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별난 추억이라는 것
나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그때 겪었던, 즐겼던, 슬펐던 추억들이 있긴 있다.
그런 추억들을 따지고 보면 참으로 평범하면서도 나 자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별난 것처럼 여겨진다.
나의 추억거리도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듯이 내게도 별 수 없이 나의 태생지 환경과 어쩔 수 없이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그 추억이 거기서 거기지 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바로 그 태생지가 대부분의 우리 또래 인생과 비교해 보면 별난 곳이어서 그 내용이 달라진다고 감히 말하게 된다.
우리 또래의 어린 시절 추억은 십중팔구 소 먹이며 풀이 있는 동네 뒷산에서 소를 풀어놓고 개구쟁이들끼리 개구쟁이짓 하던일, 그리고 물이 있는 개울에 내려가 홀딱 벗고 물장구치던 일, 수박 밭에서 서리질 하던 모험담 같은 것들이 주종을 이룬다. 어린 젖먹이를 등이 아닌 엉덩이에 달고 새참 담은 쟁반을 머리에 이고 논이나 밭에 나가야 했던 일 같은 것들인데 이런 추억들은 나에게는 아주 생소하다. 그러니까 내 추억거리는 다른 사람들과 별날 수밖에 없다.
나의 태생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도시임에는 변함이 없는 대구 시내이다. 중심지 한복판에서 비하면 다소 변두리이지만 농촌 지역이나 다름없는 아주 변두리는 아니었는데 여러 해전부터 그냥 변두리 느낌이 아닌 도심 중에 도심으로 여겨질 만큼 번화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나라 도시가 어디건 오늘날 다 비슷하게 변모하고 있듯이.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우리 동네에서 조금 벗어나면 보리밭이 있었고, 미나리꽝이 있었다. 그래도 그 논밭들과 직접 상관이 있는 동네가 가까이에 없었으니까 거기서 사는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이었는지조차 기억나는 게 없다.
동네에서 손뽑히는 기관이 학교 말고 방송국이 있었고, 공장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경부선 철로가 동네 남쪽에 동서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무래기 동네 아이들이 그 철로 주변을 놀이터 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시절이 예닐곱 살 무렵이었던 것 같으니까 아마도 초등학교(그때는 물론 국민학교)에 갖 입학했거나 그 이전이었거나 그랬을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열차가 지나가면 그 열차를 향해서 팔뚝욕을 해댔다. 주먹욕이라고도 하는 팔뚝욕을 왜 했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 이유 없이 번개같이 지나가는 차창들을 향해서 우리들은 철로변에 늘어서서 두 팔을 높이 치켜들고 한 손은 주먹을 꽉 쥐고 다른 손으로 주먹 쥔 팔을 팍 내 쏘듯이 문지르는 욕질이다. 그 욕질을 할 때 아무런 별난 의식을 한 기억이 없다. 그저 웃으며 킬킬 댔으니까 그 짓을 무슨 재미난 짓처럼 했었다. 그래봤자 열차의 승객들은 아랑곳도 하지 않은 것뿐 아니라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주먹욕을 육이오 전쟁 때도 해댔다. 그 때 우리 동네에는 유엔군 차량이 밤낮없이 번질 낳게 도로의 먼지를 일으키며 대열을 지어서 지나다녔기 때문에 그 트럭 행렬을 향해 그랬던 것이다. “할로 찡검!” 하고 소리치며 주먹욕을 해대면 그 양코배기 군인들, 흰둥이 검둥이 가릴 것 없이 껌, 사탕, 초콜릿 같은 주전부리들을 우리들을 향해 뿌려댔다. 당연히 우리들은 그 뿌려대는 선물을 향해 박이 터지게 다투어 달려들어 줍곤 했었다.
그때는 이미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였으니까 더 어렸던 시절과 나이 차이가 서너 살 정도 났을 때라고 생각된다. ‘생각된다’라는 말은 이 지음에 헤아려 보니 그렇다는 뜻이다. 그냥 느낌으로는 열차를 향해 그 욕질하던 때나 유엔군 트럭을 향해 욕질하던 때나 그때가 그때였던 것처럼 여겨진다. 그때는 예닐곱 살 때고, 이때는 열 살 때였다는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뜻이다.
하기야 지금 나이에서 서너살서너 살 차이는 동년배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어린 시절의 서너 살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은 아니라고 결단코 동년배가 될 수는 없는 나이 차이다. 열 살짜리 소년이 예닐곱 살짜리 아기들을 친구로 쳐주지도 않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노는 자리에 끼워주지는커녕 근처에서 얼씬 거리지도 못하게 한다. 어린것들도 마찬가지다. 그 형들은 그냥 형들이 아니다. 무서운 형이다. 그들 곁에 공연히 얼씬대다가 이마 빼기나 짱배기에 주먹이나 굴밤이라도 한 방 얻어걸리면 재주 옴 붙은 꼴이 된다. 와앙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런데 나의 예닐곱 살이나 열 살은 그냥 같은 나이 또래 시절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때 그 기억이나 삼사 년 지난 기억이나 같은 시기의 기억으로 추억되는 게 기이하다.
그때의 대구는 참 기이한 도시였다. 그렇게 판단되는 것은 훗날 다른 도시나 시골의 이야기를 듣거나 배우면서 그렇게 구별되어 판단이 된다는 뜻이다. 그때의 대구는 전국에서 둘째가라면 주먹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아마도 전국 인구의 절반까지는 몰라도 그런 말을 해도 틀렸다고 하지는 않을 정도로 몰려들었던 곳이고, 전세계까지는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어린 나이에 전 세계 각국의 군대가 대구로 몰려 들어와 설쳐댔던 곳으로 기억하니까 말이다.
군복도 가지가지요, 피부색도 가지가지였으니까. 타고 다니는 군용차량도 나라마다 달랐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당연히 미군용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모든 외국군대들이 다 미군용 차량처럼 생긴 것으로 착각하게 할 정도였다. 하늘에는 하루 온종일 온갖 종류의 전투기와 수송기와 폭격기로 가름되는 비행기가 종횡으로 누비고 날아다녔다. 소리는 그냥 요란한 정도가 아니었다. 비행기 종류와 크기에 따라 소리/폭음도 각양각색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 비행기 종류와 이름과 국적을 알아맞히고 구별하고 소속 국가를 알은 체하며 떠드는 것을 대단한 지식으로 알았다. 그런 전투기들 중에 나중에 나타난 제트기류의 것들이 대단한 인기 품목이었다. 그 폭음도 특이하게 요란했지만 꽁무니나 두 날개 끝에서 흰 연기를 내뿜어 기다랗게 금을 긋고 지나가며 흔적을 남기는 것도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른바 비행운이라는 것이다. 푸른 하늘에 줄무늬를 무질서하게 종횡으로 그어대며 날아다니는 –아니 그냥 날아다닌다고 해서는 안된다. 총알처럼 쏘아대듯이 달아나고 달려오는 그 모습은 가히 놀라운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의 대구는 인구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그야말로 골이 터질 정도였다. 그 많은 인구의 절대 다수가 거지들이다. 피란민들의 행색은 무작정 거지꼴을 하면서 도시를 누볐으니까. 그 피란민들은 끼니때마다 집집마다의 대문 앞에 줄을 섰다. 깡통에 철사줄로 손잡이를 꿰어 달아 쥐고 숟갈로 두들기면서 대문 안에 들어선다. 때때로 온 가족인듯한 떼전들이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그 가족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와 자식들의 구성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족이 들어서면 어머니는 아연스럽지만 보리밥 광주리를 통째 들고 대문간으로 나가서 그들 앞에 놓아준다. 그러면 그들은 마당에 둘러앉아 아구아구 퍼먹고 빈 광주리를 어머니가 있는 부엌으로 다가와 반납하고 대문을 벗어난다. 어린 시절 나는 그들이 불쌍하게 여겨지기보다 무섭게 여겨졌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철부지의 딱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끼니때가 되면 대문을 꽁꽁 닫아걸어야 했다. 그래봤자지만.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의 추억일 뿐이다.
그러니까 또래 노인네들의 추억과는 색다른 추억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