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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수인선이 군자지역의 소금수송을 위해 인천항까지 연결했다고 합니다.
: 그렇다면 원래 종착역은 남인천역이 아니었을까요?
: (인천항이니까 경인선 인천역까지 갔을 수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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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수원역은 경부선 옆에 협궤 승강장이 있어서 거기에 협궤 본선과 삼각선으로 연결돼 있다고 합니다.
: 그렇다면 그당시 여주-남인천간 직통운행했을까요, 아니면 수인선 구간과 수려선 구간을 나눠서 운행했을까요?
: 6.수인선은 1977년에 화물운송이 끊겼다고 합니다.
: 그렇다면 그 이전의 화물운송을 어떻게 했을까요?
: (협궤동차 뒤에 화물칸 달았던가... 아니면 증기기관차를 썼던가..... 둘중의 하나겠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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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업그레이드 수인선 연수구간에는 주민들이 지하화하라며 온갖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석탄수송하는 기관차 소음 때문이라나...........
: 그렇지만 수인선에는 77년에 화물운송이 끊겼습니다. 연수지역의 경우에는 92년에 여객운송도 끊겼지요.
: 그런데 어째서 다시 화물/여객수요가 증가하게 됐을까요?
: (이게 제일 풀기 힘든 수수께끼이라고 생각.)
8번에 대하여 답변드리면 당시의 수인선화물은 주로 염전
에서 싣고오는 소금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몇달전에 수인
선 기관사를 하신 노기관사님께 여쭤보니 재밌게도 당시에
소금은 인천에서 수원쪽으로 많이 싣고 나녔답니다. 제가
알기로는 소금은 인천쪽으로 실고 다닌줄 알았는데...
어쨌건간에 수인산업도로가 개통되면서 육로의 발전이
수인선화물의 수요를 흡수해버렸고.
지금에서 다시 화물열차의 중요성은 당연히 소금말고 다른
화물의 수송수요의 증가 때문이죠. 지금 경부선을 경유하
여 인천으로 가는 화물열차는 경인선을 이용하지만 수인선
이 개통되면 그 시간이 무척 단축되리나는것은 뻔한 일입
니다. 더욱이 경인선의 용량에 부담을 전혀 줄 필요가 없
기때문이죠. 그리고 여객의 증가는 수인선이 다니고 있던
싯점에는 거의 폭발적인 증가가 있었는데 특히 수인산업
도로의 개통은 수인선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할정도로 빠
른 수원과 인천간의 운행을 보장했고 또 매우 자주운행을
함으로서 수인선의 수요와는 별개의 또다른 수요를 창출
해냈습니다. 수인선의 여객은 최종목적지가 결국은 송도로
제한이 되어서 인천시내로의 진입이 귀찮고 또 기차자체의
운행도 불안하면서도 운행도 자주 없었지만
새로 계획되는 수인선전철은 우선 수원과 안산과 안산과
인천간의 수요를 흡수하게 되므로 충분히 타당성이 있습
니다. 수원버스터미널에서 안산과 인천으로 각각향하는
버스의 빈번함과 또 각종좌석버스의 빈번함 마찬가지로
인천과 안산사이 인천과 수원사이의 이동량은 기존의 협궤
수인선으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용량이 아니므로 별수 없이
광궤선만이 대안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도 안타까운것은 꼭 협궤철도를 없애야만 하는가 입
니다. 역사적인 유물조차도 경제논리로 설명을 해야하는
경제이데올로기의 천박성때문에 수인선협궤열차는 광궤에
밀리는 역활을 했는데 재밌게도 그렇다고 수인선이 다니던
그 철길에 꼭 광궤가 생기는것도 아닙니다.
수여선도 마찬가지로 기존의 철도는 변함이 없는데 영동고
속도로의 개통과 기존의 버스의 속도향상등으로 결국 역사
의 뒤안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개개버스의 속도향상은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낡은 선로전체를 개량하여 협궤열차의;
속도를 향상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는데 거기에 장마로 인
하여 철길이 유실되는 사고가 나자 아예 폐선시켰답니다.
4번 직통열차의 운행은 없었답니다. 수원역을 거쳐야만 했답니다.
6번. 원래는 화물열차가 한편성 운행을 했고 나머지 열차
에는 혼합열차라하여 객차와 화차를 연결하여 증기기관차
가 운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60년대부터 생산한 동차엔
화물을 연결하지 않고 주로 통근용으로만 사용을 했습니다.
따라서 화물운송이 멈췄다고해서 스팀기관차의 운행이 정
지된것은 아니지만 거의 그런시기와 맞물려서 스팀기관차
의 완전한 폐차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게가다 수여선이
없어짐으로 열차의 운용이 다소 수월했겠죠.
2. 수인선의 종착역은 송도역이 아닌 남인천역이였습니다.
송도에서 용현역을 거쳐 남인천에 도착되었는데 정확하게
그것이 인천역과 연결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오래된 지도에는 그래서 수인선의 철길이 남인천까지 연겨
되어 있는채로 그려져 있습니다. 당시에는 숫제 아무것도
없는 뻘이였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