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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朴泰俊,1900.11.22∼1986.10.20)
작곡가.
대구 출생.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1921년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을 졸업하고,
28년
미국 터스칼럼대학,
35년
미국 웨스트민스터음악대학을 거쳐
36년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같은 해 귀국하여
숭실전문학교 교수,
45년
오라토리오 합창단협회장 겸
합창지휘자,
46년
서울여자음대 교수,
48-66년
연세대 음대 교수로 있으면서,
52년
미국 우스터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64년
연세대 음악대학장,
예술원회원이 되었으며,
60-74년에는
교회음악협회장을 역임했다.
66-74년
연세대 특별교수,
68-72년
음악협회 이사장,
78년
예술원 종신회원(작곡)이 되었다.
서울시 문화상(1957),
예술원상(1961),
문화훈장 대통령장(1962),
고마우신 선생님상,
소파상,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 수상.
작곡가.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崇實專門)학교를
졸업하였다.
숭실전문학교 재학시
서양 선교사들에게서
성악과 작곡의 기초법을 배워
가을밤, 골목길 등을 작곡하였는데,
이곡들은 동요의 초창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졸업 후 마산의 창신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선구적 시인
이은상(李殷相)과 함께
미풍, 님과 함께, 소나기,
동무생각, 순례자 등의
예술가곡 형태의 노래를 작곡하였다.
작곡형식으로는
1920년대 초반에는
진취적이고
시의 선택도 유절가곡에서
자유스러운 형태를 채택하여
우리나라 예술가곡류의
효시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1921년
숭실전문(崇實專門)을 졸업하고,
1928년
미국 터스칼럼대학,
1935년
미국 웨스트민스터음악대학을 거쳐
1936년
동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같은 해 귀국하여
숭실전문학교 교수,
1945년
오라토리오 합창단협회장
겸 합창지휘자,
1946년
서울여자음대 교수,
1948∼1966년
연세대 음대 교수로 있으면서,
1952년
미국 우스터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4년
연세대 음악대학장,
예술원회원이 되었으며,
1960∼1974년에는
교회음악협회장을 역임했다.
1966∼1974년
연세대 특별교수,
1968∼1972년
음악협회 이사장,
1978년 예술원 종신회원(작곡)이 되고
후학양성과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예술원상, 문화훈장 대통령장,
고마우신 선생님상, 소파상 등을 받았다.
1924년에서 1931년까지
모교인 계성중학교에 재직하면서
오빠생각, 오뚝이, 하얀 밤, 맴맴 등의
우리나라 동요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1932년 이후,
그는 미국의 더스커럼대학과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합창지휘를 배웠다.
귀국한 뒤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민족항일기 말에는
민족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5년 전문적 합창단인
한국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단하여 1973년까지
지휘자로 활동하며
합창음악 발전에 기여하였다.
1958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가를 설치하여
기독교음악교육의 초석을 쌓고,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학장
및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이후 1973년까지
남대문교회의 성가대를 지휘하고,
또한 1968년 이후
한국음악협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서울음악제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동요 등 150여 곡으로,
정돈되고 아름다우면서
격정이 내재되어 있다.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대구성악회 주관으로
달서구 도원동
월광수변공원에
흉상을 건립하였다
작곡가.
그리스도교 집안에서 자라났고
그리스도교계인
계성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졸업 후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하고
1921∼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미풍,님과 함께, 동무생각, 순례자 등을
작곡했다.
같은 해에 계성중학교로 옮겨
1931년까지 재직했는데,
이때는 오빠생각, 오뚜기, 하얀 밤,
맴맴 등 동요를 작곡했다.
1932년
본격적인 교회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서
터스컬럼대학, 웨스트민스터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36년 귀국해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있었으나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되자
교수직을 그만두고
1941년 고향에 내려가
계성중학교에 부임했다.
8.15해방을 맞이해
한국 오라토리오 합창단을 창단하고
교회음악 활동을 했다.
1948년 연세대학교에
종교음악과를 창설하고
초대학장을 맡았으며,
1952년
미국 우스터대학에서
명예음악박사학위를 받았다.
1964∼66년
연세대학교음악대학 학장을 지내다가
정년퇴임해
1973년까지
명예교수로 강의를 계속했다.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서울시문화훈장(1957),
문화훈장 대통령장(1962),
예술원상(1961),
국민훈장 무궁화상(1970) 등 수상.
장지 :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일산 기독교 공원 묘원.
작품세계
박태준은 일제하
민족의 비원(悲願)을
노래에 담은 작곡가로,
60여 년간 교육계에 몸담아
제자를 길러온 음악교육가로,
우리나라 합창음악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지휘자로
다재다능했던
한국 서양음악의 산 증인이었다.
20대 초반에
작곡한 동요 오빠 생각,
이은상의 아름다운 시에 붙인
사우(思友)는
당시 국민가요처럼
일반의 인기와 사랑을 받았고,
그의 대표적 작품이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찬송가를
쉽게 접할 수 있었고,
음악이 우리 사회의 정신 복지에
기여하는 예술임을 강조,
쉽고 재미있는 노래의
작곡에 앞장서 왔다.
그는 오빠 생각 작곡 후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하기 위해 도미,
1933년
미국 터스칼림대학교에서 문학을,
1935년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대학에서
합창, 지휘를 전공했다.
귀국 후 1945년
오라코리오 합창단을 창단,
지휘자로 활동하며
27년간 헨델의 메시아, 바하의 등
수많은 합창곡을 국내에 소개했다.
1955년
연세대 음악대 종교음악과
초대 과장에 취임,
1966년
정년퇴임까지 후배를 양성했다.
박태준은 광복을 맞은 지 한 달만에
오라토리오합창단을 창단해,
합창운동에 힘을 쏟았다.
60명의 단원으로 출발한
오라토리오합창단은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해 12월
창단연주로
헨델의 메시아 전곡을 초연함으로써
합창예술의 새 역사를 만들어냈고,
그후 오라토리오합창단이
한국에서 초연한 작품만도
베토벤의 장엄미사,
바흐의 b단조 미사,
멘델스존의 엘리야,
하이든의 사계,
모차르트의 레퀴엠, 대관식 미사 등
20여 작품에 이르고 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박태준 작곡 이은상 시의 가곡 동무생각은
그의 나이 22세 때의 작품이다.
평양에서 숭실전문을 졸업한
박태준은
일본의 압제 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현실과 암울한 앞날을 걱정하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중
마산의 창신학교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이곳에서 그는 청년시인
이은상을 만나게 되었다.
박태준과 이은상은
시간만 나면 바다가 내려 보이는
언덕에 올라
조국애의 울분을 토했고
이러한 울분을
일년 사철 아름답게 변하는
조국 산천에의 찬양으로 표출해 낸
이은상의 시를 보게 되자
박태준은 아직 작곡에 대해
미미한 상태였지만
음 하나하나를
오선지에 적어 나감으로써
가곡 동무생각이 탄생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동무생각은
이 입에서 저 입으로 퍼져나가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달래주는
민족의 노래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공적
박태준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찬송가를 들으며
음악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계성중학시절에는 독학으로 풍금을 배워 교회에서 반주를 하기도 했다. 이후 숭실전문에 입학하여 선교사로 와 있던 말스베리로부터 화성학을 배우는 등 음악가로서 기초를 다지게 되며 숭실전문 졸업후 마산의 창신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물>을 비롯한 13곡의 동요와 <동무생각>, <님과 함께>, <소낙비> 등 예술가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어린이의 정서교육에 관심을 가져 해방 전까지 70여 편의 동요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1932년에는 말스베리의 도움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대학에 유학, 교회음악과 작곡을 전공하였고 귀국하여서는 숭실전문, 서울여자의학전문학교 등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48년에는 김영환, 현제명에 이어 연세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1964년에는 음대학장을 역임했으며 정년퇴임 후에도 특별강사로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합창과 교회음악으로 그가 1945년에 창단한 오라토리오 합창단을 통해 헨델의 <메시아>, 베토벤의 <장엄미사>,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 등 20여 작품을 국내 초연해 우리나라 합창예술의 새 역사를 만들어 냈다. (예술원 홈)
【학력】
1921 평양 숭실전문학교 졸업
1928 미국 터스칼럼대학교 졸업
1935 미국 웨스트민스터 음악대학 졸업
1936 미국 웨스트민스터 음악대학원 졸업
1952 미국 우스터대학 명예박사학위
【경력】
1922 마산 창신학교 교원
1924 대구 계성학교 교원
1936 숭실전문학교 교수
1945 오라트리오합창단협 회장, 합창지휘자
1946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1948 연세대학 음악대학 교수(~1966)
1954 예술원 회원
1961 한국교회음악협회 회장(~1973)
1964 연세대학교 초대 음악대학 학장
1966 연세대학교 특별교수
1968 한국음악협회 이사장(~1972)
1974 한국음악협회 고문
【상훈】
1949 제1회 서울시 문화상
1961 대한민국예술원상
1962 문화훈장
1970 국민훈장 무궁화장
【평론】<음악교육론>(조선교육.1947.8) <예배와 찬송>(신학논단 1.1953.7) <교회음악의 사적고찰(史的考察)>(숭실대학보 1.1955.12) <한국종교음악계(韓國宗敎音樂界)의 과거와 장래>(예술원보 4.1960.9) <회중음악(會衆音樂)=Congregational Music>(神學論壇 6.1961) <음악: 오늘의 사조(思潮)>(신사조.1962.3) <현대음악에 관하여>(숭실대 숭대 7.1962) <사우곡(思友曲): 영원한 가곡(歌曲)>(사상계.1965.8) <종교음악의 대중화>(종교계 2.1966.3) <중세교회음악(中世敎會音樂)>(예술원보 10.1966.10) <종교음악이 한국악단에 미친 영향>(월간음악 6.1970.12) <현대음악>(예술논문집 13.1974.11)
【동요】<가을밤>(1920) <꽃봉투>(1920) <가을>(1920) <꼬부랑 둔덕>(1920) <고기잡이 할아버지>(1920) <골목길>(1920) <꽃밭>(1920) <나비와 잠자리>(1920) <내 방패연>(1920) <눈꽃>(1920) <눈이 오는 밤>(1920) <물새>(1920) <우리나라 기>(1920) <오빠생각>(1925) <맴맴>(1926) <밤 한 톨 떽떼굴>(1926) <머리 감은 생쥐>(1926) <반달>(1926) <설날>(1926) <꾀꼬리>(1926) <귀뚜라미>(1926) <오뚝이>(1927) <찢어진 연.(1927) <기차>(1927) <방울>(1927) <보슬비>(1927) 빨강 비 파랑 비>(1927) <슬픈 밤>(1927) <종소리>(1927) <줄넘기 노래>(1927) <하얀 밤>(1927) <학교 문>(1927) <순이>(1930) <단풍잎 하나>(1930) <햇빛은 쨍쨍>(1930) <우리집 콩나물 죽>(1930) <군밤장수>(1930) <대낮에 생긴 일>(1930) <빨간 열매>(1930) <누나 얼굴>(1930) <당나귀>(1930) <시계방>(1930) <벼룻돌>(1930) <바스락>(1930) 조약돌>(1930) <교문 밖에서>(1930) <누가 누가 이기나>(1930) <먼지 나는 자동차>(1930) <시계>(1930) <시골 정거장>(1930) <심심하여서>(1930) <아침 마을>(1930) <연목물>(1930) <우리 길>(1930) <우리 누나 달>(1930) <잠자리>(1930) <저 바다>(1930) <멍멍 꼬꼬댁>(1931) <길가기>(1934) <해맞이 달맞이>(1935) <둥글둥글>(1935) <고요한 밤>(1938) <가을 부채>(1938) <철새>(1939) <다람쥐>(1940) <바윗돌>(1940) <산 산 무슨 산>(1940) <앞으로 나가자>(1940) <별 별 무슨 별.(1940) <아침저녁>(1940) <어린이 노래>(1940) <작은 배>(1940) <해야 달아>(1940) <새나라 어린이>(1945) <우리나라 무궁무궁>(1945) <우리나라 어린이>(1945) <우리 동무>(1945) <오솔길>(1945)
【가곡】<미풍>(1922) <동무생각>(1922) <님과 함께>(1922) <소낙비>(1922) <금주가>(1927) <어야드야>(1930) <임 생각>(1934) <추석>(1934) <첫 겨울>(1934) <물새알>(1935) <나>(1935) <부활>(성가.1935) <평안>(성가.1935) <오시나봐>(1938) <야호>(1938) <나물 무치기>(1938) <백두산 하늘 못>(1939) <산길>(1940) <봄바람>(1940) <참대밭>(1940) <낙동강>(1940) <밤길>(1940) <빗소리>(1940) <길>(1940) <무국화는 피고 피고>(1952) <그이 생각>(예술논문집 5집.1966) <아, 가을인가>(예술논문집 5집.1966) <마님과 머슴>(예술논문집 5집.1966) <빗소리>(예술논문집 5집.1966) <전원의 노래>(예술논문집 5집.1966)
【저서】<박태준작곡집>(가곡집.1927) <중중때때중>(동요곡집.1929) <양양범버궁>(동요곡집.1931) <물새발자국>(가곡집.1939) <뜸북새>(동요곡집.1941) <박태준동요작곡집>(음악사.1949) <성가(聖歌)>(대한기독교서회.1955) <새 중학음악 3>(동아출판사.1960) <중학음악 1>(동아출판사.1967) <중학음악 2>(동아출판사.1967) <중학음악 3>(동아출판사.1967) <(인문계고등학교) 음악 1>(동아출판사.1975) <박태준작곡집>(세광출판사.1975)
(대구 박태준 흉상)
(대구 박태준 흉상)
(대구 동무생각 노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