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성과 정체성
2열왕 11,1-20; 마태 6,19-23 /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2024.6.21.
이즈음 우리가 미사의 독서로서 듣는 성경은 열왕기입니다. 열왕기는 이스라엘 역사의 긴 기간을 다루는데, 이스라엘 백성과 그 임금들의 역사에 관한 신학적 반성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활약한 예언자들, 즉 엘리야와 엘리사, 나탄, 스마야, 아히야, 미카야, 이사야, 홀다 등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시는 증인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 그분께 순종할 것을 호소하고, 주님께서 충성하는 이들을 보호하시리라는 약속도 전해주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왕정 시기의 남과 북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참다운 임금은 이스라엘의 참 목자이신 하느님을 대리하는 인물이라는 관점을 시종일관 고수합니다. 이런 기준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스린 모든 임금의 통치마다 평가를 짧게 내렸는데 불행히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임금은 매우 드물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단호한 비판을 받았는데, 하느님의 법과 규정을 지키지 않는 임금에 대해서는,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비난을 후렴처럼 되풀이합니다.
열왕기 저자가 기록해 놓은 바 주님에 대한 불충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이를테면 우상을 숭배하고, 거짓 신들에게 신전이나 제단을 세워 바치며, 이민족 신들에게 문의하고, 온갖 억압과 폭력으로 백성을 괴롭히며,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하느님의 동의 없이 전쟁에 나서며, 아이들을 제사의 번제물로 바치는 것 등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보면, 북이스라엘왕국 아합 임금의 딸로서 남유다왕국 여호람 임금의 아내가 된 아딸야가 왕위에 오른 자기 아들이 아하즈야가 죽자 권력에서 배제될 것이 두려운 나머지 다윗 왕족을 모두 살해함으로써 유다의 왕권을 스스로 장악하려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유다를 다스린 6년(기원전 841~835년) 동안, 이로 인해 초래된 유다 왕실의 비극을 여호야다 사제가 수습하고 개혁 조치를 단행한 내용이 오늘 독서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선택하시고 부르셨으며 아브라함과 모세와 그밖의 많은 인물들을 통하여 인도해 주신 이스라엘의 역사가 도대체 왜 이렇게 불행해진 것일까요? 우선 이스라엘을 불행에 빠뜨린 유혹의 기원을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왕실에서 끊이지 않았던 이스라엘의 비극은 판관기 시대에 기드온을 왕으로 옹립하려던 시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판관 8,22 참조) 기드온은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고 목자이시다.” 하는 민족의 정통성 신앙을 고수하고자 왕위를 사양하였으나,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유혹에 빠져 왕권을 탐내어 동기간 형제 70명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입니다.(판관 9,1-6 참조) 그후 3년 만에 하느님께서는 몸소 아비멜렉을 응징하시고 내치셨으나, 이미 식어버린 신앙을 되돌리기는 어려웠습니다. 이후 백성의 원로들은 이방 민족들의 왕정제도와 상비군 제도를 부러워하여 마지막 판관 사무엘을 졸라서(1사무 8,5 참조) 드디어 정식으로 왕을 옹립하였으니(1사무 10,1 참조), 그가 이스라엘 역사의 첫 임금 사울입니다.
이후 이스라엘의 민족역사는 왕권의 타락상과 왕실 내부의 권력다툼도 극에 달하고 왕국이 분열된 후에도 남북 왕국에서 경쟁적으로 우상숭배 풍조가 민족의 신앙과 공동선의 수준을 떨어뜨렸습니다. 결국 민심이 부서지고 국력이 쇠약해져서 앗시리아의 군대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바빌론 유배살이에서 돌아와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오늘 독서의 상황도 그 한 사례입니다. 사무엘기 상하권과 열왕기 상하권 그리고 역대기 상하권 등 구약성경의 역사서들이 전해주는 지리한 내용들 속에는 이러한 역사신학적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최대의 과제는 신성과 신앙의 회복이라는 것이고, 이 민족 정통성이 확립되지 않는 한 비극은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비극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배층이 민족 정통성을 회복하기는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결정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한 세대 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고 민족이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현실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에 관한 민족 정통성은 이스라엘에게서 그리스도 교회로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참 이스라엘’로 자처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역사상 최초로 당신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역사성을 존중하여 이스라엘의 구원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 의미에서 ‘새 이스라엘’로 자처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중세와 근세 이후 유럽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반유다이즘에 빠져 저질렀던 혹독한 죄과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 등 종교권력 엘리트들의 음모가 노골적으로 커져가던 무렵, 제자들에게 근본적인 회개의 자세로서 신앙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마음속에 하느님의 빛을 회복하여 꼭 간직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민족의 정통성으로서 하느님 신앙을 회복해야 하지만, 이 과제가 종교권력 엘리트들의 거부로 어려워지자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라고 권유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정체성이 정통성을 확립합니다.
신성과 신앙은 하늘의 보물입니다. 그에 비하면 권력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은 자칫하면 사탄이 유혹하는 죄악의 미끼가 될 수 있는 쓰레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보다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 하고, 가진 재물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기보다는 자기를 위해서만 쓰거나 그마저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충동은 현대인들을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는 주범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포함된 산상설교의 주제는 그 첫머리에 나온 진복팔단에 이미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선언한 이 내용이야말로 신앙의 정체성이 담겨 있고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금과옥조(金科玉條)입니다. 이 말씀의 진리성을 알아보는 눈이야말로 영혼의 등불입니다.
또한 이 말씀의 진리성을 실천하려는 의식이야말로 부활 신앙의 구체적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말씀을 공동체로 구현하는 공동생활 양식이야말로 성령 강림의 사회적 실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실행한 바는 사도행전과 사도들의 기록에 남아서 부활 신앙과 공동생활 양식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복팔단의 뜻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 마음이 가난한 이들이 하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말씀은 세상 재화에 대한 욕심보다 하느님으로 마음을 채운 신앙인들이 지상에서 천국을 살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 슬퍼하는 이들이 위로를 받으리라는 말씀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메마른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공유해야 하는 현실을 일깨워주는 한편, 진리와 정의와 사랑이 사라져서 불행과 비극에 놓이게 된 이들의 아픔에 대한 공감의식도 가져야 함도 일깨워줍니다.
- 온유한 이들이 땅을 차지하리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열려 있는 신앙인들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함을 알려줍니다. ‘땅’이란 토지가 아니라 ‘공동체’를 말합니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작은 천국입니다.
-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이 흡족하리라는 말씀은 그만큼 의로움을 발휘해야 할 기회와 일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현실이 불의함을 탓하지 말고 의로움을 발휘할 기회가 널려 있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 자비로운 이들이 자비를 입으리라는 말씀은 불의한 세상으로부터 기대할 것도 없지만, 아예 자비를 포기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믿는 이들끼리 서로 자비를 주고 받아야 할 냉엄한 현실을 일깨워줍니다.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께서도 여인들과 토박이 지지자들의 자비를 입으셨습니다.
- 마음이 깨끗한 이들이 하느님을 뵈오리라는 말씀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라는 뜻이고, 이 식별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는 직관의 복을 놓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복직관(至福直觀)은 봉쇄 수도원의 기도방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은총이 아니라 사회악이 판치는 불의한 사회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은총입니다.
- 평화를 이루는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는 말씀 또한 평화 실현에 앞장 서는 삶이 하느님을 닮는 자녀로서의 삶임을 일깨워줍니다.
- 그런데 이 모든 지향을 간직한 삶은 필경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각오해야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도, 그리스도 교회도 이 박해가 두렵고 무서워서 비뚤어진 길을 걸어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삶을 앞장서서 걸어가셨고, 그 삶이 하느님 나라의 축복으로 충만할 것임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교우 여러분!
열왕기를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 놓은 이스라엘의 역사신학이 주는 교훈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세속의 유혹에 빠져 살아가는 현실을 보여 주는 오늘날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몸소 살아 가신 예수님께서는 진복팔단의 가르침으로 인생의 기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확립해야 할 정통성과 간직해야 할 정체성입니다. 하느님만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