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교의 상징 ‘라바룸’(Labarum)♣
로마시대때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싶은 욕구가 매우 컸어요
하지만 그들이 피신할 땅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지요
박해의 주범인 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 즉 당시 세계 전체를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300년 가까이 박해가 지속되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평화를 기대할수 없게 되었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어요
“그리스도교인들은 이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종교를 믿어도 된다”는 복음이 들려온 것이지요
이러한 칙령을 선포한 이가 바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us Magnus)이지요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장군 콘스탄티우스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 당시 로마 제국은 광대한 영토를 4개 지역으로 나누어
2명의 황제와 2명의 부황제가 다스리는, 사분령(四分領) 체제였어요
콘스탄티우스는 젊은 장교 시절 소아시아에 주둔했을때 헬레나라는 여성에게 반했지요
건강하고 발랄한 헬레나는 여관집 딸로, 콘스탄티우스의 열정적인 구애를 받아들였고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낳았어요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던 콘스탄티누스의 행복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끝이 났지요
당시 서로마의 황제 막시미아누스는 무수한 전공(戰功)을 세우고 개선한 콘스탄티우스 장군을
자기 딸 테오도라와 결혼시키고자 했던 것이지요
황제는 결혼 조건으로 콘스탄티우스에게 헬레나와의 사실혼 관계를 청산할것을 요구했어요
결국 콘스탄티우스는 헬레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황제의 부마가 되어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를 포함하는 지역의 부황제 자리에 올랐지요
그러고 나서 동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까지 정치적 볼모로 보냈어요
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이런 상황에 처했어도 상심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키울 기회로 삼았지요
그는 계속되는 전쟁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도와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얻었던 것이지요
그뿐 아니라 황궁 주변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암투와 권모술수까지 철저히 파악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부황제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는 그 뒤를 이어 갈리아 지역의 부황제가 되었지요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인품, 외모, 체력, 키 등 모든 면에서 남들을 압도했어요
더욱이 다양한 경험을 지닌 정예부대를 거느린 그는 갈리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했지요
또한 뛰어난 행정력으로 갈리아 지역을 재건함으로써 부하들과 국민들의 신임을 얻었어요
사분령 체제가 혼란에 빠지자, 콘스탄티누스 부황제의 추종자들은 그가 유일한 황제가 되어
서로마 지역 전체를 다스려 주기를 바랐지요
그리하여 오랫동안 콘스탄티누스와 동고동락했던 부하들은 그를 황제로 추대했어요
콘스탄티누스는 무력으로 로마를 점령하고 있던 막센티우스 황제로부터
‘로마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선포했지요
그리고 자신의 정예부대 4만명을 이끌고 놀라운 속도로 로마 근교까지 진격했어요
하지만 로마 북쪽에 있는 밀비우스 다리 저편에는 훨씬 더 많은 수의 막센티우스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지요
용감한 콘스탄티누스였지만 그날 밤엔 깊이 잠들지 못한 채 몸을 뒤척였어요
그러던 중 꿈속에 어떤 표식이 나타났고
“너희 모든 군대가 이 표식을 달고 전쟁터로 나가라. 그러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음성이 생생하게 들려왔어요
잠에서 깬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본 표식, ‘라바룸’(Labarum)을 그렸어요
라바룸은 가운데에 글자 같은 것이 있고, 그 주위에 월계관처럼 보이는 것이 둘러져 있었지요
콘스탄티누스는 멋진 연설을 통해 부하들에게 신이 자신들을 보호한다는 확신을 주고
라바룸을 부착하도록 명령했어요
용맹하고 확신에 찬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막센티우스가 강제 동원한 대군을 궤멸시켰지요
전쟁에서 승리한 뒤, 그리스도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라바룸의 의미를 해석해 주었어요
‘팍스’(Pax)의 약자처럼 보였던 ‘라바룸’의 문자는
실제로는 그리스어 ‘크리스토스’(XPIΣΤΟΣ)의 처음 두 글자였지요
그 해석을 들은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그리스도교 신의 가호를 받아 승리했다고 여겼어요
당시 그리스도교는 로마 사회에서 배척을 받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친숙했지요
그의 어머니 헬레나가 열렬한 그리스도교인이었기 때문이지요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었던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가 다른 측면에서도 유용하리라 생각했어요
사분령으로 나뉘어 분쟁이 그치지 않던 로마 제국을 다시 온전히 통일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이념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새 제국을 하나로 통일하려면 전통적 다신교보다는 ‘유일신’을 섬기는 그리스도교가 훨씬 더 적합해 보였어요
그리하여 313년에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인에게도 다른 사람들처럼 각자가 선택한 종교를 믿을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허용”한다고 선포했어요
그리고 박해 시대에 몰수한 교회, 토지, 그 밖의 모든 소유물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지체 없이 돌려주었지요
더 나아가 라테란 대성당을 비롯한 많은 교회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해 주기도 했어요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종교 관용 정책을 통해 자신이 구상한 새 로마 제국의 진정한 통일을 기대했지요
그리스도교를 통해 새로운 정신적 기반을 마련한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지닌 새로운 이상을 분명하게 보여줄 도시를 계획했어요
그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후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까지 모두 점령했지요
드디어 옛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리게 된 ‘대제’ 콘스탄티누스,
그가 보기에 로마는 지나치게 서쪽에 치우쳐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좀더 동쪽인, 그리스 반도와 소아시아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를 새로운 수도로 선택했지요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전까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계획도시를 세웠으며
그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어요
‘콘스탄티누스 폴리스’,
그 도시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이지요
정치 안정과 문화 도약을 이룬 콘스탄티누스 대제였지만
엄청난 제국을 아우르는 사상적 통일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었어요
그는 로마인 전체를 ‘하나의 제국, 하나의 황제, 하나의 신’이라는 이상으로 일치시키고자
그리스도교를 도입했는데, 그 종교가 자유를 얻자마자 내분에 빠졌던 것이지요
이른바 전통적 그리스도교와 아리우스파의 충돌이었어요
전통적 그리스도교인들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한 하느님이라고 믿어온데 반해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아리우스파에서는 그리스도를 ‘2급신’으로 보았지요
제국의 이념적 통일을 기대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종교 분쟁을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했어요
그는 이를 위해 325년에 니케아(Nicea) 공의회를 소집했지요
이 공의회에서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을 지닌다”는 신앙고백(信經)이 발표되었어요
그러나 아리우스파의 반발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릴 때까지 계속되었지요
337년에 사망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실현하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그는 ‘밀라노 칙령’을 내림으로써
그리스도교 정신이 서양 문화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 토대를 마련했지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13번째 사도’로 칭송받고 있어요
PX = '키로' 혹은 치로'라고 하지요
희랍어 "크릿그토너"(Xρωτδ)의 처음 두글자를 따서 꾸민 것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명(姓名)을 가리키는 상징으로서 제단, 제구 등에 널리 쓰이고 있어요
※ 피엑스(PX)나 팍스(PAX)가 아니지요
PX = XP
가톨릭교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표식인데 '그리스도'의 헬라어 표기 'Χριστοs'의 첫째자와 둘째자를 겹친 것이지요
이 글자는 헬라어이므로 '키로'(Chi Ro)로 읽어야지 '엑스 피'나 '피 엑스'로 읽으면 안되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 글자를 라틴어의 PX로 오인하여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이 표식의 유래는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틴(콘스탄티누스)이지요
콘스탄틴은 312년 막센티우스(Maxentius)와 대결 전날밤 꿈에서 십자가를 보고
다음날의 승리를 하나님이 약속해 주었다고 하지요
콘스탄틴은 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기독교를 공인한데 이어
궁전과 병사들의 무기를 십자가 형상으로 치장하였으며
황제의 군기를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었어요
나중에는 교회가 이 군기를 교회의 기로 채택하기에 이르지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처사 *-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 줄리오 로마노(1520~1524), 바티칸 박물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로마 제국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전환점을 마련했다.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상(4세기), 로마 카피톨리니 박물관.
▲영국 요크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석상.
밑에 써 있는 글씨는 'CONSTANTINE BY THIS SIGN CONQUER',
즉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에 봤다는 글귀의 영어 번역이다.
▲ 그리스도교의 상징 ‘라바룸’(Labar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