서 다 죽고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 만한 장정만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명 이었고 레위인은 이 계산에 빠졌으며 아이들과 여자들은 다 빠졌으니 총 인구는 200-300 만 명에 이를 것인데도 그 중에서 가나안 땅에 발을 딛은 사람은 오직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산 교훈을 보면서 모세보다도, 천사보다도 더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욱 신뢰하고 순종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선조들과 같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 시험하는 그런 강퍅한 마음을 갖게 되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9절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적을 체험하고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40년 동안 계속 하나님을 시험해보는 자들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강퍅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화가 나시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2]두 번째로 12절부터 14절까지의 불 신앙을 경계하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훈을 받았으니 그들과 같이 강퍅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고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삶은 우리들로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 강퍅한 마음을 갖게 할 것이므로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또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 강퍅하게 되지 않도록 성도들끼리 피차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권면하되 바로 오늘 하라는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자신을 살피고 오늘 형제를 권면하여 믿음에 서 있고 그 믿음을 굳건하게 지켜 나간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간에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에 입성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일로 미룬 계획만 가지고는 우리에게 아무런 보험이 될 수 없다는 경고인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15절부터 19절까지의 불 신앙의 결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5절부터 19절까지에서는 다시 40년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 신앙을 질문형식으로 반복 소개하며 우리들에게 불 신앙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는 누가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을 화나게 했느냐고 질문하고 있으며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는 4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노하셨느냐고 묻고 있으며 불 신앙과 불순종의 죄를 지어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하나님이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느냐고 질문하고 있으며 순종치 않은 자가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셨다고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9절에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결론을 짖고 있습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를 요약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사실을 이적을 통해서 체험했으면서도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강퍅한 마음을 가졌으므로 그들의 강퍅한 마음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셨으며 그 이유로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시므로 결과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40년간 행군은 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했으며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한 자만 들어갔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교훈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사람의 말은 믿고 따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믿지 않고 따르지도 않는 그런 강퍅한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파가 있고 각 교파마다, 각 교회 지도자마다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성경과 어긋나는 것이라면 그런 주장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하는 자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교훈인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은 오직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이라는 교훈인 것입니다. 세상 교회의 대다수가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현대 기독교의 신학이나 철학이라고 가정한다 할지라도 그 대다수가 따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신했던 200만 300만의 이스라엘 백성 중에 오직 신뢰하고 순종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오늘이라고 하는 날에 우리들의 믿음을 돌아보아보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마음이 강퍅하여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보다는 교파의 주장이나 교파의 전통, 또는 세상의 철학을 따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돌아보고 이웃과도 피차 권면하여 불신과 불순종의 삶을 청산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영원한 안식에는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보다도 높으시며 모세보다도 우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어떤 큰 유명한 교계 지도자 보다 높으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뒤로하고 이 세상 그 누구의 말을 따르는 자는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일을 스스로 포기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수가 따르는 곳이 진리일 것으로 믿지 말고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소수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순수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영원한 안식이 보장된 것입니다. 그 영원한 안식은 주님 오실 때에 우리들에게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퍅한 마음을 청산하고 신뢰와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 지금 당장 주님이 주신 안식과 평강을 누리며 이 평강이 주님 오실 때에 연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전해들은 모두에게 이 세상에서도 주님이 주신 평강을 누리며 또한 주님 재림시에 영원한 안식에 다 들어갈 수 있도록 신뢰와 순종의 삶을 살아나가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음성을 듣지 않는 안식 없는 삶
히브리서 3:7-19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듣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이 준비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강퍅하지 않은 마음이다. 사람이 들으려 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말부터 다르다. 그리고 사람은 간절하지 않으면 겸손해지지도 순종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드시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사고하게 하셨다. 자신에게 주신 사고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볼 때 마음이 강퍅하지 않다면 세상의 모든 집을 지은 이가 있듯이 세상도 지으신 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고집한다는 것이고,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에 반하여 스스로 안에서 사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므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순종하므로 그 음성이 말씀이 되어 자신의 삶을 주관하게 되면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반대로 삶의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자기 삶이 평안한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적어도 한 분야에 안식한다는 것은 더 이상 수고하지 않아도 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수고와 대학교수로서의 연구활동은 다른 것이다. 되기 위한 수고는 교수라는 자리의 안식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교수로서 연구하는 것은 교수라는 자리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인생을 이 관점에서 보면 인생에 의미를 찾은 사람의 삶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고,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모든 순간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은 안식이 없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 삶의 모습과 수고의 모양은 같아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예수님의 자이만큼 극명하게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을 저주로 벌로 규정하시는 것은 아담의 범죄 이후에 수고하도록 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은 불순종애 대한 대가성 벌이 아니라, 자신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가진 존재의 숙명이다. 자기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이 남을 판단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삶도 끊임없이 판단하기에 선악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그 판단에서 선한 자리에 이르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안에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사는 것이 바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안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둘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하는 존재가 되려면 하나님의 음성 앞에 강퍅한 마음을 버리고 순종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의지나 신념이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의외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과 육신 가진 인생에게 주신 사고와 선택과 인지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보면 너무 쉬운 것이다. 유일하게 이것을 방해하는 것은 육신의 평안이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은 육신의 수고가 수반된다는 것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의 정욕이고, 그 육신의 정욕이 이끄는 평안의 기준은 선악의 행위에 대한 반대급부에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이 생각하는 선한 행위를 공로로 쌓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마음이 강퍅한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 온 세상과 육신에게 주신 역량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은 모든 것을 목적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목적대로 순종하는 관계는 온전하다. 모든 부품이 설계자의 목적대로 작동하는 기계는 언제나 온전하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만드신 인생의 삶이야 말한 것도 없다. 그 온전하고 평안함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이다.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가 회복되어 있으니 그것이 안식이다. 그 안식을 누리는 사람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아 보여도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예수님이 다른 만큼 다르다.
오늘도 자기가 생각하는 선함을 이루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예수님을 닮겠다고 노력하며, 더 나은 신앙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수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수고가 안식이 없다는 이름표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표가 붙어 있다는 것은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이 이끄는 선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사람은 안식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으니 안식 없는 수고에 매몰된 삶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시 보는 히브리서 06
히브리서 3:7-19 / 박영선 목사
오늘 본문에서는 출애굽사건을 예로 들면서 이 히브리서의 수신인들, 초대교회의 박해와 어려움 속에서 당황하고 실족하고 머뭇거리는 교우들을 힘있게 격려하며 또 꾸중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출애굽 때에 그 큰 기적 속에 구원함을 얻은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광야생활에서 약속의 땅을 순종하지 못하여 믿음이 없어서 입국을 거절 당하고 광야에서 죽어나갔다하는 것입니다.
`순종한다`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요구되는 성경의 그저 당연한 요구들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믿음이 없어서 순종하지 못했다`이렇게도 쓰기 때문에 순종은 분명히 믿음의 행위이고, 믿음은 순종으로 행사되어야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경우에 그렇듯이 당연한 결론을 강조한다고 해서 사람이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 당연한 결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는 수많은 시행착오, 수많은 기회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시간과 과정과 훈련이라는 것으로 허락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시간성을 벗어난, 그저 판별 혹은 결론 혹은 무슨 보상같은 것으로 시간성을 외면하는 바람에, 이런 일들이 정말 요구하고 만들어내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게 됩니다!
어떻게 설명을 하면 할수록 더 꼬이는지,, 제 책임인지, 여러분 책임인지,,
그래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순종해야 되는데 순종이 되지않을 때, 믿음을 가져야되는데 믿음을 어떻게 지금의 현실적 도전을 극복할 만큼 동원할 수 있는 그 비법을 모르는 그 현실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되게 생겼습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를 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오늘 본문 14절에 있는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이런 말들이 당연하면서도 어렵죠.
첫믿음, 첫각오, 첫결심이 이렇게 늘 일정하지 않다는 걸 우리가 압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이 인용하고 있는 출애굽사건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셨지, 애굽을 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일이 꼬인거죠.
바로를 죽이고, 뭐 절을 세우든지 여러분 마음에 드는 누굴 세워서 우리 말이 통하는 우리편의 권력자를 세워서 우리 말을 들어주는 그 비옥한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했으면 아무 문제 없을텐데,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합니다!
애굽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고, 그 사이를 광야지대가 막고 있는데, 그 지리적으로 광야를 지나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동안 이 사이에 여러가지 일이 생깁니다.
우선 여행의 고단함, 또 광야가 도전하는 불편함,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고, 그리고 막막하고,, 하는 것들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큰 시험이 돼서, 뜻 밖에도 이스라엘백성은 그 큰 기적을 보고 애굽에서 해방이 되어 나와 찬송과 기쁨으로 시작을 한 여정 속에서 계속 이런 푸념, 절망, 비명을 지릅니다.
'왜 꺼내 줬느냐? 거기서 종살이 하는 게 낫다!' 이 굉장한 대답이죠.
어디서부터의 해방이 무엇을 위한 해방으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자유 해방이라는 것은 사실 덧없습니다!
공포나 압제로부터의 해방은 당연하지만, 공포와 압제로부터 해방이 되어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고, 자랑스러운 그런 자리에 가는 해방이 아니라면, 그런 구원이 아니라면, 그런 자유가 아니라면, 그 전보다 나을 것이 없죠!
'우리가 순종해야 된다, 믿으면 된다' 라는 말들은 맞는 말이지만, 믿음을 동원하고 순종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세상적은 무지, 거역, 비열함, 죄악된 생각들을 끊고 헌신을 했음에도 말하자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간 데가 광야에 불과하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된 건지, 믿음이 무슨 소용인지, 막막함 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거죠!
그러니 이 사건은 좀 더 깊게 우리가 믿음을 논할 때에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선언으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라는 말이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는가, 책임으로 다가오는가 이렇게 한번 물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라` 라는 말은 책임입니까? 은혜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논하면 백프로 은혜에 관한 얘기입니다.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로 말미암는 `은혜를 받아라!` 그렇게 얘기하지않고 `예수를 믿어라!`이렇게 얘기를 할까요?
믿음은 은혜에 속한 것으로 보입니까? 책임에 속한 것으로 보입니까?
'목사님 그런 거 물어보지마세요. 제가 안심을 평안을 얻으려고 나왔지, 뭘 따질려고 나왔겠습니까?' 그런 얼굴을 하고있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여러분에게 어떤 뉘앙스로 옵니까? 책임입니까? 은혜입니까?
우리는 늘 뻔한 질문은 의심을 하는 그런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건 틀림없이 어디 함정이 있는 겁니다. 그렇죠?
은혜가 뭔지는 모두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를 `은혜 받으면`절대 그렇게 말을 안쓰고,
`믿으면` 이라고 써서, 분명히 책임적 요소가 있다는 걸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책임을 논하면 은혜가 없어지고, 은혜를 말하면 책임이 없어지는 이 문제가 우리를 사실은 신앙생활 속에서 가장 우리를 당황시키는 겁니다! 모순에 빠지게 하고 자가당착에 빠지게 하고 막막하게 하죠!
`믿음은 은혜가 책임을 요구한다`라는 말을 묶어서 만든 단어입니다!
은혜와 책임이 어느 쪽이 역할이 많은가를 동일한 평면에 놓고 분할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이 은혜가 해서 그 은혜가 책임을 목적하고 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단어에는 분명히 책임이 있는데, 그 책임은 하나님이 시작한 일이 만들어내는 목적지입니다!
쉽게 출애굽 사건으로 얘기하면, 구원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에 가서 나라를 건설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애굽에서 꺼낼 때는 100%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시죠. 열가지 재앙, 홍해를 가르죠. 가는 길에 반석에 물을 내시고, 만나를 먹이십니다.
그러나 가나안 입국은 순종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아니, 애굽을 박살내고 꺼내셨는데 그냥 보따리싸서 택배로 부치시지, 왜 불순종했다고 그건 그만두고, 광야에서 다 죽여버리는 겁니까? 이렇게 무섭게!"
"내가 그때 진노했다! 내가 맹세했다! 너희는 내 땅에 못 들어온다!"
그러니까 이 책임은 우리가 생각하는 쉬운, 성경에서 '너희가 책임져라!' 이렇게 얘기하지않고, `믿음`이라고 얘기함으로써,
'은혜와 믿음이 어떻게 전후로 시작과 결론으로 묶여있느냐' 만큼 신비하게!
책임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조건보다 더 큰,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의 본질적인 어떤 조건이 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본질적인 조건,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내어 하나님이 누구신가도 증명하시고, 하나님이 인류에게 무엇을 목적하신가도 증명하신 것이 `성육신`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우리와 방불한 모습으로 우리의
조건 속에 우리의 가장 막다른 골목에까지 내려오실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며! 우리를 그렇게 찾아온 것이 그냥 하나님의 자기증명에 그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광과 운명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라는 존재의 가치와 정체성을 알려주기 위해서도 성육신을 택하신 분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시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보고 영광되라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최고의 내용이 뭐냐? 책임입니다!
책임이라는 말은 매우 어려운 표현입니다!
본인의 능력, 본인의 어떤 자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존재가 자발성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항복과 기쁨과 순종을 우리의 가장 중요한 본질로 가지겠다는 자리를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말의 의심의 찌꺼기가 남으니까, 우리 인간의 영광이라는 것, 자유라는 것, 책임이라는 것이 가지는 명예를 인류역사에서 어떻게 인문학 속에서 역사 속에서도 이미 그것을 결론을 내렸는가 보십시다!
'서구역사의 최고의 공헌은 시민정신을 발견한 거다' 그럽니다. 시민정신!
'시민정신이란 한나라를 구성하는 국민들은 자유로와야 하고 그리고 그 자유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걸 알아야한다' 이게 시민정신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자유로와야 하고, 자유가 책임을 이해해야 한다!'
동양은 뭐였을까요? 동양은 윤리였습니다!
서구가 시민정신을 깨우치는데까지 역사가 흘러왔고, 동양은 윤리라는 책임이 있다는 걸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와 그 책임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승리와 영광까지는 없습니다!
세상은 나와서 갈 데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올 수도 없고, 나와서 갈 데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흙으로 만들었지만, 너희라는 존재는 나와 믿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책임을 나누는 그런 경지까지 내가 목적하고 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시고 우리로 답하게 하십니다! 해결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질문, 도전에 답을 하는데, 그 답이 뭐냐하면, 내가 만들 수 있는 것보다 큰 것을 답을 하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안하죠.
뭘 않느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약속된 땅으로 가는 시작에서는 홍해를 건너고 출애굽기 15장에서 한 영광의 찬송과 그 고백들은 이 자기네를 붙잡고 있던 권력이 깨지고, 거기서 그들을 꺼낸 하나님의 권능을 실컷 봤기 때문입니다!
열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이 그들을 감격시켰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그들이 뒤집어진 것은 이 고생을 하느니, 옛날생활이 더 안전했다는 거죠. 약간 밑지고 살면 됐거든요.
전쟁도 무슨 정치도 무슨 먹고 살 일도, 그건 알아서 하고 약간 괄세받고 힘들게 살면 됐어요.
그런데 여기에 왔더니 매일매일이 만나를 한꺼번에 줘서 창고에 쌓아 놓게도 못하고, 또 물도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 그것 빌고 아우서치면 바위에서 한모금 마실 것나오다 말고, 여기는 모르겠단 말예요. 앞이 보장이 안되어 있어요. 저기는 보상되어 있단 말예요.
거기서 사백년이나 살았거든요. 익숙하다고요!
우리 모두가 하는 기도 아녜요? `하나님 제가 뭘 더 바라겠어요? 그저 우리 자식들 흉 안보고 나 걱정 안하고 이렇게 살다가 그냥 빨리 그냥 곱게 죽여주세요!` 여기가 광야죠!
`난 분노했다! 야 이ㅆㄲ들아 내가 네 애비인데, 날 뭘로 아는거냐? 뭐 곱게 살다가 그냥 쉽게 죽게 놔두라고? 너 ㅆㄲ 정말 죽어볼래?` 그게 이 얘기죠!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 하나님이 어떤 진정성을 갖고 우리를 만들고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고 있느냐? 역사가 뭐냐? 인생이 뭐냐? 현실이 뭐냐?` 에 대해서 우린 밤낮 하나님한테 `하나님 이게 뭐예요? 차라리 돌아가는게 낫잖아요? 왜 불러내갖고 고생을 시키세요?` 맨날 그 얘기 아녜요? 표정을 보세요! 옆사람 한번 보세요! 어디 괜찮은 표정이 있는가? 괜찮은 표정이 없잖아요!
다 짜증이 나고, `이게 뭔가?` 란 말예요!
뭘 모르면? 명예를 모르면!
`인간이라는 존재와 운명이 가지는 하나님이 전심을 기울여서 만들고 기르고 채우고 있다!`는 생각을 아무도 안하는거죠!!
그러니까, 쉬운 거,, 쉬운 걸로 대강 살다가 체념하는거죠.
가나안 들어가서는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가나안 들어가서는 이번에는 우상 섬겨 갖고 망하죠! 왜요?
우상이란 뭐냐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 하나님 앞에 벌받았다, 그런 문제가 아나리,
우상이란`쉬운 것으로 타협하겠다`는 거죠! 쉬운 것으로 타협하겠다!
하나님이 `그렇지 않다! 너희는 너희는 마음껏 영광을 명예를 승리를 구가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나라 만들어라! 그런 존재가 되라!` 이것 다 거부했어요! 등 따시고 배부르면 그만인 거예요!
요즘은 TV보면 다 눈 커지고, 등 따시고 배부르고 눈 커지면 다 인거예요!
그러면 안돼요! 총기가 흐려지잖아요! 눈이 크면 기가 다 빠진데요! 아, 다들 정신들을 차려요!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뭔가? 예수를 믿으면 무슨 뭐가 형통하고 뭐 잘 할 그런 것들로 이렇게 썩 둘러쳐서 어물어물어물,, 그렇게 못하게 하나님이 박살을 내는거죠! 이게 고난이예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성경이 이렇게 5장 8절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됩니다.
고난은 큰 거예요! 무엇으로부터 풀려난 정도가 아니라, 긍정적으로 만들어야될 어떤 구체적인 거예요!
예수님 마저도 하나님을 증명하는 일에도 구체성을! 우리가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일도 구체적인!
도전과 시험과 유혹을 뿌리치고 최소한의 안심, 최소한의 어떤 확인 정도가 아닌! 훨씬 큰, 시간되면 밥주면 되는 정도가 아닌!
예수님은 사역 초기에 광야에 나가서 시도하시고 준비하시는 중에 시험을 받습니다.
`떡을 만들어라, 성전에서 뛰어내려라, 내게 절해라,,` 이 전부를 거부하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죠?
거기 그 조건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일을 감수하시죠!
떡에 매인 인생! 모든 문제를 해결하라고 아우성치는 진정한 목적과 내용을 외면하자는 일, 신기하고 놀랍고, 작은 거짓과 작은 기만에 붙잡히는 것들을 거부하셨어야 됐어요!
`내게 절하면 천하만물을 주겠다`를 거부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도전하고 위협하는 존재를 놔 둔 채로 그 조건 속에서 아버지 일을 하시는 거죠!
그래서 여러가지 시험을 다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시죠!
죽이겠다고 덤비고, 그에게 와서 조롱하고 그리고 기어코 팔고 채찍질하고 놀리고 달아맵니다!
그 모든 것보다 큰, 그 모든 것에 답하는 것으로는 답이 나오지않는!
그 모든 것을 해결해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닌,,! 더 놀라운 우리의 상상을 벗어난 일을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증언하셨습니다!
그것, 우리 인생의 그것 지금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뭡니까? `하나님도 고생하시지말고 저도 고생시키지말아 주십시요!` 그 외에 해 본 기도가 뭐가 있습니까?
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합니까?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할 틈이 있습니까?
여러분이나 잘 하세요! 그건 내가 할테니까,,
기도를 뭐해야 되는지 모르게,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직면하지 않으니까! 어물어물,, 체념하고 있는거죠!
하나님이 일한다는 걸 안 믿는거죠!
`나 힘듭니다. 나 원망스럽습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암만 들어야 소용도 없죠.
그래서 기껏 최소한으로 내려와서 이제 `나라나 잘 되고, 비도 좀 그만오게 하고,, 그런 정도에서 헤메고 있으니까 가나안에 못들어가고, 거기서 다 죽었다! 너 정신 차려라!`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하나님 지금 네 인생에 일하고 있다! 너 믿음으로 걸어라!`
믿음은 뭐라고요? 은혜를 우리가 어디로 미는 거라고요? 책임으로 미는겁니다!
"너는 어떤 존재냐? 무엇으로 만족할래? 네 가치는 어디까지야? 네 기대는 뭐야? 네가 소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네한테 하겠다는 것의 차이를 이해해봐! 생각해봐!"
"하나님, 저 죽을 것 같습니다!"
"내 아들 네가 못 박았어! 내가 더 진정성 있어? 네가 더 진정성 있어? 원망을 하면 누가 더 원망할 게 많아?"
그렇게 묻는거죠!
"내가 너희보고 무슨 무슨 댓가를 내래? 너 훌륭해 지라잖아! 나 그것 절대 타협 안한다는 걸 몰라? 너 죽어볼래? 너 죽지도 못해 이 ㅆ꺄!" 이거죠! 그러니까 예수 믿는겁니다.
우리의 자랑이죠! 우리의 명예입니다!
여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현실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고, 편안한 얼굴을 만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손해입니다!
한 인간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는 데 있어서, 여러분들과 아무런 아닌 게 됩니다!
그런 망신일랑 당하지 마시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위대한 인생을 사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요!!!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가져야할 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사실과 지금 일하고 있다는 사실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택하고 순종하고 이겨야합니다.
혹 실패하는 날이 있으면 그 다음에는 보다 나아져야 됩니다.
우리의 실패가 우리의 타헙 거기가 끝이 되지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니 다시 힘내게 하시고 기어코 승리하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음을 강퍅케 하는 병
히 3:7-19
히리서는 기자는 본문 8절에서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은혜롭게 하려고 하면 꼭 시험에 들어 마음이 강퍅케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음의 병에 걸리면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외모에 특별히 신경을 썼던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유행하는 신종어(新種語) 가운데 '외모산업'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사업 계획을 생각하고 계시다면, 외모 사업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용실, 피부관리실, 스포츠센터, 각종 화장품회사, 이 모든 것들이 다 외모를 관리하는 외모산업입니다. 최근 가장 호황을 맞는 병원 중 하나가 성형외과입니다. 옛날에는 흉터 정도를 고쳐주는 병원이었지만, 지금은 멀쩡한 것을 다 고치는 공사를 합니다. 물론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쳐서 예뻐진다면 공사하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옷도 깨끗하게 입고, 자기 가진 것에서 최고로 예쁘게 보이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몸매도 가꾸어야 하고, 자신을 아름답게 보일 권리가 있고, 어떤 면에서는 책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외모에 신경을 쓰는 만큼 마음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상당한 돈과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여 외모를 가꾸지만, 마음을 가꾸는 사람은 참으로 발견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잠언 말씀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생명의 근원이 외모와 육신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문제입니다. 얼굴은 아름답고, 몸매는 누구에게 빠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외모를 가졌지만, 그 마음이 형편없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가정과 사회가 고통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질병들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질병에 대해 알았고, 오늘은 마음을 강퍅케 하는 병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우리 영혼이 성숙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속의 중요한 질병 하나를 고쳐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강퍅케 하는 병입니다.
도대체 마음을 강퍅케 하는 병이 무엇일까요? '강퍅하다'는 단어는 '딱딱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알기 쉽게 설명하면,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4장 2절)에서 유사한 단어를 사용했는데, '양심에 화인(火印)맞은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의 양심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은 선한 양심을 가진 반면 어떤 사람은 화인 맞은 양심을 가졌다는 겁니다. 여기서 '화인'이란 단어는 화상입니다.
피부에 심하게 화상을 입으면 흉터가 생깁니다. 그 흉터는 감각을 잃어버려 만져도 잘 모릅니다. 바로 이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마음이 강퍅해진다는 말은 무감각해진다는 말입니다. 감각이 없어져 버려요.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의 진리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마음이 완전히 굳어져 버리는 겁니다. 주의 말씀을 모르는 것도 아니며,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어도 내 마음이 무디어져 버린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설교를 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때때로 하나님 앞에 애통해져야 하는데, 무감각해져 버리는 겁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들려오는 겁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마음의 강퍅함입니다.
여러분! 간경화가 얼마나 무서운 질병입니까? 간은 원래 부드러워서 영양분을 잘 저장하고 자기 기능을 잘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간이 어떤 연유로 인해 딱딱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그 기능을 못하는 상태를 간경화라고 합니다. 병중에서 심각한 질병입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의 강퍅함은 이런 간경화와 비길 수 없는 중대한 질병이라고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간이 딱딱해질 때, 우리는 긴장하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많이 신경 써야 할 것은 우리의 영혼이 강퍅한가, 질병에 걸려있지 않은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러한 사람들을 향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응답치 않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시장에 나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그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지금 마음이 강퍅하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라고요. '피리를 불어도 저들이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안에서 슬픔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말씀이 나를 꾸짖고 질책할 때 주님 앞에 나아와 애통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려야 함에도 우리의 눈에 눈물이 다 말라져버린 상태! 이것을 마음이 강퍅한 상태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1. 마음이 강퍅하면 어떤 결과가 생깁니까?
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집니다.
이렇게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두 가지 엄중한 결과가 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12절)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을 잃는다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이 말은, 구원은 받았지만 이 땅을 살아갈 때 생명 되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과 소망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전혀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아무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진 자입니다.
겨울에 산에 가보면 나뭇가지가 똑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겉은 똑같아 보이지만, 속은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른 가지들이 한 나무에 달려있습니다. 한 가지는 생명이 있는 가지요, 한 가지는 생명에서 떨어진 가지입니다. 그것이 언제 결판이 납니까? 봄이 되면 납니다. 우리 눈에 똑같이 보여도 생명 있는 가지는 봄에 싹을 내는 법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가지는 봄이 되고, 여름이 되어도 마른 채로 있습니다. 농부가 나아와 그 가지를 잘라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매 없는 가지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저와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이 강퍅해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는 드리는 것 같은데, 구원은 받은 것 같은데, 하나님의 생명과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2.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11절을 보세요.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는 19절에서도 강조합니다.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마음이 강퍅해지면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식'은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한 겁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잘못 해석하여 '가나안'을 '구원'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했을 때 이미 구원은 받은 겁니다. 그러면 이 가나안은 무엇일까요? 구원받은 이후에 이 땅에서의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축복의 삶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읽어보면 이런 얘기를 합니다. '너희는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또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참 안식은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우리의 신분이 안식에 들어간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안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어떤 안식일까요? 이 땅에 사는 동안 구원받은 기쁨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놀라운 삶인 줄 믿습니다.
우리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구원받고 교회에 나오고는 있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 전혀 감사와 감격과 기쁨이 없는 삶! 이것이 우리 마음이 강퍅하게 될 때 생겨나는 무시무시한 결과입니다. 그 결과는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가끔 기뻐합니다. 이유는 사업이 잘되어서 기쁜 겁니다. 낙심합니다. 이유는 사업이 망했어요.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평안이 무엇인지 전혀 모릅니다. 하나님의 안식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불행한 삶입니다.
마음이 강퍅한 병을 진단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할 때 이 병에 걸리는가? 예방을 위한 병의 원인을 하나님은 정확히 세 가지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2. 마음이 강퍅케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① 마음이 미혹될 때입니다.
10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우리의 마음이 미혹될 때, 마음이 강퍅해진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미혹된다'는 말은 방황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다스림이 없는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는데,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관심이 없어요. 그저 환경에 따라 요동치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마음입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웃고, 나쁜 일이 생기면 낙심하고,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다스림이 없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조금만 괴로움이 와도 원망하고, 조금만 어려워도 낙심하고 짜증냅니다.
이 미혹되는 마음을 출애굽기 17장의 예를 들어 히브리기자는 설명해 줍니다. 이곳에 우리가 잘 아는 사건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에서 르비딤으로 가는 과정에 물이 떨어졌어요. 목이 마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모세 앞에 나아와 원망합니다. 그때 모세가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목이 마르게 하면, 목이 마른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바라보아야지, 어찌하여 나와 싸우려 하느냐!" 두 번째로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이렇게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모세에게 계속해서 시비를 겁니다. "모세야! 우리를 어찌하여 애굽에 그냥 두지 않고 이곳까지 데려와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너무나 괴로워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신기한 해결책을 주십니다. 거기에 큰 바위가 있었나 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내가 바위를 향하여 설 테니 홍해를 갈랐던 그 바위로 나를 치라!"라고 하십니다. 바위가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지팡이로 그 바위를 치면, 바로 하나님을 치는 겁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가 바위를 쳤더니, 거기서 물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훗날 고린도전서에서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진정된 후, 모세가 그곳의 이름을 두 가지로 짓습니다. 맛사와 므리바입니다.
맛사(Massa)는 히브리어로 '시험'이란 뜻이며, 므리바(Meribah)는 '다툼'입니다. 백성들이 모세와 싸우려고 했고, 하나님을 시험했기 때문에 맛사와 므리바라고 이름지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미혹된 마음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조금만 어려움이 있으면 사람들과 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어려울 때 그 남편의 인격이 나타납니다. 마음이 미혹되었는지, 아닌지가 나타납니다. 잘될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만 어려우면 집에 와서 애들을 달달 볶고 난리를 피웁니다. 심지어 교회에 와서 목회자에게도 시비를 겁니다. 미혹된 마음입니다.
여러분, 일이 잘 될 때 즐거워하는 것, 누가 못합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의 환경이 어려워지고, 내 목이 마르고, 하나님께서 어떤 뜻이 있어 잠시 환란을 줄 때에 그 교훈을 감사함으로 받기보다는 그저 원망하고 사람들과 싸웁니다. 그리고 나가 "하나님이 정말 계셔! 내가 이렇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주무시는 거야! 뭐 하시는 거야! 하나님은 안 계신가 봐! 목사님 기도도 아무 소용이 없더라!" 하나님을 원망해 버립니다. 맛사와 므리바!
여러분 삶에 이런 현상들이 있다면, 여러분은 미혹된 마음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하여 이런 미혹된 마음을 갖게 되면, 언젠가 우리 마음은 간경화와 같이 강퍅하며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②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입니다. - 불신(不信)
12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 - 의뢰하지 못할 때 -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민수기 14장의 예를 들어주십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가데스바네아는 이스라엘이 다 내려다보이는 곳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신하지 않았다면, 40년 동안 광야에서 죽지않고 열 하루만에 가나안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어요. 열두 명이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열 명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 땅은 우리를 삼키는 땅이야! 늪이야, 늪! 가면 다 죽어! 그 땅 사람들이 얼마나 건장한지, 우리는 그 사람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더라!" 단 두 명인 여호수아와 갈렙만 나서서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14장 1절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처음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연합하여 웁니다.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통곡을 하며 웁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 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 낙담하고 억울해서 운 겁니다. 백성들이 낙담하여 "어떻게 하나! 거기에 거인들이 많다는데..."하고 웁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뛰어나와 설교합니다. "왜 우는가! 저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가 들어가면 저 땅을 얻을텐데, 왜 낙심하고 있는가!"
여호수아와 갈렙은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은 줄 믿습니다. 불신의 마음이 없었던 겁니다. 내가 저들보다 건강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무기가 나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군사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저 땅을 우리에게 주기로 약속하신 그 말씀 때문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가기만 하면 저 땅을 차지할 수 있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그때 백성들이 울다가 울음을 그칩니다. 손에 돌을 잡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쳐죽이려고 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선포하십니다.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40일,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리라!" 불신의 대가는 너무나 큰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그곳을 헤매다가 다 죽었습니다.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신이 무엇입니까? 교회에 나와 앉아있으면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합니다. "아멘!"합니다. 그러나 사업을 할 때, 가정 생활을 할 때, 운전을 할 때, 이 교회 밖을 나가서는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삽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가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내 경험과 내 방법대로 사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불신입니다. 주의 말씀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③ 죄의 유혹에 넘어질 때입니다.(13절)
13절을 보세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유혹은 누구에게나 오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유혹에 계속해서 넘어짐으로 죄를 지어 버릴 때, 우리의 마음은 강퍅해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죄를 한 번 짓고, 두 번 짓고, 거짓말을 자꾸 하고, 성령께서 찔러주는 죄를 결단함으로 끊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진다고 말씀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성령님의 X-ray 앞에 찍어보지 않겠습니까? 외모만 신경 쓰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진단해 보십시오. 내 마음이 부드러운 것과 강한 것, 저울의 바늘이 어느 쪽에 가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은 감사하게도 우리의 마음이 강퍅한 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헤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고칠 수 있는지에 대해 그 구체적인 방법 두 가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3.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고칠 수 있습니까?
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7,15절)
7절과 15절에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7절) ...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15절)”
여러분, 마음은 무엇으로 수술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강퍅해지고 딱딱해져 버렸어요. 감동이 없고 무감각해졌어요. 구원이란 말을 들어도, 십자가 노래를 불러도 옛날에는 눈물이 줄줄 흘렀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죄를 짓고, 죄에 대한 설교를 들어도 나에게 와 닿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강퍅해진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무엇으로 수술할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수술하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어요. 세상 어디에 가도 구할 수 없는 놀라운 말씀! 우리의 영혼을 유일하게 수술하고 치유할 수 있는 이 귀한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어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암송해야 합니다. 이 말씀에 능력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영을 찔러 쪼갠다고 말씀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나도 모르게 깊이 숨겨져 있는 죄의 종양의 뿌리를 치유하고 수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탕자 어거스틴을 성자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잘못된 습관으로 인해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마음이 강퍅해지셨나요? 마음이 간경화와 같이 굳어지는 것을 고민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②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12절)
12절 말씀을 보세요.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삼가 염려할 것이요. 성경에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염려하라고 하는가? 사도 바울은 비슷한 단어를 쓰면서, 근심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사망을 이루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의 영혼을 살린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말합니다. 직역하면 '주의하라' '조심하라'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을 가꾸라는 겁니다.
브라이언 카바로프가 쓴 '내 마음의 정원'이란 책이 있어요. 이 책은 우리의 마음을 정원에다 비유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어요. 정원을 가꾸다 보면, 심지도 않은 잡초는 너무나 잘 자랍니다. 그러나 키우려고 하는 화초는 조금만 관심을 게을리 해도 시들어 버립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와 같다는 겁니다. 나쁜 생각, 음탕한 생각, 죄에 대한 생각은 공부하지 않아도 내 마음속에서 너무나 잘 자라납니다. 그러나 좋은 생각, 사랑과 신앙에 대해, 게으름에 대해, 화를 내는 것에 대한 좋은 절제의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냥 자라지 않아요. 애써 키워야 합니다.
③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13절)
본문 13절에서 “말씀하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마음에 강퍅한 병이 걸려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이 병에서 치유 받기 원하시면 당신의 마음을 가꾸시기 바랍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성도들과 교제함으로 피차 권면해야 합니다. 왜 교회가 존재하는가! 권면(勸勉)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렇게 살았으면 합니다. 얼굴은 좀 못생겨도 많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몇 백 배, 몇 천 배로 마음을 가꾸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내 마음에 잡초가 났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도와주세요!" 기도제목을 낼 때마다 내 몸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제목보다 "형제님, 내 마음에 지금 시험이 들었어요. 미움이 싹트고 있어요. 시기가 자라납니다."라는 마음을 솔직히 오픈(open)하는 기도! 목장에 가지고 가서 이런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하는, 마음을 가꾸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주의 말씀으로 마음을 가꾸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 옥토 밭이 되어 주님의 축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처음 확신을 견고히 잡으라
히브리서 3:7-19
1-6절에서 저자는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믿는 도리의 사도시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6절 마지막에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으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소망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소망을 자랑스러워하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모든 특권을 누리면 살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제 처음 확신과 소망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로 들면서 우리가 왜 소망의 확신을 굳게 잡아야 하는지, 어떻게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을 수 있는지 영적인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7-12)
저자는 이제 처음 확신을 굳게 잡지 못해 실패한 이스라엘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7-11절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7,8) 저자는 시편 말씀을 성령께서 하신 말씀으로 영접했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완악하게 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노하심을 격동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신 광야를 지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이때 그들은 모세와 다투며 여호와를 시험했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의 자녀와 우리의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출 17:3) 그들은 심히 불평하고 원망하며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내어 그 백성을 먹이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사건을 치르고 난 후 그 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습니다(출 17:7). 여기서 맛사란 시험 (test, temptation)이란 뜻이고, 므리바란 다툼 (quarreling) 혹은 격동케 함 (provocation)이라는 뜻입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을 시험하고 격노케 하였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 도다.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결국 이들은 40년 동안 유리하다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광야에서 다 엎드러져 죽었습니다(민 14:26-35).
이상의 실패의 사건을 근거로 저자는 어떤 경고를 합니까?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12)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불신앙과 완악한 마음은 결국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실 때 어떤 소망을 주셨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살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속을 믿고 온갖 고난을 감당하면서 출애굽했습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을 하면서 믿음이 없어졌습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고 마실 물이 없어서 아이들이 보채고 먹을 양식이 떨어져 우는 아이들을 볼 때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애굽에 있었더라면 양식 걱정 물 걱정은 하지 않았을 터인데 괜히 우리를 불러내어 광야에서 굶어죽게 되었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직접적인 책임을 지도자 모세에게 돌렸습니다. 모세를 보면 화가 나고 자신들의 모든 불행이 모세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는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절대적인 사랑을 믿고 있으면 마음에 여유가 있습니다.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그러나 마음에 불신이 들면 조그만 일에도 신경이 쓰이고, 모든 생각이 자기중심적이 됩니다.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면 지도자를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자신의 모든 불행을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그래서 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은 서로 통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니 제자들의 삶은 실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던 삶이 헛되고,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로 여겨졌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순종한들 예수님처럼 개죽음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모든 것이 허무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음이 돌같이 굳어지고 완악해졌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음식을 먹을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6: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막 16:14) 믿음이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불신에 빠지면 악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고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날에 소망을 두고 거룩한 나그네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보다 더 가난해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보다 가정 형편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요셉처럼 믿음으로 살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따돌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온전히 믿지 못하면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모든 불행의 책임을 하나님의 종과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그래서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12)
이 시간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왜 나의 마음에 기쁨이 없고, 마음이 완악한지, 왜 예배에 참석해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믿음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거꾸로 보입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기름이 떨어지면 곤두박질 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처음 시작도 믿음이요, 과정도 믿음이요, 끝도 믿음으로 끝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십니다.
II. 매일 피차 권면하라(13)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3) 그러므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했습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현재를 가리킵니다. 현재적으로 날마다 서로 권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권면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자극을 주고 자극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죄의 유혹을 받지 않게 되고, 완고하게 되지 않습니다. 서로 권면해 주고, 권면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기 완고하다는 말은 ‘harden’이라는 말로 마음이 돌같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가꾸고 갈아엎지 않으면 굳어지고 완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의 유혹이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완고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이 가장 완고한 사람이 애굽 왕 바로였습니다. 그는 모세를 통하여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예배할 것이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 말씀을 듣고 마음이 완악해졌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여호와가 누군데 내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보내겠느냐?” 교만이었습니다. 둘째는 왜 내가 60만 명이 넘는 값싼 노동력을 조건없이 보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왕은 라암셋 성을 건축하고 나일강 주변의 토목사업과 애굽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예처럼 되어 버린 이스라엘 백성을 붙잡아 두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보내라고 하니까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교만하고,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마음이 완고한 사람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도 돌같이 굳은 마음으로 심겨지지 않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신의 안일과 게으름 때문에 마음이 완고해졌습니다. 그들은 힘들 때마다 애굽의 고기국물 수박, 참외, 마늘, 후추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민 11:4-6).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고달프기는 했지만 그때 그 시절이 좋아 보였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현재의 광야 생활이 고생스럽기만 하고 입만 벌리면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처럼 죄의 유혹에 빠져들면 마음이 완악해 집니다.
하와를 보십시오. 하와가 마귀의 유혹을 받기 전에는 마음이 부드러웠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마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늘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을 받은 후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보암직도 하고라는 말은 안목의 정욕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먹음직도 하고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먹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였습니다. 탐스럽기도 했다는 말은 마음에 돋아나는 탐심으로 인해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결국 죄의 유혹을 받은 여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완고한 마음을 품고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이처럼 혼자만 있게 되면 죄의 유혹에 약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이 완고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했습니다(13).
우리는 광야와 같은 불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유혹이 끝임없이 몰려옵니다. 이 세상이 주는 죄의 유혹은 세 가지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육신의 정욕이 가장 이기기 어려운 죄의 유혹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육체의 정욕입니다. 정욕이라고 번역해서 사람들은 성적인 욕망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욕망도 포함됩니다. 아마도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프로이드의 학설에 의하면 무의식의 97%가 성적 욕망으로 차 있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정욕(에피투미아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과도한 욕망을 가리킵니다. 타락한 본성대로 행하고자 하는 욕망이 늘 우리 마음속에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육체의 욕망을 자극하고 그것을 충동질해서 따르게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됩니다.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들어오는 온갖 유혹을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유혹은 제일 먼저 눈으로 들어옵니다. 성적인 욕망도 눈으로 들어옵니다. 요즘은 모든 광고 속에 성을 상품으로 팔고 있습니다. 성적인 자극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광고효과를 못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TV도 선정적인 장면을 방영해야 시청률이 올라갑니다. 내용도 막장 드라마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점점 과도한 노출 신을 내보냅니다. 또 요즘 홈쇼핑에 중독 걸린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이것도 안목의 정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다윗은 옥상에서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눈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여 범죄하였습니다.
이생의 자랑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여기에서 자랑이라는 말은 허풍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거만한 삶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다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갑니다. 열심히 일해서 남보다 더 좋은 집을 사고, 남보다 더 좋은 차를 타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남보다 더 잘 먹고 명품을 걸침으로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고자 합니다. 이런 죄의 유혹에 빠지면 마음이 완악해집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이 부끄럽고 하나님에 대하여 쏘리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혼자 있으면 이런 유혹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피자 권면해야 합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말씀으로 서로 권면하여야 합니다. 매일 새벽 기도에 힘쓰고, 정규적인 예배에 힘써 참여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권면을 받아야 합니다. 또 금요 목장모임이나 주일 오후 모임에 참여하여 성도의 사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피차 권면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가르치라고 하지 않고 권면하라고 한 데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새 번역에 보면 “'오늘'이라고 하는 그날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서로 권면하는 것은 서로 권면을 주고받으라는 말입니다. 공동번역에는 “성서에 "오늘"이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니 날마다 서로 격려해서 아무도 죄의 속임수에 넘어가 고집부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서로 격려하라고 했습니다. encourage(용기를 돋우다, 격려하다) one another daily, exhort(간곡히 타이르다) one another daily 서로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위로하고 힘을 주라는 말입니다. one another와 daily가 중요합니다. 날마다 서로 격려하면서 죄의 유혹에 빠져서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동역자들 가운데 마음이 완고해진 사람이 있다면 누구 책입니까? 내가 권면을 하지 않아서, 내가 격려를 해주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격려할 때 우리는 모든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혼자 외톨이처럼 떨어져 있지 않고 늘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처음 확신을 견고히 잡으라(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14).” 이스라엘이 처음에 출애굽하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넌 후에 승리에 대한 확신과 가나안 땅에 대한 희망에 넘쳤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3절에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출 15:13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출 15:17)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과 거기에 들어간다는 확신에 넘쳐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처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았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일 만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시작할 대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차지하게 됩니다.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2)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성령께서는 시편 기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마음을 완고하게 하면 하나님을 격노하게 하여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처음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자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처음 시작할 때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지 못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말합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하나님을 격노케 하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까?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모세를 좇아 출애굽은 했지만 처음 가진 그 확신을 끝까지 굳게 잡지 못했습니다.
홍해를 건넌 후에 가졌던 그 확신은 며칠 가지 못했습니다. 광야 생활에 접어들면서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자 처음 잡은 확신과 소망이 흔들렸습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굶어죽을 것 같이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지자 목이 타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외에도 광야생활이 길어지면서 얼마나 불편한 것이 많았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다. 애굽을 나온 것조차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이 가나안을 정탐한 후에 나타났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정복하자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열 두령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명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두려워서 가지 않겠다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까? 곧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다가 40년 동안 광야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이 40년 동안 원망하고 불평하던 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광야에서 자라고 태어난 2세들을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7절과 15절에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7)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15)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또 18,2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18절에는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9절에는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기 못한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받은 확신을 굳게 잡고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이 길만이 승리하는 길이요, 축복의 땅에 들어가는 길이요, 영원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자세로 순종해야 합니다.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이 승리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구원의 복음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기쁘고 소망과 확신이 넘쳤습니까? 그러나 핍박이 몰려오고, 많은 십자가가 몰려오면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고, 확신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나중에는 불신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처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왜 믿는데 문제는 끊이지 않을까? 왜 기도했는데 응답은 없을까? 정말 그리스도는 살아 계실까? 나의 인생에 이렇게 중요한 때에 왜 침묵하실까?" 어떤 경우에는 죄는 자기가 지으면서 책임은 하나님께 돌립니다. 짜증은 자기가 내면서 자기의 불행이 부모 탓이요, 하나님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혹은 자기가 미혹되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왜 내게 이런 죄에 빠지도록 합니까? 하나님! 왜 내가 이런 유혹을 받아야 합니까?"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와 같이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시고 믿음을 더하여 주십니다. 또 우리가 연약하에 죄에 빠진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와 회개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긍휼의 손길로 안아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 진리를 굳게 잡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마귀의 참소를 온전한 믿음으로 물리치고 그리스도를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기적을 체험해도 그 은혜가 한달 이상 가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불신에 시달리며 마음이 완고하여집니다. 또 죄의 유혹으로 인하여 마음이 완고하여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처음 확신을 굳게 잡고 끝까지 견고히 지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서로 피차 격려하고 권면하여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온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항상 부드럽게 하시고 참된 안식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 3:7-19 / 주병열 목사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과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으며 그분의 영광에 참여합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과 부를 잡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흔히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성공과 부, 건강이 온다고 주장하는 설교가 요즘 유행하지만, 그것은 생명과 영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영광이 물질과 건강과 성공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물질과 건강과 성공이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건강도 잃고, 부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영광이 있음을 우리는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아주 안타깝고 불행한 것은 세상의 부와 성공, 건강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얻은 자는 덜 좋은 것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니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영광을 얻은 자는 더 좋은 것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덜 좋은 것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가 누리는 생명과 영광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19절에서는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본문은 믿음에 대해서, 그리고 서로 믿음을 격려할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믿음 위에 세워지는 지식
7-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95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고대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광야를 지나올 때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거역하고 시험하던 일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너희 조상들처럼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즉 마음을 닫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테스트했습니다.
한 번도 처음부터 온전히 순종하여 믿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했고, 재단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시험하여 증험하였고 사십년 동안 하나님의 행사를 (시험하여) 보았습니다.’(9절). 하나님을 알기 위해 테스트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10절).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들은 항상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진짜 신인가? 하나님이 진짜 전능하신 분인가를 테스티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항상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정말 신인지 직접 확인해 보고 믿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아는 것이 먼저입니까? 믿는 것이 먼저입니까? 알아야 믿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어거스틴이나 안셀무스 같은 사람들은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알려면 먼저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뢰가 선행되지 않으면 더 이상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터툴리안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말했습니다. 불합리해 보이는 것을 믿음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오해가 생깁니다. 이것은 성경의 역설을 말하는 것이고, 믿음의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믿음과 지식, 이 둘 중 어느 것을 더 근본적인 기초에 놓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주에 가보지 않았지만 우주가 어떻다는 것을 우주에 갔다 온 사람들의 말을 통해 압니다.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까요? 비행기를 타고 한국과 미국을 수십번 날아다녔어도 우리가 지구가 둥글다고 가르쳐 준 교육이 없었다면 우리의 경험만으로는 알기 어렵습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먼저 들어서 아는 것이지, 조사하고 확인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서 안다는 것은 앞서 연구한 학자들의 말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즉 신뢰와 믿음 위에 지식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지식은 믿음에 기초합니다. 만약 믿지 못하면 아무리 새로운 사실을 경험해도 그것은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믿어야 지식도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새로운 지식은 우리에게 온전한 지식이 되기 어렵습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 성전에서 자랐습니다. 어느 날 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지만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인줄 모르고 엘리 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그가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3장 7절에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사무엘은 그 때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인줄 알고 대답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네 번째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 사무엘은 비로서 하나님께 대답했습니다. 그 음성이 하나님의 소리인줄 믿은 것입니다. 그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엘리 제사장의 가르침을 통해 받아들인 것입니다. 믿은 것이지요.
과학자들은 끊임없는 가설을 설정해 놓고 우주를 연구하고, 또 탐사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엄밀하게 말하면 어떤 가설을 믿는다는 전제로 실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지식보다 믿음이 먼저입니다.
문제는 신앙의 영역입니다. 자연과학에서도 이렇게 믿음과 신뢰가 기초가 되어 지식을 세워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신앙의 영역에서는 끝까지 내가 알아야 믿겠다고 고집합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마음을 완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믿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게 됩니다. 내가 보았기 때문에, 내가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너무 낙심해 있습니다. 이 어려움을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절망스런 마음으로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니님을 믿는다면 상황이 변화되기 전이라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고 난 후에 기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상황이 나아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상황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상황이 호전되기 훨씬 전부터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위기와 불안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상황에 구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상황이 변화되기 전부터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뻐하고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일이 해결될 조짐이 눈에 보이기 훨씬 전보다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삶에 먹구름이 덮쳐도 그것과 상관없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이나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삶의 전제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 인생의 엄청난 변화를 전제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믿음의 삶을 출발하는 것을 거듭난다고 표현합니다. 전혀 다른 삶의 원리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신뢰의 원리입니다. 세상이 믿음에 기초한 지식을 발전시켜 가듯이 우리의 삶도 그런 믿음 위에 하나님을 알아감으로 사는 것입니다. 즉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의 삶의 시작입니다.
이런 삶을 누리고 있습니까?
믿음은 격려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불신앙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불신앙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는 참으로 불리하고 어려운 환경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주 넘어지고,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악한 세상에 내버려 두시는 이유는 이곳이 우리의 믿음이 발휘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파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13절).”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오늘’은 여전히 고난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날을 의미합니다. 여전히 우리에게 방황과 혼돈을 경험합니다. 삶의 어려움과 장애물로 인해 슬퍼하고 낙심해 하는 날들입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날들입니다.
바로 그런 날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말씀합니다. 매일 권면하는 것입니다. 지체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매 어려움이 일어날 때마다 지체하지 말고, 기다리지 말고, 얼마나 잘 견디나 지켜보지 말고 그 즉시 서로를 권면하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바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다시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할 때의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많건 적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고 하면 동일하게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런 하나님을 향한 신뢰, 믿음의 진수를 느꼈습니다. 우리가 잘 모를 뿐입니다. 의식하지 못할 뿐이고, 잘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하지만 처음 주님을 만날 때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성경은 더 많이 알아가는 것 같은데, 그리고 교회 생활에 더 익숙해져 가는 것 같은데, 사실 믿음의 본질적인 신뢰에 대해서는 더 혼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뭔가 좀 더 알아가기 시작하니까 내가 뭔가 분별을 해야 할 것 같고, 내가 지식으로 좀 더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아니라 지식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종교적 형식은 남아 있지만, 진짜 믿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14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시작할 때 가졌던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그런 믿음을 격려하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신앙과 불신앙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본래 불신앙의 세계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불신세계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이런 영향은 우리가 마땅히 누릴 기쁨과 감사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적으로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격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필연적으로 모든 위험과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으로 승리하시고, 우리교회도 그렇게 서로를 격려하며 세워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