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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저는 양천구 H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는 홍해원 집사입니다.
올해 인생에 큰일을 겪으면서 부모님 주신 이름 홍현정에서 홍해원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이 이름은 2014년 어떤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나이 50에 갑작스럽게 새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어린 시절부터의 간증들을 조금씩 올려볼까 합니다. 하나님 은혜로만 살아왔던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제 기억에 의존해서 조금씩 수정할 부분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썼다는 점 양해 부탁드리고, 체험에 말씀을 곁들이면 좋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냥 시간적 순서로 써 내려갔다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생 전체를 통해 치유훈련을 시키셨는지에 대한 과정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1장: 내 인생에 함께했던 질병들과 하나님 은혜
벌레가 가득한 대접
드넓은 논 한가운데 서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곧 내 시야가 논 가에 있는 맑은 도랑 속을 향했다. 그 안에서 각종 벌레가 움직이고 있었다. 소금쟁이와 물방개. 그리고 잠자리 애벌레 같은 각종 애벌레. 내가 평소에 아주 싫어하는 것들이다. 잠시 후 내가 그 벌레들이 가득 담긴 대접을 들고 벌컥 마셔 버린다. 우웩.
“으악” 하고 잠에서 깨었다. 이때 나는 5~6세쯤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 환상을 실제처럼 경험하고 나서 너무 끔찍하고 무서워서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괜히 혼날 것 같았고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기에 오래 품고 있었다. 순간마다 다시 기억 속에서 조심스럽게 꺼내어보곤 다시 덮어 버리곤 했다. “뭐지?”하고 말이다. 그리고 40대 후반 어느 날,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게 하셨다.
어린 시절
나는 서울과 근접한 도농 경계 지역인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안현 마을에서 1973년 2월에 태어났다. 그 당시 하안동은 산과 논, 밭으로 둘러싸인 영락없는 시골 농촌 마을이었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 단지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내 눈에는 전원일기 촬영지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다. 서울과 가깝기는 하나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때까지 버스가 없어서 한참을 걸어 철산동까지 가서 타야 했다. 엄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때 한 주먹 정도, 대략 1.8kg밖에 되지 않았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사실 엄마의 어떤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수십 년을 1.8kg이라고 들었는데 최근에는 2.2kg이라고 하시니 말이다. 암튼 삼 남매 중 가장 약하게 태어난 것은 사실이다. 이유인즉, 엄마가 임신하셨을 때 입덧이 심해서 거의 음식을 못 드셨다고 한다. 고기도 안 좋아하시고 입이 좀 짧으신 편이다. 게다가 농사일이 많아서 하루에 4~5시간 정도만 주무시고 일을 하셨다. 쉴 새가 없으셨다. 태어나서는 젖이 나오지 않는 데다가 집안에서 분유를 사주지 않으셨다. 유교 정신이 좀 강해서 딸인데 죽으면 어떠냐는 식이셨다. 동네 아줌마들 젖도 좀 얻어먹었다고 한다. 상황이 이랬기에, 3살까지 보리차에 설탕물을 타서 먹일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처지가 충분히 이해된다. 달리 방도가 없지 않았던가.
편도선, 임파선, 두드러기, 변비, 생리통, 무지외반증, 결막염, 뇌빈혈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몸이 많이 약했다. 잔병치레가 많았다. 몸이 냉한 편이라 추위에 많이 약했다. 특히 몸살이 날 때면 머릿속에 큰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통증이 자주 있었다. 머리가 흔들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편도선이 부어서 병원에 갔는데, 엑스레이에 임파선이 수백 개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수술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신마취 수술이라니. 너무 놀라 엄마와 병원을 도망치듯이 나온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나이도 문제였고, 그 당시 엄마의 처지상 수술도 어려웠다. 엄마와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한약으로 치료해 주셨다. 감사하신 하나님. 어릴 때 태열이 있어서 알레르기로 인한 두드러기도 심했다. 복숭아털, 분유, 비린 생선, 치킨 등. 잘못 먹기만 하면 전신에 손바닥만 한 울퉁불퉁한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어찌나 가렵고 따가운지 발버둥을 치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병원이나 약국이 멀리 있어서, 급할 때는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지푸라기 태운 연기로 온몸을 쓸어 주셨다. 아마도 민간요법이었으리라. 신기하게 효과는 어느 정도 있었다. 알레르기성 두드러기는 40세가 넘어서도 조금 남아있다가 40대 후반 치유의 성령의 불의 증가로 거의 사라졌다. 또 폐와 기관지가 약해서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변비와 치질 그리고 심한 생리통과 무지외반증 통증도 인생 질병 역사 속에 선명하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디테일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4학년 때는 뇌빈혈로 일어날 때마다 세상이 새까맣게 되며 빙빙 돌기도 했다. 이 증세는 강도는 달랐지만, 초등학교 내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뇌빈혈도 한약으로 치료해 주셨다. 생리통은 중학교 때부터 시작하여 40세에 딱 멈췄다. 성령의 불이 자궁까지 내려가면서 치료되었다. 결막염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어 딱 40세에 끝이 났다. 결막염 안약 히아레인이 더는 필요 없어졌다. 성령의 불과 치유의 기름 부음으로 간기능이 회복되었다. 눈의 염증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기름 부음으로 피곤한 아이들의 눈과 간을 안수하면 바로 회복된다. 염증(담적)을 손으로 느끼고 뽑아낼 수 있게 하셨다. 할렐루야.
소아 당뇨
게다가 4학년 때 소아 당뇨 진단도 받았다. 젖배를 골아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나는 폭식하는 습관이 있었다. 특히 쌀밥은 2~3그릇씩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고 쌀밥의 단맛이 당겼다. 밥 먹는 속도도 급했다. 예식장이란 예식장은 다 따라나섰다. 그곳에 나의 최애 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비탕. 어린 나이에 커다란 스뎅 냉면 그릇에 담긴 갈비탕을 두 그릇씩 작은 위장에 꽉꽉 채우고 나왔다. 결국 버스 타고 내리면서 다 토하기 일쑤였다. 허기가 지면 손발이 떨리고 걷기가 힘들어 주저앉곤 했다. 당뇨는 엄마가 덩굴차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4학년 때부터 끓여서 먹이셨다. 맛이 아주 썼다. 징그럽게 썼다. 하나님의 은혜로 6학년 때 대학병원에서 검사하니 수치가 정상 범위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겁이 나서 종종 마셨다.
위궤양, 편두통, 시신경, 전신 냉증
덩굴차 때문인지 속이 쓰려오더니 고등학교 때는 위궤양이 생겼다. 내시경을 받았는데 위궤양이 너무 심해서 그 당시 유명했던 Z라는 약을 처방받았다. 그 약 복용 후 편두통까지 더해졌다. 편두통은 너무 심해서 누가 내 양쪽 귀를 뒤에서 계속 잡아당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급기야 내가 내 귀를 앞으로 당기며 다녔다. 양쪽 귀 뒤를 콕콕 찌르는 통증도 동반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추위를 너무 심하게 타서 1년 중 6, 7, 8월 빼고는 너무 힘들었다. 봄, 가을, 겨울철 학교생활은 반수면 상태가 되곤 했다. 머리가 얼어버렸다. 그나마 따뜻할 때는 집중이 잘 되었다. 학교에서 자고 일어나면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 펴지지 않아서 그 상태로 침을 맞으러 한의원에 가기도 했다. 하품을 하다가 턱이 빠져서 집에 가기도 했다. 따뜻한 3개월 빼고는 항상 배와 하체를 포함한 전신이 차가워서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위궤양과 편두통이 심했는데 갑자기 시신경에도 문제가 와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눈앞에 W 같은 어떤 빛의 모양이 만들어지면서 시야를 가렸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글씨가 지워져 보이고, 앞에 읽은 것도 기억나질 않았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증세를 대학교 1학년 후반쯤 신유복음 선교회 강은숙 목사님을 만나서 성령으로 치료받게 하셨다. 나에게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은 내 인생의 큰 돌파였으며 전환점이 되었다. 간헐적인 허리통증과 생리통, 결막염을 빼고, 인생을 괴롭게 하고 힘들게 했던 대부분의 통증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온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때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치유의 성령의 불이 아니었을까. 할렐루야.
주근깨와 화농성 여드름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얼굴에 주근깨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점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것으로 6학년 때 별명이 “깨범벅”이 될뻔했는데 인격적이셨던 담임 선생님께서 막아 주셨다. 사면초가.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등학교 때는 얼굴에 화농성 여드름까지 심하게 생겨서 더 난감해졌다. 한의학적 관점으로는 오장육부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에서야 유추해본다. 주근깨도 극혐인데 울긋불긋한 화농성 여드름이 더해졌다고 생각해보라. 나는 여학생으로서 그악스러운 상태에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내가 자주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 줄 아는가. 거울을 주먹으로 치면서 “하나님, 도대체 제 얼굴에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하며 분노하며 절규하기 일쑤였다. 그다음은 읍소였다. “하나님 저 좀 예쁘게 좀 해주세요. 꺼이꺼이. 왜 저만 이러냐고요. 효정이도, 재혁이도 깨끗한데. 왜 저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시냐고요. 이거 불공평한 것 아닙니까. 정말. 해도 해도. 참을 수가 없네. 아버지!” 하늘을 향해 삿대질도 했다. 화장실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논쟁은 수년을 지속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혼자 발작하고 떠들어댔다.
주근깨는 대학교 1학년 때쯤 레이저 치료기술 도입으로 대부분 제거할 수 있었다. 1차, 2차, 3차의 견적이 나왔는데 2차까지만 하고 포기했다. 눈 주위는 너무 아파서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만족스러웠지만, 다시 부작용이 따라왔다. 시술 후 스테로이드로 인해 얼굴 근육이 딱딱해지고 부은 것이다. 불편함은 본인만 느낄 수 있다. 눈알 근육마저 딱딱해졌는지 눈도 활짝 떠지지 않았다. 눈알에 까끌까끌한 통증도 동반했다. 당사자만 아는 고통이었다. 조금 예뻐지는데 고통이 이 정도라니. 부작용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 약 10년쯤 걸린 것 같다. 신기하게도 남편을 만날 때쯤에는 어느 정도 가라앉은 상태였다. 심한 여드름도 대학교 때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신실하신 하나님!
부정맥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부정맥이 있었다. 집안에 놀랄 일이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루가 멀다고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트집을 잡고 괴롭히셨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영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심사가 뒤틀리시면 “예수쟁이가 들어와서 그렇다.”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밖에서 큰 소리가 나면 잠을 잘 수 없었고, 문틈에 귀를 대고 고요해질 때까지 마음졸이며 기다렸다. 자정 12시가 넘어도, 새벽 2시가 될 때까지도 나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야 안심이 되었다. 모두가 잠을 자는 것을 확인하고 누울 수 있었다. 간혹 맥이 뛰다가 멈추다가, 심장이 빨리 뛰다가 잠시 멈추는 일도 있었다. 6학년 때는 남동생이 장난으로 누워있는 내 가슴 위로 점프해서 앉은 적이 있었다. 남동생의 모든 무게가 내 심장을 덮쳤다. 그 순간 심장이 멎는듯한 극심한 고통으로 숨을 쉴 수 없었다. ‘죽는구나’ 생각했다. 다행히 몇 분 지나 숨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쿵, 쿵, 쿵, 쿵.” 심장 뛰는 소리는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베개를 높이 올려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각도가 30도가 넘어야 했다. 베개가 낮아지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안 쉬어져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한의원에서 부정맥이 심하다고 병원에서 심장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할 정도였다. 이 고통은 고1 때 구파발 사시는 침 잘 놓는 어떤 집사님이 오셔서 고쳐주셨다. 신유은사가 있으셨던 분으로 기억한다. 멀리서 1주일 이상 방문하셔서 침을 놔 주셨는데, 신기하게 그 이후로 베개를 낮추어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오랜 고통이 사라졌다. 순간순간 그 집사님께 감사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천사였다. 할렐루야!
강직성척추염
나는 학력고사 세대이다. 그때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체력장이 있었다. 그 당시 대학입시 필수항목이었다. 그중 윗몸일으키기가 있었는데 너무 무리하게 한 것이다. 쓸데없이 잘하려는 마음에 60초에 53개를 하고 말았다.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 그게 화근이 되어 갑자기 등과 허리, 엉덩이뼈에 통증이 생겼는데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극심한 통증이었다. 특히 아침에 등짝이 뻣뻣하게 굳어, 구부리지도 못하고 옆으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통증이 심했다. 오후로 갈수록 조금씩 풀리기도 했다. 한의원도 소용이 없었고, 병원에 가도 차도가 없었다. 놀랍게도 이 고통은 교회 목사님께서 오셔서 안수기도해주시고 많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종종 다시 도지곤 했고, 거의 평생을 따라다녔다. 조금 삐끗하면 재발했다. “으악” 소리가 날 정도의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이 있었다. 숨쉬기조차 힘들다. 통증이 심할 때마다 척추 통증 부위에 주사를 맞곤 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요즘에는 이런 증세를 급성 강직성척추염이라고 하는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질병의 이름조차 없었다. 나중에는 만성이 되었고, 어릴 적 있었던 허리와 등의 곡선이 사라지고 거의 일자가 되어갔다. 30세쯤 되었을 것이다. 상계동의 어떤 유명 한의원 겸 정형외과에서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선생님, 근데 왜 제 척추 모양이 일자로 보이지요?” “당신은 원래 태어날 때부터 일자 허리였소.” 내가 일자 허리라니. 내 기억과는 좀 달라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네, 그게 진실이었나 보군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40세 이후 성령의 불로 완전히 치료해 주신 후 놀랍게도 허리와 등의 곡선이 다시 살아났다. 하나님께서는 오류가 없으셨다. 내 기억에도 오류가 없었다. 할렐루야.
손목 통증과 루게릭병
초등학교를 졸업한 날로 기억한다. 홀가분한 마음에 동네 친구 선희네 집에 놀러 갔다. 어둑해져서 집에 가려고 나오는데 선희네 대문 앞에서 꽈당하고 뒤로 넘어진 것이다. 한 번도 없던 일. 누가 대문 앞에 물을 뿌려놨는데, 추운 2월이라서 얼어 있었다. 살짝 오른쪽으로 넘어지면서 내가 몸을 보호하려고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악” 그 순간 오른 손목이 심하게 꺾였다. 한마디로 홀라당 뒤집혔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날 나는 인생 질병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만성 손목 통증. 통증이 심한데 병원을 가기가 어려웠다. 워낙 시골이라서 병원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것보다도 엄마가 시간을 내서 병원에 동행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통증이 가라앉은 것 같았고 중학교 내내 크게 통증을 못 느끼고 지나갔다. 그런데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손목 통증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병원이나 한의원 가기가 무섭고 귀찮아서 내가 집에서 쑥뜸을 시도했다. 무식하게 한방용 쑥 뭉치를 그냥 손목 위에 올리고 불을 붙였다. 무모했다. 통증은 더 심해졌고 결국 작은 화상 흉터 두 곳만 남겼다. 패잔병이 되어 고3 때 혼자 광명 사거리에 있는 제법 큰 정형외과에 찾아갔다. 엑스레이를 찍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조금 후에 엑스레이 기사, 간호사 할 것 없이 우르르 진료실로 들어오는 것이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자기들끼리 엑스레이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다. 곧 의사의 설명이 시작된다. “혹시, 스티븐 호킹이라고 들어봤어요? 근육이 수축되는..” “네? 아...네..에.” “엑스레이 소견상 근육위측증 같아 보입니다. 부모님이랑 큰 병원 가셔서 정밀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 내가 루게릭병이 의심된다니. 게다가 지금 고3인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팔, 다리에 진짜 힘이 풀려 버렸다. 버스 탈 힘도 없어서 걸어가면서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를 했다. “엄마, 내가 루게릭병이 의심된대. 어떻게 해? 큰 병원 가서 다시 검사받으래.” “어? 그게 뭔대?” “스티븐 호킹이 걸린 병. 근육이 위축되는 그런 거래.” “뭐라고?”
집에 돌아가자마자, 엄마는 이종사촌이자 교회 담임이신 목사님께 전화했다. “유목사, 얼른 좀 와주게나. 우리 현정이가 루게릭병인가 뭔가 하는 것일 수 있다네. 빨리 와서 기도 좀 해주게나.” 저녁에 목사님이 허허 웃으면서 방문하셨고 기도해주셨다. 사실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나 신유는 예수님 당시까지다”라고 믿는 분이셨다. 그런데도 엄마의 성화에 한걸음에 달려오실 정도로 사랑이 많은 분이셨다. 허허허 웃으면서 들어오실 때부터 마음이 든든해지는 분이셨다. 기도 받고, 구로 고대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다시 찍었다. 정말 떨렸지만, 이상하게 평강이 있었다. 진료실에서 의사 선생님께서 엑스레이를 보시면서 말씀하신다. “아무 이상 없는데요?”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치료해 주셨다.
정말 루게릭병이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강직성척추염 증상이 완전히 낫기 전인 2010~2011년쯤 다시 증세가 재발한 적이 있었다. 허리통증과 함께 일어났는데, 걸을 때마다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경험했다. “우두둑, 우두둑.” 팔, 다리 근육의 힘이 풀려서 걸을 때마다 몸이 주저앉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다음날부터 걷지 못할 것 같았다. 다음날 오전 내 영이 천사들에 의해 공중으로 까마득하게 올려졌다. 누워있는 상태에서 천사들이 카이로프락틱을 해주었다. “탁.탁.탁.탁.” 나는 원래 카이로프락틱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측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안감으로 움찔거리며 긴장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힘을 빼라고 하는데 불가능하다. 역시 많이 움찔댔다. 하지만 천사들이 해준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꽤 오래 시원하게 받고 일어났다. 몸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결핵
2,000년 결혼 후, 직장 연수로 호주에 2주 동안 간 적이 있다. 호주가 초겨울이라는 것을 깜박하고 봄, 가을옷을 준비해 갔다. 준비해 간 옷으로는 추위를 완전히 막기 어려웠다. 그곳 사람들은 반팔로 다녀도 끄떡없는 것처럼 보였다. 홈스테이 집 1층에서 생활했는데, 한기가 땅에서 올라와 정말 서늘했다. 며칠 후 브리즈번 시티홀에서 홈스테이 집까지 가는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출구 오른편에 어떤 흑인 같아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분명 흑인이었는데, 몸에서 이상한 아우라가 보였다. 분명 보랏빛 아우라였다. “흑인 같은데 어떻게 사람 몸에서 보랏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지?”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직도 미스터리이다. 룸메이트 선생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하면서도, 그 알 수 없는 신비감이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뭐지? 정말 신기하다.” 그런데 집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나는 극도의 오한으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추위로 뜨거운 물을 안고 잠을 잤다. 그다음 날부터는 기침이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멈추지를 않았다. 기침이 폐 깊숙한 곳에서 울리면서 나오기 시작했다. 호주에 머무는 동안, 끊이지 않는 기침과 가래로 연수는 고통 그 자체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 트라우마로 병원과 엑스레이를 극도로 무서워한다. 그래서 병원을 안 가고 약국에서 기침, 가래약을 사다가 먹으며 버텼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거야. 기침, 가래가 1달 이상 지속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멈췄다. 자연 치료되었다.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2004년 미국에 가기 전 결핵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결핵 항체가 만들어져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2000년 그때를 떠올리게 하셨다. 놀라우신 하나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