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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마태오 13,24-30
밀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법
김지은씨는 북한에서 9년간 한의사로 일하면서 절망을 느꼈습니다.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와 함께 울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맨몸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시골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중국 공안에 잡혔지만 마을 사람들의 사정으로 가까스로 풀려났습니다.
그녀는 보다 안전한 북경으로 도망쳐 3년간 파출부와 도시락 판매원으로 일했습니다.
거기서도 불안을 느껴 미얀마로 피신했지만 또 경찰에 잡혔습니다.
그러다 구사일생으로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처음에는 다단계 판매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정착금으로 받은 것을 몽땅 잃고 말았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한의사가 되는 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보건복지부를 찾아갔습니다.
담당 공무원은 무심하게 “북한에 가서 대학졸업증명서를 가져오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구나! 죽는 수밖에 ...’ 그녀는 유서를 써놓고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1분 후면 목숨이 끊어질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고요함이 밀려왔습니다.
시야가 매우 투명해지고 지나간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갔습니다.
‘지금보다 더 힘들 때가 많았구나! 그런데 왜 세 끼 밥을 다 먹을 수 있는 지금 죽으려 하는 것인가? 그렇다. 욕심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시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습니다.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습니다.
한의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조금씩 잘 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직장동료들은 한의대 진학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녀는 국회청원을 내서 지방 한의대 편입학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침내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녀는 남북한의 한의사 자격증을 모두 가진 최초의 한의사가 되었고 지금은 잘 나가는 한의원 원장입니다.
주님의 씨는 밀이고 사탄이 뿌린 씨는 가라지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서로 비슷하여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나중에 심판 때 구분이 되기는 하겠지만 자기 자신이 먼저 자신이 밀인지 가라지인지 구분해보지 않으면 나중에 큰 후회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하느님의 본성으로 새로 태어났으면 밀이고, 태어날 때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가라지입니다.
밀은 사랑할 줄 알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사랑과 집착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할 줄 알아야 밀인지 가라지인지도 구별이 가능해집니다.
사랑과 집착은 어떻게 다를까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으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너무 좋아서 없으면 못 살 것 같다면 그건 집착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지옥 간다고 지옥까지 쫓아가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면 집착일 것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존중해줍니다.
그러나 자아의 집착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목숨까지 버립니다.
사업이 망해 길거리에 나 앉게 되었다고 자살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품은 사람은 그런 것을 다 잃더라도 여전히 영원한 생명을 품고 있기에 삶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김지은 원장은 자살하려고 할 때까지가 가라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집착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집착을 내려놓자 밀이 되었습니다.
자아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버렸다는 것은 다른 본성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미워하라!”는 말은 “사랑하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도 미워하고 가족도 미워하고 돈도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당신을 따르기 위해 장애가 되면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당신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지 않으면 굳이 가난을 자랑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돈을 미워하라는 말은 일부러 거지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거지가 되더라도 상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랩퍼 중 가장 돈을 많이 번다는 도끼는 돈이 엄청 많습니다.
한 달에 수천 만원하는 백 평이 넘는 초호화 호텔 방에 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명품 옷, 장신구,
운동화들을 갖춰놓고 살아갑니다.
고양이 방이 보통 집 안방보다 큽니다.
차고엔 초고가 외제차들이 즐비합니다.
진열장엔 5만 원짜리 돈다발이 수북이 놓여있습니다.
매달 한 뭉치씩 어머니에게 드린다고 합니다.
그는 밀일까요, 가라지일까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난을 아는 사람입니다.
2년 간 기획사 옥상 컨테이너에 살며 랩을 배울 땐 단 돈 5백 원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때를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술, 담배, 커피를 일절 하지 않습니다.
공연이 끝나도 뒤풀이를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 말은 그가 돈 버는 것이 돈에 집착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돈으로 육체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돈이 없어도 잘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면을 볼 때 밀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은 사랑하고 가라지는 집착합니다.
가라지는 집착의 본성이고 밀은 사랑의 본성입니다.
내가 사람이나 세상 것들을 사랑하는지, 집착하는지 살펴야합니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매우 다른 심판을 받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7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3,24-30
주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혈기왕성했던 나머지 이리 충돌 저리 충돌, 사방으로 다니면서 좌충우돌하곤 했습니다.
돌아보니 참 부끄럽습니다.
나 자신의 심각한 결핍이나 죄 앞에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이웃의 작은 실수나 부족함 앞에는 엄청나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 주님께서 나를 무한한 인내로 참고 또 참아주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히 이웃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냈어야 마땅한데...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우리의 주님은 분노에 더디시고 인내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수천 년간 거듭되어온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반역에도 또다시 자비를 베푸시고, 새 계약을 맺으시며,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모습이 오늘 밀과 가라지의 비유 속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 없는 나무는 즉시 톱을 들고 나가 바로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 29-30)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 모순되고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종들처럼 생각합니다.
“저 악한 인간들을 지금 당장 모조리 쓸어버릴까요?”
인간의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최종 심판자이신 주님의 역할을 인간이 직접 수행해버리려는 유혹 앞에 서게 됩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하고 복수하려고 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깊은 침묵 속에 계시는 것 같지만 사실 당신께서 직접 정한 계획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주님 홀로 한 인간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의 권리를 지니고 계십니다.
악의 세력들에 대한 최종적인 단죄와 보복은 주님께 맡겨드릴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계획과 섭리, 주님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원수는 종종 우리를 찾아와 우리 마음의 밭에다가도 가라지를 뿌려놓고 갑니다.
공동체를 좀먹게 하는 불평불만의 가라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이단의 가라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심의 가라지...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 다양한 가라지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때, 주님의 뜻, 주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강론>
(2024. 7. 27. 토)(마태 13,24-30)
<아직은 모릅니다. 누가 밀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4ㄴ-30).”
1) 여기서 ‘하늘나라’는 종말에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 세상 안에서 건설되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 또는 교회입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이 세상에, 또는 교회에 왜 악인들과 의인들이 섞여 있는지를 나타내는 비유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는 악인의 멸망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신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에제 33,11).
2)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라는 말은, “사람들이
방심하고 있는 동안에” 라는 뜻일 수도 있고, 그냥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악’의 기원과 활동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즉 ‘신비’ 속에 숨어 있는 일입니다.>
교회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비유를 생각하면, 악마는 교회 안까지 침투해서 사람들을 유혹하고,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이 말에서, 겟세마니에서의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0ㄴ-41).”
죄를 지은 다음에 악마가 유혹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악마 핑계를 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짓입니다.
유혹한 악마는 하느님께서 따로 엄하게 심판하시겠지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서 죄를 지은 사람 자신도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불가항력에 끌려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완전한 의인들만 모여 있는 완성된 공동체가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여서 모두 함께 믿고 함께 회개하면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함께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 과정에서 악마의 유혹과 압박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람들 사이에 의견 차이와 갈등과 대립이 있을 수도 있고, 외부에서 오는 박해와 고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거나 신앙을 아예 잃어버리는 일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교회는 서로 사랑하면서 끝까지 함께 가려고 노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남 탓’ 하지 말고, 우선 먼저 ‘나부터’ 노력해야 합니다.>
3)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는, 산상설교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1-2).”
어떤 형제가 악인이 아닌데도 함부로 악인이라고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그 형제의 구원이 막히는 것은 아닌데, 그를 판단하고 단죄한 내 죄만 커지게 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는 용서의 권한에 대해서 사도들에게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ㄴ-23).”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또는 교회에) 모든 권한을 넘겨주신 말씀들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대행할 수 있도록 사목 직무와 권한을 ‘위임’해 주신 말씀들입니다.
사도들은(교회는) 아무나 마음대로 심판하고 단죄해도 되는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직무와 그 직무 수행에 필요한 권한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오직 용서할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4)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는, “혹시 진짜 악인이라고 해도, 회개할 기회를 주어라.”입니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라는 말씀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악인들은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지금 악인이라도 회개해서 의인이 될 수 있고, 의인이라도 타락해서 악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될지는 ‘지금은’ 모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나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