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정치인의 자살이 있었다.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 자살로 끝맺는 일이 이제는 흔한 일처럼 자주 뉴스에서 접한다. 내 주변에도 정신과 약을 먹는 이들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어느새 우울증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더구나 신앙인의 우울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성경 인물 중에서도 우울감을 느낀 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사역에 성공하고서도 이세벨의 협박 한 마디에 도망쳤던 엘리야는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구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의 예언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계속된 고난을 당하자 생일을 저주하며 우울감을 드러냈다. 모세도 백성의 요구에 지쳐 죽기를 구했고, 욥도 생일을 저주했다. 다윗의 시편에서도 우울과 낙심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우울감은 자주 느껴지는 감정이다. 왜 우울감이 생겨날까?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잠언 13:12).
보통은 바라던 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희망이 사라질 때 우울감이 찾아온다. 시간이 갈수록 절망이 커져 죽음을 생각하다 삶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위의 성경인물들은 우울감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이는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자살은 살인이어서 지옥을 택하는 것과 같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께 우울의 감정을 토로했고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긍휼의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의 기도를 들으시고 새 힘을 주셨다.
상담을 배울 때 사람의 기질이 다혈질, 담즙질, 점액질, 우울질로 나누는 테스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완전 우울질의 결과가 나왔다. 다혈질의 특성은 한 개도 없었다. 그만큼 나는 우울과 친했다. 울어도 슬펐고, 웃어도 가슴 밑바닥에 있는 슬픔을 감지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이 말씀을 접할 때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우울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해왔다. 내적치유를 받게 되면서 어렸을 적 상처를 발견하고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도 얼굴에는 기쁨이 없었다. 왜 그럴까? 주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나는 우울의 동굴에 갇혀 지내고 있는지 괴롭기만 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 깨닫게 되었다. 우울감은 내 마음에 주님으로 꽉 채워져야 하는 공간을 내 생각, 내 감정, 내 입장들로 채워져 있음을 알았다.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 중요하고, 주님의 마음보다는 내 마음에 상처 받는 걸 더 크게 여겼다. 그렇게 ‘나’가 더 컸고 중요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을까봐 거기에 더 신경을 썼다. 그건 내가 주인으로 살았다는 증거였다.
이런 나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린다. 우울의 동굴에 자주 들어갔던 내가 주님의 은혜를 크게 경험한 후에 다시는 우울에 빠지지 않고자 결심했다. 그러나 내 연약함을 알기에 또 넘어질까 염려가 되어 기도했다. 주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울과 너를 분리하라. 우울이 네게 다가오면 그것을 내게로 던져라. 십자가 뒤로 던져라.”
나는 그때까지 우울과 내가 하나인 줄 알았다. 우울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에 놀랍게도 우울감이 내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깥에서 다가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된 경우가 있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우울을 향해 물러가라고 명령했더니 썩 물러가는 게 아닌가? 자주 그런 감정이 다가올 때마다 “이 우울한 감정을 십자가로 던집니다”하고 외쳤다. 신기하게도 언제 그랬냐 하듯이 우울의 감정이 사라지고 다시금 주님의 평안이 내 안을 감쌌다. 마치 빛과 어둠이 동시에 공존하지 못하듯, 우울의 감정을 몰아내니 주님의 빛으로 내 영혼을 밝게 채워진 것이다.
전에는 우울이 나인줄 알고 우울한 감정이 올라오면 그걸 껴안고 살았었다. 우울한 환경을 묵상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거듭 생각하고, 그 말들을 곱씹으며 점점 더 우울감을 키웠다. 그 결과 가장 정죄 받은 대상은 내가 되었다. 상대방 탓하다가 내 탓으로 돌리니 더욱 우울해졌다. 자존감이 낮아졌다.
이제는 그런 감정들을 십자가로 던진다. 주님이 이미 해결하셨기에 믿음으로 선포한다. 사탄에게 속지 않고 주인 되신 주님의 마음을 묵상한다.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려 찬양을 크게 틀어놓고 부르거나 큰 소리로 선포 기도한다. 말씀 묵상과 설교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한다. 그러면 사탄은 패배하고 우울과 함께 도망간다.
<천로역정>에 ‘의심의 성’이 나온다. 크리스천과 소망이 순례 길을 잘못 들어 그 성의 주인인 ‘절망의 거인’에게 잡혔다. 거인은 순례자들을 때리며 자살을 하라고 협박한다. 거인의 아내는 ‘자포자기’인데, 순례자들이 아직도 살아있느냐며 더욱 심히 괴롭히라고 거인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살을 부축일 뿐 직접 죽이지는 못한다. 자살하라고 사탄이 유혹할 뿐 선택은 본인에게 달려 있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몇날 며칠이 지나자 순례자들은 거인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고 싶은 유혹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크리스천은 의심의 성을 빠져나올 방법이 자기 가슴에 있는 약속의 열쇠라는 것을 깨닫고, 열쇠를 꺼내 감옥을 열고 탈출에 성공한다. 이 비유를 통해 절망은 우울감을 주어 결국 자살하게 만들어 지옥에 끌고 가려는 사탄의 간계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크리스천에게는 이를 능히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말씀의 능력과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번지점프에서 낙하를 하기 전에 사람들은 무장을 한다. 튼튼한 줄로 그들의 몸을 단단히 묶는다. 만일 이 생명의 줄이 없다면 사람들은 결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지 않을 것이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줄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심을 믿으니 살아갈 힘이 있는 것이다. 이 줄이 없다면 자유낙하가 아닌 추락하는 꼴이 되리라. 내가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려면 얼마나 두렵고 절망이 되어 우울하지 않을까? 나는 그 줄을 한시라도 놓치지 않으리라.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편 4:7-8).
선한 말 꿀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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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간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