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의 봄 외 2편
우남정
우중충한 참나무 숲이 순간, 일렁인다
검은 망토를 들추는 바람
보굿이 꿈틀거린다
짓무른 땅에서 누군가 주검을 밀고 깨어난다
까칠하던 나뭇가지가 반지레해졌다 화살나무 허리춤에 푸른 촉이 장전되었다 물오른 꽃봉오리들이 치마를 뒤집어 쓰고 숨죽이고 있다
봄은 뱀파이어처럼 온다
저 산벚나무 피가 낭자하다
Let me in*
불면으로 누렇게 튼 산수유 입술
노란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나의 사랑은 늙지 않아요
꽃나무 아래 나의 목덜미가 창백하다
*뱀파이어 영화 제목
오래된 끝에서
흘러넘치듯 능소화가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
열매는 꽃에 매달리고 꽃은 줄기에 매달리고 줄기는 뿌리에 매달린다 뿌리는 지구에 매달려 있고 지구는 우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린 것을 잊고 매달려 있다
산다는 것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 여자의 가슴에 젖이 매달리고 등에 아이가 매달리고 팔에 장바구니가 매달리고 장바구니는 시장에 매달리고 저 여자는 집에 매달려 있다
손가락은 카톡에 매달려 있고 수많은 당신에 매달려 있다 당신은 씨줄과 날줄, 그물에 매달려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오래된 슬픔이 묻어난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굴욕의 기미가 있다 ‘매달리다’라는 말에는 ‘솟구치다’의 그림자가 매달려 있다 그 끝에 거꾸로 솟은 종유석이 자란다
매달리는 것은 추락을 견디는 것 오래 바람을 견디는 것 길게 휘어지는 촉수를 말아 안고 잎사귀 뒤 나뭇가지 끝에서 잠을 청한다
말뚝이 붉게 짖는다
설렁탕집 마당에 개 한 마리 묶여 있다 손님이 와도 딴청이다 아니 손님이 엎드려 있다 개 꼬리가 움찔 움직이다 만다 심드렁해진 손님이 마당에 한동안 묶여 있다 24시간 사골을 끓여 대는 가마솥 밥집은 성업 중이다. 마당에 묶인 라일락나무가 푸르다 그늘이 자꾸 움찔거린다 혀를 빼물고 늘어진 뱃구레를 뒤척여 먼 곳을 보고 있다 배경은 낡은 집과 먹다 만 밥그릇이다 저 나무 그늘에 매여 있는 것은 무엇일까 벌름거리던 코, 빳빳하던 귀, 달빛에 날 세워 짖어 대던 개 소리, 다 어디로 갔을까 길길이 뛰며 퍼붓던 그의 키스는, 저 개 한 마리 선지처럼 뜨거운 울음을 울은 지 언제였을까 주인은 가끔 먹이를 찾는다 주인이 추억 속을 지나간다 주인이 개의 주위를 빙빙 돈다 주인은 개 그릇을 핥기 일어선다 목줄이 개의 반경을 그리다 만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햇살을 쬐고 있다 누가 누구에게 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끈이 구불렁거린다 먼지바람이 오후의 신작로를 따라 피었다 흩어진다 울타리에 접시꽃들이 까르르 웃는다 그의 말뚝이 붉게 짖는다
― 우남정 시집, 『뱀파이어의 봄』 (천년의시작 / 2022)
우남정
충남 서천 출생.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다시올文學》 신인상 수상,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돋보기의 공식」 당선으로 등단. 시집으로 『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2020년 아르코문학나눔도서 선정) 등이 있음. 김포문학상 대상 수상,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