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기술 유출 최다… 양형위, 처벌강화 추진
국가핵심기술 노려 경제안보 위협
“실제 드러난 사건은 빙산의 일각”
대법양형위 내주 처벌강화 발표할듯
손해 5배 배상法 법사위 처리는 무산
지난해 국내 반도체 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건수가 역대 최다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해 올 3월 최종 의결할 방침이다.
8일 한국의희망 양향자 의원실에 따르면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적발한 반도체 기술 해외 유출 사건은 13건으로 역대 가장 많았다. 2022년 9건보다 44%(4건) 증가한 수치다. 최근 반도체 해외 기술 유출은 2016∼2018년 매년 1건 적발되다 2019년 3건, 2020년 6건 등 늘어나는 추세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 심화되며 국내 기술을 노린 해외 정부 및 기업들의 탈취 시도가 늘고, 한국 수사기관도 적발에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적발된 사건 상당수가 과거 수년 전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3일 삼성전자 전 부장 김모 씨가 구속 기소된 사건도 2016년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 씨는 18나노 D램 공정 정보를 중국 창신메모리(CXMT)에 무단으로 넘긴 혐의를 받는다.
기술 유출은 반도체뿐 아니라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자동차, 조선 등 한국의 주력 산업에 걸쳐 전방위적으로 일어나면서 국가 안보 및 경제에 위협이 되고 있다. 최근 경남경찰청 산업기술안보수사대가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전 직원 2명에 대해 잠수함 설계도면을 빼돌린 혐의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기술 유출이 끊이지 않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기술 유출로 얻는 이득이 적발 시 손실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8일 정기회의를 열고 기술유출 범죄와 관련해 법원 판결의 지침이 되는 양형 기준 범위 등을 심의했다. 양형위는 18일 추가 심의를 거쳐 이르면 다음 주 내 상향된 양형 기준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핵심 기술을 유출한 산업스파이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를 배상금으로 물게 하는 산업기술보호법 개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 상정됐지만 처리가 무산됐다. 야당이 면책조항이 광범위하다고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양 의원은 “지금 드러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라며 “유출자에 대해 엄격히 처벌하고 사전 예방을 위한 시스템도 철저하게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반도체 기술 유출 38건, 수십조 피해… “정보 다 털린 뒤 발각 많아”
[해외로 새는 첨단기술]
美-中 갈등 속 한국기술 ‘표적’… 2019년이후 총96건 유출 적발
반도체가 38건으로 가장 많아
산업계 “처벌-제재부터 강화해야… 인력관리 통한 예방조치도 시급”
“반도체 기술 탈취는 주로 첨단 공정을 겨냥해 시도되기 때문에 적게는 수천억 원, 많게는 수조∼수십조 원에 달하는 천문학적인 피해를 낳는다.”
반도체 업계 한 임원은 반도체 기술 유출에 대해 8일 이같이 말했다. 무엇보다 시장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맞붙는 경쟁사에 기술이 넘어가면 단 한 번의 유출로 한국 기업 및 국가에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힐 수도 있다. 중대 범죄인 셈이다.
미국은 2022년 첨단 반도체 및 관련 장비에 대한 대(對)중국 수출 통제에 나선 데 이어 지난해 말부터는 저사양 반도체까지 규제를 추진했다. 특히 중국 기업이 메모리·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선두를 달리는 한국 기술에 대한 탈취 시도가 갈수록 심화되는 배경이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국내 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는 이른바 ‘산업스파이’ 사건은 총 96건이었다. 산업별로는 반도체가 38건으로 가장 많았고 디스플레이(16건), 자동차(9건), 이차전지(7건) 등 경제 안보 핵심 기술 분야가 뒤를 이었다.
기술 유출은 이미 핵심 정보가 경쟁사에 다 털린 이후 뒤늦게 발각되는 경우가 많아 업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실제 3일 재판에 넘겨진 전 삼성전자 부장 김모 씨 등은 2016년에 범죄를 저질렀다. 당시 중국 경쟁사로 이직해 D램 18나노 기술을 빼돌린 혐의를 받는다. 2016년은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18나노 D램 양산에 성공하며 메모리 기술의 새 역사를 썼다는 평가를 받았던 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이제는 최첨단 공정인 D램 10나노 초반대나 파운드리 3나노, 2나노에 대한 기술 탈취 시도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며 “뒤늦게 발각된다 한들 이미 해당 기술은 옛날 기술이 돼 있고 경쟁사는 턱밑까지 추격한 상태일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계는 우선적으로 처벌 강화 및 강력한 제재를 통해 경각심을 심어줘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인텔에 3나노 공정 기술을 유출하려다 적발된 전 삼성 직원은 1심에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중국에 삼성 판박이 공장을 세우려 한 혐의를 받는 삼성전자 임원 출신 최모 씨는 당초 구속 기소됐다가 지난해 11월 보석으로 풀려나 논란이 일었다.
사전 예방을 위한 제도 마련도 시급한 과제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미국은 기술 유출 범죄에 대해 개인의 일탈, 범죄 정도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시스템 문제로 접근한다”며 “사후 제재도 중요하지만 사전에 막을 예방 조치에 더 많이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게 인력 관리 시스템이다. 퇴직 또는 이직하는 전문 인력들에 의한 리스크를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2022년 우수 인력 유치 및 퇴직 인력 관리를 위한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겠다고 했으나 지난해와 올해 모두 관련 예산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손승우 한국지식재산연구원장은 “기술 유출은 결국 사람 문제”라며 “국가 핵심기술과 관련된 전문 인력은 아예 퇴직 시 6개월 이상 취업제한을 두거나 다른 곳으로 갈 유인이 안 생기게 보상체계를 강화하는 등 당근과 채찍 모두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이 확대되는 데 따른 감시 및 규제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에서는 첨단 기술 기업이 해외 사업장에서 외국 정부로부터 자료 제출 요구를 받을 경우 대통령령으로 보호 조치한다는 법안을 논의하고 있다. 실제 미국 조 바이든 정부에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상대로 안보를 이유로 들어 공급망 정보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가 논란이 된 바 있다.
박현익 기자, 장은지 기자, 김준일 기자, 신규진 기자, 김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