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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경 수행 스크랩 2014.11.2일 일요일, 이야기가 있는 곳 걷기(인사동거리,북촌한옥마을)
김항섭 추천 0 조회 35 14.11.02 23: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요일 새벽5시, 가을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비를 맞으며 뛰어야 하나?, 멈추기를 기다리며 논어를 읽어야 하나?

 

결국 비맞으며 뛰기보다는, 비 멈추기를 기다리며 논어를 읽는다.

논어 첫구절은 항상 읽어도 공자님의 노년의 생각을 느낄수 있어서 새롭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학이시습지,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불역낙호?"

    "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불역군자호?"

 

The Master said,

"Is it not pleasant to learn with a constant perseverance and application?"

"Is it not delightful to have friends coming from distant quarters?"

"Is he not a man of complete virtue, who feels not discomposure

though men may take no note of him?"

 

 

7시반쯤 가을비가 멈춘다,

오늘은 선유도까지만 천천히 뭄풀기 거리주다. 아주 천천히

춘마를 다녀와서, 세번정도 걷기로 회복은 한것 같지만, 뛰기는 처음이다.

약 15Km정도 거리를 약 두시간 예상하고 천천히 뛴다.

 

외발자전거 경주대회가 있나보다.

쉬고있는 분에게 물었더니, 한강주변을 대부분 통과하는 100Km대회라고 한다.

뛰기보다는 좀 빠르고, 두발 자전거 보다는 많이 느리지만,

자전거 타기보다는 난이도가 있다고 한다.

외발자전거 즐기는 분들이 이렇게 많은줄 예전엔 몰랐다.

 

돌아오는 길에 한두장 찍어보았다.

달리는 수준차이가 많은가 보다...

내가 달리기 출발 할때 지나가던 사람도 있었는데...

돌아올때 약 2시간 후에도 아직도 달리는 분들이 있으니....

대회명: 제8회 저글링샵컵 울트라 100km 외발자전거 마라톤대회

대회 주최/후원: 저글링샵, UDC Korea(Unicycle.com Korea) / KUF(한국 외발자전거 협회)

 

이러한 대회도 많은가 봅니다. 협회도 있고, 동호인들이 많다는 이야기인데...

하여튼 마라톤 주자들 보다는 빠르게 달린다는 사실....

 

 

아침을 딸래미가 해주는 스파게티를 먹고, 문래역에 볼일이 있어 갔더니,

문래역 이름의 전래에 대해서 소개된 내용이 있어서 읽어보고, 확인 해본다.

 

 

 

도심에도 단풍은 아름답게 물들고....

 

 

인사동 거리는 아직은 조용하지만, 막걸리페스티벌 한다는 홍보물은 여기저기 나부끼고...

올때 한잔씩 해야겠다.

 

 

북촌 한옥마을이다.

거의 주말마다 잠시 잠시 다녔지만, 마음먹고 돌아다닌것은 몇번 않된다.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오”

- 선생이 3.1 독립선언을 앞두고 천도교 간부들에게 다짐한 말 중 -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 제 3대 교조로 취임

손병희 이미지 1

손병희(孫秉熙, 1861. 4. 8~1922. 5. 19) 선생은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에서 출생하여1882년 동학에 입문하였다. 그리하여 동학 제2세 교조 최시형 밑에서 종교적 수양을 닦으며 이후 동학을 이끌어갈 역량을 길러갔다. 입교 10년만인 1894년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保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신 사회건설을 주장하며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자 일약 호서지방을 중심으로 한 북접의 통령에 임명되어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동학혁명운동의 기수로서 활약하기에 이른다. 선생이 이끄는 북접군은 관군을 연파하고 충남 논산에서 전봉준과 남접군과 함께 남북접연합군을 형성함으로써 동학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갔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남북접연합군은 일본군의 불법개입으로 인해 공주우금치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동학혁명운동의 열화 같은 의지는 좌절되고 선생은 원산, 강계 등지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동학의 제3세 교조로 취임하여 교세확장에 힘을 기울이다가 1901년에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구국의 길 모색,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일본에서의 경험은 선생으로 하여금 종래 동학혁명에서 보여주었던 무력항쟁의 노선에서 계몽운동으로 방략을 변경하는 기점이 되었다. 선생은 일본에서 권동진, 오세창, 박영효 등의 망명객들과 교류하며 새로이 구국의 길을 모색한다. 그리하여 2차에 걸쳐 총 64명의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유학을 주선하고 신문물에 대한 안목을 키우게 함으로써 민족의 동량(棟樑)을 육성코자 하였다. 또한 1904년에는 갑신개화혁신운동을 추진하여 교도들에게 단발을 지시하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해 간다. 아울러 심복인 이용구를 국내에 파견, 진보회를 결성케 하여 신생활운동의 중추기관으로 삼았다.

일본에 망명중인 선생 등 천도교 간부들의 사진(1904) 망명 시절은 아직 천도교의 출현 전으로, 동학 제3교주였던 선생은 박해를 피해 유학생 24명과 간부 등을 데리고 일본에 망명하였다. 아랫줄 오른쪽이 선생.

이러할 즈음 한국에 대한 주도권 쟁탈을 놓고 야심에 찬 러시아와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한국은 순식간에 전쟁의 도가니가 되었고 한국인의 피해는 극심한 것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물자동원, 인력동원은 결국 우리의 몫이었다. 어느 편이 이기던 우리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 전쟁이 조국독립의 호기로 파악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견하고 이 기회를 이용, 부국강병의 대책을 세워 국가만전(國家萬全)을 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진보회를 앞세워 농민층을 중심으로 한 민중들을 규합해갔다. 그러나 사육에 눈이 먼 이용구가 이끄는 진보희는 선생의 뜻과는 달리 친일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로 변신하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매국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

 

상황의 심각함을 인식한 선생은 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함으로써 친일화된 진보회와의 단절을 서두르는 한편 이듬해(1906년) 귀국한다. 이후 선생은 사태수습을 위해 일진회에 가담한 이용구 등 천도교도 62명을 출교 처분하였다. 국내에 돌아온 선생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일진회에 의해 잠식당한 천도교의 교세를 만회하여야 할 뿐 아니라 심각한 재정문제도 눈앞의 급무였다. 그리하여 우선 교회만회를 위해 정교분리정책을 실시하였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정치적 문제를 떠나 교세확충에 전력하기로 한 것이다. 재정은 신도들의 성미(誠米)로 차츰 호전되기 시작했다.

민족교육사업을 위해 보성학교, 동덕여학교 등 인수

문화사업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했던 선생은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운영하여 교육사업을 확대해 나갔다.

선생은 여기에 만족할 수만은 없었다. 원래 민족의식에 뿌리를 둔 천도교에서 살아온 그였다. 좀 더 민족을 위해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계몽운동으로 눈을 돌린다. 각급 학교에 의연금을 지원하여 교육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해 갔다. 또 보성사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천도교월보>를 발행하여 문화사업에 대한 관심도 늦추지 않았다.

 

당시의 국내상황은 1904년 망국사태를 인식한 의병의 궐기가 눈부셨고 한편으로 교육, 문화 등 국민계몽을 통한 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천도교단의 입장에서 볼 때 대체로 동학과는 사상이 상충되는 의병에 합류하기는 어려운 처지였고(개별적으로는 의병에 가담하는 동학교도가 있었다) 더욱이 1894년 동학혁명운동을 통해 무력투쟁에 의한 실패의 경험을 겪은 처지에서 또다시 무력항쟁의 방략을 구사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 천도교의 실상이었다. 따라서 선생이 교육, 문화사업을 통한 구국의 길을 걸은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이해된다.

 

선생은 1907년 김연국을 거쳐 박인호에게 대도주직(大道主職)을 이양하여 천도교 서무를 관장케 하고 자신은 교세확장에 진력하는 한편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자대학교)를 비롯한 문창, 보창, 명신, 양영 등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또는 신설 운영하는 등 교육사업을 더욱 확대해 갔다.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식을 이끌다

1918년에 접어들면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발맞추어 꾸준히 독립운동의 방안들이 모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19년 1월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계획이 유학생 송계백을 통해 국내에 전달되고 이어 광무황제(고종)가 급붕(急崩)하자 국내에서도 독립선언방식의 운동계획이 급속히 추진되기에 이른다. 독립선언방식을 채택한 것은 파리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할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선생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 측근들에게 독립운동의 세부추진계획을 일임하였다. 이들은 박영효, 한규설 등 저명인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거족적인 항일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였으나 뜻과 같이 않았다. 그리하여 방향을 전환, 독자적인 독립선언계획을 추진하던 기독교측과 연합하기로 하고 기독교계의 남강 이승훈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이어 만해 한용운을 통해 불교계의 동참이 이루어졌으며 유교계와의 연계가 시도되기도 하였다. 또 연희전문, 보성전문, 세브란스 의전 등 각 학교학생들이 추진하던 독립운동계획도 이에 통합하여 바야흐로 전민족적 거사의 준비는 무르익어 갔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

이들 각계 인사들은 3.1독립운동의 골간이 된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화의 3대원칙에 합의하고 각 교계의 중심인사들을 규합해 갔다. 이윽고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완성되었고 천도교계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2만1천여매(3만5천매라는 학설도 있음)의 선언서 인쇄를 마치었으며, 전국 각지로의 배포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선생을 필두로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의 민족대표들이 서명함으로써 모든 준비는 갖추어진 셈이었다. 거사일은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으로 정하였다. 원래 광무황제의 인산(장례일)은 3월 3일이었는데 이사 당일에 거사하면 장례식에 지장을 줄 것을 우려하여 3월 2일로 하려 했으나 이날은 마침 일요일이라 기독교측의 반대로 토요일인 3월 1일로 거사일을 확정한 것이다.

독립선언식 이후 체포되어 2년 옥고 치러

거사일인 3월 1일, 29인(33인중 4명 불참)의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여 선생의 주도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은 만세삼창을 끝으로 선언식을 마친 후 일경에 연락하여 자진 피체되었다. 이들이 점화한 3.1독립운동은 이후 요원의 불길처럼 국내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중국, 러시아, 미국 등 한국인이 살고 있는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3.1독립운동의 영향은 국내외 각지에서 8개에 달하는 임시정부의 출현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통합을 통해 그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그 중 대한민간정부(기호지방)와 대한국민의회 정부에서 각각 선생을 대통령에 선임한 것도 이러한 민중의 신망에 바탕한 것이었다.

 

선생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22년 5월 19일 병사하였다. 당시 선생은 62세였다.

선생의 친필 유묵

선생의 생애는 참으로 한국근대사의 큰 줄기를 이룬 것이었다. 때로는 혁명가로, 때로는 사상가요, 민족의 지도자로 손병희 선생은 늘 앞장서 걸었다. 선생의 유해는 삼각산 동쪽 우이동 언덕에 안장되었고 1966년 민족의 얼이 깃든 탑골공원에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독립된 국가의 앞길을 지켜보고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삼청공원[ ]

면적은 388,109㎡이다.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도성 안에 제일 경치 좋은 곳으로 꼽은 바 있는 삼청동의 이 골짜기가 삼림공원으로 관리되기 시작한 것은 1934년 3월부터의 일이다.

 

일찍이 성현이 “산이 높고 나무가 빽빽한데 바위 골짜기가 깊숙하다(, ).”라고 하였듯이, 북악산 기슭의 깊은 송림으로 이루어진 이 일대는 그 자체가 그윽한 삼림공원이어서 특별히 새로운 시설을 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당시의 경성부는 순환도로ㆍ산책도로ㆍ정자ㆍ벤치ㆍ풀장 등을 시설한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

 

이 공원이 도시계획공원으로 된 것은 1940년 3월 12일자 총독부고시 제208호에 의해서였는데, 특히 이 공원은 140개의 계획공원 가운데 제1호였다. 당시의 면적은 432,000㎡이었으나, 그 뒤 여러 가지 이유로 이 공원의 경내는 잠식되어 줄었다.

 

경내에는 1973년 건립된 정몽주시조비(調) 외에는 이렇다 할 시설이 없으며, 비교적 자연상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점이 특색이다. 신록 및 녹음이 우거졌을 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설경 등이 매우 아름다우며, 도심에서도 가깝기 때문에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이 많이 찾는다.

 

 

 

공원은 경복궁 북동쪽의 북악산() 기슭을차지하며, 북악 동쪽 기슭의 능선을 따라 허물어져 없어진 부분을 복원한 성벽이 뻗어내리고, 도성의 북문이었던 숙청문()도 1976년 10월 복원 ·단장되었다.

 

노송을 비롯한 울창한 수림과 청계천의 상류인 삼청천의 계곡이 공원의 주된 경관을 이룬다. 골짜기의 물이 모여드는 삼청동 남동쪽의 영수곡()에는 병풍 같이 늘어선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인조() 때의 서예가 김경문()의 휘호라고 전해지는 ‘’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또 공원 안 일청교() 옆의 산책로변에는 포은() 정몽주()와 그의 어머니의 시조를 새긴 시조비(調)가 있다. 공원에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성북동() 쪽으로 쉽게 통할 수 있으나, 현재는 삼청동과 성북동을 잇는 삼청터널이 공원 옆으로 뚫려 있다.

 

이 공원의 이름은 도교()의 ‘삼청(:신선이 사는 세 궁전인 · ·)’에서 유래한다.

 

 

 

 

경복궁창덕궁, 금원(비원) 사이 북악산 기슭에 있는 한옥 보존지구로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뜻으로 북촌이라고도 한다. 북촌은 고관대작들과 왕족, 사대부들이 모여서 거주해온 고급 살림집터로 한옥은 모두 조선시대의 기와집이다.

 

원래 이 지역에는 솟을대문이 있는 집 몇 채와 30여 호의 한옥만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말부터 한옥이 많이 지어졌고, 1992년 가회동한옥보존지구에서 해제되고, 1994년 고도제한이 풀리면서 일반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총 2,297동의 건물이 있는데, 이 가운데 1,408동이 한옥이고 나머지는 일반 건물이다.

 

북촌 거리에는 북촌양반생활문화전시관과 북촌 한옥촌 상징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으며, 옛 선조의 생활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가회동 전통 마을축제가 열린다. 주변에 경복궁·창덕궁·덕수궁·금원·삼청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북촌 한옥마을은 서울의 대표적인 한옥마을로, 창덕궁경복궁 사이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고위관리나 왕족들이 살았던 한양의 고급주거지이다. 옛날 으리으리했던 집들을 기대하고 간다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일제 때 이 지역의 땅들이 분할되면서 큰 집들이 작게 나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실제 주거를 목적으로 새로 집들을 지으면서 서로서로 지붕을 맞대는, 작지만 생활하기에 효율적인 집들이 만들어졌다.

이 지역을 새로 개발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한옥마을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해 보존해야 된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이곳을 보호하고 있으며, 우리 옛 동네의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곳으로 꾸며나가고 있다. 골목골목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으며 동네 구경을 하다 보면 곳곳에 있는 다양한 주제의 공방과 박물관 등을 찾을 수 있다.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현대사옥 사이 골목길로 들어가면 북촌문화센터가 있다. 북촌 지도를 비롯해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삼청동길, 가회동길, 계동길, 원서동길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한옥길의 정취로는 가회동 31번지가 유명하다. 계동길 주변으로는 한옥체험관들이 몇 곳 있다. 북촌 내 윤보선가, 중앙고등학교 등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가회동박물관, 동림매듭박물관, 실크로드박물관 등이 둘러볼 만하다.

 

 

고려사이버대 입구, 2004년도 편입해서, 2007년도 졸업했으니, 벌써 거의 10년 다되어 간다.

매주 토요일 중국어 스터디 하는곳이다.

 

중앙고등학교 정문 앞이다.

오후 늦은 시간, 관광객들이 많이지기 시작한다.

여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많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중앙고등학교 정문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다.

몇년이나 되었을까. 몇백년은 된듯하다.

중앙고등학교, 예전에 겨울연가의 드라마 배경으로, 일본인들에게 유명해진 곳이다.

일본이 관광객이 예전에는 단체로 많이 왔는데...요즘은 중국관광객들에게 많이 밀리는듯...

 

 

 

태견 시합을 하고, 시상식이 있다.

외국인들에게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 같다.

 

 

공중부양을 한다고, 뭘 한참 하드니, 옆에 막대를 이용해서 공중부양을 했다나...

그래도, 관?들은 좋아한다.

 

인사동이라는 명칭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처음 사용되었다. 현재의 인사동 지역에는 조선 초기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과 견평방()이 있었고(방()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도의 행정구역 명칭의 하나로 성안의 일정한 구획을 말함), 1894년 갑오개혁 당시에 이루어진 행정개혁 때는 대사동(), 원동(), 승동(),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등이 있었다. 관인방과 대사동에서 가운데 글자 인()과 사()를 각각 따서 인사동이라는 동명이 붙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사동(댓절골)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에 고려시대에는 흥복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원각사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졌다.

 

 

 

 

매주 토요일 일요일 시민들에게 무료로 글을 써주시는 분....

복받을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도 "命" 하나를 써달라고 부탁해서 방에다 걸어 놓았다.

 

 

터키아이스크림 장사수단이 좋은것 같다.

애들을 상대로 코믹하게 연기하니...애들이 많이 몰린다.

 

이집이 손님이 많은 이유, 만드시는 젊은이들이 콩글리쉬 비슷하지만, 영어,일본어,중국어로

만드는 과정을 코믹하게 설명하므로써 외국인에게 인기가 있는듯 하다.

오래전에 이곳에서 아리랑을 연주해서 감동을 준 곳이기도 하다.

 

http://www.youtube.com/watch?v=wygOocOSOVo

 

March 1, 2013, In Ssamji-gil, Insa-dong, Seoul, South Korea.
Korean university student organizations have been working
on a project called 'This is Arirang'.

그때 감동을 다시한번 느껴보시길를 바랍니다.

 

 

조선왕조를 건립한 태조 때부터 국가나 왕실에 공을 세운 사람을 공신으로 책록(祿)하기 위해서 그 업적을 조사하던 관청인 충훈부()가 관훈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도적을 경비하고 법에 금한 사치스런 잔치나 풍기문란 등을 단속하던 이문()이란 관청과 도화서()가 인사동에 있었다. 인사동은 관가이면서 동시에 거주지였다. 중인()들이 많이 산 것으로 전해지지만, 이율곡(), 이완() 장군, 조광조() 등도 이곳에서 살았다.

 

일제강점기부터 골동품 상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이들 상점들은 문화재 수탈의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시기에 인사동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을 들 수 있다. 당시 33인이 모였던 태화관 자리에는 태화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해방 후 1970년대에 들어와 화랑, 표구점 등의 미술품 관련 상점들이 이곳으로 집중되면서 인사동은 현재와 비슷한 문화의 거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서울시에서는 1988년에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로 지정하였고 2002년 4월 24일에는 제1호 문화지구로 지정했다.

 

 

 

 

 

 

인사동은 도심 속에서 낡지만 귀중한 전통의 물건들이 교류되는 소중한 공간이다. 인사동에는 큰 대로를 중심으로 사이사이 골목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이 미로 속에는 화랑, 전통공예점, 고미술점,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카페 등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인사동의 가게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멋으로 젊은이들은 물론 중년층에게까지 매우 인기가 많다. 그 중에서도 화랑은 인사동의 맥을 이어온 중심이다.

이곳에는 100여개의 화랑이 밀집되어 있는데 한국화에서 판화, 조각전까지 다양한 전시회를 감상할 수 있다. 대표적인 화랑으로는 민중미술의 중심역할을 했던 학고재, 재능있는 작가들의 터전이 되었던 가나화랑, 가나아트센터 등이 있다. 만약 인사동의 유명한 화랑만을 골라서 편하게 구경하고 싶다면 미술관 순화버스 를 이용해보자. 저렴한 가격으로 유명 화랑 10여곳을 둘러볼 수 있다.

화랑과 함께 인사동 거리를 메우고 있는 것은 바로 전통 찻집과 음식점이다. 처음에는 찾기가 힘들지만, 산책하듯이 천천히 골목골목을 둘러보면 매우 재미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명소를 꼽는다면 전통찻집 귀천이 있다. 귀천()은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운영하는 전통찻집으로 내부는 매우 작지만 당시 시인의 책과 사진을 접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모과차가 가장 향기가 좋아 인기인데, 지금도 가끔 유명 인사들이 다녀가는 곳이다.

인사동은 매주 토/일요일마다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어 시민과 함께 하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날은 기존 가게는 물론 거리에는 전통공연과 전시는 물론 엿장수, 사주와 궁합을 보는 할아버지가 함께 한다. 이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이들은 바로 각국에서 몰려든 외국인들이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기 위해 찾아든 외국인 관광객들은 전통가게에서 고물건을 보거나 고미술을 산다. 그리고 거리에 있는 엿을 사고 전통 파전을 먹는다. 도심에서 느끼는 전통의 멋에 빠진 외국인들의 모습도 많이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사동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6, 한국관광공사)

 

 

 

 

 

무엇을 했던 곳일까?

안내판도 없고, 인터넷을 찾아봐도 모르겠다.

다음에 가서 다시 한번 물어 봐야겠다.

사헌부와 함께 대간()이라 하였고, 사헌부, 홍문관과 함께 삼사(), 사헌부, 형조와 함께 삼성()이라 불리었다. 그 연원은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의 산기대부(), 간의대부()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당·송대에 정비되어 문하성과 중서성의 관리로 산기상시·간의대부·보궐·사간·습유·정언 등이 황제에 대한 간언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를 본받아 중서문하성의 낭사()가 간관의 역할을 하였고, 별도의 관청은 없었다.


1392년(태조 1) 조선의 새 관제를 정하면서 고려와 마찬가지로 문하부(낭사)를 두어 간관의 일을 맡도록 하였는데, 관직은 정3품 좌·우 산기상시 각 1명과 종3품 좌·우 간의대부 각 1명, 종3품 직문하 1명, 정4품 내사사인 1명, 정5품 기거주 1명, 정5품 좌·우 보궐 각 1명, 정6품 좌·우 습유 각 1명 등 총 11명이었다. 이때 문하부 낭사는 단지 왕의 잘못에 대한 논박을 할 뿐만 아니라, 왕의 교지를 받아서 발표하고, 각종 문서를 왕에게 올리는 일까지 함께 맡고 있었다.

 

1401년(태종 1) 문하부가 혁파되면서, 문하부 낭사는 독립된 기관인 사간원으로 개편되었는데, 관직은 좌·우 간의대부 각 1명과 지사간원사 1명, 좌·우 헌납 각 1명과 좌·우 정언 각 1명으로 축소되었다. 이는 교지나 문서를 전달하는 업무를 없애고, 간관으로서의 기능만 남겨 두었기 때문이었다. 1466년(세조 12) 관제개혁 때 좌·우 간의대부를 정3품 당상관인 대사간으로, 지사간원사를 사간으로 바꾸었으며, ≪경국대전≫에는 정3품 당상관 대사간 1명, 종3품 사간 1명, 정5품 헌납 1명, 정6품 정언 2명으로 규정되었다. 모두 문관으로 임명하였고, 대사간에서 정언까지 모든 관원을 대장()으로 통칭하였다. 이같은 사간원의 직제는 ≪경국대전≫에 고정되었다가 갑오경장 때 폐지되었다.


사간원의 직무는 원칙적으로 왕의 잘못을 간하는 것이었지만, 그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다른 기능을 하였다. 사헌부와 함께 비리관리에 대한 탄핵을 담당하였고, 왕이 고위관리와 함께 정치를 논하는 조계()와 상참()에 참여하였다. 의정부, 육조와 정치나 입법을 논의하였고, 왕이나 세자가 공부를 하는 경연, 서연에도 입시하였다. 또한 5품 이하 관원들을 임명할 때 자격을 심사하여 동의하는 서경()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간관은 유교적 이상사회의 실현을 위한 바른 정치를 위하여 왕을 보좌하고 견제하는 모든 업무를 담당하였던 것이다.

 

간원()·미원()이라고도 한다. 사헌부와 함께 대간()이라 불렀고, 홍문관()·사헌부와 함께 삼사()라 하였고, 형조()·사헌부와 함께 삼성()이라 하였다. 수장은 대사간이었으며 정3품의 벼슬이었다.

1392년(태조 1)에 관제를 제정하면서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문하부()의 낭사에게 간관의 기능을 담당시켰다. 이때 관직은 좌·우산기상시(:정3품) 각 1명, 좌·우간의대부(:종3품) 각 1명, 직문하(:종3품) 1명, 내사사인(:정4품) 1명, 기거주(:정5품) 1명, 좌·우보궐() 각 1명, 좌·우습유(:정6품) 각 1명을 두었고, 헌납간쟁()·박정차제()·수발교지()·통진계전(?) 등의 일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1401년(태종 1)에 문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두는 동시에 문하부의 낭사를 독립시키면서 비로소 설치되었다. 이와 함께 관원의 숫자도 줄여 좌·우간의대부(정3품) 각 1명, 사간원지사(:종3품) 1명, 좌·우헌납(:정5품) 각 1명, 좌·우정언() 각 1명 등을 두었다.

 

그뒤 1466년(세조 12)에 다시 관제를 정비하여 대사간(:정3품) 1명, 사간(:종3품) 1명, 헌납(정5품) 1명, 정언(정6품) 2명을 두었는데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관료는 첫째, 국왕에 대한 간쟁, 신료에 대한 탄핵, 당대의 정치·인사 문제 등에 대하여 언론을 담당했으며, 둘째, 국왕의 시종신료로서 경연(서연()에 참여하였고, 셋째, 의정부 및 6조와 함께 법률 제정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였으며, 넷째, 5품이하 관료의 인사 임명장과 법제 제정에 대한 서경권()을 행사하였다.

이처럼
간관의 임무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화요직()으로 인정되어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강직한 사람 가운데서 선발하였고, 교체시에도 지방관으로 폄출하지 않았으며, 승진시에는 파직 기간도 근무 일수에 포함시켜 주었다.


사간원 본문 이미지 1

 

 

 

http://www.mmca.go.kr/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과천관에 이어 이번에 개관했다.

사진을 못찍게 해서...

잘 모르는 그림이지만 감상만하고 왔다.

 

 

http://jdlib.sen.go.kr/jdlib_index.jsp

정독도서관 홈페이지

 

대지 3만 6470㎡(1만 1032평), 건물 1만 2999㎡(3,939평)

서울시민에게 최신의 정보를 제공하고, 교양·학습 등을 지원하여 문화발전 및 평생교육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서울시는 1976년 1월 경기고등학교를 인수하고 1977년 1월 4일 개관하였다. 1985년 8월 1일 족보자료실을 개실하고 1989년 4월 7일 도서관운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94년 2월 25일 국립중앙도서관과 네트워크로 운영되기 시작하였으며, 1995년 6월 15일 서울교육사료관을 개관하였다.

1995년 7월 24일 중국연변자치주 연변도서관과 결연을 체결하고 1996년 9월 25일 도서관협력망 서울지역 대표도서관으로 지정되었다. 1996년 10월 8일
멀티미디어실을 개설하고 1997년 5월 2일 일본도립중앙도서관과 결연을 체결하였다. 1997년 5월 15일 다이얼업 검색, 1997년 6월 30일 인터넷 자료검색을 개통하였다. 1998년 3월 7일 취업정보도움방을 개실하고 1999년 3월 31일 한국도서관상 공적상을 수상하였으며, 2000년 6월 19일 장애인실을 열었다.

대지 3만 6470㎡(1만 1032평), 건물 1만 2999㎡(3,939평)이며, 전산시스템과 2,900여석의 좌석을 갖추고 있다.
인터넷 자료검색과 멀티미디어 자료제공 및 정부공공기관 인터넷망(T1) 연결 사업을 하고 있으며, 특별 활동으로는 독서회, 1일 독서교실, 엄마와 함께 하는 이야기교실, 문화교실, 전통천자문교실, 영화상영을 하고 있다.

중점사업은
족보실, 서울교육사료관, 교육사진전개최 및 학교순회전시, 전통천자문교실, 일본 도립중앙도서관과 연변도서관의 국제교류, 자료발간, 이동도서관, 취업정보도움방 운영 등이다. 간행물로는 《도서관보》《연속간행물종합목록》을 비롯하여 족보안내소책자《나의 뿌리는? 》을 발간하였다.

 

정독도서관 앞....유명한 맛집들이 많다...

우리가 자주가는 중국식 만두집....

 

 

 

맛걸리 시연회 하는곳에서 한잔씩 맛을 보고...

그래도 제일 입맛에 맞는 막걸리는 서울장수 막걸리다.

장수막걸리 파는 곳에서, 저녁겸 막걸리 한잔씩 하고, 하루를 마무리 한다.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북악산은 산행은 생략했다.

먹거리들이 없으면 않되죠....

다양한 먹거리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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