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0년(정조14) 5월27일 청나라 건륭제(재위 1735~1796)의 팔순절에 사은사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박제가에게 정조는 10월24일 청나라를 재차 방문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면서 당시 규장각 검서관(임시직·5~9품)이었던 박제가에게 군기시 정(정3품)을 하사한다. 외교사절로 파견되는 만큼 그에 걸맞은 벼슬을 임시로 내린 것이다. 검서관은 서얼 출신을 위해 규장각 내에 부설한 잡직으로 문서를 필사·교정하는 일이었다. 그런 관리에게 임시직이지만 정3품이라는 고위직을 하사한 것이다.
박제가는 1750년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1700~1760)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가 소실(첩)이었기 때문에 서자라는 신분적인 한계를 안게 된다. 박제가는 키가 작지만 다부진 체격에 당대의 천재라는 평을 들었다. 만주어와 중국어에 능하고 시문 또한 상대가 없을 정도였고, 서예공부 역시 벼루와 먹이 마르고 닳도록 연습했으며, 유교경전과 역사서가에 통달했다는 극찬을 들었다.
박제가는 총 4번 중국을 방문했다. 특히 1780년(정조2)의 1차 사행(使行)을 마친 박제가는 중국에서의 견문과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의>를 저술했다. 그는 <북학의>에서 중국을 배우자(學中國)라는 말을 20번이나 썼다.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값,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 중국처럼 무한정 찍어낼 수 있는 벽돌로 성(城)을 쌓아야 한다. 운반도, 가공도 어려운 석성은 버려야 한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도 형편없다. 도저히 팔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조잡하다.”
박제가가 중국을 외친 이유가 있었다. 그냥 두면 조선은 곧 망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폐쇄적인 나라라 판단했다.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조선의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중국을 상징으로 하는 선진문물의 도입을 재촉했다. 그가 보기에 조선의 버팀목이라는 사대부는 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부류였다. “국가의 폐단은 가난인데, 나라의 종벌레인 사대부만 번성하고 놀고먹는 자들만 늘고 있다. 이들이 천하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면서 자신들만 중화(中華)라고 떠들고 있다.”
박제가는 이런 자들(사대부)보다는 차라리 서양인들을 기용하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했다. 즉 기하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기술에 능한 서양인들을 과감히 관리로 영입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이어 ‘우물론’을 제기하면서 소비의 미덕을 강조하기도 했다. “재물은 우물이다. 물을 퍼내면 우물물이 다시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버린다.” 소비의 미덕을 이렇게 간결한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 짜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당대 조선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경세유표>에서 “이용후생을 담당할 이용감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박제가의 제안을 정부기구 설립 제안으로 구체화 한 것이다. 그러나 당대 조선의 그릇은 박제가의 개혁을 받아내지 못했다. 박제가는 훗날 승하한 정조의 말씀을 되뇌며 회한에 찬 시를 한 편 짓는다. “신을 불러 왕안석에 견주니 그 옥음 아직 귀에 쟁쟁하여라.”(<정유각집> ‘권5·이원’)
왕안석(1021~1086)이 누구인가. 북송대 위대한 개혁사상가였지만 보수파에 의해 소인배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정조도 박제가가 왕안석에 견줄만한 개혁사상가였지만 너무 앞서갔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박제가는 심지어 관상감에도 이용후생에 능한 서양인들을 대거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박제가의 열변에 사대부들은 왜 오랑캐 편을 드냐고 어이없어 했다. 사대부의 눈에 중국은 청나라 오랑캐였다 오히려 조선이 소중화(小中華)라며 우쭐댔다.
<북학의>에는 지금도 논란을 일으킬만한 ‘중국어공용론’이 실려 있다. “글자는 말의 근본이다. 한데 조선은 글자를 말로 쓰지 않고 따로 말을 만들었다. 예컨대 ‘天’을 그냥 ‘천’이라 하지 않고 굳이 ‘하늘 천’이라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중국어는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쉽다. 글을 모르는 부인이나 어린아이도 일상으로 쓰는 말이 모두 제대로 문구를 이룬다. 중국은 말로 인하여 문자가 생성됐다. 문자를 탐구해서 그 말을 풀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글을 버리고 말과 뜻이 같은 중국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특히 우리 땅에서 중국어가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기원전 108년 중국이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한 이후 중국말이 이 땅의 공용어가 되었을 것이라며, 그러나 발해 멸망(926년) 이후 옛 땅이 중국에 편입되면서 중국어가 사라졌다는 견해다. 박제가는 나아가 역대 임금들이 중국어를 익히도록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사실 박제가의 말은 일리가 있다. 임진왜란 때 중국어에 능통한 자들이 없어 곤욕을 치렀다. 특히 박제가 시대에는 더 심각했다. 사대부는 중국을 오랑캐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과의 행사나 문서의 대화는 통역관들에게 맡겼다. 통역관의 농간 때문에 부정부패가 심했다.
그러나 박제가의 주장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다. “중국은 말이 문자와 동일하다면 그렇다면 말이 변하면 문자의 소리도 변하지 않은가. 우리말은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사용하지 않나. 우리는 맨 처음 받아들여 배운 한자의 소리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은가.” 유득공의 <고운당필기>는 동방의 소리가 중국의 소리보다 낫다면서 특히 동방에는 고음이 있다고까지 했다. 박제가는 이런 주장에 대해 문자와 말은 하나로 통일하고 옛 한자의 소리가 바뀐 것은 학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재반박했다.
박제가의 순수성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는 <북학의>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천지를 그리워하며 수심에 잠긴다. 천 개의 글자로 가슴 속 생각을 풀어내려니, 어느 겨를에 내 한 몸 위해 고민하리오.”(<정유각시집> 제2권) 일신을 초개처럼 버리고 백성을 끔찍이 여기던 박제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국어공용론’ 만큼은 어떨까. 망국의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는 조급함 때문에 빚어진 박제가의 ‘오버’가 아닐까.
<북학의(北學議)>에서 북학이란 『맹자(孟子)』에 나온 말로, 중국을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저자 박제가(朴齊家)는 청년 시절부터 시인으로서도 유명해 연경(燕京)에까지 명성을 날렸다. 그는 채제공(蔡濟恭)의 호의적인 배려로 연경에 갈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그 동안 연구해 왔던 것을 실제로 관찰, 비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연구한 것과 3개월의 청나라 여행을 통해서 본 경험을 더해 집필하였는데 당시 쓴 북학론이 바로 이 책이다.
당시의 시대 풍조로 보아 청나라인 중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매우 과단성 있고 혁명적인 사상이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는 정치적인 대외정책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에 사대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멸시하는 풍조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시대 풍조에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받게 될 박해를 무릅쓰고 구국·구빈(救貧)의 길이 오직 북학밖에 없음을 역설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소신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이다. 그는 실학자들마저도 천편일률적이었던 금사론(禁奢論)을 배격하고 용사론(容奢論)을 주장하였다. 즉, 민중의 수요억제·절검이 경제 안정에 필요하다는 통념을 물리치고 생산 확충에 따른 충분한 공급이 유통 질서를 원활하게 한다는 경제관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공급 확충을 위해서는 적극적인 선진 문물의 습득과 보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북학의>는 2권 1책으로 된 사본이다. 이 책은 내외편 각 1권으로 구성되었다. 내편은 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해 현실의 문화와 경제생활 전반을 개선하려 하였다. 외편은 상공업과 농경 생활에 관한 기초적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북학의>는 광복 전에는 간행되지 않다가 광복 직후에 『진소본북학의』의 번역문만이 출판되었다. 그 뒤 1962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북학의』가 간행되었고, 1971년에는 『북학의』의 내외편이 을유문고본으로 전문이 번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