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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야호♬ (lil_ili@hanmail.net)
친정 ★ 야호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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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법칙>
법칙 48. 산다는 건,
“오는 길에 찐빵 좀 사다줘. 날씨 추워지니까 먹고 싶다.”
“독고산하한테 사달라고 하라규.”
“안 돼. 산하는 더 비싼 거 사오기로 했어.”
“비싼 거? 헉! 너 설마 플스플스 노래를 하더니 결국 얻어낸거냐?”
‘너도 진짜 집요하다.’하고 중얼거리는 다솔이를 향해 씨익 웃으며 ‘아플 때 아니면 언제 얻어내?’하고 맞받아쳤다. 나와 다솔이가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며 툴툴거리는 동안 먼저 택시에 오른 엄마가 창문을 내리더니 날 불렀다.
“딸!”
“응?”
“고추가루 꼈으니까 양치하고 산하군 만나도록 해.”
“악! 그런 건 진작 얘기해줬어야 할 거 아냐! 아까 의사 선생님 앞에서 활짝 웃었는데!”
반사적으로 입을 가리며 엄마를 향해 소리 지르자 엄마가 나이에 맞지 않에 킬킬거리며 웃었다. 저 아줌마가 주책인 것도 모르고!
가재미 눈을 뜬 채 엄마를 흘겨보았지만 엄마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룰루랄라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더니 다솔이에게 어여 타라며
재촉했다.
“아무튼 올때 찐빵 꼭 사와.”
택시에 탄 엄마와 다솔이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제 제법 쌀쌀해진 초겨울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원도라 그런지 서울보다 훨씬 춥구나.
그저께 깁스를 풀어 허전해진 왼손으로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병실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어? 초하씨, 날도 추운데 왜 나왔어? 우리 간호사실에서 피자 시켜먹을건데 같이 먹을래?”
“우와! 그래도 돼요? 나도! 나도 먹을래!”
본관 앞에서 마주친 서 간호사가 반갑게 인사하며 날 불러세웠다. 곱상한 외모에 말투가 얼마나 사근사근한지 환자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간호사였다.
나보다 두살 많은 언니라서 그런지 입원해있는 한 달동엔 금세 친해지기도 했고.
“엊그제 일반 병실로 옮겼다며? 기분이 어때?”
“일단 삐비빅거리는 기계소리들 안들어도 되니까 좋죠. 3주동안 그 소리 들으면서 중환자실에 있느라 노이로제 걸릴 뻔 했어요.
게다가 중환자실이라고 면회도 시간 정해져있어서 얼마나 심심했는데.”
“하하, 맞아. 생각난다. 그거때문에 산하씨가 의사 선생님 멱살 붙잡고 ‘들여보내줘!’하고 난리 피웠잖아.”
“윽. 그건 쪽팔리니까 더이상 언급하지 말아줘요. 애가 개념이 없나, 가끔보면 지가 연예인이라는 걸 잊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의식을 되찾고 3일 후부터 산하의 영화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영화 촬영 안해도 된다며, 내 옆에만 있겠다는 걸 달래고
달래다 지쳐 ‘영화 안찍으면 너 안봐!’하고 협박까지 해서 서울로 올려보낸 걸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온다.
유진태 감독과 매니저의 손에 이끌려 강제적으로 벤에 태워지던 순간 독고산하의 얼굴을 전국의 팬들이 봤다면 게거품 물고
난리났을 거다.
물론 산하는 지금도 영화 촬영이 끝나면 잽싸게 병원으로 돌아오지만 서울과 강원도를 왔다갔다 하는 것은 촬영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되도록 내가 오지 못하게 하는 편이다. 물론 그것때문에 산하는 꽤나 심술이 난 상태지만.
“그러고보니 초하씨, 어머니는 어디 가셨어? 친구도 안보이네?”
“엄마랑 다솔이는 겨울 외투 가지러 절에 갔어요. 올때 찐빵 사오라고 했으니까 언니도 이따 제 병실에 놀러와요.”
“정말? 나 찐빵 좋아하는데, 꼭 가야겠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서 간호사 언니를 쳐다보며 나도 베시시 웃었다. 목과 왼팔 그리고 오른쪽 다리의 깁스만 풀었을 뿐 아직
오른팔과 왼쪽 다리는 깁스를 풀지 못해 걸음이 더딘 내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걷는 서 간호사 언니는 꼭 친언니 같아서 어쩐지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외동 딸, 심지어 절로 들어가버린 엄마때문에 혼자 홀홀단신으로 삭막한 도시에서 지내다보니 쑥스러운 기분이랄까.
“언니 나 퇴원해도 언니랑 연락해도 돼죠?”
“물론이지! 왜? 벌써 퇴원 날짜 나왔어?”
“하하, 설마요. 퇴원 날짜 나오면 오죽 좋겠습니까만 넌지시 의사 선생님께 물었보니 ‘적어도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걸.’하고
냉담한 반응만 돌아오던데요? 으하하하.”
국어책 읽듯 단조로운 의사 선생님의 말투를 따라하며 얘기하자 서 간호사 언니가 ‘맞아, 그 선생님 말투가 원래 그래!’라며
맞장구 쳐주었다.
꺄르르 웃으며 본관으로 들어와 엘레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뚜벅뚜벅하고 꽤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응? 하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가죽 자켓을 입은 굉장히 무섭게 생긴 사내 둘이 날 노려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뭐, 뭡니까?”
혹시 곽하주가 나 일반 병실로 옮긴 거 알고 죽이러 왔나? 곽하주는 아직 중환자실에서 나오지 못했다는 얘길 간호사들을 통해
얼핏 전해들은 기억이 있기에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사내 둘은 날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았다. 그리고는 약 5초의 시간이 흐른 뒤 내 앞에 지갑 같은
것을 내밀었다.
“민초하씨 맞으시죠?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내민 것에는 ‘강력계…’ 어쩌고가 써있었는데, 그걸 보자마자 죄진 것도 없는데 괜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
“응, 별 일 아니니까 걱정 마. 그냥 영화 일하면서 알게 된 분들인데 사장 오빠한테 소식 듣고 오셨나봐. 그래, 알았어. 이따 봐.”
핸드폰 폴더를 닫자마자 입에서 긴 한숨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꽤 흥미로워하는
얼굴을 한 형사 한 명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 애인?”
“네.”
“거짓말이 능숙하네. 원래 거짓말 잘하는 편?”
또박또박 나한테 존댓말을 쓰는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형사는 병원 관계자들을 만나기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로서는 그를 상대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공교롭게도 내가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과 마주하고 있어야만 했다.
“네, 저 원래 거짓말 엄청 잘해요. 그러니까 뭘 물어볼진 모르겠지만 거짓말로 대답할 수도 있어요. 알아서 잘 골라 들으세요.”
“하하,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은데?”
“그래요? 어머, 숨긴다고 숨겼는데 티났나보네요. 그리고 일로 찾아오셨으면 존댓말 써주실래요? 제가 처음 본 사람한테,
그것도 일에 관련 된 사람한테 반말 들을 근본은 아니라서요.”
“아아, 그래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무섭게 왜그래?”
알았다면서 여전히 반말하는 너의 태도는 뭐니.
어차피 존댓말 써달라고 악다구니 써봤자 나만 목아플 것 같고 딱히 이 사람과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내가 중환자실에 입원해있을 때 산하에게 형사들이 찾아왔다는 얘길 전해들은 적이 있다. 일주일에 서너번꼴로 날 찾아왔었는데,
곽하주와 관련된 일로 할 말도 없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면회를 계속 거절했다.
산하 또한 별로 탐탁치 않아하는 눈치였고.
“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계속 튕기나 했더니 생각보다 예쁜 얼굴이네. 다치기 전엔 더 예뻤을 것 같은데.”
“하하하. 깁스로 맞으신 적 있으세요?”
오른팔을 휘두르며 웃는 얼굴로 얘기하자 형사가 두 손을 내저으며 ‘어, 무서운데?’하고 시덥잖게 웃었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해버렸다.
이게 이 사람들 일이니 집요하게 날 찾아오는 걸로 뭐라고 할 순 없지만 치사하게 산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오다니!
분명 일부러 그런 걸거야. 나 혼자 있으면 강제적으로라도 만나기 쉽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덕분에 간호사 언니들이랑 먹으려던 피자도 못먹고, 날씨도 추운데 벤치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아우씨.
“추운가? 몸 부르르 떠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추우면 병실에서 얘기해도 되는데.”
“절대 싫거든요.”
난 내 병실에 모르는 사람 절대 안들여놓을 거거든요. 입을 삐죽 내밀며 툴툴거리자 형사가 나지막이 웃더니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내게 덮어주었다.
얇은 환자복에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있었던터라 그가 벗어준 외투는 좀 따듯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하나도 안괜찮을 정도로 추웠기 때문에 꾸역꾸역 그의 외투에 팔을 집어넣었다.
“널 보니 동반 자살 시도는 아니었을 것 같고, 역시 살인 미수인건가?”
내가 그거 물어볼 줄 알았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짜고짜 내게 물어오는 형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묘하게 확신에 찬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 어떤 정보를 주워 날 찾아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에게 해줄 얘긴 없었다.
“그건 본인한테 물어보시죠.”
“아아, 그쪽은 아직도 중환자실에 있어서 말이지. 절대 만나주지를 않아. 공무집행방해로 우리가 잡으려고 해도 너무 거물이라서.”
곽하주네 집이 좀 살긴 좀 사는 모양이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난감한 얼굴로 날 쳐다보며 ‘그래서 너한테 먼저 얘길 들어보려고.’라고 말하는 형사가 얄미워 꿀밤이라도 놓아주고 싶었지만,
난 공무집행방해죄로 잡으려면 잡을 수 있는 만만한 서민이었기에 꾹 눌러 참았다.
으으, 젠장!
“그래요? 근데 저도 드릴 말씀이 없는데.”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내 태도에 형사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브레이크를 밟은 자국이 없어. 그건 분명 고의적이라는 건데, 동반 자살이 아니라면 살인 미수잖아? 억울하지도 않아?
왜 입을 다물지? 뭐 무서운 거라도 있는 건가? 협박 당했어? 그렇다면 걱정 마, 우리 측에서 신변 보호를…”
“네? 푸… 푸하하하! 아이고! 푸하하하!”
신변 보호가 뭐? 무서운 게 있냐고? 협박? 얼씨구.
순간 웃음이 터져 나도 모르게 실례라는 걸 알면서 큰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어깨까지 간헐적으로 떨어대며 푸하하 웃자
형사는 내가 머리라도 크게 다쳤나 싶은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난 머리를 다친 게 아니라 순수하게 웃겨서 웃었는 걸? 나참, 말이 되는 소릴 해야 상대해주지.
“협박이 무서워서 입을 다문 거였으면 이 병원에 있지도 못했겠죠. 무서워서 어디 같은 병원에 입원이나 했겠어요?”
“그럼 왜…”
“정말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에요. 여기서 나불나불 떠들어대면 아마 한동안은 이 일로 불려다니게 되겠죠? 좋든 싫든 곽하주와
마주쳐야 할 테고. 근데 전 그러기 싫거든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을 만큼 빠르게 말을 내뱉었더니 아쉽게도 호흡이 딸렸다. 예전이었으면
거뜬했을 텐데 사고 후 한동안 누워서 쉬기만 했더니 몸이 많이 약해진 탓이었다.
“이 일은 굳이 내가 나불거리지 않아도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질 일이고 그건 형사님이 할 일이잖아요? 막말로 내가 기억이라도
잃었어요~ 하고 얘기하면 이 사건에 대해서 마냥 손 놓으실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아우, 얘 기억 상실이네.’하고 넘어가주세요. 저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걔랑 마주치기 싫어요. 살아서 숨 쉬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이번에 뼈저리게 알았거든요. 연애하기도 바쁘고, 일 하기도 바쁜데 걔때문에 머리까지 아프고 싶지 않아요.”
용서하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언가가 두려워서 입을 다무는 게 아니라 복수 운운할 시간이 아까워졌기 때문이었다.
영화 일로 바쁜 산하의 얼굴을 1초라도 더 많이 보아두는 게 복수보다 중요하고,
엄마와 다솔이와 나란히 앉아 시덥잖은 수다를 떨며 고스톱 치는 시간이 복수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곽하주를 생각하는 건 내 인생에서 1분 1초도 아까운 시간이라는 것도.
“그만 들어가봐도 돼죠? 날씨가 추워서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가 벗어주었던 외투를 다시 돌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형사도 날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귀찮게 진짜. 이러다 병실까지
쫓아오는 거 아냐? 으으, 그럼 곤란한데.
“걷는 거 불편할 테니 병실까지 데려다줄게. 혹시 모르잖아? 병실까지 걸어가면서 내 호의에 마음이 바뀔지도.”
“그럴 일 절~대 없으니까 그냥 돌아주시면 좋겠네요.”
“하하, 나도 환자를 보고 외면할 근본은 아니라서.”
어차피 거절해도 집요하게 쫓아올 것 같았기에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하고 그의 부축을 받으며 본관으로 들어왔다.
바깥의 추운 바람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따듯한 기운이 건물 곳곳에 가득했다.
느닷없는 따스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치 밖에서 따라온 추위의 마지막 한 톨까지도 털어내기 위한 것처럼.
“여기서부턴 엘레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돼요.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너무 냉랭한 거 아냐? 난 그새 정들었다구.”
“전 그나마 있는 정까지 털어버릴 것 같은데요.”
엘레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며 딱 잘라 단호하게 얘기했다.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병실에 데려다주겠다며
귀찮게 구는 거 아냐? 하고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만 날인 건 아니니까. 그럼 다음에 또 보자구.”
“절대 싫어요.”
뒤돌기만 해봐라 뻐큐를 날려줄테니.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하자 그는 꽤 호탕하게 웃더니 ‘난 또 보고싶은데?’하고 얘기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느끼한
멘트에 기겁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씨익 웃는 얼굴로 내가 엘레베이터에 타는 것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나도 대충 고개만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고개 들기 전에 엘레베이터 문이 닫히길 바랬지만 얼마나 문이 천천히
닫히던지 그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쓴 내 표정을 보더니 푸하하 웃었다.
“아, 진짜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사람이다.”
설마 내가 마음에 들어 꼬시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딱 보니 왼손에 반지도 끼고 있더만.
“헉! 혹시 처음에 산하 꼬시려고 할 때 내가 저런 분위기였나? 으, 아니겠지? 이따 물어봐야겠다.”
만약, 정말 만약에, 아니길 바라지만 혹시라도 산하가 날 그렇게 느꼈다면 나라도 엄청 싫어했을 것 같다. 집요하지, 느끼하지,
뻔뻔하지… 아, 점점 얘기할 수록 나와 비슷한 인상일세.
나 같은 환자가 다른 사람과 같은 병실을 쓰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할 거라며 산하가 잡아준 1인실 병실 문을 열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싫어 방향제까지 달아놨는데, 방향제와 소독약 냄새가 섞여 더 이상한 냄새가 폴폴 느껴졌다.
“아, 토할 것 같다.”
추워서 너무 열기 싫은 창문이었지만 이대로 있으면 이상한 냄새에 질식할 것 같아 살짝만 열어두었다. 침대에 편하게 기대고
앉아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야홍의 ‘거짓말의 법칙’이라는 책을 펼쳐들었다. 하품이 쩍쩍 나오는 무척이나 뻔하고 뻔한 로맨스
소설이었지만 시간 때우기엔 또 이만한 것이 없었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벌써 왔어? 아까 통화할 때 서울에서 출발하는 거라더니, 순 뻥…….”
보나마나 독고산하지. 녀석 내가 보고 싶어서 달려왔구나 싶은 마음에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표정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장난스레 내뱉던 말마저 끝을 맺지 못하고 이상한 곳에서 멈췄다.
“오랜만이구나.”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닫힌 문 앞에는 우아하다 못해 귀품이 흐르는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 서있었다. 5년 전 그날, 교실 문 앞에
서있던 모습과 똑같은 얼굴로 곽하주의 엄마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네, 정말 오랜만이네요. 5년만인가요?”
춥더라도 그 형사랑 더 붙어있을 걸 그랬어, 하는 뒤늦은 후회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
“강간이었다.”
손 끝이 떨린다. 불쾌한 것들이 온 몸에 달라붙어있는 것처럼 간지럽다. 소독약 냄새와 뒤엉킨 방향제 냄새때문에 열어놓은
창문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스믈스믈 기어들어왔다.
“…무슨…….”
“주아 얘기, 궁금할 테지.”
그런 거 지금 듣고 싶은 생각도 없고, 오히려 잊고 있는 편이 낫겠다 싶어 괜한 호기심까지 덮어놨는데 이제와서 무슨 소리야.
이불을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최대한 호흡을 길게 내쉬며 곽하주의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녀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날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하주에게 어디까지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이 얘긴 듣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서 해주는 거다.”
“…….”
“주아라는 아이는 하주의 전 약혼자가 강간했다. 강제로, 약을 먹여서.”
속이 울렁거린다. 몹시 불쾌한 기분…….
“하주 또한 그 사실을 알고 무척 당황했지. 죽고 못산다 난리를 피워 한 약혼이었는데 자신의 약혼자가 그렇게 배신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하주는 그걸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약혼자를 사랑했다. 그게 잘못이었어.”
“그런 얘기 별로 듣고 싶지 않…”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 난 내 딸 변호를 위해 서있는 거야!”
목소리 끝이 떨리고 있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아니다. 시선을 잠시 내려 곽하주의 엄마가 꽉 쥔 두 주먹을 쳐다보았다.
저렇게 힘을 주면 손톱이 살을 파고들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꽉 힘을 주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일만큼.
“하주가 주아를 찾아갔다. 용서해달라고, 너만 묵인하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지만 주아는 고소하겠다고 했다. 그게 자신과
산하를 위한 일인 것 같다고. 고소하고 나서 산하에게도 모두 사실대로 털어놓을 거라고.”
“설마 곽하주가 주아를 죽였다는 건…”
“그래, 그 얘기가 끝나고 나서 주아가 돌아가는 길에…… 하주가 밀었지. 주아가 살아있으면 안되니까. 그 남자를 지켜야 하니까.”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만약 내가 곽하주의 입장이었다면, 산하가 그 남자였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아버렸다.
더디지만 꾸준하게 불어오던 찬바람이 한번에 차단되었다. 그런데도 온 몸에 돋아난 소름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소문이란 건 무척 빠른 녀석이라 내 귀에도 그 얘기가 들어왔지. 바로 하주를 유학 보내고 그 남자와의 약혼은 파기했다.
그때부터 였을 거다. 하주가 이상하게 독고산하에게 집착하기 시작한 것은.”
독고산하를 향한 곽하주의 집착. 그건 곽하주 본인에게 들었으니 잘 알고 있어. 독고산하를 사랑하지 않지만 약혼이라는 틀로
붙잡아 놓으며 그것으로 주아를 향해 복수하는 것이라 생각했겠지.
자신의 약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모든 원인이 주아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약혼 시켜주셨군요.”
“내 딸이 더이상 망가지는 건 볼 수 없었어. 그쪽에서 우리의 약혼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고…….”
그야 독고산하의 집안에서도 독고산하가 주아의 죽음 이후 망가지는 걸 원치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약혼이라는 건 서로에게
독이 됐을 거야. 독고산하의 곁에 있으면서 곽하주도 느꼈겠지. 독고산하가 껍데기만 남은 채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는 걸.
사실 모든 마음은 이미 죽어버린, 심지어 다른 남자의 아이를 (원해서) 가졌다고 생각하는 주아에게 향해있음을.
“…그래서였나.”
‘부러웠어. 난 모든 사랑을 다 잃었는데, 왜 너랑 유주아는 그렇게 쉽게 누군가의 사랑을 얻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사고 당시에 곽하주가 울부 짖었던 것이 어렴풋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사고 자체의 기억은 그다지 좋은 것이 아니라서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주아에 관한 얘기를 제게 한다는 건 이유가 있어서겠죠. 당신이 한가하게 내 병실에 와서 수다나 떨 사람은 아니니까.”
“…형사에게 들었다. 사건 증언을 거부했다고.”
그새 이야기가 전달됐나. 뭐, 곽하주를 위해 한 일은 아니었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
피식-하고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뭐 별로 곽하주를 위해서 그런 건 아니니까 감사 인사를 하러 오신 거라면 돌아가주세요. 들을 이유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고.”
“혹시라도…”
말 끝을 흐리며 날 쳐다보는 곽하주의 엄마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굉장히 애매모호한 표정이라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하주를 용서해줄 생각이 있는 거라면, 이 얘길 들으면 너도 조금은 하주를 불쌍하게 생각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하?”
“보통 사람이라면 형사가 나서기 전에 네가 먼저 소송을 걸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귀찮아서요. 내 시간이 아까워서- 라고 속으로 대답했지만 그걸 소리내어 말하진 않았다. 좋을 대로 해석하세요 라는 표정을
지으며 곽하주의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꽉 쥐고 있던 두 손을 힘 없이 풀며 다소 긴 숨을 내쉬었다.
“내 착각이라면 미안하게 됐구나. 쓸데 없는 얘길 늘어놓아서. 하지만 분명 너에게도 유익한 이야기였겠지.”
그래, 그건 분명해. 주아가 독고산하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던 일에 대해서는 계속 의구심을 가졌었으니까.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되는 건 전혀 예상도,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쓴 웃음이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곽하주는…”
“…….”
“몇 호실에 있나요.”
중환자라고 모두 같은 중환자는 아니다. 내가 산하의 재력에 힘 입어 1인실인 집중 치료실에 입원했던 것처럼 곽하주도 그럴테지.
쓴 웃음을 머금은 채 곽하주의 엄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내 질문을 예상하지 못했던 듯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와 입을 열었다.
“네가 입원해있던 곳 바로 옆에.”
「달-칵」
곽하주의 엄마가 열었을 때보다 부드러운 소리로 문이 열렸다. 그 탓에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돌려야만 했고,
곧이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이거 뭐야. 냄새 왜이래? 아, 진짜 토 나올 것 같아. 민초하, 너 방향제 한 통을 쏟았…”
내가 병실에서 뒤엉킨 냄새에 불쾌해했던 것처럼 산하도 얼굴을 찌푸리며 병실로 들어왔다. 녀석의 오른 손에 들린 게임기가
플스라는 걸 알아차리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손으로 코를 막으며 ‘아, 진짜!’하고 투덜거리던 산하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어진다 싶더니 말까지 멈춰졌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얼굴을 가리려고 나름 노력한 것인지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린 산하가 천천히 숨을 고르더니 말을 내뱉었다.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마스크를 내리자 촬영을 끝내고도 지우지 못한 입술의 상처 분장이 보였다.
내가 보고 싶긴 엄청 보고싶었나보네.
“특별히 해코지를 하러 온 것은 아니니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그렇지, 초하양?”
부드러운 목소리지만 웃고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살짝 떨리는 그녀의 손 끝이 보였기에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별 일 없었어. 그냥 형사들 때문에 얘기를 좀 나눴을 뿐이야.”
“설마 협박하러 오신 건…”
“산하야.”
녀석의 말을 가로지르며 내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그만해.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산하는 자신의 말을 가로막으며 내가 내뱉은 얘기가 꼭 곽하주 엄마를 옹호하는 것 같은 느낌을 풍기자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분명 들리진 않았지만 중얼거리는 입모양으로 보아 ‘민초하, 저 멍청이가.’하고 중얼거린 것 같았다.
……죽여버릴까.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곽하주의 엄마를 또렷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곽하주가 입원해있는 곳은 내가 병실을 옮기기 전에 있던 집중 치료실의
바로 옆이라는 얘기까지 들었으니 더이상 들을 얘기도, 나눌 말도 없었다.
그녀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딸칵-」
“거참. 산하씨 같이 가자니까 뭐가 그렇게 급해서 뜁니까? 나랑 같이 가는 게 그렇게 싫… 아, 죄송합니다.”
또 한 명의 익숙한 목소리. 뛰어오는 걸음 소리가 유달리 크다 싶더니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유진태 감독이었다.
그의 손엔 내가 농담으로 먹고 싶다고 했던 수박이 들려있었다. 한 겨울에 수박이라니, 진짜 사온거야?
어이없는 웃음에 피식- 웃었지만 유진태 감독은 곽하주의 엄마와 부딪힌 것에 놀란 듯 고개를 깊이 숙여 사과했다.
아마도 곽하주의 엄마인 것을 모르니, 내 병실에 찾아온 손님일 거라 생각한 듯 했다.
“…괜찮아요.”
곽하주의 엄마는 묘한 표정으로 유진태 감독을 쳐다보다가 짧게 말을 마친 후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 묘한 분위기를 유진태 감독도 느낀 듯 그는 한참이나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나와 산하를 향해 물었다.
“누구에요? 분위기 엄청 묘하네.”
‘우리 영화에 꽤 맞는 분위기 아닌가?’하고 중얼거리는 유진태 감독을 쳐다보다가 힐끔 산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산하도 고개를
숙여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말 없이 시선이 오고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냥 지나가는 손님이에요.”
“손님.”
산하는 무슨 생각에서 그렇게 대답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주아의 죽음과 사건에 대해 긴 뼈대를 알아버린 나는 그렇게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희미하지만 씁쓸한 웃음이 한참이나 입가에서 머물렀다.
*
바깥 날씨는 화창했다. 내가 입원한지 한 달이 흐르고 나서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나무들은 앙상해졌고, 바람은 한결
더 매서워졌다.
산하는 곽하주의 엄마와 ‘별 일 없었다’고 얘기하는 날 못미더워하는 눈치였지만 의외로 이것저것 묻진 않았다.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어련히 얘기하겠지 싶은 듯 했다.
하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난 죽을 때까지 산하에게 주아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생각이다.
“표정이 뭐 그래?”
깁스는 풀었지만 아직 움직이는 게 어색한 내 대신 짐을 챙기던 산하가 뚱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창 밖을 쳐다본다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용케 날 관찰했구나 싶어 녀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뭘?”
이제와서 산하에게 주아가 사실은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하고 미주알 고주알 얘기하는 건 의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산하를 더 슬프게 하지 않을까 싶어 차라리 내가 모두 품기로 했다.
그건 유진태 감독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곽하주의 엄마를 손님이라 말한 그 날, 나는 입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게 설령 몹시 무거운 짐이라고 해도 독고산하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감당해야 할 유일한 짐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퇴원하는 날이면 좀 더 ‘우와!’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래야 하는 거 아냐? 모처럼 나 촬영도 끝나고 너 퇴원하니까 이제 마음껏
붙어지낼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하나도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잖아.”
연애하면 남자는 애가 된다더니.
투정 부리듯 툴툴거리는 산하의 말에 결국 피식 웃으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얼마나 힘껏 펼쳤는지 오른팔이 저릿해질 정도로.
“어이구, 내 새끼. 그게 섭섭했져요? 자, 엄마 품에 안겨보렴~”
“뭐야! 하지 마! 징그럽잖아! 저리 꺼져!”
“아잉, 산하씨 왜 그래요~”
간만에 산하씨 하고 불러줬더니 산하가 있는대로 소리를 지르며 베개까지 던져댔다. ‘미친년아, 저리 꺼져!’하고 소리지르는 게
영화에서 오열하는 주인공보다 더 리얼해서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어버렸다.
처음 만나서 한동안은 꼬박꼬박 산하씨라고 부르고 존댓말을 하곤 했었는데, 이 호칭이 어색해지는 날이 오다니.
“아하하! 진짜 겁 먹은 얼굴이야. 내가 너 잡아먹기라도 해? 하하하!”
“아, 진짜! 넌 불리할 때면 이상하게 더 뻔뻔해지는 거 같아. 다시는 하지 마, 진짜 소름 돋았어.”
그러면서 자기 팔을 내미는 산하의 모습에 다시한번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녀석의 팔에 돋아난 소름을 보고 또 키득키득.
“있지 산하야.”
“또 뭐가 있어.”
“내가 또 너에게 비밀을 만들면 어떻게 할 거야? 몹시 중요한 비밀을.”
룰루랄라 산하씨 어쩌고 중얼거리던 내가 느닷없이 진지하게 묻자 산하의 표정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녀석은 잠시 생각하는
얼굴로 날 쳐다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이번에도 날 위해서겠지.”
“응?”
“그런 건 비밀이 있으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그리고 그 비밀은 날 위해서일테고.”
“…….”
아무런 대답없이 산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산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어련히 나한테 말할 테니 상관없어.”
“상관없어?”
“그래, 난 널 믿는다고 했잖아. 네가 감당하기 힘든 비밀이라면 나한테 얘기하겠지. 애써 추궁할 마음은 없어.”
“…어…….”
“뭐냐? 그 얼빠진 표정은? 새삼 나한테 반한거냐.”
너야말로 뭐냐. 잠시 멋있다고 생각했던 걸 와장창 부숴놓는 그 발언은.
두 눈을 반짝이며 녀석을 쳐다보다가 맥이 탁 풀리는 바람에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니. 느끼해서.”
“뭐?”
산하는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내 대답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꽤나 삐친 듯, 짐 가방을 챙기더니
‘알아서 와.’하고 말함과 동시에 퉁명스레 나가버렸다.
“에? 얼레? 진짜 가는 거야? 아, 냉정해. 냉정하다구. 나 아직 발은 깁스 안풀었는데!”
애타게 불러보아도 이미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그대의 이름은 독고산하산하산하… 아, 재미없다.
“뭐… 새삼 반할 필요도 없이 푹 빠졌는데 그런 걸로 삐치고 그러냐.”
머리를 긁적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좋은 녀석이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대답만을 해주
는 녀석. 이럴 때마다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독고산하여서 다행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어차피 짐은 산하가 다 가져갔으니 나도 슬슬 내려가볼까.
엘레베이터의 내림 버튼을 누르려다말고 우뚝 멈췄다. 그러고보니 어제 서 간호사 언니에게 곽하주는 아직도 집중 치료실에
입원해있다는 얘길 전해들었다.
내가 먼저 물어본 거였고,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내가 퇴원하는 날까지 집중 치료실에 있을 줄이야.
나보다 덜 다쳤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전혀 나아지질 않는 건가.
“흐음…”
집중 치료실은 내가 있는 층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어떻게 할까, 하고 한참 엘레베이터를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버튼을 꾹
눌렀다.
산하가 알면 거품 물고 기절할 일이지만, 분명 싫든 좋든 마무리는 지어야 할 일이니까.
올라가는 모양의 화살표가 그려진 버튼이 주홍색 빛을 뿜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얍!’하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딸칵-」
조심스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코끝을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확 찌푸렸다. 삐비빅-거리는 소리들은
불과 4주 전까지만 해도 귀에 익은 것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낯설었다.
아, 이래서 병원이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차라리 그냥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문 앞에서 날 본 순간 ‘와 주었구나.’하고 말하던 곽하주 엄마의 얼굴이
생각나 그럴 수도 없었다.
“아, 빌어먹을. 난 진짜 내 무덤을 내가 파는 스타일인가봐.”
구시렁거리며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닫힌 문을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자 죽은 듯이
누워있는 곽하주가 보였다.
두 달이 흘렀으니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대부분 아문 상태였다. 문제라면 죽지 못해 살아난 정신머리겠지.
“곽하주.”
“…….”
“자냐? 뭐, 자든 안자든 상관없어. 어차피 오늘은 나 혼자 주절거리려고 온 거니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으로 보아 곽하주는 절대 자고 있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녀석의 옆에 섰다. 누워있는 곽하주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퇴원해.”
“…그래?”
대답하지 않을 줄 알았기 때문에 의외였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조심스럽게 눈을 뜬 곽하주가 날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마치 살아가는 걸 포기한 듯 기계에 몸을 맡긴 곽하주의 표정은 너무나 조용해서 살아있는 자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 였다.
“그거 아쉽네. 죽지 않아서. 너도, 나도.”
“난 별로 아쉽지 않은데.”
곽하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집중 치료실엔 커다란 창이 하나 있었다. 물론 병균의 침투를 염려해서 절대로
열리지 않는 창문이었지만.
밖이 보이지만 밖의 공기를 느낄 수 없는 투명한 창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벤 앞에 서있는 산하가 다솔이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내려오지 않자 둘 다 서로 책임이라며 투닥거리는 듯 했다.
얘들아 미안.
“어떻게 하면 내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너에게 복수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어.”
결국 산하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핸드폰을 꺼내는 모습이 보였다. 희미하게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아쉽게도 핸드폰은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
예민한 기계들이 많은 곳이라서 핸드폰의 전원을 켜놓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라 통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내 핸드폰의 전원이 꺼져있다는 멘트가 흘러나왔는지 산하가 걸음을 돌려 본관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이크.
“그래서? 방법은 생각해봤어? 이번엔 어떤 복수가 나올지 너무 흥미로워서…”
“살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창을 등진 채 곽하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햇빛을 등진 내가 꽤 눈부셨는지 곽하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곽하주, 살아서 지독하게 고통스러워봐.”
이게 내가 결정한 너를 향한 복수다. 네가 사는 삶은 내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도 않을 거고 나와는 상관이 없으니까.
곽하주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날 쳐다보았다.
걸음을 천천히 옮겨 곽하주의 옆으로 다가갔다. 희미하게 웃으며 곽하주를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너를 쉽게 용서해줄 수 없어. 네가 살아서 내가 겪은 것만큼 고통스럽길 바라. 그래서 지금 널 용서할 거야.”
“……너!”
곽하주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맘처럼 쉽지 않았는지 신음을 내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곽하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슬슬 내려가지 않으면 산하가 온 병원을 쑥대밭으로 만들며 뒤지고 다닐 테니.
“내가 널 용서하는 게 널 용서하지 않는 방법이야.”
그러니까 살아. 살아서 숨 쉬며 버텨. 이 고통스러운 세상도, 네가 저지른 죄들도.
나지막이 숨을 들이마시며 문고리를 잡았다. 곽하주의 표정을 굳이 보지 않아도 녀석이 울고 있다는 것쯤은 끅끅거리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이걸 웃어야 하나, 아님 울어야 하나.
참았던 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음과 동시에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있던 곽하주의 엄마가 날 잠시 쳐다보다가 날 스치 듯이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라. 그게 내 복수니까.”
타악-하고 닫힌 문을 등진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깁스한 발 때문에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엘레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기
위해 손을 뻗은 순간 띠잉-하는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이 멍청아!”
웃음이, 번진다.
“한참 찾았잖아!”
엘레베이터로 날 잡아 끌며 와락 끌어안은 따스한 온기에 고개를 묻었다. 날 찾기 위해 뛰어다녔는지 산하의 숨이 가쁘다는 게
내심 기뻤다.
산하가 숨을 고르게 쉬기 위해 의식적으로 천천히 내쉬는 것과는 반대로 빠르게 뛰는 심장 고동에 베시시 웃었다.
“산하야.”
“왜.”
“사랑해.”
“너, 너는 그런 얘길 왜 갑자기 해! 아, 진짜 사고나서 머리 멍청해진 거 아냐?”
“뭐? 참나, 그럼 네 심장은 왜 더 빨리 뛰는건데.”
“그런 거 일일이 말하지 마!”
산하가 빨개진 얼굴로 날 내려다보더니 느닷없이 내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뽀뽀를 했다. 뭐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뽀뽀라니!
어이없는 표정으로 산하를 쳐다보다가 결국 푸하하 웃어버렸다. 산하는 웃지말라며 내 머리를 꾹꾹 눌렀지만.
“아하하, 진짜 웃겨. 뽀뽀라니, 뽀뽀라니! 아하하~ 나 진짜 널 만나서 다행이야. 널 사랑해서, 정말 다행이야.”
아하하 하고 고개까지 젖히며 웃는 내 허리에 팔을 두른 산하가 ‘야, 작작 좀 웃어!’라며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이런거다. 삶을 산다는 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
안녕! 예쁜이들!
원래 이번 편에서 완결을 내려고 했습니다만, 산하의 영화가 어떻게 될지 묻는 분들도 계시고 이대로 영화 스탭들을 버리기엔
든 정도 있고(으응?), 하주에 대한 마무리도 더 있어야 할 것 같고 해서 다음 편이 드!디!어! 완결이랍니다.
완결 후 번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예정이 없답니다. 안쓸 수도 있고, 쓸 수도 있고. 쓴다면 어떤 내용을 쓸지 저도 몰라용-.,-
으후후.
<거짓말의 법칙>의 첫 편을 업데이트하던 날이 새삼 생각나는 밤입니다.
야호♬ 올림.
(+ 떡국 맛나게 많이 드시고 새해 복도 많이 받으셨나요? 와우, 멋진 하루 되세요!)
첫댓글 ㅠㅠㅠㅠㅠㅠㅠ너무 슬퍼용!!!!!!!!!!!!!!!! 벌써 완결이라니요유ㅠㅠ 흑흑
헉...담편이완결이라니 ㅠ.ㅠ........ 담편넘기대되네여 !@#$$%^&*(())
아니 벌써 담편이 완결!? ㅠㅠ 흐엉흐엉 아쉽아쉽... 근데 초하 진짜 너무 머신거아니야?ㅋㅋㅋ 용서하는게 또다른 용서하지않는 방법이라니 ㅋㅋㅋㅋㅋ 완전 서프라이즈!
아아 벌써 완결을 앞두고 한편만이남았다니ㅠㅠ 너무 슬퍼여ㅠㅠ 담편이 너무너무 기대되네여!! 저는 번외 나왔으면 좋겠어여!!ㅋㅋㅋ 산하랑 초하랑 알콩달콩사는 모습보는것도 좋을것같아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담편완전기대할게여!!
아오진짜이거 최고에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저도 번외원해여..
와우... 잘되서 진짜!!!!!!!!!!! 다행이네요ㅠㅠ 아쉬워요!! 그러니 번외도 꼭! 부탁드려용 !ㅋㅋㅋ
아... 아쉽다... ㅎㅎㅎ
헉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슬퍼라 ㅠㅠㅠ 벌써 ㄱ-
ㅠㅠ 감동 ㅠ 벌써 완결이라니 ㅠㅠ 완결안났음 좋겠어요 ㅠㅠ
지금까지 너무 재미있었어요>ㅁ< 주아 번외도 올려주실꺼죠???
벌써완결이다가온건가요ㅜㅜ
아 재밌어요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의러브러브도좀그려주세여~
벌써 완결이 다가오다니...ㅠㅠ 재미있어요~
드디어 완결이 다가오는군요!!! ㅋㅋㅋㅋㅋ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전개 덕분에 한편한편 기다려가면서 읽은 보람이 있어요 ㅋㅋㅋㅋㅋㅋㅋ 완결까지 화이팅!!!
으으, 버얼써 완결이 코앞인가요, 저역시두 야호님의 소설을 처음 접했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만해도 코멘트가 가장 많이 달린 소설만 찾아읽다가 처음으로 코멘트가 아닌 제목에 끌려 읽었던 소설이었는데! 역시 제 느낌이 틀리지않았네요 히히,
★
어떻게...너무행복하잖아 ㅠ.ㅠ.ㅠㅓ허허헣
그저황홀할뿐이군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