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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아저씨 같은 사제>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사제, 약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며 물질에 신경을 쓰지 않고 겸손한 사제, 겸손하여 언행에 예의를 갖춘 사제, 성사집전을 경건하게 하고 강론을 경건하게 하는 사제, 편견과 편애를 멀리 하고 후배 양성에 마음을 쓰며 죽기까지 사제직에 충실한 사제..."
위 글은 신학교 산책길 모퉁이에 언제부터인지, 누구에 의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조그마한 나무 푯말에 적힌 글인데, 들리는 말에 따르면 "평신도가 바라는 이상적인 사제상입니다(조정래, 일요한담, 가톨릭 신문 참조).
"먼저 자신이 피안으로 건너가 다른 사람들을 건너게 해주며, 먼저 자신이 해탈하고 나서 다른 사람도 해탈케 해주며, 먼저 자신이 수양하고 나서 다른 사람도 수양케 하며, 먼저 자신의 마음을 밝게 하고 나서 다른 사람의 마음도 밝게 해주며, 먼저 자신의 먼지를 털고 나서 다른 사람의 먼지도 털어 주며, 먼저 자신이 즐거워 한 후에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해준다."
위 글은 최인호씨의 구도소설 "길 없는 길"을 읽다가 발견한 글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고 따르는 구도자들은 자기 한 몸 구제하는 데 정신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바세계를 헤매는 숱한 중생들과 일심동체가 되는 사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 모습대로 솔직하게 살되 만나는 이들로 하여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사제, 많은 일보다는 꼭 해야 할 일을 정성껏 하는 사제, 명령하기보다는 귀가 큰 사제, 너무 유식하고 고상해서 가까이 갈 수 없는 사제가 아니라 때로 실수도 하지만 담담하게 웃을 수 있는 사제, 그래서 누구나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골 아저씨 같은 사제를 원합니다."
위 글은 본당에서 사목하고 계시는 한 수녀님이 그려보는 바람직한 사제상입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어려운 생활이 목자로서의 삶, 사제로서의 삶인 듯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요구나 기대치는 높은 반면, 사제 역시 인간인지라 실제 생활은 그러한 기대에 결코 부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제로서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강론대 앞에 서는 것이, 그리고 세상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곁들여 길 잃고 헤매는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착한 목자로서의 삶은 우리가 막연히 상상해보는 낭만적인 삶이 결코 아닙니다. 끝없이 펼쳐진 파란 풀밭 위에서 여유 있게 책을 본다든지 피리를 부는 그런 유유자적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늘 양떼의 머릿수를 세야하고, 뒤쳐지는 양들을 끊임없이 몰고 가야하며, 때로 황량한 들판에서 노숙을 하는 거친 생활입니다. 때로 퍼붓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아야 하며, 수시로 다가오는 위험과 돌변의 사태를 대비해 언제나 긴장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이 착한 목자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사제들이 착한 목자로서의 삶에 충실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숱한 부족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충실한 사제,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제, 갈 곳 없는 사람들, 하소연할 데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의지처가 되는 사제들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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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8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필리3,3-8ㄱ 루카15,1-10
자유를 향한 여정
-깨달음, 치유, 자유-
오늘은 ‘자유’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본능적으로 자유를 찾는 사람입니다.
자유로울 때 인격의 실현이요 행복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여정은 그대로 자유를 향한 여정입니다.
하느님은 자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점차 자유로워지는 삶인지요?
우리의 크고 작은 깨달음은
존재의 원천인 하느님께 대한 깨달음에 닿아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은총보다 더 좋은 명약은 없습니다.
대부분 심신의 질병은 무지에서 기인하고
깨달음의 은총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낼 때 저절로 치유요 자유입니다.
깨달음과 자유는 함께 갑니다.
진정 각자(覺者)만이 자유인(自由人)으로 살 수 있고
이런 이들만이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자유인의 예를 나눕니다.
“遊(유);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다-유유녹명종교나눔터”
얼마 전 수도원을 방문한 분들에게 받은 명함입니다.
종파를 초월하여 종교 간의 대화와 나눔을 통해
더 큰 자유를 찾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예전에 제가 써 놓았고 자유로워했던,
‘하늘 보면/마음은/훨훨 날아/흰 구름 되네.’
시와 일맥상통하여 반가웠습니다.
얼마 전 배 철수씨가
‘100년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 극찬을 한
최 백호 대중음악가의 인터뷰 기사 중 마지막 대목도 강렬했습니다.
-‘나이 드는 게 신난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들었다-
“정말이다.
나이 들면서 좋은 일들이 더 많이 생겼으니까.
가수로서 새 삶을 살게 해 준 ‘낭만에 대하여’는
20,30대에는 절대 못 만들 노래다.
세월은 그저 덧없이 흘러가지 않는다.
하루하루 차곡차곡 쌓여간다고 생각하면 진짜 멋지지 않나.
좋아서 즐겁게 노래하니 나이 들수록 실력이 는다.
괜한 이야기가 아니고 목청도, 호흡도, 감정표현도 더 좋아졌다.
아마 내 생애 최고의 앨범, 최고의 노래는 아흔쯤 나오지 않을까 싶다.
(웃음)”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의 자유로움이 가득한 고백입니다.
어제 읽은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사람의 생사, 화복, 수명, 그리고 일의 연월연일을
귀신처럼 예언하는 신들린 무당이 있었다.
제자가 안내하여 호자(壺子)라는 현자의 관상을 보게 하였다.
무당은 그의 상을 보고 죽음이 임박했다고 하고,
그 다음은 병이 나아 생명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다음 번에 무당은
얼굴의 상이 변화가 심해서 관상을 볼 수 없다고 하면서
호자를 피해 달아났다.’
이에 대한 풀이가 심오합니다.
‘처음 호자는 무당에게 땅의 징조를 보여줬고,
두 번째는 하늘과 땅의 조짐을 보여주었다.
호자가 세 번째 보여준 것은 표면적인 증상을 넘어 가는 본질적 실체였다.
그러나 무당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흡사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소리치며 달아난 악령들을 연상케 합니다.
호자나 예수님 같이 본질적 실체를 사는 이들이 자유인입니다.
본질적 실체인 하느님을 깨달아 알아갈수록 치유요 자유입니다.
그 무슨 환상이나 우상도 이들을 유혹하지 못하며
두려움이나 불안도 발붙이지 못합니다.
사실 무지로 인한 환상, 우상, 두려움, 불안이요
깨달아 자유로워지면 저절로 자취 없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진정 각자요 자유인입니다.
현실도피적인 자유가 아니라
현실 안에서 자유로운 처신으로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을 자유에로 이끄신
예수님이요 바오로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과의 경계를 허물고 자유롭게 식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무엇에도 매이지 않은 예수님의 자유로움을 반영합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투덜거리는
종교적 엘리트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님은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를 통해
이들을 깨달음의 자유에로 이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하느님을, 하느님의 기쁨을 체험했기에 이런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이런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깨달아 살았기에
예수님은 진정 각자요 자유인 되어
만나는 모든 이들을 하느님의 자유에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사도의 깨달음과 자유의 비밀이 환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로 그리스도께 대한 깨달음이
사도 바오로를
세상 모든 육적인 것으로부터 초연한 자유를 누리게 했음을 봅니다.
하여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자유를 누리며 살았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우리 수도승의 정주 서원 역시 자유와 직결됨을 봅니다.
하느님 중심 안에 정주가 깊어질수록
하느님께 대한 깨달음과 더불어 자유도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깨달음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치유해주시고 자유롭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께는 생명의 샘이 있고,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나이다.”(시편36,10참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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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필리피 3,3-8ㄱ
복음 루카 15,1-10
저는 6남매 중의 막내로, 제 위로 형 셋과 누나 둘이 있습니다. 형님과 누님들 모두 학창시절에 공부를 아주 잘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공통적으로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운동이었습니다. 달리기도 못하고 공도 잘 못 차고…….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형 누나들이 운동을 잘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또 직접 보았기 때문에 우리 집안은 원래 운동을 잘 못하는 집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또 친척들이나 이웃들 역시 ‘너희 형제들이 공부는 잘 하지만 운동은 잘 못하지.’ 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저 역시 체육 시간이 제일 싫게 되었습니다. 달리는 것이 자신 없었고, 각종 구기 종목에 있어서도 못한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거든요. 이러한 저를 향해 ‘우리 집안은 원래 운동을 못해.’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체육시간을 피했고, 운동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한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 반 이어달리기 대표로 뛰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달리기를 잘해서 뽑힌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이 운동회 직전에 우리 반 학생 대부분이 서울로 야구 응원을 가던 중에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지요. 결국 달릴 선수가 없어서 그래도 멀쩡한 제가 인원 채우기 위해 이어달리기 대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결과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각 반에서 제일 빠르다는 아이들이 뛰는 이어달리기입니다. 그런데 꼴찌로 달리고 있던 우리 반이었는데, 제가 두 명을 제치고 전체 이등을 한 것입니다.
운동을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저한테도 운동을 잘 하는 에너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거의 모든 운동을 잘 하는 학생이 되었지요.
저는 운동을 못한다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꼬리표가 철옹성처럼 계속 제 뒤를 쫓아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꼬리표는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충분히 떼어낼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 가운데에서도 꼬리표를 달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성당에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분, 나 같은 죄인을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분…….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쫀쫀한 분이 아니십니다. 나의 기준에 주님을 맞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대범하신 분, 그래서 우리의 작은 회개 하나로도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크게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스스로 꼬리표를 달지 마십시오. 꼬리표는 주님께서 붙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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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1주간 목요일>(2012. 11. 8. 목)(루카 15,1-10)
<되찾은 양의 비유, 되찾은 은전의 비유>
11월 8일의 복음 말씀은
루카복음 15장 1절-10절,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되찾은 양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면,
'예수님'과 '세리들, 죄인들'과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이
삼각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세리들과 죄인들을 구원받지 못할 인간들로 생각했고,
그런 인간들과 어울리는 예수님도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리들 쪽에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의인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고,
자기들보다 더한 죄인들(위선자들)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거리낌 없이 자기들과 어울리고 함께 음식을 먹는 예수님은
참으로 구세주이신 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세리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은 모두 예외 없이 구원해야 할 죄인들입니다.
세리들도 잃은 양이고, 바리사이들(율법학자들)도 잃은 양입니다.
우리는 이 삼각형의 구도에서 각자 어느 한 꼭지점에 서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입장이 바뀌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착한 목자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같은 모습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비판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은 그것을 교회를 위한 건전한 비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구원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한 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30)."
큰아들은 동생을 동생이라고 하지 않고 '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비난합니다.
큰아들이 동생을 동생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것은
자기가 형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과 같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을 비난한 것은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을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작은아들은 집으로 돌아옴으로써 아들 자격을 회복했는데,
큰아들은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함으로써
아들 자격을 잃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하는 아버지는 큰아들을 설득하려고 애를 쓰는데,
큰아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큰아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현재진행 중인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교회 문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열려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소외 계층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소외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곳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의 입장에서는
'잃은 양 한 마리와 같은 나'를 찾아나서는 예수님의 은혜에
응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잃은 양'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에게로 돌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를 거부하고 떠나버린 양이 아니라
목자가 찾아와 주기를 애타게 바라는 양이 '잃은 양'입니다.
그런데 세리들이라고 해서 전부 다 '잃은 양'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세리들 가운데에는
회개할 생각도 안 하고,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도 많았는데, 그런 세리들은
예수님을 거부한 바리사이들(율법학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은 세리들과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든'(루카 15,1)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잃은 양이지만 목자에게 가려고 애를 쓰는 양'입니다.
세리들이든지 바리사이들이든지 간에
자기가 잃은 양인 줄도 모르고 목자를 외면한다면
아무리 착한 목자가 찾아 나선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의 핵심은 '되찾은 기쁨'입니다.
지금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죄인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이어야 합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와 '되찾은 은전의 비유'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회개만 말하는 것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가'
회개해야 할 잃은 양 한 마리이고, 잃어버린 은전 한 닢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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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탄의 질투 >
영화 「아마데우스」는 1984년에 제작되어 두 사람의 작곡가, 즉 ‘볼프강 아마데우스’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삶과 음악’, ‘두 사람간의 갈등’을 그린 영화입니다.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요제프 2세 황제의 궁정 음악장이고 황제의 개인교습을 도맡아 하는 대단한 음악가입니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7세 때’, ‘교향곡’, ‘12살’ 때는, ‘오페라’를 작곡했을 정도로, 천재적이었고, 8세 때는, 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 할 정도로, 이미 그의 실력은 출중했습니다. 이런 모차르트의 출현으로 살리에리는 자신의 음악적 한계를 절감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은 황제 요제프 2세가 모차르트의 오페라 연주 소식을 듣고 오페라 작곡을 의뢰하기 위해 그를 궁중으로 초대합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를 환영하는 행진곡을 작곡해 궁중에서 연주합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의 연주를 한 번 듣고서 악보를 보지 않은 채 즉석해서 재현해내고 수정할 부분까지 지적합니다. 이런 천재적인 재능을 보고 살리에리는 패배감에 사로잡힙니다.
더군다나 모차르트가 살리에리의 약혼녀까지 자신의 오페라에 출연하게 하여 자신의 여자가 있음에도 그녀를 범하고, 오만하고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자, 그러한 모차르트에게 천재성을 부여한 신을 저주하고 그를 증오하기 시작합니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 살리에리가 사제에게 고백한 내용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신을 믿지 않게 되었소. 오만하고 음탕하고 지저분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녀석을 선택하고선 나에겐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능력밖에 안 줬기 때문이오.”
살리에리는 신이 편파적이고 매정하다고 여기고, 십자가를 불태워버리면서 모차르트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키워갑니다.
그럴 즈음, 빈곤과 병마로 시달리던 모차르트는, 자신이 존경하던 아버지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이를 본 살리에리는 이것을 이용해, 모차르트에게 아버지의 환상에 시달리도록 조정하면서, ‘진혼곡’의 작곡을 부탁하자 계속돼가는 심리적 압박감에 결국 지쳐 쓰러져 목숨을 잃게 되고, 살리에리 역시 죄책감에 나름대로의 대가를 받게 됩니다. 살리에리는 그 질투심 때문에 그 이후에도 자신의 음악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자신이 천재 음악가인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자살까지 시도하는 평생을 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오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며 투덜거립니다. 자신들이 보기에는 커다란 죄인들인데 예수님께서 자신들보다 그들과 더 가까이 지내는 것에 대한 불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죄인들이기에 그 회개가 당신과 하늘의 천사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된다고 그들을 설득하십니다. 이는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큰 잔치를 벌여주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한 마리 내어주지 않는다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하던 큰 아들을 설득하던 아버지의 모습과 같습니다.
사실 살리에리도 모차르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 나라의 첫째가는 음악가였습니다. 그리고 죽기까지 열심히 더 노력했더라면 많은 좋은 곡들을 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질투심이 모차르트도 죽게 만들고 자신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질투는 상대도 죽이고 자신도 죽이는 죄입니다. 이는 교만에서 나옵니다. 자신이 받은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남에게 더 준 것에 대해 불평만 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이 처음에는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에게 천사보다도 더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실 것이라는 계획을 알게 됩니다. 천사들은 죄를 짓는 일도 없지만 영원히 종노릇만 하고, 인간들은 많은 죄를 짓지만 하느님의 자녀의 지위까지 올려주셔서 자신들이 인간을 섬기는 종이 되게 만드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하느님께 반기를 든 것들이 사탄과 마귀들입니다. 질투는 이렇게 교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투는 상대의 파멸을 위해 자신의 더 큰 파멸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구전되는 유대인들의 민담입니다. 어느 날 천사가 한 여자에게 나타나 “내가 너를 축복하겠다. 그리고 네가 원하는 친구 한 사람에게는 너에게 주는 축복보다 갑절로 많은 축복을 주겠다. 어떤 축복을 원하며 어떤 친구를 갑절로 축복해 주기 원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 여자의 머릿속에 평소에 질투하던 여자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사님, 제게 주실 축복을 갑절이나 더 줄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바라는 축복은 한 쪽 눈이 머는 것입니다.”
질투는 내가 받은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교만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됩니다. 천사였다가 마귀가 되면서까지 하느님과 인간을 질투했던 사탄의 모습이 되지 말고, 항상 주님을 찬미했던 성모님의 겸손한 모습을 본받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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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쁘게 해 드려라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 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루가23,42)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가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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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말로 ‘자비’(misericordia)라는 말은 두 개의 낱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하나는 ‘슬픔’ 또는 ‘괴로움’을 뜻하며, 다른 하나는 ‘마음’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자비란 이 두 낱말이 합쳐져, 마음이 슬픈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자비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없애 주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수학 시험을 보셨다면 어떻게 되셨을까요? 아마 낙제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인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한 마리 양이 아흔아홉 마리 양들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닙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계산 방식을 따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수학은 하늘 나라의 시민만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시고자 그 어떤 수고나 위험도 감수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을 찾으신 뒤에는 너무도 기쁘신 나머지 보잘것없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십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의 슬픔과 괴로움을 어루만져 주시고 덜어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운 마음에 동참하도록 오늘도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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